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의 방은 기분 나쁘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다. 누가 들어가도 그럴 것이다. 그 천사 같은 나나리 마저도 를르슈의 방에 들어가본 적이 벌써 3년 전이고, 를르슈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세 명 뿐이다. 겁도 없고 간이 큰 를르슈의 어머니 마리안느, 어머니 친구 C.C., 그리고 나, 쿠루루기 스자쿠.
오늘도 를르슈의 방문 앞에 서서… 나는 를르슈를 기다린다.
“를르슈, 있어?”
‘…안녕, 여러분!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
“아아… 스자쿠, 오늘도 너는 빛이 나는구나…!”
“저기, 스자쿠 여기 있으니까… 문 좀 열어도 될까?”
‘—다음 곡은 모두와 함께 부르고 싶어!’
“함께 하자고, 스자쿠!”
“들어갈게!”
암막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이며, 불빛은 를르슈의 32인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면 불빛이 고작인 이 어두컴컴한 방. 그리고 화면에 비치는 것은 몇 주 전에 발매된 나의 단독 콘서트 블루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를르슈는 화면을 보다가 뒤늦게 밖의 불빛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나에게 눈을 돌렸다.
“으악, 생 스자쿠다! 진짜 스자쿠다!”
“…진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평범하게 스자쿠라고 하면 되잖아.”
“드, 들어올 때에는 노크하라고 말했잖아!”
“노크만 삼십 분 했어.”
“그럴 리가.”
“콘서트 시작한 지도 30분 넘었잖아.”
실제로 를르슈가 보고 있는 블루레이는 콘서트의 30분 중반 쯤이었다. 혼자서 블루레이로 보는 주제에 를르슈는 착실하게 응원봉도 들고서 흔들고 있었다. 티셔츠는 콘서트 한정 판매 티셔츠 굿즈를 입고 있고, 바지에는 주렁주렁 내 얼굴이 가득한 키링을 달고 있었다.
아… 정말.
“나, 기… 기분 나쁘지?”
“아니, 를르슈가 날 좋아하는데 뭐가 기분 나쁘겠어.”
기분 나쁘다….
“기분 나쁘다고 마음으로 말했어!”
“들렸어?!”
“당연하지, 너의 팬 싸인회, 팬미팅, 콘서트를 모두 섭렵한 나에게는 너의 마음 속 소리를 읽는 건 일도 아니다!”
“그거 문제 있어! 스토커야!”
“스토커가 아니라 팬이라고! 오히려 문제 삼는 쪽이 문제인 거야!”
그래, 사실 를르슈 말고도 나의 일정에 ALL 출석하는 팬들은 많다. 그런 팬들은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여워. 힘내라고 말해줄 때마다 정말 힘이 난다.
하지만 를르슈가 힘내라고 말한다거나, 열심히 출석해준다고 할 때마다… 솔직히….
“하하, 를르슈가 내 팬이라고 할 때마다 힘들어.”
“왜? 나는 네 팬이 맞는데. 무려 팬클럽 넘버도 제로0, 너의 모든 굿즈는 내가 제일 먼저 받고, 너의 소식은 내가 제일 먼저…!”
“너는 내 팬이 아니라 애인이잖아! 굿즈나 내 소식 같은 건 나한테 직접 받으면 되는걸.”
“그런 비겁한 방법으로 얻은 게 소용 있을 리가 있나!”
“사귀는 사이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너 어디 가서 나랑 사귄다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당연하지.”
“그럼 내가 널 따라다닐 수 없게 되니까… 나에게 아이돌 스자쿠는 삶의 빛, 희망, 절대적인 존재 이유, 철학적 사유의 원료, 어쩌고 저쩌고, 웅앵웅앵….”
“날 좋아하는 건 알겠으니까 제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주라, 를르슈, 부탁이야….”
를르슈는 열려진 방문을 꽉 닫았다. 어두워진 화면 속에서 블루레이 속의 내가 움직인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를르슈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답지 않게 바지런히 움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박스 속에서 꺼낸… 하얗고, 긴, 둥글고, 단단한…
“이 응원봉은 뭐야?”
“너도 응원하면서 보라고.”
“저기요!!!”
“참고로 새 거니까 거침없이 흔들어도 돼.”
“필요 없어!”
“필요할 걸. 없으면 콘서트 온 기분이 안 들어.”
“필요 없다고!”
“필요하다니까 그러네.”
를르슈의 컴퓨터를 홧김에 꺼버렸다. 눈이 뒤집어질 거 같은 를르슈를 겨우 달래놓고, 암막커튼도 걷고,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키면서 를르슈와 키스를 한 번 했다.
“저기 를르슈, 눈 뜨고 키스하지 말아줄래…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키스하는 스자쿠 보고 싶어.”
“내 드라마 보듯이 보고 있잖아, 너….”
키스를 하고 나니 우리가 겨우 사귄다는게 실감이 났다.
나는 아이돌, 를르슈는 아이돌 스자쿠의 팬. 그렇지만 실상은 우리는 원래부터 소꿉친구였고, 나는 나나리가 아이돌 연습생 서바이벌에 참가하러 가는걸 막으러 갔다가 얼떨결에 내가 캐스팅 되어서 아이돌이 된 사정을 갖고 있는… 뭐 어쩌다보니 대박을 친 케이스였다.
사실 아이돌이 되었다는 건 실감이 나지 않지만, 를르슈가 이렇게 굴 때마다 정말 곤란해서 미칠 거 같다. 생리적으로 무리인 느낌으로 기분 나쁜 오타쿠가 되어버린 를르슈는 가끔씩 이 관계의 끝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내 앞에서 연기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늘 나 오는 날인 거 알고 있었으면서.”
“진짜 스자쿠를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해.”
“난 를르슈가 그럴 때마다 섭섭해….”
“뭐가?”
“그냥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아이돌 스자쿠만 좋아하는 거 같아.”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제로 우리는 대체 몇 번이나 싸운 걸까.
너는 아이돌인 내가 좋은 거지, 진짜 나는 좋은 게 아니잖아! —라고 소리 지르면, 를르슈는 괴로워하면서 울었다. 네가 좋은 거니까 아이돌인 너도 좋은거지, 너 같으면 헐벗고 무대에서 소리지르는 남자를 원숭이 말고 다른 걸로 보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원숭이와 나를 비교하는 게 좀 슬픈 비교였지만, 아무튼 를르슈는 나름대로 사랑하니까 그런거라고 어필한 셈이었고, 나는 수습은 안 되지만 그날밤에 를르슈가 오만가지 서비스를 다 해줘서 그럭저럭 견뎌냈던 거 같았다.
오늘도 그 서비스를 받고자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니고. 아무튼.
“무대에서의 너는… 좀 특별해. 뭐라고 해야할까…."
“응.”
“섹스도 안 할 거 같고, 키스할 때 침에서 꿀 맛날 거 같아.”
“미안, 안 들을래, 미안.”
“그렇지만 진짜 스자쿠는 섹스도 잘하고 침에서는 뭐… 침 맛이 나지. 먹던 거 먹던 맛 나는 사람이라는 갭이 있으니, 그걸 또 갭 모에라고 한다고. 좀 옛날 말이긴 한데.”
“갭 모에?”
“그래. 무대에서의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너의 갭 모에가 나를 좀 돌게 해.”
“그냥 돌아있는 거 같은데.”
“너 그냥 헤어지자고 말을 해라.”
“내가 차이는 거야?!”
장난이고, 하고 를르슈는 또 가볍게 뽀뽀를 해준다. 그래, 이런 스킨쉽이 좋다구. 를르슈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주는 그 미소가 좋은 거라구.
“그래도 가끔씩… 아이돌 스자쿠를 보고 있으면.”
“응?”
“너무 성스러워서 고추도 없을 거 같아.”
“…….”
“특히 이 콘서트의 7번째 곡을 부르는 스자쿠는 더 성스러워. 홀리 쉣 그 자체라고.”
“…나 고추 있어.”
“알아.”
“지금 섰어.”
“왜 서?”
“만지고 있잖아, 네가!”
아, 미안, 허벅지만 만진다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를르슈는 잘 수납된 내 고추를 더듬더니, 은근히 열이 오르는 것을 즐기는 거 같았다. 그래, 이제 환기도 끝났고, 섹스나 한 판 할까….
창문을 슬쩍 닫으면서 커튼까지 마무리를 치고 나면, 를르슈는 히죽 웃으면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올라타고 나면 를르슈가 몸을 뒤틀어서 기승위 자세를 취했다. 내 위로 올라탄 를르슈, 그리고….
“저기, 천장에 내 포스터 안 붙이기로 하지 않았어?”
“천장 포스터의 스자쿠가 제일 섹시해.”
“성스러워서 고추도 없을 거 같다며!”
“천장 포스터로 일주일에 두 번은 빼는 거 같아.”
“우리 폰 섹스보다 더 많이 하잖아!”
“나 가끔 네가 라이브 방송 할 때마다 자위하면서 봐.”
“그런 고백 필요 없어!”
를르슈의 얼굴과 천장 포스터 속의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억지로 기승위를 당했다. 를르슈가 ‘내 등 뒤에서 천장 포스터 속의 스자쿠가 쳐다보고 있다고 하니까 더 아찔해…’ 같은 말을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나는 대체 왜 아이돌이 됐을까.
또 너는 대체 왜 이런 돌아이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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