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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자 15

그는 여자 / DOZI 2024.04.28 11:58 read.62 /

열네 살이 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생활은 처음 시집을 왔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쿠루루기 저택에 갇혀 지냈으며, 그의 생활 반경은 정원과 스자쿠의 침실, 서재, 그리고 자신의 방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를르슈는 자신의 생활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자쿠가 없는 시간에는 스스로 공부를 하면 됐고, 스자쿠가 돌아오면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고 그와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몸을 섞는 시간도 좋았다.

다만 이런 를르슈에게도 고민은 존재했는데, 바로 아플 정도로 키가 크더라도 여전히 자라지 않는 가슴이나 아직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궁 같은 것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야 의사를 만나서 자신의 정상성을 인정 받고 싶었지만, 이제 열네 살이 된 를르슈는 그런 것이 오히려 두려웠다. 자기가 정말 여자로써 기능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면,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겐부는 스자쿠로부터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놓을 것이 분명했으며, 언젠가 만났던 카구야가 스자쿠의 아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곧 불안을 낳았다. 스자쿠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를르슈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렇지만 스자쿠 앞에서 나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어리다는 이유로 스자쿠는 를르슈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스자쿠에게 투정이라도 부렸다가 더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한편, 를르슈가 어딘가 의기소침해져가는 것을 스자쿠가 모를 리가 없었다. 스자쿠는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그를 어떻게 어르고 달랠까 고민했다. 쾌락에 약한 를르슈는 몸으로 구슬리면 말해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들어 를르슈는 섹스를 할 때에도 예전처럼 솔직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스자쿠가 애원하듯이 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하면 그제서야 소리를 내고, 쾌락에 약한 점은 여전하면서도 그것을 느끼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지, 뒤늦게 수치심을 배운 아이처럼 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 수도 있겠구나….’

 

를르슈를 여자로, 그리고 아내로 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자쿠는 자신이 를르슈를 돌봄과 양육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를르슈의 성장이 아쉬우면서도 당연한 하나의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를르슈를 추궁하고 싶다가도, 성장통으로 아픈 와중에도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를 떠올리면 이대로 숨기고 있는 것을 못 본 척 넘어가주고 싶기도 했다.

 

‘어른이 된 를르슈… 상상하기가 어려운 걸.’

 

그는 언제까지 스자쿠를 믿어줄까. 스자쿠는 자라나는 를르슈를 보면서 언젠가 자신의 거짓말에 한계가 찾아올 것을 느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원체 영특한 머리를 타고난 를르슈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를르슈는 이제까지 자신을 속여온 스자쿠를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것인가. 스자쿠는 를르슈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의 사랑이 절대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를르슈가 자신에게 향한 사랑은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를르슈는 어리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고 하더라도 를르슈는 스자쿠에 비하면 열두 살이나 어렸으며, 그의 세계와 접하고 있는 것이 오로지 스자쿠 한 명이기 때문에, 스자쿠를 중심으로 한 세계 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열네 살. 스자쿠는 를르슈의 나이를 되새겼다. 2년이 지나면, 를르슈 역시 스자쿠가 를르슈를 처음 만났던 날의 나이가 된다. 그때도 를르슈는 스자쿠의 여자이자 아내로 남아주고 있을까. 스자쿠는 자신이 없었다. 

를르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날아간다면, 스자쿠는 그 날개를 꺾어버리고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할 것인지, 아니면 스자쿠의 손길에 길들여진 를르슈가 여전히 자신의 곁에 남아줄 것이라고 믿을 것인지. 어느 쪽이든 스자쿠의 곁에는 를르슈가 있어야만 했다. 스자쿠는 이런 점에서 자신이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를르슈의 성장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면서,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도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할 만큼의 추잡한 소유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나쁜 어른, 그것이 바로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자라나는 아이의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은 것은 스자쿠였다.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를르슈의 두 다리를 이 쿠루루기 저택에 묶어버린 것도 스자쿠였다. 그를 쾌락으로 얽매고 순종하게 만든 것도 스자쿠였다.

스자쿠는 자신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를르슈의 가능성을 망쳐놓았다는 것은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를르슈를 자신 만큼이나 사랑할 사람도 없다는 것도 인정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 어린 를르슈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척이나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성장한 그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고민을 끌어안고 있던 간에 스자쿠는 를르슈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자쿠에게 자신의 고민을 숨기고 있던 를르슈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의 사건은 갑자기 일어났다.

를르슈는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늦은 오후에, 를르슈가 곧잘 스자쿠의 서재에서 놀고 있을 시간에 온 전화였다.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해둔 전화기가 울렸고, 스자쿠의 전화일 것이라고 생각한 를르슈는 무방비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를르슈 씨.’

 

전화의 상대는 다름 아닌 스메라기 카구야였다. 를르슈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숨을 멈추었다.

 

‘다른 게 아니라 스자쿠 일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스자쿠는 지금 집에 없어요.”

 

그 말은 즉 스자쿠가 없는 틈을 타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를르슈는 이전과 같이 그녀를 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카구야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를르슈의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전화는 중요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스자쿠가 지금 병원에 있어요.’

“네?”

‘모르셨나요?’

“스자쿠가… 병원에 있다고요?”

 

그 말에 를르슈는 전화를 붙잡고서 카구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이라서 당황하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카구야는 그런 를르슈를 알고 있는 것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겐부 아저씨가 모두에게 입막음을 한 모양이네요. 를르슈 씨마저도 모르고 있을 정도면.’

“사고요?”

‘네.’

“무슨… 무슨 사고길래, 스자쿠가 병원에….”

‘스자쿠가 당신을 찾아요.’

 

그 말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스자쿠, 병원, 사고. 이 세 단어가 엉망으로 뒤엉켜서 를르슈의 사고회로를 마비시켰다.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를르슈는 금방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를르슈 씨?’

 

카구야는 굳어 있는 를르슈를 불렀다. 가까스로 대답한 를르슈는 숨을 고르면서 냉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그려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겐부가 자신에게까지 감추고 스자쿠의 사고를 덮으려고 했다는 것부터 스자쿠의 사고는 끔찍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올 수 있다면 병원으로 오실래요? 지금 바로 차를 보낼 테니까요.’

 

그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그러겠다고 말했다. 눈물이 고이고 손발이 차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스자쿠가 처한 사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은 를르슈는 곧 도착한다는 카구야의 차를 기다렸다. 현관 앞에서 차 소리가 들리자마자 를르슈는 현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 번도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완벽한 새장에서의 탈출이었으며, 그것은 스메라기 카구야가 준비한 납치극의 시작이었다. 

 

* * *

 

쿠루루기 스자쿠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가 스스로 이 집을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모습을 CCTV의 영상으로 확인할 때까지 스자쿠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를르슈가 자기 발로 이 집을 나갔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태우고 간 차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승용차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더 흥분하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달래면서, 스자쿠는 를르슈가 타고 간 차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자쿠는 그 차를 어디서 보았는지 알아냈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차였다. 그 차는 교토6가를 오고 갈 때마다 카구야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였다. 

 

* * * 

 

“저를 속였군요.”

“스자쿠가 위험에 처한 건 사실이에요.”

 

카구야의 차분한 대꾸에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를르슈는 스메라기 카구야의 손에 이끌려 스자쿠가 있다는 병원까지 오고 나서야 자신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갔음을 깨달았다. 

스자쿠는 어디 있냐는 말에 카구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를르슈를 스메라기 병원에 데려왔다. 를르슈는 거의 10년 만에 나오는 밖의 풍경에도 아랑곳 않고 스자쿠의 위치를 물었다. 스자쿠는 괜찮은 거죠? 를르슈의 계속되는 질문에 카구야는 ‘가면 알아요.’ 라고 말한 뒤에, 를르슈를 어느 한 병실로 데려갔다.

를르슈는 나가려는 자신을 가로막는 카구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에는 이제껏 본 적 없던 혐오와 경멸이 묻어나고 있었다.

 

“스자쿠가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데요?”

“당신을 잃을 위기에 처한 거죠.”

“…….”

“를르슈 씨, 이야기 좀 할까요?”

 

를르슈는 카구야의 ‘이야기’에 시간을 내어 귀를 기울여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이 병실에는 카구야와 카구야를 돕는 사람들 뿐이었으며, 를르슈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까지 를르슈의 인생은 그래왔다. 오로지 스자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고는 멈췄으며, 스자쿠가 없는 곳에서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를르슈는 잠시 숨을 골랐다. 를르슈가 이야기에 응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카구야는 자기 사람들을 물리고서 를르슈와 단둘이 병실에 남았다.

 

“드디어 말을 꺼내보네요. 를르슈 씨, 제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아세요?”

“모릅니다.”

“를르슈 씨한테 소중한 건 스자쿠일까요?”

 

갑자기 소중한 소중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카구야의 화제에, 를르슈는 솔직하게 응하기로 했다. 스자쿠와 관련된 질문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게 스자쿠가 소중한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스자쿠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

“당신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누구와도 접하지 않게 하면서, 자기만 바라보게 만드는 못난 남자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스자쿠가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카구야는 를르슈를 떠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그런 카구야의 도발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스자쿠에게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 스자쿠가 자신을 이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스자쿠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은연 중에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아했고, 를르슈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스자쿠의 손을 한 번씩 거쳐간 것들이길 원하는 그 집착과 소유욕은, 아무것도 모르는 를르슈가 느끼기에도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를르슈가 그 쿠루루기 저택에서 1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두문불출하며 지냈던 이유는 스자쿠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아무래도 카구야는 를르슈의 스자쿠에 대한 사랑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걸려온 싸움에 를르슈는 응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답 없이 카구야의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에는 빈틈 없이 날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카구야는 이 어린 소년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피곤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을 보니까… 어떤 이야기를 듣던 간에 스자쿠를 계속 믿겠다는 것 같네요, 를르슈 씨는.”

“맞아요. 그럼 이제 이야기 해보세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이유가 궁금해지니까요.”

 

카구야는 도발에 응하면서도 티나지 않게 자신의 패를 능숙하게 감추는 를르슈의 모습에, 그가 타고난 책사라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이런 뛰어난 지략가를 그저 쿠루루기 스자쿠의 아내로만 묶어두는 것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해서 카구야의 계획은 실행되어야만 했다.

 

“를르슈 씨는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하나요?”

“……무슨.”

“지금 나이가 열 넷이죠? 보통의 열네 살 여자라고 하기엔, 를르슈 씨는 너무 이질적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은 여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아요?”

 

카구야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의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 스자쿠가 말해주었던 것들을 카구야와 공유해야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스자쿠와 자신 만의 은밀한 비밀이었으며, 쿠루루기 저택에서는 부부의 생활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의 입에도 쉽게 오르내리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스자쿠가 어린 당신을 어떻게 농락하고 있는지 알려줄게요.”

 

카구야는 를르슈에게 진실을 들이밀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무언가가 를르슈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것을 떨군 카구야는 미소를 지으면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작은 그림책을 들여다보았다.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

 

를르슈가 그 책을 주워들고, 카구야는 책을 펼치는 를르슈의 반응을 기대하며 말했다.

 

“조금 유치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당신에게는 이 정도의 확실한 ‘진실’은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