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無 기어스 無 스자루루 有
5월 5일 아침, 를르슈는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기 싫게 만드는 늦은 아침의 햇살에, 그저 옆자리에 있는 사람의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스자쿠…. 작게 중얼거리며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잠귀가 밝은 그라면 금방 를르슈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아줄 것이 분명한데, 오늘은 그게…생각보다 짧다.
를르슈의 등까지 넉넉하게 안아줬던 품이 오늘은 짧다. 게다가 닿는 체온이 뜨거웠다. 를르슈는 눈을 뜨고 빛이 들이치는 시야에 초점을 겨우 잡았다. 눈앞에는 갈색 곱슬머리, 혈색 좋은 뺨, 햇빛에 뛰어노는 것이 자연스러운 어린 남자애.
어린 남자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를르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집이다. 스자쿠와 같이 살고 있는 집.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날짜는 어제의 내일, 즉 오늘이다. 휴대폰 갤러리 속의 나나리 사진도 안전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니야.”
“…를르슈?”
어리다 못해 변성기도 오기 전인 소년의 목소리가 스자쿠와 를르슈의 침실에 울려퍼졌다.
를르슈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은 반짝거리는 신록으로, 그래,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소년은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를르슈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으로 발전하여 현재 남녀의 혼인관계에 준하는 동거인. 쿠루루기 스자쿠!
“나 작아진거 같아.”
“너…. 머리는 멀쩡한가보군.”
“이럴 땐 걱정해주는 거잖아, 를르슈!”
어젯밤 스자쿠가 입고 잤던 티셔츠는 어린 스자쿠의 어깨를 훤히 드러내보일 정도로 커보였다. 실제로 사람이 작아졌으니 큰 게 맞긴 하지만.
를르슈는 작아진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리는 스자쿠를 보면서, 일본의 유명한 헤이세이 명탐정을 떠올렸다. 스자쿠가 그 명탐정마냥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좋은 거라면 체력 밖에 없는 외곬수 고집쟁이가 아포톡신 같은 위험한 약물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있더라면 아마 온갖 도박과 주식, FX 같은 걸로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는 를르슈 본인이라면 모를까….
“아포톡신! 아포톡신 나오는 그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된 느낌이야!”
“…….”
를르슈는 자기의 추리 수준이 어린 스자쿠(추정 7살)와 같다는 것에 머리를 싸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스자쿠가 배가 고프다는 말에 를르슈는 일어나기로 했다. 먼저 화장실에 가겠다는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아, 속옷이 흘러 내려…. 그리고 바지도 못 입겠어!
티셔츠를 원피스마냥 입고 침대에서 내려간 스자쿠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를르슈는 이불과 옷가지들을 치웠다. 평소처럼 밥을 차릴까 하다가, 어린애 입맛에 맞는 메뉴를 떠올린 를르슈는 부엌에 섰다.
“를르슈, 나 아래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노 팬티야!”
“집에 어린애를 위한 팬티 같은 건 없어.”
“무방비한 나를 어떻게 하진 않겠지.”
“어린애한테 손 대진 않아.”
“근데 어른이었을 때에도 를르슈가 손을 댄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믿어줄게!”
“……선심 쓰듯이 대답하는구나, 스자쿠.”
브런치는 달기만한 프렌치 토스트에 케찹으로 스마일을 그렸다. 어린 스자쿠는 행동이 산만해서, 얼굴에 반은 묻히고 먹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그걸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그 나잇대면 대부분 깔끔하게 먹지 않나?”
“그런가? 근데 빨리 먹고 나가서 놀 생각하면 이렇게 돼!”
“팬티도 안 입고, 맞는 바지도 없는 녀석이 어디서 나가서 놀 생각을 해?”
그 말에 손에 묻은 케찹을 빨아먹던 스자쿠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린이날인데?!”
“그래서?”
“어린이날이니까 나랑 같이 나가서 놀아야지!”
“…팬티도 안 입고 바지도 안 입는 너랑?”
쳇, 속지 않는군. 스자쿠는 어린이들이 으레 만화 주인공을 따라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나리는 이맘때 아마 공주님 연기에 빠져서 지냈었지. 하지만 나나리는 진짜 공주님이니까 소용 없다고 어머니가 말했다가…. 를르슈는 스자쿠의 뺨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먹었다. 다 틀어진 오늘의 일정은 스자쿠와 함께 집데이트다.
“근데 왜 갑자기 어린애가 됐지?”
“아포톡신이라며?”
“우리는 추리물이 아니라 메카물이잖아….”
“……."
“기어스 때문이구나!”
메타발언을 쉽게 하는 어린애는 어딜 봐도 귀엽지 않다. 좀 더 어린이다운 말을 하도록 해. 를르슈는 스자쿠의 빈 잔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면서 볼을 꼬집었다.
어린 스자쿠(추정 7세, 하의실종)는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고 했다. 를르슈는 식기세척기를 세팅하고, 스자쿠의 옆에서 텔레비전을 켜주었다. 어린이날 특집이라고 애들이 많이 보는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나오고 있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명령한다!’
“어라, 마지막 뭔가 이상한 거 같아. 마지막은 성인 애니메이션이잖아.”
아직 시작한 것은 아닌지, 연휴를 맞이해서 시작할 광고였던 모양이다. 텔레비전 광고 속의 명대사를 줄줄 읊던 스자쿠가 마지막에 갸웃거리고 있는 건 퍽 귀여워보였다. 밤에는 귀여워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를르슈는 스자쿠의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을 보고서 웃음이 나왔다. 어려진 스자쿠가 귀여운 걸 떠나서, 남자친구가 속옷도 안 입고 하체 노출을 하는 걸 참아주는 것은 를르슈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맨션 주변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아동용 속옷이라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
“편의점. 네 속옷 사러.”
“나도 갈래.”
“…어린애라고 해서 풍기문란죄가 적용되지 않는 건 아니야. 만약 이대로 나가면 너는 그레이존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혼자 있으면 불안해!”
“어린애도 아니…. 아니, 어린애니까 불안하겠네. 그렇다고 계속 그러고 있을 순 없잖아.”
택배는 안 온단 말이다. 그 전에 네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를르슈는 고민을 하던 찰나에 갑자기 드는 불길한 생각에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 만약에 네가 평생 이 상태라면 어떡하지?!”
“그, 그렇게 되면 경제적 무능력자가 되었지만 를르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경제적 무능력자는 물론 나의 성적 쾌락에 있어 만족감을 주는 데에도 무능력해진다.”
“쇼타공이라는 장르도 있어, 를르슈! 나 할 수 있어!”
“내 도덕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걸 배덕감이라고 한대!”
“필요 없어!”
스자쿠는 씩씩거리다가 를르슈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몰라, 를르슈가 나 키워야 돼. 평생. 어른이 될 때까지. 를르슈는 나나리도 아니고 스자쿠를 키우는 취미는 없었다. 게다가 스자쿠는 겉모습만 어린애지 알맹이는 이미 다 큰 스자쿠니까 풋풋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내 손해인데.”
“그래도 나 귀엽지 않아? 어렸을 때의 나를 떠올려봐.”
“골목대장 깡패가 귀여워봤자 얼마나 귀여웠겠어?”
“하긴 그때는 를르슈를 너무 괴롭혔으니, 나의 진정한 귀여움을 모를 수도 있지.”
“…….”
“죄송합니다, 허튼 소리였습니다.”
“반성하고 있는 중에 그럼 네 속옷을 사러 다녀와도 될까?”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밑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것도 시원하지만 안정감이 없어. 쓸데 없는 감상을 들은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인 머리에 모자를 쓰고 나서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배웅을 받고 나섰다. 혼자 남은 스자쿠는 맛집 리포터의 호들갑을 떠는 방송을 보면서 를르슈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를르슈가 손에 들고 돌아온 것은.
“여아용이잖아! 핑크색?!”
“수납하기는 힘들지는 몰라도 어리니까 여아용을 써도 크게 무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설마 이거 밖에 없어서?!”
“남아용도 있었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너를 위해서.”
“이거 스자루루인데?!”
“여장공이 대세라서.”
“를르슈!”
“항상 사랑한다, 스자쿠.”
젠장—!
죽도록 사랑해, 를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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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5 22:27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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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발언하는 스자루루 가끔 보고 싶었다ㅎㅎ ...어린이날은 이용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