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람페르지는 이제껏 피해왔던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여동생 나나리를 걸고 넘어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나리가 속상해하는 목소리로 ‘다들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계신대요.’라고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도망갈 퇴로를 차단 당한 것이었다.
누가 대체 나나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는가. 그런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를르슈를 불러내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라고 물었지만, 나나리는 입을 다물고서 울적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고집을 부리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를르슈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결국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년 동안 줄곧 피해왔던 동창회라는 모임에, 를르슈 람페르지는 오랜만에 참석 여부에 동그라미를 보낸 것이었다.
* * *
7월 10일 금요일 저녁에 번화가에 위치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를르슈도 그 식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룸으로 따로 나뉘어져 있어서 시끄럽게 굴어도 괜찮은 곳이었다. 메뉴도 다양하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를르슈는 7월 10일이라는 날짜를 듣고서 그 녀석의 생각을 했다. 10년 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 녀석. 를르슈는 그 녀석이 이 동창회에 10년 동안 빠지지 않고 계속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피해온 것인데, 이제 피할 구석도 없게 된 것이다.
그 녀석은 10년 전에 결혼을 했다.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라고 들었다. 집안끼리 간소하게 식만 올렸다고 했다. 그래서 를르슈는 결혼식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건너건너 소식으로만 그 녀석이 결혼했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10년 전 오랜만에 간 동창회에서, 그 녀석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게 된 이후로, 를르슈는 몇 번 모이자는 동창회 약속에도 계속 불참했으며, 그것도 벌써 10년씩이나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10년 내리 거절을 하면 이제 안 물어볼 법한데도, 오히려 나나리를 움직인다는 비겁한 수를 쓰다니. 를르슈는 이를 부득 갈면서 예약해두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 녀석은 아마 참석할 것이다. 그 반지는 여전할까.
10년 동안 안 봤으면 감정도 흐려져야 할 텐데, 를르슈는 날짜를 듣자마자 그 녀석의 생일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만큼 그 녀석에 대해서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오늘도 왔겠지. 를르슈는 식당에 들어서면서 동창회 총무의 이름을 대고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다.
를르슈가 들어서면 모두가 환호하며 반겨주었다. 나이를 조금씩 먹긴 했어도, 여전한 얼굴들이었다. 를르슈는 동창들 사이에서 하나 둘 익숙한 얼굴들을 찾으며, 그 녀석이 어디 있나 확인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는 거야. 찾아내서 그 녀석과 가장 먼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은 건가? 를르슈는 이제껏 긴장한 상태였던 자신이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그럼 마음 편히 놓고 즐겨도 되는 건가, 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네, 를르슈.”
“…스자쿠.”
“10년 만이지?”
“아, 아아… 그러네.”
를르슈의 등 뒤에서 그 녀석이 나타난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얼굴로, 사회 초년생이었던 10년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좀 더 무거운 분위기로, 약간 깊어진 눈매로, 를르슈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를르슈의 곁에 앉았다.
뒤늦게 도착한 동창회 멤버들 중에 한 명이었던 그 녀석은 를르슈를 자기 옆에 앉히고서, 이 자리가 익숙한 것처럼 메뉴를 주문하고, 를르슈의 앞에 술잔을 놓아주고, 술을 채워주며, 말을 걸었다. 를르슈는 왜 하필 그가 자신의 옆자리이고, 왜 자기 앞에 술잔이 놓여져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를르슈는 음식과 술을 번갈아 먹고 마시면서 한숨을 삼켰다. 그와의 대화는 간간히 이어졌다.
“10년 동안 뭐하고 지냈어? 많이 바빴나봐?”
“조금… 바빴어.”
“를르슈는 사업한다고 그랬나? 무슨 사업이야?”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서 하는 중이라, 이제 겨우 내 몫을 할 정도야.”
“대단하네. 어렸을 때도 를르슈는 뭔가 사장님 같은 분위기이긴 했지만 말이야.”
“하하, 그게 뭐야.”
를르슈는 어색함을 감추며 웃었다. 그 녀석— 쿠루루기 스자쿠는 웃는 를르슈의 얼굴을 보고서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도 술을 한 잔씩 마시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그의 왼손을 살폈다. 약지에는 여전히 백금으로 만들어졌을 반지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아내와 잘 지내는 듯 했다.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와의 관계는 무탈한 듯 했다. 속이 쓰리고, 눈가가 흐려지는 기분이 들어서, 를르슈는 술잔을 쥐고서 계속 들이켰다. 빨라지는 를르슈의 페이스에 스자쿠는 보기 좋다면서 계속해서 술을 따라주었다.
“너는 안 마셔?”
“나? 나도 마시고 있어.”
“내가 따라줄게.”
“아냐, 를르슈 마시는 거 보니까 좋아보여서. 나는 내가 알아서 페이스 조절 할게.”
“…….”
오랜만에 동창회의 참석한 를르슈에게는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요즘 하는 사업은 어떤지부터 시작해서 으레 하는 ‘만나는 사람은 없느냐’ 같은 이야기까지 나왔다. 를르슈는 마지막 질문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기는 그럴 여유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대답에 스자쿠의 시선이 닿는 것 같았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었다. 스자쿠와 시선이 마주치고 나면, 그는 여유롭게 씩 웃으면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속을 읽히는 것 같다. 스자쿠에게는 분명 그럴 재주가 없을 텐데도. 마음 속 소리가 다 들리는 게 아닌가.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선을 피하면서 다른 곳에서 잔을 부딪혀 오는 것에 기꺼이 어울렸다. 를르슈는 그렇게 많이 마셨다. 스자쿠의 눈치를 보면서 마시느라 어느 정도로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이윽고 시야가 잘 맞지 않을 정도로 취했을 무렵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했다.
좋아, 잘 끝냈어. 이제 돌아가면 돼. 를르슈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며, 별 일 없이 끝난 동창회에 만족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를르슈는 역으로 가지?”
“아, 그렇긴 한데…….”
“같이 가자.”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감싸면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두 사람이 붙어있으니 주변에서는 ‘꼭 옛날 같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옛날에는 꼭 붙어다니는 친구였으니까. 시간은 벌써 11시 40분이었다. 동창회는 반가운 마음으로 끝이 났고, 를르슈는 얌전히 돌아가고 싶었지만, 스자쿠에게 붙들렸다.
여전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자쿠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사실 역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 되는데, 왜 스자쿠와 같이 걷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아니, 의문은 아니다. 답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를르슈는 스자쿠를 아직도 좋아하니까. 서로 조금의 거리만 두고서 걷고 있는 지금이 정말 꼭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서 기분이 좋으니까.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을 따라 걸으면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스자쿠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를르슈에게 말했다.
“나 사실… 를르슈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응?”
“나나리한테 자주 이야기를 들었거든.”
“…….”
나나리를 부추긴 범인이 스자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시원한 자백에 를르슈는 속이 쓰리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패턴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부딪히고 나면, 정신의 회복력은 더디게 올라왔다. 를르슈가 말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에 스자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연히 나나리가 하는 카페에 간 적이 있거든.”
“아, 거기서…….”
“를르슈가 바쁘고, 그래도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
“나나리랑 주말마다 같이 시간을 낼 정도라고는 들어서, 그럼 왜 동창회에는 오지 않는 걸까, 하고 고민 상담을 했거든.”
“…….”
“나나리 때문에 나온 거지?”
를르슈는 답을 알고서 물어보는 스자쿠의 태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모든 투정을 내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스자쿠를 피할 명분이 없었으니까.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의 긍정에 스자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10년씩이나 피하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바빴다는 건 알고 있었다며?”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를르슈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스자쿠는 를르슈와 눈을 맞추며 눈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눈이 반으로 접혀 귀여운 눈웃음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시선의 깊이는 예전과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변함없을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걸 알고 있는데,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았다. 를르슈는 겨우 떨어지는 입술로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지.”
“정말?”
“응.”
“그럼 자주 만날까? 다음주 토요일에 시간 돼?”
“아, 아니, 그렇게 갑자기는 조금….”
를르슈의 긍정에 스자쿠는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 페이스에 휩쓸리면 안된다. 를르슈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서 침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토요일에 만날 수도 있지, 다음주 토요일도 괜찮다. 하지만 스자쿠에게는 주말을 같이 보내야 할 가정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를르슈는 그의 약속을 거절할 참이었다. 그의 아내를 언급하는 것은 혀가 굳어버릴 것 같았지만, 차분하게 말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말에는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야지.”
“아, 나나리 때문에?”
“아니, 나나리가 아니라. 너는… 그… 가족이랑도, 시간을 보내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스자쿠는 아아, 그거,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라고 말하며 그가 하는 말은 를르슈의 상상을 초월했다.
“나 이혼했어.”
를르슈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혼, 이혼, 이혼. 이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스자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를르슈가 멈추는 것에 스자쿠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서 를르슈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그 동창회 술자리에서처럼, 마음을 읽는 것처럼.
“결혼하고 1년 쯤 되고 나서였나…? 가정을 꾸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거 같더라.”
“어… 어쩌다가, 이혼한 거야?”
“뭐, 자랑할 만한 건 아닌데. 전처가 바람을 피웠어.”
“…….”
“나도 잘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참고는 못 살겠어서 이혼했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바람을 피운 유책 배우자를 상징하는 그 반지를 여전히 끼고 다니는 건, 여전히 그 여자를 잊지 못한다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를르슈는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스자쿠의 이혼 이야기를 듣고 나서, 순간 든 생각은 혹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나, 라는 생각이었다. 너무나도 약삭 빠르게 든 그 생각은 스스로도 역겨워서, 를르슈는 자기가 남자라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는 게 헛웃음이 나왔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하고, 그러니까 결혼을 했겠지만… 그러나 그걸 기회라고 여겼던 자신이 어리석고, 한편으로는 비참했다.
“이혼 했으니까 친구 만나는 건 자유롭거든. 그래서, 를르슈는 시간 안 돼?”
“…그건 아닌데.”
“나 이혼 했으니까 위로해줄 겸, 만나면 안되는 거야?”
“이혼한 것도 시간이 꽤 흘렀잖아, 너. 이제 와서 위로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를르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스레를 떨어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스자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를르슈의 손목을 붙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를르슈가 안 만나줬잖아.”
“…….”
그건 사실이라서,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알겠다, 라고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를르슈의 허락에 스자쿠는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기분이었지만, 를르슈는 물어보고 싶은 것에 대해 입을 열었다.
“넌 아직도 그 사람을 못 잊은 거 같으니까…… 위로는 해줄게.”
“그 사람? 아, 전처?”
“그래. 반지도 아직까지 끼고 다닐 정도면.”
“반지? 아, 이건 별 거 아니야. 그냥 결혼 안 했다는 티를 내면 꼭 귀찮은 일이 생겨서, 나름의 호신용이지.”
“……뭐?”
스자쿠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호신용으로 전처와의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는 남자가 어디 있는가.
를르슈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면, 스자쿠는 반지를 손에서 빼내기까지 했다. 를르슈가 신경 쓰이면 안 하고 다닐게. 그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서 빈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제 됐어?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그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를르슈가 아무 말도 못하고, 스자쿠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에 스자쿠가 멀어진 거리를 좁혀오며 말했다.
“다음주 토요일에 만나줄 거지?”
“…만날 이유가 없어. 위로할 것도 없고.”
“우리가 만나는 데에 이유나 명분이 있어야 돼?”
“어.”
난 그게 무척 중요해. 를르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까지 스자쿠의 옆자리를 거부하지 않은 것도, 스자쿠의 술잔을 거부하지 않은 것도, 스자쿠와 같이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은 것도 전부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였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없으면 만나는 건 옳지 않았다. 그건 를르슈의 짝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만들 뿐이었다.
“10년 전부터 계속 노력했는데 안 되서, 이젠 더는 참을 것도 없을 거 같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무리 기다려도 를르슈는 나를 선택해줄 거 같지 않아서, 그래서 결혼했어.”
스자쿠가 하는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소리를 내지르며 괴성을 지르는 젊은이들이 한 차례 지나가고 있는데, 스자쿠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하게 를르슈의 귓가에 와닿았다.
“결혼해도 를르슈를 계속 좋아했으니까, 전처도 눈치챈 거야.”
“…무슨.”
“자기한테 마음이 없는 남자랑 있는 게 괴로웠대. 그래서 바람을 피운 거랬어.”
“…….”
“이제 명분은 확실하지? 를르슈 때문에 이혼한 거야, 나.”
결론이 이상했다. 스자쿠가 결혼한 것은 스자쿠의 의지였으면서, 이혼은 를르슈 때문이라니. 를르슈는 당황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문을 열지 못하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그를 더 몰아세웠다.
“난 10년 동안 를르슈를 기다렸어.”
스자쿠의 가차 없는 고백에, 를르슈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깰 것 같았던 술기운은 머리 끝까지 돌아서 땅바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주저 앉은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도 몸을 낮춰주었다. 평소에는 비상하게 잘 돌아갈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붉어진 뺨이나 어색하지만 환하게 웃는 미소 같은 것에 맥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만나줄 거야?”
그는 를르슈의 마음을 진작에 읽고 있던 것이다. 좋아하는 시선도, 감추려고 했던 마음도, 전부 다.
그래놓고 결혼을 하고, 를르슈를 괴롭게 만들었으면서. 그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를르슈를 핑계 삼아 이혼까지 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만나줄 거야?’라고 묻는 얼굴은 어릴적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해서, 를르슈는 앉은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며 시선을 피했다.
“를르슈.”
“나한테 말 걸지마.”
“…….”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도…….”
“이제 와서니까 하는 거야. 를르슈한테 시간을 더 줬다가는 또 도망갈 거 같으니까.”
“나 때문에 이혼했다는 말을 들어도…….”
를르슈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를르슈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그렇지만 그와 엮일 수 없는 자신을 알고 있어서, 진작부터 체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지금 자기 때문에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현실감이 없을 뿐이었다. 앞서 들었던 ‘를르슈를 계속 좋아했으니까’ 같은 말을 들어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한 것은, 를르슈의 지속적인 체념이 만든 역효과인 걸까. 를르슈는 스자쿠가 자신의 힘없이 늘어진 팔을 붙잡고서 를르슈,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푹 파묻은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울컥 차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키면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뺨을 감싸는 손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스자쿠의 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를르슈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지 마.”
“너 같은 거…….”
“응.”
“필요없어, 나 원래도 잘 살았고, 10년 동안 잘 해왔으니까.”
“…….”
“이제 와서 내가 좋아서 그랬다고 해도, 나는 안 들어줄 거야.”
“그래?”
“네가 이혼한 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네가 멋대로 결혼한 게 문제인 거지.”
“응.”
“내 핑계 대지 말라고…….”
“응.”
를르슈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면서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자리에서 서로 일어나서 시선을 마주하고 나면 를르슈는 더욱 억울해졌다. 이제 와서, 그것도 를르슈에 대한 감정을 들먹거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를르슈를 뒤흔들어 놓는 스자쿠가 싫었다.
싫어, 정말 싫어, 너 따위, 너 같은 거, 정말, 밉고, 싫고, 짜증나고,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하고.
“됐어, 이제 안 만나면 그만이니까.”
“난 계속 보고 싶은데.”
“싫어. 안 볼 거야.”
를르슈는 가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스자쿠를 거부할 명분이 생겼다. 를르슈는 거침없이 앞서 나갔고, 스자쿠는 그를 쫓아왔다.
를르슈는 뛰었다. 술을 마신 다리로 달린다는 것은, 그리고 쿠루루기 스자쿠를 제칠 각오로 달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지만, 를르슈는 있는 힘껏 뛰었다. 달리고 달려서,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뛰었다. 그러나 뜀박질의 끝에서 쓰러질 것 같은 를르슈를 붙잡아 준 것은 스자쿠였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있는 를르슈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스자쿠가 하하, 하고 웃었다.
“를르슈 진짜 못 뛴다.”
“…하, 하아, 닥, 쳐.”
“걷는 게 더 멀리 갈 수 있을 정도던데.”
“닥치라고, 했지.”
“이제 다 도망쳤어?”
“…….”
를르슈는 자신의 도주가 이렇게 맥없이 끝났다는 것에 서러웠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로 열심히 뛰었는데 도망친 곳이 스자쿠의 품이라니. 이런 말도 안되는 경우가 다 있을까. 를르슈가 씩씩거리면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스자쿠는 난데 없는 소리를 했다.
“나 오늘 생일이야.”
“…알아.”
“를르슈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서?”
“내 생일 기념으로 만나주면 안 돼?”
를르슈는 이유나 명분이 되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스자쿠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면서 를르슈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수트에 주름이 생길 텐데. 그런 힘으로 꽉 안아버리면 엉망이 되잖아. 물론 지금 수트의 구김 같은 것이 중요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어떻게든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이 불쾌한 심정에 를르슈는 내던져진 상태였다.
무방비한 를르슈의 입술을 쓰다듬던 스자쿠가 귓가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키스해도 돼?”
“그런 게… 되, 될 거 같아?”
“해도 될 거 같아서.”
“안 돼…….”
“사람들도 없으니까 진짜 딱 하기 좋은 분위기인데.”
“안 된다고….”
를르슈가 내달려서 도망친 곳은 역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보는 눈도 없으니 스자쿠는 더욱 과감하게 움직였다. 으슥한 골목에서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서 스자쿠와 를르슈가 껴안고 있었다. 둘이 하나로 얽힌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 를르슈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뺨에 순식간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를 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스자쿠는 를르슈를 품에서 풀어주었다.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져서, 를르슈는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런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가 말했다.
“억지로 하는 건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서, 를르슈가 원한다면 시간을 줄게.”
“…뭐?”
“얼마나 줄 거냐면.”
“…….”
“3.”
“뭐?”
“2.”
“말이 돼?”
“1.”
“웃기지 마!”
0.
그 소리는 를르슈의 마음에서 조용히 울려퍼졌다. 를르슈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다고 말하면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이제 숨도 골랐고, 밀어낼 힘도 있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얼굴을 한 대 때려서라도 반항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독한 짝사랑에 굶주린 를르슈에게 스자쿠와의 키스는 반항조차 못할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계산기는 지금의 키스가, 앞으로의 관계가 얼마나 최악으로 치닫을지에 대한 결과를 추론하고 있었다.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이 키스도, 스자쿠와의 관계도. 그러니까 키스를 하면 안 되는데.
입술 끝에 까슬하지만 따뜻하게 맞닿는 느낌에 피할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턱을 붙잡고서 입술을 더 깊게 파묻는 스자쿠의 체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를르슈의 입술을 핥는 혀의 적나라한 감촉에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러면 머릿속을 녹여버릴 것 같은 질척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경고등을 실컷 울리고 있는데, 를르슈는 스자쿠의 입술에 매달린 채로 첫키스의 짜릿함을 즐기는 중이었다.
입술을 떼어내고 나면 를르슈는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충격 속에서 스자쿠가 를르슈를 바라보며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해주면 안 돼?”
“…….”
“키스까지 한 사이잖아, 우리.”
웃기지도 않지. 고작 키스 한 번에 우리 사이가…… 우리 사이가 그렇게 되는 게 가능하겠냐고.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가빠진 숨 사이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스자쿠랑 키스를 했어. 그렇게 껴안았어. 그런 정보들은 를르슈의 머리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정말 안 해줄 거야?”
하지만 너무 좋았다. 키스도, 포옹도, 고백도, 모두 다. 너무 좋아서, 를르슈는 결국엔 그의 옆에 서있고 싶어하는 자신을 알았다. 그의 이혼이 기뻤고,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고, 그런 감정을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키스 한 번, 포옹 한 번, 고백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되는 것이 싫고도 좋았다.
난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쉬운 마음으로 널 좋아하고, 포기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를르슈는 축하를 조르는 스자쿠의 목을 덥썩 끌어안고서 그의 귓가에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생일을 축하한다고, 이 빌어먹을 놈아, 하고 속삭였다.
모처럼의 생일에 욕을 얻어먹어도 좋은 쿠루루기 스자쿠가 다시 한 번 키스를 해주었다. 를르슈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 461 | 아줌마 를르슈의 유혹 2 | 2026.07.14 |
| 460 | 구토 중추 화피성 질환에 걸린 스자쿠 3 | 2026.07.14 |
| 459 | 아줌마 를르슈의 유혹 | 2026.07.13 |
| 458 |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 2026.07.12 |
| > | 스자쿠 생일 연성 2026 | 2026.07.10 |
| 456 | 유유상종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14 | 2026.07.10 |
| 455 | 유유상종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13 | 2026.07.10 |
| 454 | 구토 중추 화피성 질환에 걸린 스자쿠 2 | 2026.07.04 |
| 453 | 구토 중추 화피성 질환에 걸린 스자쿠 | 2026.07.03 |
| 452 | 감기에 걸린 를르슈와 간호하는 스자쿠 | 2026.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