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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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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

DOZI 2021.10.15 02:49 read.336 /

 

 

“나이트 오브 세븐, 오늘은 나랑 같이 자.”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자신의 방에 찾아온 손님은 그렇게 당돌하게 말을 꺼냈다. 아직 잠들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스자쿠는 제 방문앞에서 어떻게 들어올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 스자쿠는 마리안느 황비의 부탁으로 아리에스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여자들만의 모임을 가겠다고 아리에스를 비우게 되면서, 홀로 남게 될 자신의 아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맡긴 것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황자가 혼자 아리에스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스자쿠는 기겁을 하며 달려왔지만, 정작 홀로 남은 당사자는 태연하게 스자쿠를 맞이했었다.

 

“어머니가 같이 갈거면 드레스를… 드레스를 입으라고 했단 말이야.”

 

스자쿠 몫의 찻잔을 준비해온 를르슈는 홍차를 내어주며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스자쿠는 과연 그 마리안느 황비다운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를르슈는 제 아무리 어머니와 여동생이 걱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여동생 앞에서 여장을 한다는 수치스러운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써 스자쿠와 단 둘이서 아리에스를 지키게 되었지만, 를르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홀로 남을 를르슈가 걱정이 되어 단숨에 달려온 스자쿠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지만,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소년에게 그런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여전하다고 말은 전해보면 를르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제 열 살이라고! 스자쿠, 아니 나이트 오브 세븐이 그렇게까지 걱정할 어린애가 아니야!”

“충분히 어리니까 제가 부탁을 받은 거죠, 전하.”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하지만 테이블을 떠나지 않고서 스자쿠의 옆을 지켜주는 다정함을 보여주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를르슈는 정이 많은 편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아리에스를 비운 어머니와 여동생 때문에 를르슈의 할 일은 없어졌지만, 스자쿠와 같이 있게 되자 를르슈는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면서 스자쿠를 이끌고 아리에스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아리에스의 화원을 같이 거닐기도 하고, 이번 달에 새로 지은 를르슈만의 서재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를르슈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 얼마나 유익하고 스자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들떠 있었다. 영특한 황자전하가 가끔 이렇게 제 나잇대에 맞는 행동을 보일 때면 느껴지는 귀여움에 스자쿠는 얌전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서재를 나올 때에는 를르슈의 추천으로 받은 책 몇 권을 들고 나오기도 했었다.

아리에스를 그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나면 를르슈는 금방 지쳐버렸다. 를르슈는 해가 다 넘어갈 무렵에는 길게 하품을 하면서 스자쿠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하도 걸어다녀서 욱씬거리는 다리가 아팠지만 스자쿠 앞에서 그것을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하, 피곤하시면 제가 안아드릴까요?”

“싫어. 혼자 걸을 수 있어.”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저는 전하의 도움이 될 수 없을까요?”

 

스자쿠는 일부러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를르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높이에서 스자쿠가 눈꼬리까지 힘없이 떨구고 나면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스자쿠의 목에 손을 두르고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편안하게 방으로 가고, 헤어질 무렵에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뺨에 작게 키스를 했다. 떨어지려는 찰나에 하는 그 짧은 키스에 스자쿠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 를르슈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나나리가 없으니까, 스자쿠가 대신이야.”

 

스자쿠는 이 앙큼한 황자전하의 키스가 여동생 대신이라는 점에서 맥이 빠져버렸다. 그럼 전하도 좋은 밤 되시길. 를르슈의 뺨에 그 키스를 돌려주고 나면 를르슈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의 이불을 끝까지 잘 덮어준 스자쿠는 언젠가 를르슈의 기사가 머물 방에서 잘 준비를 마쳤다.

아리에스에서 스자쿠가 머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리안느 황비의 부탁으로 자주 아리에스를 찾아오기도 했었고, 가끔은 묵어가기도 했었다. 그런 날은 다음날의 아침에 를르슈를 만나는 것도 기대가 되었다. 오늘도 그런 밤의 연장선이었다.

모처럼 를르슈가 골라준 책을 한 번 읽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에 스자쿠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 아이가 읽기에는 조금 어려웠지만, 스자쿠는 금세 흥미를 갖고 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를르슈는 어리지만 똑똑했고, 그의 스자쿠를 위한 추천은 훌륭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어갈 때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리에스까지 울렸다. 

벌써 이런 시간이, 라는 생각에 이제 자야할 생각에 침대에 드러누우려는 때였다. 똑똑, 하고 스자쿠의 방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리고 문을 열면, 눈가가 붉어질 때까지 울었던 를르슈가 서있던 것이다.

 

“명령이야, 스자쿠.”

 

를르슈의 입에서 튀어나온 ‘명령’이라는 단어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스자쿠에게 거절을 당할까봐 걱정이 된 나머지 명령을 한 것에 대해서 를르슈는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어린 아이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오늘 자신이 있는 것이다. 스자쿠는 그것을 되뇌며 조심스럽게 를르슈의 앞에 낮의 그 모습처럼 무릎을 꿇었다. 시선이 마주하면 를르슈의 고인 눈물이 더 잘 보였다. 그것을 살살 닦아내며 스자쿠는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니. 그냥, 혼자 있으니까… 아니, 원래 나는 혼자 있을 줄 알아. 그, 근데 오늘은 어머니도, 나나리도… 없으니까.”

“네, 괜찮아요, 다 말씀하세요.”

“나 혼자 아리에스에 있는 거 같아서.”

“제가 있잖아요.”

“정말?”

 

를르슈는 또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황자는 똑똑한 만큼 걱정이 많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인 통찰도 뛰어난 편이지만, 그것은 때로는 독이 되어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오늘 혼자 울면서 스자쿠를 찾아온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그를 가볍게 들어올려 침대 쪽까지 단숨에 데리고 갔다. 스자쿠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를르슈는 놀라서 그를 꼭 붙들었다.

 

“호, 혼자서 걸을 수 있어.”

“네, 그렇지만 이게 더 편하잖아요?”

“뭐가?”

“전하의 명령대로 할 생각입니다.”

 

를르슈는 눈물 젖은 뺨을 스자쿠의 목덜미에 부비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절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을 했는지 스자쿠를 끌어안는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스자쿠의 침대에 뉘이면서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나면 를르슈는 스자쿠 쪽으로 몸을 돌리고서 그의 품에 달라붙었다.

 

“스자쿠, 있잖아.”

“네, 전하.”

“내가… 명령해서 같이 자주는 거야?”

 

그 말은 꼭 자신이 명령하지 않았다면 거절했을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를르슈가 이렇게 맥없이 말하는 것은 은근히 충격인지라, 스자쿠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하지 않으셨으면 제가 서운했을 거예요.”

“뭐야, 그게.”

“전하께서 혼자 못 주무시고 내일 아침을 맞이했으면, 전하를 도우러 온 제가 무슨 소용이예요?”

“…….”

“저를 의지해줘서 기쁩니다.”

 

스자쿠의 기쁘다는 말에 를르슈는 만족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스자쿠는 아이다운 따끈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에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길었죠, 전하. 스자쿠가 건네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랑 노니까 하루가 너무 빨리 가. 재미 있었어. 를르슈의 솔직한 말에 스자쿠는 무언가 튀어나오려던 말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사랑스러운 대답에 무어라 말을 골라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어딘가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스자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 기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다가 이내 말투가 느릿해지더니 잠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아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스자쿠는 그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소년이 언제까지 자신을 찾아주고 의지해줄 것인가, 그런 생각에 빠지다보면 괜히 슬퍼졌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저를 믿어주면 좋으련만. 스자쿠는 이 시간이 조금 더 오래가길 바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