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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DOZI 2020.01.06 08:23 read.399 /

겨울비가 사납게 내리고 있는 아침이었다. 햇살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거실 창문 밖을 내다보며 스자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거실에는 를르슈가 먼저 와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한창 전화 중인 를르슈의 옆에 앉으면서, 스자쿠는 빗방울이 창문을 치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옆에 있는 를르슈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을 들으면, 아마도 전화 상대는 나나리, 아니면 유페미아일 것이다. 확실하게 하자면 나나리겠지. 오늘 약속 상대는 나나리였으니까.

나나리는 스자쿠와 를르슈가 사는 곳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원래 를르슈가 살았던 도시였다. 를르슈가 대학 진학을 위해 펜드래건으로 자취를 시작했고, 스자쿠는 아버지의 등쌀에 떠밀려 브리타니아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둘은 운명적인 사랑을 했으며, 를르슈는 살았던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고, 스자쿠도 태어나고 자란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고, 또 누구든 부를 수 있다.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를르슈의 가족이었다. 그의 어머니, 여동생, 배 다른 형제들. 스자쿠는 전화에 집중하고 있는 를르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 오른쪽 어깨에 닿는 스자쿠의 무게에 를르슈는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며, 가끔씩은 그 안을 헤집는 것에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처음 를르슈를 만났을 때의 당황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스자쿠는 자신의 미추 기준에 대해서 제법 엄격함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기준을 넘어서는 규정 외의 미모에 놀랐다. 마주 보는 눈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이때 를르슈는 나나리를 만나지 못한지 한 달이 넘어갔기 때문에 인생 최고로 짜증이 나있던 상태였다.

 

무섭게 생겼네. 예쁘게 생겨서…. 

 

멍청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자기소개를 했다. 쿠루루기 스자쿠, 성은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스자쿠라고 불러줘. 스자쿠의 자기소개에 를르슈는 힐끔, 스자쿠를 위 아래로 훑었다.

까다롭게 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스캔하며 계산하다니, 성격은 별로인 거 같네. 스자쿠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얼굴은 활짝 웃었다. 

 

“브리타니아 사람인가?”

“응? 아, 아니. 난 일본에서 왔어. 유학생이야.”

“흐음….”

 

를르슈는 스자쿠의 깔끔한 발음에 놀랐다. 반듯하게 서있는 자세도 나쁘지 않았다. 팀 프로젝트 상대로는 적격이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었다. 

 

“를르슈 람페르지다. 잘 부탁한다, 스자쿠.”

“응, 나도 잘 부탁해. 람페르지.”

 

그렇게 둘은 손을 잡았다. 

일주일 있다가 키스를 했다. 스자쿠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걷다가, 노을이 예뻐서 해가 질 때까지 서로 그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잡고,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키스 이후 를르슈는 사흘 동안 결석했고, 스자쿠는 결석한 를르슈 몫까지 바쁘게 사흘을 보내야만 했다.

사흘 뒤,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연인 선언’을 했다. 사흘 전 있었던 키스는 우발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으며, 스자쿠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스자쿠의 연인이 되고 싶다는 욕구까지 들었으므로 알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스자쿠는 그 선언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었다. 

첫 만남에 들었던 생각. 까다롭게 생겨서, 성격은 별로일 것 같은. 정정해야겠다. 까다롭게 생겨서, 성격은 귀엽네. 

 

“그럼 사귀자.”

 

사흘 동안 결석을 하면서 고민했던 를르슈에게 보란듯이 반격한 스자쿠도 그에게 고백했다. 동성애에 대해서 서로 크게 관심은 없었으나,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의 성정체성을 떠나서 서로가 좋아진 것이니 연인 관계는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뿐, 후퇴하지는 않았다.

발전, 진보, 전진.

그리하여 스자쿠와 를르슈는 4년 동안 연애를 했으며,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면서 동거도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법적으로 사실혼 관계에 속한다고 를르슈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말했다. 스자쿠 역시 바라던 바였다. 

이때쯤 스자쿠와 를르슈의 사이는 5년째 연애 중이었으며, 스자쿠 안에서 를르슈는 성격은 귀여운 게 아니라, 성격이 나쁜 것이었고, 가끔은 이런 성격 파탄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를르슈의 성격 : 별로 > 귀여움 > 나쁨 

 

이렇게 된 경위에는 여러가지 일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를르슈는 스자쿠가 이제껏 사귀어왔던 여자친구들 보다 더 깐깐하고, 섬세하고, 악질이었다. 

를르슈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옳은 것이고, 목적이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그 사이에서 윤리나 규범 같은 것을 지키지는 않았다. 를르슈가 자기 안전을 위해 규칙을 지킬 때는 운전할 때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늘 자기 방식대로 움직여주길 바랐고, 스자쿠가 그러지 않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를르슈가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스자쿠가 멍청해보였을 뿐, 스자쿠는 브리타니아에 쫓겨나듯 유학을 왔어도 알아서 자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를르슈는 기본적으로 모럴리스다.

 

스자쿠가 보통 상종하지 않는 인간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으나, 스자쿠는 그와 사실혼 관계에 놓인지 벌써 4년이 지났다. 무상A/S 기간도 2년이고, 전자제품 품질보증서도 길어봤자 3년이다. 여러모로 를르슈를 반품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지났다.

가장 큰 문제는 를르슈가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고 빨고 깨물어도 질리지 않았다. 사건 사고를 키우는 데 있어서 물불 안가리는 성격의 를르슈는 섹스할 때에는 정 반대가 되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인간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스자쿠가 그렇게 믿게 된 계기에는 를르슈가 있었다. 침대 위, 스자쿠의 아래, 그 사이에 있는 를르슈가 성적 쾌락으로 무너진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가벼운 자기혐오에 울고 있으면, 스자쿠는 간단하게 이성을 잃고 모럴리스가 된다.

하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이론이며, 실제로 적용될 때에는 수많은 변수로 그 사이에 손실되는 에너지가 있듯이, 둘 사이에 모럴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스자쿠는 섹스 도중에 지친 나머지 잠들어버린 를르슈를 상대로 3번 정도 사정했다. 그가 느낀 감정은 거의 수면 중에 강간한 것과 다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미 없다’는 느낌이었다. 울면서 스자쿠,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그리워져서 스자쿠는 막판에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그리고 끝이 났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한다. 

 

둘은 같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공통의 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를르슈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은 가족, 그 중에서도 여동생 나나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나리는 입시 준비 때문에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기에, 를르슈는 나나리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만성 나나리 부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그를 위로하고 달래는 것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나리’라는 존재에 그렇게 집착하는 를르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나리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를르슈의 성격이 그렇게 된 것은 복잡한 집안 사정이 얽혀있다고 그랬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만도 했다. 이복 형제만 10명이 넘고, 재산 다툼으로 늘 긴장된 집안이고, 를르슈와 나나리의 어머니는 다른 부인들에 비하면 평범한 서민이었기에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고 그랬다.

재산 상속에 있어서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서 나왔음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들 때문에 를르슈는 지칠대로 지쳤고, 펜드래건으로 도망치듯 대학교를 골랐다고 했다. 나나리가 걱정되었지만, 그때는 집밖을 나돌던 어머니도 집에 들어왔고, 나나리도 오빠 없이 자립할 기회가 필요하기도 했다고 생각했다.

 

나나리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귀엽고, 예쁘다.

 

를르슈가 아끼는 여동생들은 대체로 그랬다. 나나리는 를르슈와 반대로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고, 운동신경이 좋았으며, 스자쿠가 제일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정말 착하다는 것이었다. 

판타지 같은 착하고 예쁜 여동생을 끼고 살았으니 그리울 만도 하지. 스자쿠는 나나리와 함께 있을 때 달라지는 를르슈의 분위기에 웃음이 나왔다. 나나리와 헤어지고 나서 우울해지는 모습을 보면 심란하긴 했지만. 

이후 같이 살게 되면서 나나리가 두 사람의 집에 놀러오기도 하고 그랬지만, 대학 생활을 즐기는 나나리는 최근 들어 남자친구가 생긴 듯, 예전처럼 자주 오진 않았다. 연락도 늦어지는 것 같았다. 상심한 를르슈를 달래주는 건 스자쿠의 일이었지만, 스자쿠는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섹스할 핑계가 늘어난 거니까.

스자쿠도 를르슈와 같은 맥락에서 나나리를 좋아한다. 이런 여동생이 있다면 누구든 안 예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배 다른 여동생인 유페미아도 비슷하다. 미워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를르슈가 슬퍼할 뿐만 아니라, 스자쿠도 별로였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미워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처럼의 휴일에, 이렇게 단 둘이 있는건 오랜만이었다. 

 

막 일어났을 때보다 더 세게 들리는 빗소리에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스자쿠의 뺨을 툭툭 건드리던 를르슈의 손은 어느새 스자쿠의 손에 잡혀있었다. ‘그럼 나나리,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역시 나나리였다. 비가 이렇게 오니 운전도 힘들 것이다. 

 지난 달, 운전면허를 따면서 를르슈에게 새 차를 선물 받은 나나리는 운전에 욕심이 생겼다. 약속대로라면 오늘 스자쿠와 를르슈의 집에 혼자서 운전해서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겨울비는 무섭게 내리고, 또 도로는 쉽게 얼 것을 생각하면 운전은 어려울 것이다. 를르슈는 마음이 아프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두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는 눈을 뜨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를르슈가 ‘뭐야?’하고 말했지만 스자쿠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