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AU
둘이서 같이 살고 있다고 하면 우선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하우스 쉐어? 돌아오는 첫 마디는 대부분 그것이다. 아니, 동거. 정정해주면 눈이 더 커진다. 스자쿠의 아버지에게 스자쿠를 달라고 허락을 받으러 갔던 때가 떠오를 정도로 를르슈는 이럴 때마다 기시감을 느꼈다.
아무튼, 제법 알고 지낸 동기에게 순차적으로 커밍아웃을 하자고 한 것은 스자쿠였다. 집안 어른들을 경악시킨 것으로도 모자란지, 스자쿠는 계속해서 를르슈와 저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를르슈로써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커밍아웃이 여러 차례한다고 덜 피곤해지는 법은 없었다.
—아, 어쩐지. 쿠루루기랑 그래서 친한 거였구나.
—뭔가 둘이 정반대 타입이라서 의외였거든.
동기는 를르슈에게 그래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앞에서 실컷 이상하다고 해놓고서는 잘 어울린다니. 이놈은 별로지만, 스자쿠와 같은 영업부니까 봐줄까. 를르슈는 눈웃음을 대충 짓고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다다음달, 12월에 를르슈와 스자쿠는 결혼하기로 했다. 누구의 호적에 들어갈 것인가, 그런 것은 서로 외국인인지라 정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일본은 아직도 동성 결혼이 합법이 아니었다. 동성결혼이 가능한 브리타니아에서 식을 올리긴 하지만, 입적하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를르슈는 누군가의 성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서 크게 로망이 없었지만, 스자쿠는 끝까지 아쉬운 모양이었다.
저녁까지 여유롭게 밀린 업무를 해치우고 나서,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쉬러 나갈 때 같이 따라나서서 결혼식 이야기를 하자. 를르슈는 느슨하게 쳐다보고 있던 모니터를 반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어느 세월에 청첩장을 다 나눠줘?”
“상식적으로 모든 회사 사람들이 브리타니아에 올 수는 없잖아.”
“그래도 청첩장은 찍은 만큼 돌리고 싶어!”
“그래서 너는 다 나눠줬어?”
“당연하지. 영업부에서는 이미 를르슈는 내 거로 소문 났어.”
개방적인 브리타니아계 기업에 미레이 애쉬포드가 부장인 영업부에서 얼마나 축제판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면 를르슈는 쓴웃음이 났다. 기획부에서는 아직 서너 명이 전부였고, 그 중에서 를르슈가 꺼리는 인물도 몇몇 있었다. 대부분 속이 좁고 옹졸한 인물들로 를르슈의 미모와 지성에 시기하여 꺼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를르슈 람페르지가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일본 유수 기업가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건 하나의 이슈이자 조롱할 건덕지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귀찮은 놈…. 그렇지만 그게 귀여운 거다. 를르슈는 카레를 남김없이 깔끔하게 비운 스자쿠를 보면서 절반 조금 남겨 놓은 제 몫을 보았다. 잘 먹는 스자쿠를 보고 있으면 저도 많이 먹기 마련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오히려 체한 것처럼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또 남겨?”
“응, 배불러. 퇴근 전에 간식도 먹었고….”
“간식? 뭐 먹었어?”
“딸기 타르트. 작게 한 조각.”
“를르슈가 좋아할 것 같은 거네. 그럼 푸딩 먹을래? 오는 길에 사다놨는데.”
“푸딩….”
먹을래.
카레에 대한 욕구는 사라졌다. 푸딩을 한입 가득 먹으면서 를르슈는 턱을 괴고서 저를 쳐다보는 스자쿠와 눈을 마주했다. 뭐야, 하는 시선으로 응하면 스자쿠는 씩 웃기만 했다.
“스자쿠 람페르지는 어때?”
“왜 그렇게 성에 집착해?”
“결혼식으로는 확실하지 않아. 이름이 바뀔 정도로 확! 티가 나야 돼.”
“동성 결혼이 비합법인 나라에서 게이가 결혼식 한다고 청첩장 돌리는 거면 티가 나는 거지, 이름까지 바뀌어야 하나?”
를르슈로서는 성에 대해서 크게 미련이 없었다.
여자가 많았던 아버지, 그리고 미련 없이 브리타니아의 성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따르게 한 어머니. 그런 가정사를 겪고 나면 성 따위야 크게 애정도 없었다. 쿠루루기 를르슈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 쿠루루기 집안에서 를르슈를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스자쿠가 보기 좋게 쫓겨난 것도 를르슈 때문이지 않은가. 스자쿠의 말로는 교토 6가에서는 늘 스자쿠를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를르슈를 핑계 삼아 내쫓은거니 크게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바로 옆에서 쫓겨나는 걸 본 입장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쿠루루기 가문을 이을 후계자로써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고, 정숙한 약혼녀도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완벽한 퍼즐을 다 부수어 놓은 것이 를르슈였다.
그 정도로 나는 너를 사랑해. 모든 걸 다 버릴 정도로. 스자쿠는 집안에서 옷가지만 들고 나와서 를르슈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를르슈에게 똑같이 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를르슈도 그 다음날 어머니와 동생들을 앞에 두고서 커밍아웃을 했다. 한 명은 집안에서 쫓겨났지만, 다른 한 명은 모두에게 인정 받았다. 옆에 있던 스자쿠는 집안에서 쫓겨날 때 한 번도 울지 않았으면서, 를르슈의 가족들이 축하한다고 말했을 때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런가….”
“스자쿠, 너 혹시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야?”
“설마.”
“설마가 아닌 거 같아. 계속 불안해하는 거 같은걸.”
“……그런가?”
푸딩을 다 먹은 를르슈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 일어났다. 스자쿠는 가만히 앉아있는 채로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최근 스자쿠는 메리지 블루인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걱정을 나눌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게 아니지만, 그게 아마 원인이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미래의 배우자로서 그 고민을 같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쓰레기를 다 버리고 온 를르슈는 스자쿠를 끌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소파에 앉혀두고서, 제 허벅지 위에 스자쿠의 머리를 눕혔다. 멀뚱한 표정으로 있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스쳤다. 그것에 스자쿠는 눈을 감고 희미하게 웃었다.
“메리지 블루에는 이게 효과가 좋대, 를르슈?”
“모르지.”
“그럼?”
“메리지 블루는 몰라도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효과가 있지.”
“하하하.”
스자쿠는 아예 를르슈의 허벅지를 베고서 누웠다. 딱딱할 텐데. 를르슈는 스자쿠의 곱슬머리를 슥슥 매만지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그래. 를르슈가 아니라 다른 남자, 아니 여자를 데려가도 그랬을 거야.”
“어?”
“를르슈가 얼마나 대단한데, 왜 인정하지 않는걸까?”
“…그건 됐어. 이제 지난 일이잖아. 나도 네 아버지가 우리 결혼식에 안 오는 건 아쉽지만.”
“사실 결혼식은 둘째 치고 내 를르슈의 훌륭한 점을 몰라주는 게 짜증나.”
“메리지 블루가 아니라 심통난 거였군.”
“그래?”
뭐가 ‘그래?’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코를 콱 꼬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프로포즈 멘트도, 상황도 형편없었던 놈에게 뭘 바라는 건지. 를르슈는 스자쿠의 눈을 손으로 아예 덮어버렸다.
“이건 무슨 효과가 있어?”
“몰라.”
적어도 부끄러운 말을 할 때 거리낌 없이 하는 그 멋있는 모습에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효과는 있다고, 를르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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