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오브 세븐과 아리에스의 황족들
새로운 에리어 확장을 위한 전투에 앞선 군사 회의가 있었다. 지금껏 이름만 들었던 지휘관의 이름과 새로운 전투인력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하의 말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같이 임무를 함께 하는 상대는 황족이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고 하더라도 일레븐 출신인 스자쿠를 좋게 보는 황족은 드물었다. 아마 이번 전투에서 스자쿠에게 맡겨지는 일은 헛짓거리에 가까운 소일거리일 것이다. 그런 소홀한 천대에 익숙해지다 못해 넌더리가 나서, 스자쿠는 단독 임무 위주로만 나가는 경우가 잦았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획일적인 군복을 입는 것은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나 해당되었다. 황제의 기사—나이트 오브 라운즈인 스자쿠와 먼저 기다리고 있는 황족들 만큼은 원하는 색으로 치장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어 타겟이 되더라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과시였다. 목숨을 내놓는 허세는 스자쿠의 취미가 아니었지만, 브리타니아의 문화는 그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연회장이 아니라 군사 회의장이다. 스자쿠의 건조한 인사에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어깨에 내려앉은 망토의 끝자락에 새겨진 금실의 브리타니아 상징이 너울거렸다.
“딱 맞춰서 왔으니 늦진 않았어. 나이트 오브 세븐.”
브리타니아 황실에는 수많은 황자와 황녀가 있다. 매니아가 아닌 이상 외우는 건 다 힘들 것이다. 그들을 알아보는 건 ‘보라색 눈동자’ 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로열 퍼플이다. 지금 스자쿠에게 말한 남자도 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어려보이는 소녀도 보라색 눈동자. 황자와 황녀가 동시에 참가하는 임무라고 했었지.
스자쿠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열어보았다. 아프리카 대륙 남부 에리어 확장. 총 사령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부사령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아마도 남자 쪽이 를르슈고 옆에 있는 소녀가 나나리일 것이다. ‘비’ 가문이라…. 동복의 남매가 동시에 참전하는 건 드물다.
“처음 뵙겠습니다, 를르슈 전하. 나나리 전하.”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소녀는 얼굴을 환하게 빛을 내며 웃었다. 웃는 것만으로도 소녀가 얼마나 어린지 알 수 있었다. 부사령관이라니, 할 수 있을까? 스자쿠는 살짝 굳은 웃음으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아프리카 남부에 대한 침공 작전에 대해 설명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작전 개요 설명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설명부터, 침공 작전에 참전하는 모든 군인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상식까지 파고 들면서 시작했다. 처음엔 강의를 들으러 온 기분이었으나,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황녀가 누구보다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에 이해했다. 저 황녀를 위해서 지금 열심히 설명 중이구나. 한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남부 지역을 어떻게 에리어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스자쿠도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사하고 왔기 때문에 를르슈 황자가 준비해 온 작전의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당 부분 놀란 것은 를르슈가 스자쿠의 랜슬롯 기동성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크게 이용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선두에 서서 기동대장 역할을 맡아주면 좋겠어. 그러면 모든 전투가 수월하게 풀릴 거야. 그 외의 작전도 세세하게 짜야겠지만.
“우선은 첫날이니까, 이 정도만.”
회의장의 조명을 모두 켰다. 다음 회의는 내가 다시 일정을 조정해서 부르지. 이래보여도 재상 보좌라 출전 전까지 정리해야할 일이 많아서.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를르슈의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었나 했더니 재상부에 서류를 내러 갈 때 재상 대리 보좌 서명으로 를르슈의 이름을 많이 보았다.
“재상 보좌이시면 바쁘실 텐데 어떻게 출전을….”
스자쿠는 순수하게 궁금한 나머지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은 그 전투에 참전하는 모든 군인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다 해내는 인간은 드물다. 재상 보좌의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총 사령관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전투에 집중을 못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지금이야 첫날이니 작전이 그럴싸하게 보여도 실전에 가서 무너질 지도 모른다.
“경은 모르겠지만 나는 전투 경험이 많아. 내 이름을 걸고 싸운 적은 드물지만 말이야.”
“…전하의 명령 하나에 몇 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지 아십니까? 안일하게 무공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참전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제가 황제 폐하께 아뢰겠습니다.”
“안일하게 무공을 세운다? 내 마음을 그렇게 단언하는 건 황족에 대한 불경죄라는 생각은 안하는가? 넘버스 주제에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정신을 놓아버렸나?”
“오라버니! 쿠루루기 경에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금방이라도 서로 멱살을 쥘 것 같았던 를르슈와 스자쿠 사이에서 를르슈를 끌어 안은 것은 같은 검은 군복 차림의 나나리였다. 를르슈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금실로 브리타니아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휘두른 나나리는 여려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단호하게 제 오빠를 끌어안고 말리고 있었다.
“쿠루루기 경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오라버니는 원래 재상 보좌의 일로 바쁘시지만, 제 데뷔전 때문에 일부러 군 사령관의 일까지 하게 되신 거예요.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시면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나리 전하의 데뷔전이요…? 설마 나나리 전하는 전투가 처음이신데 부 사령관의 자리에 오르신 겁니까?!”
“일개 테러 진압으로 나나리의 데뷔전을 치르게 할 순 없지. 나나리의 이름으로 에리어를 세우는 게 이 전투의 목적이다.”
여동생의 무공을 위해서 전쟁을 하려는 오빠를 위해 싸워야 한다니.
지금까지 브리타니아의 많은 억지와 그에 따른 수모를 당해왔지만 스자쿠는 이만한 것은 처음이었다. 허무하다 못해 황당한 스자쿠의 얼굴에 나나리는 눈치를 살폈다.
“쿠루루기 경이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사관학교에서도 KMF 조종 성적도 좋았고…. 코넬리아 언니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이드 씨한테서는 어머니 못지 않은 성과를 낼 거라고 칭찬도 들었고요. 오라버니의 작전을 수행할 때에도 지장이 가지 않게 할 거고, 경의 공도 가로채지 않을게요. 아마 그럴 수준도 못 될 거예요.”
“…사관학교를 나오셨습니까? 그리고 로이드 씨를 아세요?”
“저는 ‘섬광의 마리안느’의 딸이니까요. 랜슬롯의 테스트 파일럿들 중 한 명이었어요.”
쿠루루기 경과 저희 남매의 인연은 정말 깊답니다. 스자쿠는 제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하는 나나리의 말에 헛기침이 나왔다. 아, 그렇군요. 그런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두 사람의 손을 떼어버렸다. 무례한 녀석이다, 나나리. 필요 이상으로 상대하지 말도록. 나나리는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스자쿠에게 말했다.
“언젠가 아리에스에 오세요. 오라버니와 제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나리, 쓸데 없는 말을…. 를르슈가 그렇게 말하며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먼저 나가는 ‘비’ 가문의 남매에게 고개를 숙여 경례를 한 스자쿠는 텅 비어버린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택에 돌아가서 아프리카 대륙 남부 침공 작전에 대한 데이터를 더 정리했다. 작전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아 불참을 할까 하려다가, 그럴 군더더기 조차 보이지 않아서 머리를 쥐어뜯을 뻔 했다. 그저 꼬투리 잡을 것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전투 경험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초짜를 데리고 에리어 확장이라는 대전투에 나간다니. 아무리 여동생을 위한 공을 세우고 싶다고 한들 그건 무리수였다.
스자쿠는 사관학교 데이터에 나나리의 이름을 검색했다. 황족임에도 무공을 세우고자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황족은 제법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황실계승권 레이스에서 높은 순위로 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사관학교 출신 중에서 무공과 동시에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공주장군이라 불리는 코넬리아 정도일까.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는….
올해 수석으로 졸업.
KMF 시뮬레이션 전투 AAA+
그외의 잡다한 비고사항이 붙어있었지만 스자쿠의 눈에 들어온 나나리의 경력 중에 가장 특이한 경력은 그것이었다. 보통 사람이 수석이라면 황족 누구의 기사도 될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황족이 수석으로 졸업한다면? 그런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게다가 AAA+는 가능한 점수였나? 스자쿠도 졸업했을 때 AAA였다. 사관학교가 황족이라고 점수를 더 주는 곳이 아니기에 이건 순수한 나나리의 실력이었다.
그래, 그 오빠가 그저 단순한 테러 진압을 데뷔전으로 쓰기엔 여동생의 실력이 아깝다고 생각할만 해…. 하지만 시뮬레이션 전투와 실전은 다르니 스자쿠는 아직 그녀의 실력을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섬광의 마리안느’의 딸이라고 했고, 또 카멜롯의 로이드를 알고 있다고 했으니…. 황제가 신경 쓰는 자식이자 군사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이었다.
섬광의 마리안느는 스자쿠도 그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전장에서의 공을 세운 후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서 황후가 되어서도 무공을 혁혁하게 세워 지금의 브리타니아 ‘비’ 가문을 대귀족의 후원 없이도 일으켜 세운 여기사. 그러나 다른 107명의 황후들은 불결한 서민이라며 헐뜯는다고. 지금은 전선에서 물러났지만 그 기백은 여전하다고 들었다.
“대단한 자식들을 두셨군요….”
한 명은 재상 보좌, 한 명은 사관학교 수석 졸업.
둘 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할 때이다. 스자쿠는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를 해야할지 다시 두통이 몰려왔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전투경험 부족의 초짜를 데리고 참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황족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보조하는 것이 이번 전투의 나의 임무인 거 같다. 를르슈 전하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은 엄청나게 맘에 든다. 이 작전이라면 브리타니아 역사상 단기간 내에 에리어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스자쿠도 공을 인정 받을 수 있는 작전이다. 뭐 하나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머리를 비우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카멜롯에 들려서 어제의 회의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하러 갔다. 그러나 이미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둘. 스자쿠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제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쿠루루기 경, 왔군요. 전하들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그런 스자쿠의 마음을 모르는 세실이 먼저 반겨주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숙여 두 전하에게 인사했다. 환하게 웃는 나나리야 그렇다 치고 를르슈는 시종일관 불편한 얼굴로 그 인사를 받고서 곧 등을 돌렸다.
“그럼 나나리의 기체가 준비되는대로 다시 부르도록 해라. 나나리,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전하.”
“벌써요? 모처럼 쿠루루기 경도 왔는데….”
“그의 실력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 알고 있는 걸 보는 건 시간 낭비다.”
“……알겠습니다. 쿠루루기 경, 나중에 봐요.”
스자쿠가 들어왔던 곳으로 바로 나가는 두 남매에게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고개를 든 로이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컴퓨터 앞에 섰다. 요새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의 삶의 빛, 나나리 황녀 전하는 정말 최고야~! 스자쿠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는 로이드의 뒤통수를 때리는 세실에게 후련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쿠루루기 경은 여기에 무슨 일로? 아직 조정일은 멀었잖아요?”
“아,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이제 전하들은 가셨잖아요.”
“그럴까? 그럼, 진짜로 왜? 아프리카 대륙 남부 침공 작전은 우리도 들었어. 를르슈 전하랑 나나리 전하가 오셔서 설명해주셨으니까.”
“…네?”
“이번 전투가 나나리 전하의 데뷔전이라서 쿠루루기 경의 손이 많이 갈 거라고, 실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신경 쓰일 일 없게 하겠다고 를르슈 전하가 그러시던데. 한 번 말씀하시는 건 어지간하면 다 지키시는 분이시니까 스자쿠 군도 믿어도 돼.”
스자쿠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세실은 오히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나리 전하가 실전에서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거에 스자쿠 군이 힘들 수도 있어서…. 미리 사과하겠다는 뜻에서 스자쿠 군이 번거로울 일 없도록 를르슈 전하가 먼저 움직이겠다고 하셨는데.”
“하지만 를르슈 전하는 재상 보좌 일을 하셔야하잖아요?”
“그것도 하시면서 하시는거지. 어쩌겠어.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나나리 전하의 데뷔전을 준비하시는 거니까.”
“…….”
“못 들었어?”
“…넘버스 출신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고 그러시는 걸까요?”
그 말에 가만히 있던 로이드가 소리를 지르듯 웃었다. 하하하하! 아, 스자쿠 군~! 넘버스라니, 이제 와서,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로 상처 받는 말투라니~! 소름 끼쳤잖아! 진짜로 소름이 돋은 것마냥 팔뚝을 슥슥 문지른 로이드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쪽은 서민 출신 황족이야. 불결함으로 따지자면 피차 일반이라구~”
“로이드 씨!”
이번엔 스자쿠가 때렸다. 악 소리 내며 쓰러지는 로이드를 보며 세실이 고맙다고 말했다. 가끔은 뭘 믿고 저렇게 말하나 몰라 싶어….
로이드가 실험실 바닥에서 쓰러져있는 동안, 를르슈와 나나리는 아리에스 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나리는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도 편히 쉬질 못했다. 보름 정도는 파티나 연회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리에스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서 차를 마시고 춤을 추는 시간이 길었다. 나나리가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기숙사에서 황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비’ 가문과 연을 닿아보려는 귀족들이 초대장을 보내와서 고르고 골라서 다녀도 나중엔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나나리, 친구들이랑만 놀지 말고 오빠랑도 놀아달라고 하면 싫어?’
‘오라버니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걸요. 그렇지만 바쁘시잖아요.’
나나리가 사관학교에 가고 나서, 적적해진 나머지 오빠는 재상 보좌의 일을 시작해버렸다고 했다. 그게 적적하다고 시작할 수 있는 일인가 싶지만, 아무튼 재상 보좌의 일을 하면서 나름의 군공도 세웠다고 들었다. 다만 재상 보좌의 일로도 모자라 군부의 일까지 넘보면 암살 위협이 커진다고 봐서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들었다. 나나리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체력이 없는 오빠가 군부의 일을 해냈다니.
그렇지만 모처럼 돌아온 아리에스에서 오빠와 티 타임을 가져본 것은 돌아온 첫날이 전부였고, 그 이후는 없었다. 를르슈는 이제 바쁜 일은 없다며 나나리와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했다. 그날은 모처럼 들어온 초대장도 없었고, 를르슈도 재상부에 가는 일 없이 나나리와 티 타임을 가졌다.
‘이제 아리에스에 돌아온지 보름이 되어가는 건가?’
‘네,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이제 너의 데뷔전을 치러야할 거 같은데.’
‘사교계요?’
‘사교계라면 이렇게까지 미루지 않았지? 한참도 전에 시켰을 거야. 너의 전투 데뷔전이다.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인이 되었으니….’
‘아직 KMF가 투입될만한 전투가 없어서요. 대기 중이에요.’
‘곧 아프리카 대륙 남부 침공 작전에 대해 군부에서도 이야기가 오갈거야. 새로운 에리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새 군사도 투입되어야 하고…. 아마 나이트 오브 라운즈까지 동원될 정도로 큰 전투가 될 거야. 너를 위한 데뷔전으로 딱이지.’
‘…….’
‘아버지께 말씀 드려 카멜롯에 네 전용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로이드를 기억하고 있지?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더군. 펜드래곤에서 몇 번 조종 연습을 하고 아프리카에서 네가 싸우는거다.’
‘……제가요?’
‘하지만 절대로 너 혼자 보내지 않아. 나도 간다.’
나나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전쟁터에 기꺼이 따라 나서주겠다는 오빠를 말려야하는 걸까, 함께 해주겠다는 말에 기뻐해야할까. 나나리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자 를르슈는 다 예상한 듯이 제 찻잔을 기울여 차를 마셨다.
‘재상 보좌는….’
‘슈나이젤 형님이 나 없다고 일을 못 할까?’
‘…….’
‘를르슈도, 나나리도 없으면 아리에스 궁은 텅 비어서 심심해서 어쩐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마리안느는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하나 더 내올까요? 를르슈의 말에 마리안느는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차 마시는 고상한 취미는 없고.
‘아프리카로 가니? 나도 갈까?’
‘어머니 때랑 달라서 시스템 적응 못하실 걸요.’
‘나나리, 를르슈가 나를 무시하네.’
‘실제로 그렇더라구요. 어머니의 가니메데 때랑은….’
‘나나리까지!’
‘아리에스 궁에서 저희를 기다려주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그래, 그러렴. 이겨서 돌아오는 걸 잊지 마렴.’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누구였지? 샤를의 아내가 나 말고 107명이 되니까 외울 수가 없네. 자기 집안 자랑을 엄청 하길래 나도 우리 아들 딸 자랑 하고 왔지. 그랬더니 서민은 천박해서 내세울 게 자식 밖에 없냐느니 흠, 나나리는 이런데 자주 다니고 싶니? 사관학교가 더 낫지 않니? 맘에 안들면 총으로 쏴도 되고…. 그러면 퇴학 당하잖아요…. 아니 사형 당할걸?
그때의 우스운 대화를 떠올리며 나나리는 오빠의 망토에 새겨진 브리타니아의 문장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고급스러운 자수는 부드럽게 닿아왔다. 똑같은 것이 제 등에도 새겨져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났다.
“졸리니? 도착하면 깨워줄게.”
“아뇨. 약간 긴장이 돼서.”
“괜찮아. 나나리가 이길거야.”
“오라버니의 작전이 승리하는거죠.”
“……네가 바라는 세상에 좀 더 가까워지겠지.”
“설마 상냥한 세상을 말씀하시는건가요?”
“나는 늘 네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 나나리.”
“……상냥한 세상.”
“강자는 약자에게 상냥할 수 밖에 없지.”
“알고 있어요.”
강해질수록 자기 손 안에 들어온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서 상냥해진다. 약한 사람이 상냥한 것은 그저 나약한 것…. 나나리는 를르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제 상냥함과 나약함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약하지도 않다.
아프리카 침공 작전에 대해서 다음 회의까지 사흘이 남았음에도 뜻밖의 연락이 왔다. 모처럼의 휴일을 얻은 스자쿠는 보통 저택에서 처박혀 하루를 보낸다거나 지노가 부르는 유흥거리에 어울리는 편이었으나, 집사가 내미는 초대장더미에 가장 위에 올려진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리어11 출신인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부르는 것은 전투에서 친분을 쌓은 귀족들이나 황족들 아니면 대부분 호기심이나 대놓고 면박을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었다. 진짜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가 모욕죄로 잡혀가는 게 두려우니, 넘버스 출신인 스자쿠는 반쪽짜리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 초대장의 주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경께서 드셨습니다.”
아리에스의 파티 홀에 스자쿠가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꽤나 늦은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북적거리고 있었다. 를르슈와 한창 춤을 추던 마리안느는 스자쿠가 나타나자마자 를르슈의 손을 놓고 바로 스자쿠에게 달려왔다. 균형을 잃은 를르슈를 나나리가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어서 와요, 아리에스의 황후,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라고 합니다.”
“섬광의 마리안느 님을 드디어 뵙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말씀 편히 하세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옛날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부끄럽군. 초대장을 당일 아침에 보내서 못 올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올 거라는 기대는 했었지.”
아침의 초대장은 마리안느가 보낸 것이었다. 저녁에 아리에스에서 연회가 열릴 것이니 나이트 오브 세븐도 참석해주길 바란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이 자리에 출정 중인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구석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는 아냐는 거의 어느 파티 홀에 가도 다 그 모습이었다.
“를르슈, 나나리, 나이트 오브 세븐과 인사를 해야지.”
이미 주 2회 이상 회의를 하고 있는 관계에 새삼스러운 인사는. 두 사람은 군복 차림이 아니라 연회복 차림으로 평소보다 화려했다. 스자쿠는 무릎을 굽혀 두 전하께 인사를 올렸다. 여기는 군사회의를 하는 곳이 아니라 연회의 장소였으니 예의를 한껏 갖춰야지 서로에게 피해가 없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아리에스의 전하들을 뵙습니다.”
를르슈에게 먼저, 그 다음은 나나리에게 손등에 키스를 하고 나서 다시 목례를 하고 나서 일어섰다. 교과서 같은 자세로 인사를 마치고 나면 왜인지 를르슈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자쿠를 쳐다보고 있었다.
“쿠, 쿠루루기 경은 오늘 쉬는 날인데도 연회에 오느라 고생 했네.”
“를르슈, 나이트 오브 세븐을 그렇게 부르니? 쿠루루기 경? 이름도 어렵구나. 스자쿠 경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아? 그렇지 않나, 스자쿠 경?”
“아, 편하신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원래 브리타니아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어렵죠.”
“그래, 그럼 편하게 부르겠어. 스자쿠 군.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들었는데, 열 아홉이던가?”
“올해로 스물 하나입니다.”
“를르슈랑 동갑이군. 를르슈, 드물게 너와 동갑이니 친구처럼 지내도록 해라. 어차피 나이트 오브 라운즈니 너의 기사가 될 일도 없고.”
“어머니 마음대로 하지 마세요….”
를르슈는 저에게 스자쿠의 이름을 불러보라며 재촉하는 마리안느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스물 하나 먹고 친구 만들어주는 어머니가 다 있어! 나나리는 옆에서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잔을 쥐어주었다. 아리에스에 오신 걸 환영해요, 스자쿠 씨. 아, 저는 오라버니의 친구 분들은 이렇게 부르거든요. 나나리와 마리안느 안에서는 스자쿠와 를르슈는 벌써 친구가 되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을 위하여, 하고 갑자기 네 명이서 잔을 부딪혔다. 대체 왜 저를 위해서? 스자쿠가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다들 술을 비우고 있었다.
“오늘은 나의 딸—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아리에스에 돌아와서 처음 여는 연회입니다. 이 기쁜 자리에 참석해준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그리고 뭐, 서민의 어쩌고를 얼마나 잘났나 확인하러 와주신 여러분들과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께 정말로 감사합니다. 항상 사랑하는 나의 를르슈와 나나리, 올 하일 브리타니아!”
올 하일 브리타니아!
다들 건배사를 외치고 나서 잔을 비웠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은 흥겹고, 준비된 음식은 맛있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춤추는 사람들과 흥에 취해 떠드는 사람들의 수다소리가 번잡스럽지 않아 즐거운 곳이 괜히 마음이 놓였다.
비록 마리안느의 건배사가 상당히 신경 쓰였지만 말이다. 스자쿠의 귀에도 들리고 있다. ‘혈통이 천박하니 몸으로 공을 세우는 일을 한다’는 말이 라던가, ‘집안으로 받쳐주질 못하니 발악하는 것이 안쓰럽다’는 등. 하지만 를르슈나 나나리가 귀신 같이 알아채고 말을 걸면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꾸하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남인 스자쿠가 봐도 쓴웃음이 나는 마당에 본인들은 어떠할까. 스자쿠는 연회장 구석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중에 갑자기 시야를 차지하는 를르슈의 얼굴에 깜짝 놀랐다.
“입 다물고 있는 쿠루루기 경이 제일 낫군. 내 상대를 하겠어?”
“를르슈 전하.”
“댄스는 사절이고, 대화도…솔직히 귀찮다. 그냥 말하는 시늉만 하고 있어. 아니면 너만 말하고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일 테니.”
“나나리 전하는 정말 우수한 군인이더군요. 성적을 봤습니다.”
“어머니의 딸이니까.”
“…를르슈 전하께서는 마리안느 님의 친자가 아니십니까?”
“너는 어디가서 입 잘못 놀려서 감옥갈 수 있으니 혀 조심해라. 나는 어머니의 친아들이 맞고, 나나리의 친오빠도 맞다. 그저 주요 전공 분야가 다를 뿐이다.”
“재상부에서 일하시면서 어떻게 군공을 세우셨습니까?”
“나는 많은 가명으로 다른 에리어에서 테러 공작 활동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
“이번 아프리카 침공 작전은 정말 순수하게 나나리 전하만을 위한 전투입니까?”
“그래. 나나리의 이름으로 세워진 에리어가 필요하다.”
“…전임 기사도 없으신 분이 전투에 들어서면.”
“많은 군공을 세운 황족일수록 우수한 기사 후보를 추천받는다. 나나리와 함께 성장할 기사가 필요하지 않아. 이미 완성된 기사가 필요해.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기사를 뽑으려고 했다. 올해 졸업하는 수석 졸업생을 나나리의 기사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수석 졸업생은 나나리가 되었고…. 정말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아닌 이상 나나리의 기사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뭐야, 내가 더 많이 말했잖아. 를르슈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죄송합니다, 하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전하는 정말 나나리 전하를 아끼시는군요.”
“하나 뿐인 여동생이니까.”
“저 역시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나 역시 늘 쿠루루기 경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로 이번엔 나나리와 마리안느의 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서 경쾌한 스텝을 밟으면서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통의 춤과는 달랐다. 음악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더욱 더 빨라지는 구두소리에 나나리가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넘버스 출신이면서 왜 브리타니아를 위해서 싸우는거지?”
“…….”
“우리 ‘비’ 가문은 어머니 때부터 에리어를 확장하고 황제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터에서부터 군공을 쌓아올리는 걸로 유명했어. 에리어 확장을 생업으로 삼는 황족을 위해서 싸우는 에리어 출신의 피해자인 나이트 오브 세븐이 아직까지도 내 작전을 따르겠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원수를 위해 싸우는지, 그게 궁금하다 이거군요.”
“그래.”
여긴 너무 덥군요. 스자쿠는 들리는 귀가 많다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 테라스로 나가지. 어차피 여긴 나의 집이니까. 를르슈는 파티 홀을 빠져나왔다. 파티 홀 쪽의 테라스가 아니라 아예 정 반대편의 테라스를 말한 것이었다. 음악 소리도 조용히 들리는 곳에 달만 고요히 떠있는 저녁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전하는 절 모르시니까요.”
“응?”
“나이트 오브 원이 되면 원하는 에리어를 받을 수 있다고 그러기에, 저는 필사적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아, 비스마르크 경은 아직 건재하니까. 그리고 경의 전투 경력이 단독 임무 말고는 다 형편 없더군. 견제라도 받는건가?”
“…….”
“…실력은 좋던데.”
“세상은 실력만으로 봐주지 않으니까요.”
“알고 있지. 당장에 저기 연회장만 해도.”
정말 공통점이 많네, 우리 둘. 를르슈는 난간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출신 때문에 이 지경이 됐으니. 를르슈는 턱을 괴며 웃었다.
“경과 나나리를 이제 누구도 우습게 보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누가 나나리 전하를 우습게 봅니까?”
“말했잖아. 연회장에도 수두룩해. 주제를 모르고 천한 서민 짓을 한다느니. 하지만 그렇게 입을 놀리는 사람을 지켜주는 건 우습게도 나나리가 되겠지.”
“…군인이나 기사는 천한 것이 아닌데 말이죠.”
“귀족이란 것들은 원래 그렇다. 어머니도 성격이 많이 죽으셨지….”
예전에는 말이야, 로빈 훗 놀이라고 연회장에서 총을 쐈어. 네? 백작가의 아가씨께서는 마리안느 황후를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브리타니아 황실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서 이만큼 믿고 있다, 라고 말하면 증명해보라고 하면서 벽 앞에 세워 두고, 머리 위에는 물컵을 올려놓고…. 그걸 총으로 쏴.
“네?!”
“그래서 어머니가 여는 연회나 티 파티에는 사람이 잘 안 모이더라고. 그 이후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동원되기 시작됐지.”
“나이트 오브 라운즈한테도 그걸 시키게요…?”
“그건 아니지. 황제가 자기 기사단을 보낼 정도로 신경 쓰는 황후라는 걸 보여주는거야.”
로열 퍼플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우리 어머니의 흑역사를 하나 풀어버렸군. 나나리가 실전에서 실수해도 비밀로 하도록 해. 음악이 끊어지더니 한참 후에 나나리의 발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스자쿠 씨! 여기 계셨군요!”
“너무 더워서 말이야.”
“저도 너무 더워서 나왔어요. 이상하게 회의 때마다 매번 보는 얼굴들인데 아리에스에서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요!”
“아, 그러고 보니 아리에스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특히 뜰이 되게 넓어서….”
“스자쿠 씨는 뜰이 넓은 이유를 아세요?!”
“네?”
“오라버니가 학교 가셨을 때, 저 혼자 너무 심심해서 어머니의 가니메데를 몰래 타고 나가다가 후원을 다 짓밟아놔서 그 이후로 어머니도 후원 가꾸는 것도 귀찮다고 그냥 다 밀고 잔디밭으로만…. 아, 말하고 보니, 이건 자랑이 아닌 거 같네요.”
“…어, 친KMF적 환경에서 자라셨군요.”
“너 정말 아무말 하는 구나….”
얼굴이 빨개진 나나리와 웃음이 터진 를르슈 사이에서 스자쿠는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왜 또 여기서 회의하고 있니. 마리안느가 또 찾아와 연회장으로 끌고갔다. 를르슈와 스자쿠의 손을 붙여놓고는 소녀들끼리 출 때 추는 음악을 연주하라고 명령하는 마리안느 때문에 를르슈가 빽 질렀다. 소녀가 아니라고요! 그럼 숙녀니? 어머니!
“아발론으로 출격한다고요? 그건 재상 각하의….”
“그래, 슈나이젤 형님의 것이지. 빚을 지게 됐지만 그래도 모양은 갖추게 되었다.”
옆에서 나나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를르슈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 형님도 너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계시니. 자료를 살피며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을 세 군대로 나누어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이쪽 지역이다.”
소량의 사쿠라다이트가 묻혀있어. 에리어11에서 생산되는 양에 비하면 아주 소량이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곳이지. 이 녀석들이 나중에 수가 뒤틀리면 이 사쿠라다이트로 자폭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랜슬롯은 물론이고 아발론까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스자쿠와 나나리가 먼저 진압해라.”
“네? 황녀 전하와 같이요?”
“그래. 나나리 혼자서는 위험하고, 스자쿠 혼자서는 벅찰 테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이전에 이 지역을 먼저 점령해라.”
“저는 아직 기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스자쿠 씨의 발목을 잡을 거 같고.”
“그럼 내가 대신 들어갈까?”
“오라버니는 KMF도 없잖아요!”
“서덜랜드든 뭐든 탈 수 있긴 해. 조종 실력이 좀 뒤떨어져서 그렇지. 나나리보다 더 못하는 건 확실하겠지만 그렇다고 스자쿠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닐 거 같군. 스자쿠는 나보다 더한 사람과도 전투를 나가봤을 테니.”
나나리는 결국 하겠다고 대답했다. 스자쿠에게 눈으로 벌써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를르슈의 말마따나 수준 미달의 황족들과 전투에 나가본 경험이 수두룩한 스자쿠는 이 정도는 거뜬했다. 매번 확인하는 작전의 예상 경로, 그리고 나나리의 조종 훈련에 대해서 이야기가 흘러갔다.
“기본 시스템은 랜슬롯과 비슷하지만, 랜슬롯보다는 덜 까다롭대요. 다음주 쯤에 이름을 지어주신다는데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나나리 전하께서 직접 짓지 않습니까?”
“음…. 글쎄요, 아무래도 그 기체의 파일럿은 저지만, 부모는 로이드 씨라는 느낌이라서요. 그건 로이드 씨의 즐거움이 아닐까요?”
“황당무계한 이름만 아니면 좋겠네. 나는 먼저 가보겠다. 재상부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스자쿠는 괜찮다면 나나리를 아리에스까지 데려다주겠어?”
“Yes, Your Highness.”
아리에스에서의 파티에서 급속도로 친해져서 이젠 를르슈는 스자쿠를 이름으로 불렀다. 나나리는 오라버니에게 동갑내기 친구가 생긴 건 처음이라고 했다. 스자쿠의 경례를 받은 를르슈는 빠르게 회의장을 나갔다. 나나리는 아리에스에 가봤자 할 일이 없다며 회의장에서 스자쿠랑 더 있다 가고 싶다고 말했다. 작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스자쿠는 나나리의 우수한 성적을 떠올리며 지도를 펼쳤다.
“방금 전에 를르슈 전하께서 말씀하신 저희 둘의 사전 진압 말인데요. 아마 나나리 전하의 기체에도 플로트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을 거예요. 둘 다 공중전이 가능하겠지만…. 저로써는 공중전보다 육지에서 밀어 덮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쿠라다이트를 보호하기 위해서 군사가 배치가 안 되어있을 리가 없죠. 이 나라의 유일한 생존 수단인데. 모든 전력이 여기에 배치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육지 쪽에서 밀고 가면 아무리 최신형 KMF라고 해도 모두 방어하기 힘들거예요. 그것도 단 두 기가 말이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플로트 시스템에 대해서는 사관학교에서도 아직 훈련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스텔스 모드로 접근한다 해도 위험합니다.”
“그건 미숙한 저에게만 해당됩니다. 제가 육지에서 밀고 나갈테니, 스자쿠 씨가 공중에서 치고 오세요.”
“그렇게 되면 나나리 전하께 공격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죽기 직전에 빨리 구하러 오세요.”
나나리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스자쿠는 지도로 짚고 있던 손가락을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 내 총알 받이나 하고 죽어라 일레븐, 이렇게 말하는 황족들을 만나왔지만, 죽기 전에 구하러 오라는 황족은 처음이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전쟁터에 나간다는 건, 게임이나 시뮬레이션과 다릅니다.”
“두려워하면 죽을 확률이 줄어들고, 죽일 확률이 늘어날까요?”
“……두 분은 정말 다른 분들과 다르군요. 코넬리아 전하와도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코넬리아 언니네…그러니까 ‘리’ 가문과 저희 ‘비’ 가문은 다르죠.”
근본부터가 다르답니다. 나나리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근본이요?”
“서민이니 귀족이니 하는 그런 혈통이 아니라, 브리타니아 황실을 위해서 존재하는 ‘비’ 가문은 다른 황족들과 다른 이상을 꿈꾸고 있죠.”
“…….”
“넘버스와 브리타니아인의 차별도 없는 그런 상냥한 세상을 위해서 저는 싸울 것이고, 오라버니는 그 상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상부과 군부를 오가며 싸우고 계시죠.”
나나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위험한 말이었다. 브리타니아의 계급제를 부정하는 말을 당연하게 하는 나나리는 그 위험함을 모르는 것 같았다. 스자쿠가 그걸 짚고 넘어가려고 입을 여는 순간에도 나나리는 멈추지 않았다.
“가식 없는 세상. 어머니가 만들고자 했고, 우리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
“슈나이젤 오라버니가 황제로 즉위하시고, 제 오라버니가 재상이 되는 날이 머지 않았어요…. 오라버니는 슈나이젤 오라버니의 기사단에 스자쿠 씨의 이름을 넣으실 생각입니다. 제 데뷔전을 도운 대가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나봐요.”
나나리는 스자쿠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네요. 상냥하신 분.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상냥하지 않아요. 나나리 전하. 나나리는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스자쿠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상냥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싸울 수 있을까요?”
“…네?”
“상냥한 사람만이 그렇게 싸울 수 있습니다. 자기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으니,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고, 마음대로 죽이지 않는거죠.”
“…….”
“스자쿠 씨는 상냥한 사람이에요. 오라버니와도 같죠.”
오라버니가 우리를 비웃는 사람들을 그냥 살려두는 이유가 딱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오라버니는 상냥하시니까요. 나나리는 스자쿠의 망토를 잡고 흔들었다. 힘내세요, 나이트 오브 라운즈.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요. 이제 아리에스로 데려다 달라는 황녀의 말에 스자쿠는 사람을 불렀다.
스자쿠가 상냥한 사람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재상부 건물까지 왔더니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대부분 서류 업무 중이라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 를르슈였다. 를르슈 역시 스자쿠를 만나는 것이 의외였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스자쿠잖아? 재상부까진 무슨 일이야?”
“를르슈 전하, 지난번 전투 데이터를 슈나이젤 재상 각하께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그거라면 내가 이미 넘겨드렸어. 자꾸 말하는 걸 까먹네. 미안해, 괜한 걸음하게 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차피 재상 보좌의 업무다. 내가 떼를 써서 형님의 일을 떠맡은 거니 이 정도는 해야지.”
잠깐 바람 쐬러 나왔더니 스자쿠를 만났군. 오늘은 운이 좋아.
를르슈는 작게 웃으며 스자쿠에게 잠깐 수다나 떨고 가라며 바깥에 마련된 벤치에 앉혔다. 출정까지 벌써 일주일이 남았다. 모든 것이 서서히 준비가 되어가면서 스자쿠는 자료 정리 중에 지난 번 전투 데이터를 넘기지 못한 것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어?”
“황제가 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응?”
를르슈는 난데 없이 황제를 운운하는 스자쿠의 말에 놀란 목소리를 냈다. 황제의 기사가 황자에게 황제가 될 생각이 없냐니. 이건 반역이다. 누가 들었을까봐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미쳤어? 그런 말은 어디에서도 하면 안된다! 내가 위험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나나리까지!”
“아,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라…. 재상 보좌에, 군부 일까지 하실 정도로 브리타니아를 위해서 일을 하시는데. 황위계승권 레이스라고 하던가요? 거기에서도 높은 순위를.”
“놀랍게도 17위 밖에 되지 않는다. 순위권 밖이기 때문에 황위 찬탈 같은 거엔 관심 없다.”
“……17위?”
“그래, 재상 보좌를 하고 있는 게 놀라운 순위지. 소문으로는 내가 슈나이젤 형님께 얼굴과 몸으로 빌어서 얻어낸 자리라고 하는데….”
“누가 그럽니까?”
“누구겠어. 어머니한테 총 안 맞고 살아있는 애들이 그러겠지.”
를르슈는 다리를 흔들며 웃었다. 아, 헛소리를 내 입으로 하니까 헛웃음이 나온다.
“슈나이젤 형님을 황제가 되면 나는 재상이 된다. 그 조건으로 재상 보좌의 자리를 받은거야. 형님의 정적을 없애고, 필요에 따라서는 형님의 공적을 올리는 일도 하지.”
“두 분의 관계가 그렇게 돈독하십니까?”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다. 형님께서는 새로운 브리타니아를, 우리는 가식 없는 브리타니아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합치면 올 하일 브리타니아지?”
황제가 되면 편하겠지만 누군가가 대신 일해줄 수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게 낫다. 나는 가면을 쓴 사람들을 내쫓아내는 일로도 지쳐있으니. 를르슈는 정원의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스자쿠에게 속삭였다.
“이 정원이 피바다가 되어도 상관 없어. 세상에 진실만 남으면 된다. 그 진실에 가까운 사람이 몇몇이나 되겠어? 나와 나나리, 어머니, 슈나이젤 형님, 스자쿠 너까지는 확실하지.”
“…….”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아쉽지 않게 챙겨줄거야.”
“무언가를 바라고서 전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면 줄 때 받도록 해. 거절하는 순간 적이다.”
거절도 자기 힘의 과시라는 걸 알고 있지? 스자쿠는 거절도 용기 있는 사람이 한다는 걸 알거야.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용기는 쓸모 없다. 올 하일 브리타니아. 이제 더 길게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를르슈의 뒷모습을 보며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아프리카의 출정까지 이틀을 앞두고서 새벽, 를르슈로부터 호출이 왔다. 스자쿠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쿠루루기입니다. 그러자 를르슈가 심각한 목소리로 텔레비전 생중계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방금 전까지 데이터 정리로 꺼두었던 PC를 켜고서 생중계 화면을 볼 수 있는 사이트로 접속했다.
“이건….”
‘에리어11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화면에 나오는 여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 황녀 전하로, 코넬리아 전하의 친동생 분이시죠.”
‘그래. 나보다 계승순위권도 높기 때문에, 어려서도 에리어11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
‘언론에서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자애의 공주님’이죠.”
‘자애가 느껴져?’
행정특구 일본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는 황녀는 무엇보다 반짝였지만, 그녀가 짓밟은 땅의 처참함을 알고 있는 스자쿠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일레븐도 브리타니아인도 평등한 세계라니. 비슷한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저건 자애도 아니고, 평화도 아니다.’
“…….”
‘가지고 있는 자가 베풀어주는 아량일 뿐이지. 브리타니아가 누리고 있는 모든 넘버스에 대한 기만이다.’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코넬리아 누님은 지금 유피가 황적 박탈이 될까봐 걱정하고 있어. 당장 본국으로 귀국시키길 바라지만, 유피는 지금 누님의 뜻에 반항하고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재상의 힘이다. 일개 부총독이 여기까지 나섰다는 건 황적 박탈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유피는 귀여운 여동생이니까.’
“황제 폐하와 재상 각하의 힘으로 그녀를 본국으로 소환하겠다는 뜻이군요.”
‘아프리카 작전이 피곤해질 것 같다면 다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부르겠다만…. 에리어11은 스자쿠의 고향이니 유피가 더 말을 잘 들을 것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곧 출격 준비를 하겠다는 스자쿠의 대답을 끝으로, 를르슈도 전화를 끊었다.
군부 건물 앞에서 모인 사람들은 셋이었다. 슈나이젤, 를르슈, 스자쿠. 슈나이젤은 스자쿠를 보면서 여유롭게 웃었다.
“특파 시절에 보고서, 카멜롯에서는 또 처음이군. 쿠루루기 경. 나이트 오브 세븐 생활은 할만 한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유피를 크게 혼내고 오게. 를르슈가 하려고는 하겠지만, 마음이 아파서 길게 못할 거니까. 를르슈는 아프리카 출정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무리하지 말도록. 아발론은 아직 점검 중이니 출격이 불가능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나나리한테는 내가 다 말해두마.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너한테 연락을 할 테니 바쁘더라도 꼭 받도록.”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화할 때도. 유피가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네가 재상이다, 를르슈.”
제국 재상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라.
슈나이젤을 장난스럽게 웃으며 를르슈의 뺨을 꼬집었다. 오랜만에 유피를 만난다고 웃는 얼굴만 잔뜩 보이지 말고. 스자쿠는 군함에 올라탔고, 를르슈는 준비된 비행기에 탔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스자쿠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네가 바라던 일레븐의 반응이 이거였다면, 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유피.”
총독부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 아래를 내려다보면, 조계의 브리타니아인과 그 바깥의 일레븐이 엉겨붙어 싸우고 있었다. 소위 유피라고 불리는,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는 드레스 자락이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제 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하러 온 이복 형제와 아버지의 기사는 언니처럼 보듬어 안아주지도 않았고, 그녀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거야? 바닥에 있는 것도 추울 거 아니야? 빨리 자리에 앉아.”
“를르슈 전하…. 유페미아 황녀 전하께서는 지금.”
“유피, 너는 일레븐을 위해서라면서 어떤 계획도 갖추지 않고 그저 허울 좋은 모습만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그거야 말로 비겁하지 않느냐? 일레븐과 브리타니아인이 구별 없는 세상이라니, 말은 좋지….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 네가 잃을 것을 포기할 각오는 되어있어?”
“…….”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포기하라고 명령할 준비는 되어있냐고 물었다, 유페미아! 네 명령 하나로 지금 브리타니아인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고스란히 내어주게 생겼고, 일레븐은 일레븐 안에서 또 다툼 경쟁이 일어난다. 이게 평화고, 네가 말하는 자애인가?”
스자쿠는 찬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유페미아를 보며 혀를 찼다.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를르슈에게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유페미아의 계획은 정말 를르슈의 말마따나 허울 좋은 이야기들 뿐이었다. 구색을 갖추고 나면 정말 형편 없는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달콤하게 보기만 할 뿐,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 없는 사람이라고. 스자쿠는 자신의 푸른 망토를 풀어서 유페미아의 어깨 위에 걸쳐두었다. 일어나고 싶으실 때 일어나세요. 몸이 식었습니다. 유페미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에 앉았다.
“코넬리아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유페미아 전하를 본국으로 데리고 돌아가시죠.”
“……그래야지.”
“유페미아 전하도 악의는 없으셨을 겁니다.”
“악의가 없다는 게 중요해. 악의가 없으면 선의로 그랬다는 것이고, 세상 물정을 안다면 선의로도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아야지.”
과연 나나리가 그랬더라도 이렇게 냉정하게 대답했을까? 스자쿠는 를르슈의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울음을 그친 유페미아는 스자쿠와 를르슈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총독 자리는 사임하겠습니다….”
“그리고?”
“…행정특구 일본도 없던 걸로 할게요.”
“유피는 당분간 ‘리’ 가문의 별궁에서 자숙하고 있도록 해. 이건 재상 대리로써의 명령이다.”
“…….”
“에리어11이 고향인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도 사과해.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미안해요, 나이트 오브 세븐. 나는, 나는 그럴 뜻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넘버스를 위한 유페미아 전하의 마음은 전해졌으니까요. 다만 방법의 미숙함에 대해서는 서로 배워나가는거죠.”
를르슈의 날이 선 말투와 다르게 스자쿠는 평온했다. 스자쿠 몫까지 화를 내주고 있는 를르슈 덕분에 화낼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유페미아는 고개만 그저 끄덕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화만 내면 그렇지.일 년만인데 유피의 우는 얼굴만 보는 것도 속상하니…. 별궁에 들어가기 전에 아리에스에 들려. 나나리도 이제 돌아왔으니까.”
“나나리! 나나리가 왔나요?”
“곧 다시 바빠질 거라서 아마 오늘이나 내일 말고는 시간이 없을 거야.”
“그렇군요…. 돌아가는 게 꼭 슬픈 일은 아니게 되었네요.”
곧 코넬리아가 들어왔고, 를르슈와 스자쿠는 경례를 했다. 타고난 군인인 코넬리아는 잔뜩 지친 얼굴이었다. 를르슈는 본국에서의 전달사항을 전했다. 유페미아는 황적 박탈은 면했지만 황위계승권 순위는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리’ 가문의 별궁에서 자숙해야한다는 것까지. 코넬리아는 그 말을 얌전히 듣다가 한숨을 쉬었다.
“슈나이젤 오라버니가 많이 봐주셨군. 를르슈에 나이트 오브 세븐까지 부르다니. 게다가 거긴 새벽 아니었어?”
“유피의 생사가 달린 일이니까요. 누님 혼자서 고생하시는 걸 아니까 그러신 거겠죠.”
“알겠다. 그 뜻에 따르겠어. 그리고 유피.”
여동생을 부른 언니는 하얗게 드러난 예쁜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콩, 하는 소리와 함께 유페미아가 아프다고 하자 코넬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무모한 짓을 하지 말도록 해. 매번 하는 말 같지만.”
“네, 언니.”
“를르슈한테 잔뜩 혼났을 걸 생각하면 딱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얌전히 돌아가도록 해. 를르슈도, 나이트 오브 세븐도, 에리어11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여동생을 부탁하지.”
피가 낭자한 거리를 보며 스자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이 끝난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데도 에리어11은 변한 것이 없다. 자애의 공주님이 만든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니 더 입맛이 썼다. 군함에 올라탄 스자쿠와 비행기에 오르는 유페미아와 를르슈에게 코넬리아는 손을 흔들었다. 스자쿠는 느긋한 속도로 올라붙는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넘버스도 브리타니아인도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이룬다는 건 를르슈와 나나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비’ 가문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고 자부심까지 가질 정도였다. 유페미아가 만들려고 했던 ‘행정특구 일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를르슈는 유페미아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넘버스의 입장에서는 브리타니아인들이 말하는 평등 같은 것은 제대로 적용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궁금한 것이다. 브리타니아인들이 말하는 평등의 차이.
“…유피 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나나리.”
“오라버니 곧 멀리 출정을 떠나셔야하는 분인데 그 와중에 새벽에 에리어11까지 왔다 갔다 하게 만든 이유가 유피 언니 때문이라니! 제가 그걸 납득할 것 같나요?!”
“코넬리아 누님께서 급하실 만한 사안이었다. 하마터면 유피가 죽을 뻔 했어.”
“…….”
오늘은 군사 회의장 대신에 그냥 아리에스에서 보자고 하길래 왔더니 친밀하던 두 남매가 싸우고 있었다. 거의 일방적인 나나리의 화풀이었다. 를르슈는 지난 밤에 유페미아에게 가시 같던 잔소리를 해댄 모습과 다르게 맥을 못추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 스자쿠, 왔네. 앉아. 차 한 잔 들지.”
“어서오세요, 스자쿠 씨.”
“나이트 오브 세븐이….”
“그런 건 이제 와서 필요 없다. 어머니는 오늘 ‘리’ 가문에 외출 중이시니 우리 뿐이다.”
유페미아가 사실상 폐적에 가까운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 이 황궁에 퍼진 것 같았다. 20계단이나 떨어진 순위며, 그녀의 무리수에 가까운 ‘행정특구 일본’에 대해서 전 세계가 떠들고 있으니 사실 황궁 뿐만이 아니었다. 대귀족의 딸로 황실의 ‘리’ 가문을 대표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속이 상할대로 상했을 것이다. 거기에 가서 마리안느가 뭘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우리 어머니? 약 올리러 간 건 아니지. 오히려 위신을 세워주려고 간 것이다. 재상 보좌의 어머니가 직접 신경 써줄 정도로 긴밀한 관계이니, 아무리 유피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어도 그녀의 집안은 건재하다는 걸 의미한다. 덕분에 아침부터 어머니께 애걸복걸하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애걸복걸 중이신 거군요.”
“나나리. 유피와 우리는 친하잖아.”
“다들 그 친분을 이용해서 오라버니를…. 아마 이번 전투가 끝나면 ‘행정특구 일본’에 대한 사안은 오라버니가 다 떠맡게 되겠죠.”
“……나나리한테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까.”
“‘행정특구 일본’이라니, 특별한 사람만이 선택 받아 들어갈 수 있는 행정지역인가요? 들어가지 못하면 특별하지 못한 사람이고, 브리타니아인 사이에서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과 평화를 실현하는 사람, 다양하게 나뉘겠죠. 저는 그런 싸움판을 만든 유피 언니를….”
“유피는 그게 평화라고 생각했던 거야.”
를르슈는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나나리는 기분이 나쁜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스자쿠는 냉랭해진 분위기에 눈을 굴렸다.
“스자쿠 씨는 유피 언니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사실 명예 브리타니아인이나 넘버스에게는 꿈 같은 말 아닌가요? ‘차별 없는 세상’ 같은 말이요. ‘행정특구 일본’도 마찬가지죠.”
“…안에서부터 바뀌어 나간다는 건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만.”
“…….”
“사실 저는 행정특구라는 말 자체가…사람들을 또 다시 가둬놓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특구 밖을 나가는 순간엔 다시 넘버스와 브리타니아인이 되는 구별법이 뚜렷해지는 거죠. 하지만 황족에서 먼저 안으로부터의 시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정선의 중립을 지킨 스자쿠의 말에 나나리도 차를 마셨다. 를르슈는 다리를 꼬며 발끝을 까닥거렸다.
“나나리, 유피를 만나러 다녀와.”
“…….”
“어젯밤에 내가 실컷 잔소리를 해줬으니, 네가 어리광이라도 부리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테니까.”
“…어리광을 부릴 만큼 어리지 않아요.”
“나는 이 나이 먹고 슈나이젤 형님한테도 어리광을 부리는데, 나나리가 그렇게까지 하면 어쩔 수 없다. 스자쿠, 나와 같이 유피를 보러 다녀오자. 오늘 새벽까지 일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나리가 싫다는데.”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유피가 선물해준 드레스를 입고 다녀오도록 해. 메이드를 불러주마.”
드레스 룸으로 올라가는 나나리를 보며 를르슈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평생이고 어릴 줄 알았는데 저런 말도 할 줄 알아. 를르슈는 차를 한 잔 더 따르며 아리에스의 정적을 즐겼다. 스자쿠는 어제부터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유페미아 전하와 를르슈 전하가 원하는 건… 닮으면서도 다르군요.”
“유피가 원하는 얄팍한 이상과 우리들의 이상을 비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넘버스와 브리타니아인의 차별 없는 세상을 바라는 건 같다고 치더라도, 유피처럼 무모하게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건 우리들이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어.”
“…그렇습니까?”
“나나리가 바라는 상냥한 세계, 어머니가 바라시는 하나의 세상.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계를 부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그게 유피와 우리의 차이다. 유피는 현실 위에 기반을 세우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저 차례차례 준비된 가면만 바꿔 쓸 뿐이다.”
드레스 차림의 나나리가 내려왔다. 평소보다 화려한 것이 유페미아의 취향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관까지 나간 를르슈와 스자쿠는 나나리를 배웅하고는 다시 살롱으로 들어왔다.
“나나리 전하는 군공을 세우시고 기사를 뽑는다고 하신다면…. 를르슈 전하는 기사는 아직이신가요?”
“나의 기사는 이미 정해져있다.”
“네?”
“비스마르크 경이다.”
“…그는 지금 나이트 오브 원으로.”
“응. 어차피 그도 이 계획의 일부이다. 슈나이젤 형님께서 황제가 되면 그는 다음 세대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오르지 않아. 대신에 나의 기사가 된다.”
“정해진 사안입니까?”
“그래. 스자쿠가 형님의 나이트 오브 원이 되는 것도 결정 사항이다.”
미리 축하해. 스자쿠는 재미있는 거짓말을 한 것 마냥 들뜬 를르슈의 옆 모습을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형님께서는 너를 시작으로 넘버스에 대한 차별을 없앨 거니까…. 를르슈는 꿈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올 하일 브리타니아, 라고 속삭였다.
“새 기체의 이름이…뭐라고요?”
“아, 스자쿠 씨는 랜슬롯 조정 때문에 바빠서 못 들으셨다고 그랬죠.”
“네, 그리고 로이드 씨 치고는 꽤 늦게 이름이 지어졌네요.”
“그렇죠. 그 전까지 출격 연습할 때마다 부끄러웠다구요. ‘나나리 전하 러브’하고 나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출정까지 딱 하루를 남겨두었을 때, 회의장에서 나나리의 불만이 이어졌다. 보통 로이드의 KMF를 만드는 과정은 핵심 기술을 염두에 두고서 그 다음에 기체의 이름이 바로 정해지는 편이었다. 이번엔 파일럿이 먼저 정해지고 KMF를 그에 맞춰서 만드는 거여서 오래 걸린 거였을까? 그나저나 ‘나나리 전하 러브’라니…. 그건 그것 대로 끔찍하군. 아무리 ‘랜슬롯은 재미있지만 스자쿠 군은 재미없어’를 외치는 사람이 황녀 전하께….
“내가 추천한 이름이다. ‘아마테라스’.”
“…….”
“스자쿠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를르슈는 파일들을 정리하며 키득거렸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옆에서 웃었다. 에리어11의 신이라고 들었어요. 를르슈는 나나리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말했다.
“나나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브리타니아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지금의 브리타니아에게는 말이지. 앞으로의 브리타니아를 위해서는 우리는 타국의 신이라도 그 이름을 빌려야한다.”
“그냥 나나리 전하께 여신의 이름을 붙이고 싶은 거잖아요.”
“반은 그 속셈이 맞고. 반은 브리타니아를 위해서.”
그리고 첫 출격에 에리어11 출신의 나이트 오브 세븐과 함께 한다는 의미도 담고 싶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파일철 더미를 들으라고 했다. 재상부까지 들고 갈 텐데 도와주게. 가녀린 나나리를 시킬 순 없으니.
“나나리는 오늘도 카멜롯인가?”
“네, 마지막 점검이에요.”
“그럼 아리에스에서 보자꾸나.”
“네, 오라버니.”
카멜롯으로 향하는 나나리와 재상부로 향하는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재상부로 걸어가는 길목마다 모두 인사를 했다. 를르슈가 자기 집무실에서 차라도 들고 가지 않겠냐고 하길래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스자쿠는 알겠다고 했다.
“에리어11의 부총독 자리가 비었어.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고 싶은 녀석들이 꼬리를 흔들어대려고 내 집무실 문을 두드려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적어도 떠나기 전날까지는 얌전히 보내고 싶으니….”
“저를 방패로 삼으시는군요.”
“나이트 오브 세븐을 이렇게 부려먹을 수 있는 것도 한 때라고 생각하니까. 적재적소?”
를르슈의 책상 위에 파일을 올려두고서 스자쿠는 를르슈가 안내한 의자에 앉았다. 차를 마시려면 사람을 불러야하는데…. 그건 또 귀찮네.
“전하께서는 부총독 자리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에리어11? 관심 없다. 그리고 그 지역은 스자쿠의 것이니까 손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직 정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뭐야, 스자쿠. 우리가 반역이라도 할 것 같아? 입에 담기도 무서울 정도인가? 재차 말해두지만 너는 나이트 오브 원이 될 남자다. 아니면 지금의 에리어11을 받는 건 조금 귀찮은건가? 손 볼 곳이 많은 동네이긴 하더군.”
“…….”
“코넬리아 누님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다. 친한 형제이긴 하지만, 누님은 넘버스를 차별하시는 분이니까. 그런 누님 밑에서 유피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
서류 하나만 보고 가면 된다. 나머지는 다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데. 스자쿠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를르슈는 의외로 하인은 부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떠넘기는 것도 시원하게 떠넘겼다. 바로 지금처럼 스자쿠에게 정리를 맡기는 것처럼.
스자쿠가 파일 넘버별로 정리를 다 하고 나서도 를르슈는 책상에 붙어있었다. 꽤나 고전하는 모양새에 스자쿠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유피가 만든 행정특구 이야기다. 테러리스트와 합작해서 만든 특구라니. 브리타니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군.”
“…테러리스트랑 합작을 했다구요?”
“그래. 에리어11 즉 옛날 일본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비합법 무장단체와의 결연을 통해 행정특구 일본을 세운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행정특구 일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코넬리아 누님이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유페미아의 작전은 사실상 코넬리아 누님의 작전으로 테러리스트 소탕, 이라는 걸로 마무리가 되는 걸로 하지만….”
“유페미아 전하의 뜻은 그게 아닌데도 말이죠.”
“넘버스가 브리타니아를 미워할 만한 계기를 계속 만들어두는 게 좋아.”
“…왜죠?”
“그래야 테러가 다시 생기고, 테러가 생겨야 브리타니아는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으니.”
무너진 곳은 병원이었다. 스자쿠는 소리를 질렀다. 나나리 전하! 지금 무슨 짓을…! 아직 공중전에서 고전하고 있는 스자쿠는 나나리가 육지에서 전멸시킨 건물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색의 아마테라스는 육지의 도로를 달리면서 민간가옥을 무차별적으로 폭파시켰다.
‘브리타니아는 선전포고를 했고, 이 나라는 항전을 외쳤습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브리타니아도! 이 나라도!’
“저들은 민간인입니다!”
‘무기가 없는 테러리스트입니다. 오라버니, 스자쿠 씨, 알파 지점은 점거 완료 했습니다. 베타 지점엔….’
‘여기는 베타 지점. 도망가려는 잔챙이들을 모두 잡아챘다. 스자쿠는?’
랜슬롯만이 고전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 적기와 싸웠다. 몇 없는 양산형 KMF가 스자쿠의 기체에 당해낼 리가 없었다. 를르슈가 통신으로 보채는 소리에 스자쿠는 겨우 대답했다. 남아있는 한 사람이 총을 갈기는 것에 그를 단 한 발로 즉사시켰다. 와이어를 타고 내려온 스자쿠는 사쿠라다이트의 채굴장에 저 혼자 남은 것을 확인하고 연락을 취했다.
‘감마 지점도 점거 완료입니다.’
‘다들 아발론으로 귀환해라.’
아발론에 모든 기체를 싣고 나면 를르슈는 총을 들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가리고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서 옷자락이 흩날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했었는데, 항전을 외친 이유가 무엇이지?”
“브, 브, 브리타니아에 목숨을 구걸하느니…!”
“그러면서 자국민을 버리고, 이제 와서 항복하겠다고 무릎을 꿇는다는건…. 아마테라스의 영상 자료를 보여주고 싶군. 누굴 믿고 이렇게 되었는지, 이 나라, 아니 에리어가 쑥대밭이 되었는지.”
“사쿠라다이트의 채굴권이라면 언제든지…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그 작은 사쿠라다이트가 아쉬워서 이럴 것 같아? 비겁한 녀석들에게는 목숨도 아깝다.”
를르슈는 그들에게 총을 쏘면서 탄창을 한 번 갈아끼웠다. 모두 머리를 노리고 쏘았기 때문에 껄떡대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죽었다. 죽은 시체들을 불에 태워버리고 영상으로 남겨놓으라는 를르슈의 명령에 다른 군인들이 뒤따라 나섰다.
“나나리의 아마테라스는 훌륭했다. 첫 전투였는데도 나의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 오히려 스자쿠의 부진함이 이해가 안 되는군. 공중전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전하. 민간인은 전쟁과 관련이 없습니다.”
“세상에 전쟁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민간인이라는 말도 우습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황실의 사람이니 진정한 민간인 아닌가?”
“이게 전하의 방식입니까? 이건 전쟁의 룰에 벗어났습니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뒤에 숨은 채로,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스자쿠 씨. 그러면서 나나리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 오빠보다 연한 색이지만 심지만큼은 누구보다 곧은 그 보랏빛 눈동자가 스자쿠를 향했다.
“룰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브리타니아가 절대 악이 되어야지 넘버스들은 테러의 명분을 찾지 않습니까?”
“…두 분은 넘버스와 브리타니아인의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꺼이 두 분을 위해 싸우겠다고!”
“브리타니아가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게 된다면, 넘버스들은 더 이상의 명분을 찾지 못한 채로 해체되고 말 거예요. 차별을 없앤다는 건, 가진 쪽이 모든 걸 잃는다는 걸 뜻합니다. 새로운 브리타니아에서는 희생만이….”
“됐어, 나나리.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라. 스자쿠도 지친 모양이니 내가 이야기해서 돌려보내겠다.”
군화를 신은 나나리의 발걸음 소리가 여느때보다 무겁게 들렸다. 그녀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리며 함내로 돌아가는 것에 스자쿠는 주먹을 쥐었다. 스자쿠와 단 둘이 된 를르슈는 스자쿠의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네가 맡을 수 없는 임무를 나나리에게 준 건, 내 호의였다.”
“전하.”
“내 호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해?”
“전하의 방식으로는…!”
“유피와 같은 안일한 방식으로는 무엇이 바뀔 수 있었지?! 에리어11이 세워진지 벌써 10년이 되었는데도 그 모양 그 꼴이라는 건, 지금까지의 브리타니아의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텐데!”
“…….”
“나이트 오브 원이 되고 싶다면 나를 따르도록 해. 넘버스 출신의 디바이서로 너는 출중하지만, 나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면 거기까지다.”
머리를 식히고 들어오던지, 아니면 여기서 총을 물고 자결을 해라.
스자쿠는 총을 쥐어주고 함내로 들어가는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사라지기 전, 마지막 한 걸음을 떼기 전에 스자쿠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살아라, 하고 빛을 내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쥐어준 총을 장전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당겨지지 않는 것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총알 하나 들어가지 않은 총으로 어떻게 자결을 하라는 건지…. 스자쿠도 결국 함내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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