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견딜 수가 없다. 여름의 더위가 가시고, 가을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고 나면 상쾌함보다 공포가 스자쿠를 집어삼켰다. 아, 이제 그날이 다가오고 있어. 내가 그를 죽였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머릿속은 그를 죽였던 날의 파편이 튀어오르고, 손끝부터 저릿하게 느껴지는 가벼운 마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자쿠는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 내가 그를 죽인 날, 그래서 세상이 ‘내일’을 찾은 날이 아니던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다.
제로의 사실에 혼자 남아있는 스자쿠는 문 너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축제에 들뜬 사람들의 흥분은 때로는 위험을 부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제로가 있어야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늘은 나나리도 쉬는 날이다. 그녀가 쉬는 이유는 하나 뿐인 오빠를 잃은 애도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악역 황제의 남은 혈연이라는 이유로 테러를 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근신 처분을 받듯 하루동안 일을 쉬는 날이다. 그녀가 평화를 위해서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단순하게 그녀를 미워할 수 있다.
그 모든 일을 꾸민 제로는 영웅의 모습으로 오늘을 맞이해야만 했다. 스자쿠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미안해요, 제로. 오늘 하루를 잘 부탁해요. 오늘 전화로 들었던 나나리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옛날의 그녀를 알고 있는 스자쿠는 ‘부탁’이라는 단어에 입맛이 썼다.
그들 남매가 저에게 부탁하는 것의 무게는, 손 안에 쥐어지는 가면의 무게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스자쿠가 그것을 탓할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억눌려 죽을 것 같은 압박감에 맨몸으로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 하나 닮은 구석 없는 것 같았던 그 오빠와 그 여동생은, 이런 부분에서는 서로를 꼭 닮고 있었다.
어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스자쿠를 멈추게 만들었다.
우리는 고작 열여덟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몇번이고 내던져지고, 그럴 때마다 살아있는 게 죄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제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제로만….”
“아, 그래. 이제 가지.”
제로라고 불린 스자쿠는 자리에서 움직였다. 손발을 차게 식힌 마비는 움직임에 따라서 풀렸다. 제로, 제로, 제로, 제로, 제로…. 그렇게 불리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죄인이다, 이 가면의 무게를 평생동안 끌어안고 살아가야하는 죄인,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저주에 걸려버린 죄인,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그때의 우리가 얼마나 어렸던, 우리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간에, 억울함은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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