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가 저를 따라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괜한 오기가 아닌가 싶다. C.C.는 그늘에서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고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같은 거리를 걸어도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는 C.C.와 다르게 얼굴이 벌개질 때까지 달아오른 제가 부끄러운지, 를르슈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수줍은 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와서 를르슈에게 설렐 멋진 구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C.C.는 를르슈의 행태가 아니꼬울 뿐이었다.
L.L.는 어떠냐고 스스로의 가명을 짓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오만방자한 황제께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선택해준 것이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C.C.와 다르게 돌아갈 곳이 있었고, 반겨줄 사람이 있었다. 미움도 받겠지만 그것도 하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면, 를르슈는 C.C.의 옆보다 좋은 곳에 갈 수 있다.
‘왜 나를 따라왔지.’
C.C.는 가방의 주머니 안에서 물통을 꺼내서 마시는 를르슈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꾹 삼켰다. 본인에게 물어봐서 답을 얻는 것이 제일 적당하겠지만, 를르슈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 감정에 치우칠 때에는 그 뛰어난 머리를 쓰지 못하는 쓸모없는 경우도 있긴 하다만, 대부분 머리가 좋다. 만약 지금 당장에 질문을 해도 진실된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고작 한 달밖에 안 지났다. 그래, 아직 한 달이다.
—너, 이름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를르슈 람페르지에서 따와서, L.L.는 어떨까?
사람을 놀리는 거라면 정말 최고점을 주고 싶다. C.C.를 비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네이밍 센스는 최악이다. 하지만 C.C.는 그런 것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이 어리숙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목적도 흐릿한 이 여행의 끝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바로 저 녀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C.C.가 를르슈에게 왜 저를 따라왔냐고 물어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똑똑한 를르슈가 한 번도 묻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함께 하는 걸 허락했냐는 질문이었다. C.C.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그 질문으로 반격을 가할 놈이었기에 그녀는 얌전히 옆을 걷고 있는 를르슈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끝과 끝을 다 맛본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한 명은 노예였고 한 명은 세계를 호령한 황제였다. C.C.는 넘겨받은 물통으로 목을 축였다.
둘은 지금 난민캠프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C.C.만이 읽을 수 있는 기어스의 기척을 따라서 걷고 있는 중이었다. 자동차를 얻어타기도 했지만 대부분 질 나쁜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걷는 것이 우선이었다. C.C.와 를르슈의 무지막지하게 큰 짐을 노리는 녀석들도 많아서 짐도 대폭 줄였다. 를르슈의 짭짤한 수완에 C.C.는 물건을 팔고 오랜만에 피자를 먹었다. 대체 이런 애들 장난감은 왜 들고 다닌 거야? C.C.는 를르슈가 하는 말에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네가 쓰던 거야, 특히 그 만화경은 네가 제일 좋아했지, 같은 말이었다. 아무튼 그것도 다 팔아치웠다.
막막한 사막보다 더 싫은 것은 황폐한 마을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을 보고 있으면 C.C.는 그곳을 다시 정리하고 치워야하고, 곧 올 사람들을 맞이해야할 것 같았다. 를르슈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눈앞의 풍경을 보았다.
자신이 죽어서 만들어진 평화로운 세계가 아직도 이 모양이라서? C.C.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쯤에, 를르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 나는….
예전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기억을 읽었을 때에, 아주 희미하지만 강하게 남아있던 흔적이 있었다. 어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이를 악물며 외쳤던 말이었다. 나는 브리타니아를 부수겠어! 브리타니아의 황자가 하기에는 위험한 말이었다. 스자쿠의 기억 안에서도 그것은 친아버지를 두 손으로 죽인 후에도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을은 를르슈가 잘못한 것도 아니며, 제로와 흑의 기사단이 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리이고, 또 예전에 망한 브리타니아의 나쁜 소행도 아니었다. 사람들끼리의 나약함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지만, 를르슈는 가끔 그런 곳에서도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C.C.는 를르슈와 잡은 손을 놓았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과거가 C.C.의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싫었다. 서로 알고 싶은 부분만 알고, 모르고 싶은 부분은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디까지 왔어?”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 잘 느껴지지 않아. 사람들이 더 많은 곳으로 가야겠어.”
“귀찮군."
“네 체력을 고려해서 걸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날카로운 시선이 C.C.에게 내리꽂혔다. C.C.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귀찮으면 안 오면 됐잖아. 그 말도 꾹 억눌렀다. 를르슈가 가방을 다시 둘러맸고, C.C.도 손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기어스의 조각은 말 그대로 조각이었다. 조각난 기어스는 애매하게 작동했다. 엄청난 능력을 주기도 했고, 열심히 찾고 있던 두 사람을 바보로 만들 정도로 미약하기도 했다. 대부분 마약에 취한 것처럼 자신이 일으킨 기적에 심취한 사람들이었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썼다. 예를 들면, 말도 안되는 꿈, 소위 세계정복 같은 것이다.
좀 더 물리적인 것으로 변했으면 회수가 편했을 지도 모른다. C.C.와 를르슈는 기어스의 조각에 홀린 사람들을 죽여나가며, 망가진 C의 세계가 복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기어스의 조각을 이렇게 열심히 찾지 않아도 돼. 사람들은 언젠가 죽고, 기어스의 조각은 다시 C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거니까.”
“그 사이에 코드 계승자가 될 사람이 나타나면?”
“지금 코드를 가진 건 너와 나뿐이야. 그런 사람이 나타나도, 우리가 찾지 않으면 소용없어…. 그리고 직접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코드를 주는 것도 쉽지 않아. 그 사람은 늙어서 죽어. 보통 사람처럼.”
“……지금 하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는 일은 아냐.”
를르슈는 사람이 텅 빈 거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꼭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나는 기어스 때문에 사람들이 또 혼란 속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
“그거 참 자애로운 황제 폐하시군.”
“나그네에게 황제라니, 그거 참 영광이로소이다.”
단막극 속의 대사처럼 우아하게 중얼거린 를르슈는 다시 앞서 걸었다. 어디인지나 알고 걷는 건지, 저 바보. C.C.는 를르슈의 뒷목을 잡아 끌었다. 거기가 아니야. 뭐? 진작 말하지.
아무튼 또 걷는다. 정처 없이 걷는 건 를르슈 뿐이다. C.C.는 갈 곳이 어디인지도 알고,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할지도 알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안다.
“C의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너는 원래대로의 소원을 이루고 싶은 건가?”
“원래대로의 소원? 죽는 거?”
“그래.”
“그러고 싶어.”
를르슈가 옆에 있어도 이 삶은 버겁고 끝이 없다. 인간답지 못하다. 원래 살았을 때에도 인간답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비참하다.
“마지막에는 꼭 웃어.”
“물론이지. 좋은 녀석을 찾을 거야.”
“……다시 계약을 해야겠네.”
“응. 과정이 번거롭지만, 너 같은 녀석은 안 걸렸으면 좋겠어.”
“나 같은 녀석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긴.”
C.C.와 를르슈는 다 무너져가는 담을 옆에 두고서 모닥불을 피웠다. 땔깜을 가져온 것은 C.C., 늘어져서 자던 를르슈는 뒤늦게 요리를 했다. 통조림으로 만든 것이지만 아주 맛있다. 노예였던 C.C.의 생존식과 차원이 다른 요리였다.
“그래도 너 같은 녀석이면 좋을지도 몰라. 미움 받는 건 싫잖아.”
“기어스는 비열한 힘이라고 욕먹는 게 싫은 건가?”
“그렇지. 사실 나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걸.”
“…그래.”
“너도 그렇겠지만, 를르슈.”
“나도 그럴까?”
아직 나는 길게 살아보질 못해서. 그러자 C.C.는 먹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나는 늙어서 다 안다는거야? 여자에게 실례야. 를르슈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도 않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난 기어스 때문에 삶이 변했으니까. 원하는 힘이었어. 그래서 나쁘지 않았고, 죽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괴로워했잖아. 아, 그런 의미에서 네가 나 같은 녀석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건 이해한다. 나는 꽤 좋은 남자니까.”
“재수 없어.”
“그리고 하나 더 고쳐주자면.”
“…….”
“나는 좋아서 이러고 있어. 너와 다르게.”
재수 없는 좋은 남자. 를르슈의 평가가 올라가면서도 곤두박질쳤다. C.C.는 설거지는 네 몫이라고 했다. 땔감을 구해오느라 손이 다 망가졌다고 투덜거리자, 를르슈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를르슈는 진짜로 설거지를 했다. C.C.도 노는 일 없이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바닥깔개를 깔고, 담요를 두고, 겉옷을 돌돌 만 베개를 두었다. 를르슈와 C.C.는 항상 머리를 맞대고 잤다. 싸우고 나서 등을 맞대고 잔 날도 있다. 하지만 손을 잡거나, 끌어안거나, 그런 다정한 연인의 잠은 자지 않는다.
우리는 뭘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될까. C.C.는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밤이었다.
* * *
“C.C.! 지난주에 드레스 맞춘다고 했었잖아! 자는 척 하지 마!”
그리운 목소리다. C.C.는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이건 꿈이다. 예전에 본 꿈이다. C의 세계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그 영상이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마음이 묶여있으면 안되는데.
“C.C.!”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잔 모양이었다. 새벽잠이 없는 마리안느가 시도때도 없이 커튼을 걷어댄 탓에, 아침잠이 많은 C.C.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즉, 지금 꿈에는 마리안느가 나오고 있다. C.C.는 결국 눈을 떴다. 사실 반사적으로 뜬 것이다.
눈앞에는 물결치는 검은 머리를 손끝으로 빙빙 꼬고 있는 마리안느가 삐딱하게 서있었다. 수수하지만 화려한 외모 탓에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주홍빛 원피스를 입은 마리안느가 C.C.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눈을 바로 뜨는 걸 봐서는 아주 예전에 깨어나셨군? 얼른 일어나! 세수하고 나가자!”
“난 싫어.”
여기서 나가면 마리안느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서 또 이것저것의 선물공세로 C.C.를 두고 갈 것이다. 사실 오늘 이 꿈의 결말도, 드레스를 맞추러 가자고 해놓고서 과일 가게 앞에서 사과를 한 입 가득 베어물고 C.C.를 까먹은 마리안느가 저녁에 사과의 의미로 애플파이를 구웠다가 홀라당 태워먹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저를 잊는 마리안느를 보기 싫었다. 드레스 따위 맞출 기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입고 나갈 마리안느의 서임식에 C.C.는 정식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드레스 같은 건 필요없고, 이 꿈은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드레스가 싫은 거야, 나랑 나가는 게 싫은 거야?”
“둘 다라고 하면?”
“그럼 내가 상처 받지.”
“아아, 네 상처 정도야 뭐, 흔하디 흔한 거 아닌가?‘
“소녀의 마음은 연약하니까 좀 더 정중하게 다루어주면 안되겠니?”
그러는 너나, 마리안느. C.C.는 하고 싶은 말을 억눌렀다. 이쯤 되면 C.C.가 울상을 짓는 마리안느를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이었다.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강요하지 않아.”
“……응?”
이건 꿈이 아닌가. 아니면, 진짜로 일어나는 일인가?
“그럼 집에서 뭐라도 해먹을까? 오늘은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할게. 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딱히 생각는 건 없지만. 적당한 거 아무거나 좋아. 아, 그래도 C.C.가 먹고 싶은 거라면 좋겠는데.”
“오랜만이니까 기사님 입맛에 맞추지.”
“그래, 그럼 파스타가 어떨까?”
요즘 잘 안 먹었잖아. 미트볼도 엄청 넣어주면 좋겠어. 손가는 것만 골라서 말하는 마리안느 때문에 C.C.는 그래도 입가를 느슨하게 하며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 사람을 녹이는 마리안느의 웃음이 좋다.
“드레스가 그렇게 싫었어?”
“응. 그리고 나는…사람들이랑 다르니까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모처럼 예쁜 얼굴인데 말이야.”
“그런 것과 별개로 나는.”
“그렇지만 를르슈랑 같이 다니는 건 조심해. 극악무도한 황제 본인이니 닮았다는 말로도 이젠 둘러대기도 힘들 걸.”
마리안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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