스자쿠가 눈을 뜬 이유는 귓가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였다. 일정한 박자로 부웅부웅 울리는 진동 소리는 귀에 귀찮게 거슬렸다. 시끄러워,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를 내려는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아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맞아… 나 아팠지?
스자쿠는 휴대폰을 대충 찾아 쥐고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더 무거운 몸은 물 먹은 솜마냥 축축 늘어졌으나, 방금 전에 부엌까지 가지도 못했던 상황보다는 나아진 듯 싶었다. 스자쿠는 아직까지도 징그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발신인은 를르슈 람페르지였다. 전화를 받을까 하다가 스자쿠는 아프다는 이유로 받지 않기로 했다. 무시하기로 마음 먹고 나서 1분 뒤에 를르슈 람페르지의 전화가 끊어졌다.
[부재중 전화 38통]
스자쿠는 눈을 의심했다. 부재중 전화 38통? 놀라서 부재중 착신 목록을 살펴보면 전부 다 를르슈 람페르지로부터 온 전화 뿐이었다. 때마침 물을 마시려고 했던 스자쿠는 콜록콜록대며 모든 물을 게워냈다. 38통? 대체 언제부터 전화를 한 거지? 스자쿠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할 무렵 쯤에 전화가 다시 이어졌다.
[를르슈 람페르지]
이걸로 39번째 시도를 하고 있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집요함에 대해서 놀라야 하는지, 아니면 지긋지긋하다고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평상시처럼 아무렇지도 않아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스자쿠는 조금 사람다운 소리가 나는 목소리를 확인하고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스자쿠? 괜찮은 건가?’
“아, 응. 를르슈. 나 지금 일어났어.”
‘아… 그렇군. 일어날 수는 있어?’
“침대에서? 응. 일어날 수 있는데 그건 왜?”
‘현관문 좀 잠깐만 열어줄 수 있을까?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지금 우리집 앞이야?!”
‘미안, 멋대로 찾아와서.’
스자쿠는 전화를 끊기 전에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을 벌써 새벽 2시 40분이었다. 현관으로 다급하게 걸어가서 문을 열어보면 를르슈 람페르지가 어색하면서도 안심한 표정으로 스자쿠의 앞에 서있었다. 그는 스자쿠에게 이온음료와 레토르트 음식들, 그리고 감기약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비닐봉투 하나를 쓱 내밀었다. 스자쿠는 그것을 엉겁결에 받으면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집 안에서 네 소리가 들린 거 같아서… 계속 자고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방금 전 스자쿠의 기침 소리가 얇은 나무 현관문 너머로 들린 모양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안도하는 표정이 꽤나 지쳐보이는 걸 깨달았다. 얼마나 기다리고 있던 거지? 내가 자고 있다는 건 언제부터 안 거지?
“를르슈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수업 끝나고 나서부터… 수업은 잘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5시부터 계속 기다린 거야?”
“아아, 아마도.”
“그냥 깨우지!”
“전화 했는데…… 아파서 자는 거 같아서 그냥 기다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잘 자고 있는데 깨우는 거도 미안해서 전화는 20분에 한 번씩만 걸었어. 네게 부재중 전화가 많이 남았을 거 같아서.”
“왜 그렇게까지…… 사람 미안하게.”
“어쩔 수 없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데.”
를르슈 람페르지의 말에 스자쿠는 핫, 하고 숨을 헛삼켰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으면서, 그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서 미팅 자리에서 왜 따라나오지 않았어? 그렇게 따지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누르고 스자쿠는 한숨을 쉬는 를르슈 람페르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아. 얼굴 봤으니까. 그만 가볼게. 스자쿠도 쉬어야지.”
스자쿠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당황으로 복잡한 머릿속으로도 지금 를르슈 람페르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가는 안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남자에게 빚을 달아두면 안 된다. 그는 이렇게 스자쿠가 약해진 틈을 타고서 분명 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려는 를르슈 람페르지를 붙잡고서 스자쿠는 겨우 말했다.
“가지 마, 를르슈.”
그러면 를르슈 람페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무너진 컨디션인 지금,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은 아닐 게 분명했다.
“혼자서 아프니까 외로워.”
스자쿠 본인도 이런 어리광 부리는 듯한 대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를르슈 람페르지가 스자쿠의 열려있는 현관 안쪽으로 들어왔다. 스자쿠는 문이 철컥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를르슈 람페르지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신발을 벗고 스자쿠의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를르슈 람페르지가 구애 목적(자위 공개 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스자쿠의 집안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자신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것을 보고서 그에게 처음으로 식탁의 의자를 내어주었다. 늘 식탁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위를 하던 를르슈 람페르지는 그런 스자쿠의 권유가 낯설었는지 묘한 눈으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그대로 권유를 거절하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되도 않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서 를르슈가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근데 나 혼자 두지만 마.”
“…….”
“를르슈가 안 갔으면 좋겠어.”
스자쿠의 애원에 를르슈 람페르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자쿠가 하는 말에 그는 감동을 받은 건지, 아니면 평소 같지 않아서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어느쪽이든 좋다. 를르슈 람페르지가 계속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으니까.
“우선 누워있어, 스자쿠. 많이 아파보이니까.”
“…으응.”
“약은 먹었어? 아니, 그 전에 밥은?”
“아무것도 안 먹었어. 약도, 밥도 안 먹었어.”
“…….”
그 말에 를르슈 람페르지는 스자쿠를 보고서 놀란 얼굴을 했다. 스자쿠의 상태를 눈여겨 본 그는 스자쿠에게 잠시 눕지 말고, 스자쿠가 권유했던 식탁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다. 거의 를르슈 람페르지의 팔에 이끌리듯이 의자에 앉은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부엌 써도 돼?’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자신이 들고 왔던 비닐봉투 속의 레토르트 죽을 꺼내어 데우기 시작했다. 먹기 좋게 그릇에 옮겨 담고서 분주하게 먹일 준비를 하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모습을 스자쿠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그렇게 멍하진 않았다. 마음 속은 엄청난 불합리에 대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 주제에, 나를 간병하는 것도 기꺼이 하는 주제에, 왜 그때 나를 따라오지 않았어?
“스자쿠? 죽은 먹을 수 있겠어?”
“…먹을래.”
“잘 생각했어. 죽 먹고 약도 먹자.”
“으응.”
“뜨거우니까 조심해.”
스자쿠는 식탁 위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보고서 시선을 떨구었다. 숟가락을 들고서 한 숟갈 떠야하는데 그럴 의욕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를르슈 람페르지에 대한 비이성적 분노로 복잡했고, 몸은 아직도 무겁게 느껴지기만 했다. 를르슈 람페르지를 붙잡을 힘이 났다는 것만 기적적이었다. 먹지 않고 그저 죽만 바라보고 있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 람페르지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혹시 먹기 싫어? 아니면 너무 뜨거워서?”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문제야?”
“손에 힘이 안 들어가.”
그 말에 를르슈 람페르지는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몸이 안 좋은데 어째서, 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스자쿠를 이대로 아무것도 안 먹이고 재우는 것도 그의 심성에는 맞지 않은지, 를르슈 람페르지는 스자쿠의 앞에 놓인 죽과 숟가락을 제 손에 쥐었다. 죽을 한 숟갈 퍼올린 뒤, 후후 불어서 를르슈 람페르지는 스자쿠의 입 앞에 가져다댔다. 딱 먹기 좋은 온도로 식은 죽이 스자쿠의 입가에 와닿았다. 스자쿠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
“뜨거워?”
“…아니.”
“그럼 계속 먹여줄 테니까, 스자쿠는 천천히 먹으면 돼.”
“…….”
아프다고 해도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직접 숟가락으로 떠먹여준다는 행위에 대해서 를르슈 람페르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 했다. 애널 자위를 하고, 펠라치오를 강구하는 주제에 이런 데에서는 이런 눈치가 없다고? 스자쿠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죽 그릇이 바닥이 날 때까지 천천히 떠먹여 주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숟가락질에 그런 내색도 못하고 죽을 전부 다 먹어버렸다.
를르슈 람페르지가 가져다 주는 약까지 먹고 나면 스자쿠는 배가 부르면서 적당한 각성 상태에 되어버렸다. 푹 자버린 잠과 채워진 체력 같은 것에 정신이 방금 전보다 맑아졌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이 되긴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를르슈 덕분에 살았어.”
“아냐, 스자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됐어.”
를르슈 람페르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를르슈 람페르지에게 빚이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스자쿠가 원해서 생긴 빚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그런 찜찜한 기분은 싫어서 스자쿠는 일부러 를르슈 람페르지에게 말을 걸었다.
“를르슈한테 너무 미안해서…… 나중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줘. 꼭.”
“……그렇다면.”
“응?”
“조금 비겁한 부탁일 수도 있지만.”
“뭔데?”
“네가 아프고 힘든 와중에 이런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지금 말고는 안될 거 같아서.”
를르슈 람페르지는 비겁하다고 운을 띄우면서 말했다.
“펠라치오를 지금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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