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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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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쿠의 자취 2

DOZI 2026.06.17 12:29 read.96 /

오늘은 스자쿠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늦게 들어오는 날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돌아왔을 때 먹을 수 있는 저녁을 간단하게 해둘 겸 그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스자쿠가 줬던 집 열쇠로 들어온 를르슈는 생각보다 깔끔한 방을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자쿠의 자취도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갔다. 처음엔 망나니 도련님 같았던 스자쿠의 생활 패턴도 어느새 안정이 되었다는 게 감회가 새로웠다. 를르슈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내려두면서 냉장고 안에 물건들을 차곡차곡 채워넣었다.

적당히 오래 먹을 수 있는 카레를 만들어두고, 를르슈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스자쿠가 도착하려면 1시간 정도 남았다. 평소라면 방 청소를 해두고 스자쿠가 미뤄두었던 빨래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요리를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스자쿠가 청소도, 빨래도 미리 해치워둔 덕분에 할 것이 없었다. 

심심함을 느낀 를르슈는 휴대폰을 켜는 대신에 방의 한 가운데에 덜렁 놓인 좌식 테이블 쪽을 흘끔 살폈다. 거기에는 스자쿠의 노트북이 있었다. 를르슈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스자쿠의 노트북 전원을 켰다. 비밀번호는 1205. 시작음과 동시에 마구잡이로 켜지는 시작 프로그램들을 일일이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는 컴퓨터를 할 줄 아는 애가 왜 이런 걸 관리를 안 하지? 

를르슈는 자동으로 로그인 되어있던 메신저를 닫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스자쿠의 사생활은 중요하지만, 우리 연애사에 걸림돌이 될만한 일들은 미리 예방하는 것도 더 중요하지. 를르슈는 스스로의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스자쿠가 이미 읽은 메시지들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대체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누는 대화나 조별 과제를 위한 대화 뿐이었고, 를르슈와의 대화가 제일 위에 있었다. 잘하고 있군. 를르슈는 스자쿠가 바로 앞에 있었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지만 거기에 있던 것은 사랑 뿐이었다는 흡족스러운 결과에 를르슈는 메신저를 껐다. 스자쿠의 하드디스크를 다 탐색해볼까 했지만 문서 폴더에 쌓여 있는 과제1.docx, 과제222.docx, 과제최최최종.docx 파일이 가득한 것을 보고서 스자쿠가 노트북으로 허튼 짓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다시끔 깨달았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 기록은 다를 수도 있겠지. 를르슈는 거침없이 인터넷 브라우저를 눌렀다. 스자쿠의 검색 기록부터 살폈다.

[남자끼리 임신]

[지루가 나쁜건가요]

[콘돔 할인]

보기만 해도 지능이 떨어질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를르슈는 딱히 걸릴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스자쿠는 이런 걸 남들 앞에서 공개해도 되는 검색어라고 생각하는 건가? 를르슈는 남자친구의 사회적 체면을 위해서 그의 검색어 기록을 일일이 삭제해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검색 알고리즘을 위해서 스자쿠가 좋아하는 [고양이] [고양이 카페] 같은 것을 검색도 해놓았다.

그러고 나면 를르슈는 느꼈다. 할 게 없다, 고.

지루해하던 를르슈는 북마크 바에 있던 넷플릭스 로고를 눌렀다. 뭐라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갈 거 같아서 한 선택이었다. 스자쿠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하고, 를르슈는 고심했다. 요새 유행한다는 해외 드라마의 제목들을 한 번씩 훑고, 지난 번에 극장에서 보고 싶었지만 놓쳤던 영화들이 새로 업데이트된 것에 반가워하며 무얼 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갈 길 잃은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며, 스자쿠가 찜해둔 목록 같은 것을 살폈다.

스자쿠와 함께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목록을 죽죽 훑으면서, 를르슈는 두 사람이 본 것들은 제법 되지만, 생각보다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거면 넷플릭스 해지하는 게 낫지 않나? 를르슈는 한 달 요금이 쌓이면 일 년동안 제법 된다는 것을 계산했다. 역시, 해지하는 게 낫겠어. 스자쿠도 넷플릭스를 그렇게 열심히 보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를르슈의 선택에 동의할 것이다.

근데 어째서… 이렇게 많이 봤는데 기억에 남는 게 없는걸까? 를르슈는 시청했던 목록을 살피면서 머릿속에 남는 의문을 곰곰히 생각했다. 이건 초반까지 본 기억은 나고, 엔딩이 어땠는지 모르겠는 작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를르슈는 지난 주에 스자쿠와 함께 쉬는 날 보았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를 떠올렸다.

화끈한 액션 영화였다. 스자쿠가 영화관 분위기를 내자면서 불을 다 끄고 암막커텐까지 쳐놓고서 화면의 밝기를 최대로 했다. 번쩍번쩍거리는 화면이 조금 눈이 부셔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팔뚝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다가 진부한 전개에 질려 하품을 조금 했다. 지루해, 를르슈? 스자쿠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우리 재미있는 거 할까? 스자쿠의 낮아진 목소리에 를르슈는 화면을 쳐다보다가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의 입술이 다가왔고, 를르슈는 키스를 피하지 않았다.

그래, 섹스를 했구나.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정주행하겠다던 드라마도 보다가 나중엔 섹스했다. 그 이전에 새로 업데이트 되었던 명작 영화를 볼 때에도 섹스를. 섹스하느라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영화 도중에 섹스 신이 나오면 그때는 날잡고 섹스만 하는 날이었다.

스자쿠와 넷플릭스=섹스

를르슈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꺼버렸다. 이런 낯부끄러운 깨달음 같은 것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를르슈는 노트북까지 꺼버리면서 더운 뺨을 식혔다. 아아, 몰라. 스자쿠가 올 때까지 열이 빨리 식어야 할 텐데.

그때 때마침 스자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를르슈, 내 방에 있어?]

[응]

[나 청소 잘했지?]

[어]

[빨래도 다 해놨어]

[알아. 잘했어.]

[오늘 저녁은?]

[카레]

[카레 좋아!]

 

를르슈는 스자쿠와 대화를 하면서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스자쿠는 금방 퇴근한다면서 를르슈에게 빨리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를르슈는 뭐하고 있었어? 를르슈는 휴대폰… 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유튜브 좀 보고 있었어.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말에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넷플릭스 볼까? 지난 번에 보고싶어했던 영화 업데이트 됐대!]

 

넷플릭스…!

스자쿠와 넷플릭스=SEX !!!

를르슈의 얼굴은 다시 한 번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 자식, 오늘은 아직 평일이고 나는 내일 일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유혹해도 되는 거야?! 너, 내가 이런 거 좋아할 줄 알아?! 를르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답장을 했다.

 

[🔥]

 

하지만 그 유혹, 피하지 않겠어!

스자쿠는 갑자기 불꽃을 쏘는 를르슈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뭔가의 오타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난 따끈따끈한 를르슈가 스자쿠를 반겨주었다. 스자쿠는 카레도, 넷플릭스도 생각나지 않았다.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 매끈매끈한 를르슈가 살짝 상기된 뺨으로 스자쿠를 돌아봐주면 그것은 곧 베드 인의 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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