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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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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erous Darling 中

DOZI 2023.04.04 17:23 read.112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씬거리고 쑤셔댔다. 그렇게 몸이 불편한 와중에 낯선 천장이 아침햇살 속에서 고요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를르슈는 스스로 처한 상황을 제대로 실감했다. 여기는 일본이고… 맡은 일은 슬프게도 진전이 없다고.

근처에 있는 휴대폰을 확인해보면, 어젯밤 슈나이젤에게 보낸 메일에 온 답장 뿐이었다. 내용은 없었고, 나나리가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주변에는 유페미아와 코넬리아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안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은 훤히 밝았고, 를르슈는 자신이 늦잠을 잤나 싶었지만 아직 7시였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는 집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방문 밖으로 나갔다.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어. 아침은 꼭 먹기.]

 

를르슈는 휘갈겨 썼지만 멋들어진 글씨를 보면서 혀를 찼다. 존댓말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를르슈는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계약을 맺은 이후로,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가면 어제처럼 정갈하게 놓인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도 메모가 있었다.

 

[밥은 밥솥, 국은 냄비, 반찬은 데워서.]

 

를르슈는 그 메모대로 따라서 밥은 밥솥에서, 국은 냄비에서, 반찬은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었다. 따뜻해진 식사를 조용한 와중에 먹고 있으면 그제서야 쿠루루기 스자쿠의 행방에 대해서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뭔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식사에 집중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한가롭게,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없이 밥을 먹고 있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을 순 없다. 를르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나리를 떠올리며 빠른 시간 내에 작전에 세우고 착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 빨리 나나리에게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러기 위해서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 * * 

 

“저랑 계약 하나 하시죠, 쿠루루기 스자쿠 씨.”

 

를르슈의 자신 있는 미소와 또 당당하게 꺼내진 ‘계약’이라는 말에, 스자쿠는 놀란 눈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스자쿠의 크게 터진 웃음은 한참 이어지다가, 눈물까지 닦는 스자쿠가 겨우 말을 꺼낼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람페르지 씨가 말하는 계약은 뭐죠?”

“제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친구?”

“외롭잖아요, 지금.”

 

를르슈는 스자쿠와 시선을 맞추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스자쿠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웃고 놀라던 모습이 아닌, 고요하게 가라앉은 듯한 눈으로 를르슈를 바라볼 뿐이었다. 를르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당신한테 접근할 때 다들 그러하겠지만… 뒷조사를 조금 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쿠루루기 스자쿠 씨, 당신 친구가 별로 없더라구요.”

“흐음….”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무도 안 찾아왔다는 건, 당신 인간관계 끝을 보여주는 거죠.”

“뭐어….”

 

스자쿠는 거의 인신공격이나 다름 없는 말들을 들으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내가 외롭다는 건 맞긴 하지만. 그래서 람페르지 씨가 제 친구가 되었다고 하면… 음, 저만 좋잖아요. 그래서 람페르지 씨가 얻는 건 뭔가요?”

 

세상에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으니까. 스자쿠는 누구나 품을 법한 의심을 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대놓고 꺼림칙하게 ‘친구하자’라는 말을 하는 를르슈나, ‘나랑 친구해서 얻는 게 뭔데?’라고 묻는 스자쿠나, 둘 다 서로에게 경계심을 감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를르슈는 어깨에서 힘을 빼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호의를 얻겠죠.”

“호의요?”

 

스자쿠는 그런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말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반응에 더 이상의 말을 얹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윽고 스자쿠가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런 순수한 의도로 제게 접근하신 게 아니지 않나요, 람페르지 씨는?”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바라는 것이 없기도 하거든요.”

“친구의 호의를 얻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면, 내일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이 바닥에서 친구는 없다는걸.”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그의 아버지 못지 않게 고집이 세다는 것을 느꼈다. 를르슈가 여기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빛내면, 스자쿠는 아무것도 못본 것처럼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건 재미있었어요. 그럼, 식사나 마저 할까요?”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람페르지 씨는 집요하네요.”

“그게 제 유일한 장점이거든요.”

“유일한 장점이라고요?”

“네.”

 

스자쿠는 킬킬거리면서 한 번 더 웃었다. 를르슈와 지그시 눈을 맞춘 그는 잘 갖춰진 입모양을 싱긋 올리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람페르지 씨 얼굴도 훌륭한 장점인데요.”

 

‘당신 얼굴도 만만치 않은데요?’와 같이, 그 말에 보기 좋게 받아쳤어야했는데,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사레가 들리고 말아버렸다.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하는 를르슈를 보며 스자쿠는 미지근한 찻물을 내주면서 하하, 하고 웃고 말어버렸다.

 

“람페르지 씨 못지 않게, 내 얼굴도 그럭저럭 봐줄만 하죠?”

“…잘 알고 계시네요.”

 

를르슈가 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스자쿠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럼, 진짜로 남은 식사나 하죠.

식사가 끝나고 나서, 를르슈가 설거지를 하겠다는 것을 스자쿠는 극구 말렸다. 사실 이게 끝이 아니거든요. 끝이 아니라고? 를르슈는 의아한 얼굴로 ‘끝이 아님’을 알리는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요, 라고 말을 덧붙이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나 멋진 술을 가지고 오나 싶었는데, 스자쿠는 캔 맥주 두 개만 덜렁 들고 왔을 뿐이었다.

 

“실망했죠?”

 

스자쿠는 장난에 성공한 어린애처럼 말했다. 를르슈에게 하나 내밀고, 스자쿠 본인도 가볍게 캔을 따더니 한입 벌컥 마셨다. 를르슈도 그를 흉내내듯 캔을 따고, 한 모금을 마셨다. 서로 안주도 없이, 말도 없이, 맥주만 몇 모금씩 마셨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뭐가 그렇게 갖고 싶어요?”

“네?”

“내 호의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가 안 되니까, 나라도 찾아와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거잖아요.”

“…날카롭네요.”

“정확하기도 하죠?”

“네.”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남자에 대해서 지금까지 조사한 것을 떠올렸다.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으면서 농사에 전념 중인, 거물 정치인 쿠루루기 겐부의 외아들이자 그의 후계자.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듯 해도, 그의 몸가짐에서는 배우고 자란 티가 났고, 손익계산에 뒤처짐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알아낸 것이 없었다.

 

“평범하게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거창하게 이야기할까요?”

“…어려운 선택지네요. 람페르지 씨가 말하기 편한 쪽으로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평범하게 말하자면,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하. 그럼 거창하게 말하면?”

 

바로 대답하는 것 대신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계약 후에 알려드릴게요.”

“아아, 내 호의를 얻고 나서?”

“네.”

“꽤 어려울 텐데. 이래보여도 저, 인간불신이거든요.”

“…원래 사람 믿기가 제일 어려워요.”

“아하하. 그렇죠. 부모 자식 간에도 믿어주기가 그렇게 힘든데 말이죠.”

 

스자쿠의 말은 아무 뜻 없이 뱉어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를르슈가 그 뜻을 곱씹기도 전에,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캔 맥주를 내밀었다.

 

“짠해요, 짠.”

“아…. 좋아요, 짠.”

 

그렇게 캔끼리 부딪히는 퉁, 하고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를르슈는 스자쿠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 말없이 시선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친구 합격.”

 

를르슈는 ‘친구 합격’이라는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이제야 조건 하나를 클리어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드는 의문이 있었다. 를르슈는 친구 합격의 여세를 몰아 그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요?”

“람페르지 씨 같은 친구가 있으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정말로?”

“얼굴만 봐도 재미있는데요, 뭘.”

“…….”

“나이는 어떻게 돼요?”

“스물 네 살, 인데요.”

“뭐야, 나랑 동갑이잖아. 이제 존댓말 그만 쓰고 친구처럼 말해요, 우리.”

“…그래놓고 존댓말 쓰는 건 그쪽이잖아, 요.”

“아하하.”

 

쿠루루기 스자쿠는 맥주 한 캔을 털어마셨다. 거의 흘려넘기다시피 하는 모습에 를르슈는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이 남자의 마음 속을 모르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그의 마음에 든 것은 다행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이 불안감이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쿠루루기 스자쿠보다 더한 상대들도 해낸 를르슈인데, 어째서?

를르슈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는 다 마신 캔을 찌그러뜨렸다. 

 

“하나 더 마실 건데, 를르슈도 마실래?”

 

갑자기 이름으로 부른다고? 를르슈는 미묘한 얼굴을 하며 급하게 남은 맥주를 다 마셨다. 

 

“그래, 스자쿠.”

 

이번에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를르슈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스자쿠는 신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금방 부엌에서 캔 맥주 두 개를 들고 왔고, 를르슈에게 하나를 따서 줬다. 그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해, 를르슈.”

“나도 잘 부탁해, 스자쿠.”

 

그리고…… 

 

* * *

 

‘친구가 된 기념’(쿠루루기 스자쿠는 그렇게 표현했다.)의 술자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괴물이었다. 그는 술을 무지하게 많이 마셔댔으며, 캔 맥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며 어디선가 일본 술을 들고 와서 안주 없이 부어댔다. 를르슈가 집안 내력으로 주량이 다져졌기에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그는 급성 알콜 중독으로 죽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와 미식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면서 를르슈는 현관 근처로 향했다.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해가 떠서 훤히 보이는 푸른 산과 들 같은 것들이 를르슈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생각보다 심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며,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괴물처럼 마셔대고 난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는… 어떻게 보면 성실한 사람이다. 약점이나 트집을 잡기에는 애매한 구석 밖에 없는 남자다.

 

‘아… 모르겠다.’

 

를르슈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아직 개키지 않은 이부자리에 몸을 뉘였다. 숙취에, 근육통에, 몸이 남아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나나리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기분이, 패배감이랑 비슷하면서도 나른함과도 맞닿아있었다. 를르슈는 그냥 자기로 했다.

자겠다고 다짐하고, 정확히 57분 뒤, 를르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브리타니아로 돌아가야만 한다.

를르슈는 뭔가를 훔칠 도둑이 된 심정으로 집안을 돌아보았다.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한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를르슈는 조심스럽게 어제 스자쿠가 들어간 자기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문은 열려있었고, 침입하기는 무척이나 수월했다. 마치 어제 스자쿠의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햄버그 스테이크의 31가지 조리법… 혼자서도 할 수 있다 12가지 채소 재배… 생선구이 맛있게 하는 법…. 뭐야, 먹는 거 아니면 키우는 거에 대한 책 뿐이잖아?’

 

세 칸짜리 책장에는 거의 요리 레시피나 채소를 키우는 방법 지침서 같은 것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대학시절 전공서적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일기장 같은 것도 없으려나. 를르슈는 책장을 꼼꼼히 살피면서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그 노트는 빼곡하게 단정한 글씨와 숫자들로 가득했지만…

 

[…어젯밤에 물을 잔뜩 주었더니 토마토 새싹이 4cm가 되었다!]

 

“이게 무슨… 토마토 관찰일기냐고….”

 

내용물은 어린이가 쓸법한 식물관찰일지 수준이라 를르슈는 참담함을 느꼈다. 방을 둘러보면 작은 옷장, 서랍, 이불, 낮은 책상이 고작이었다. 를르슈가 머물고 있는 방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꽤나 황량한 방이었다. 를르슈는 이곳에서 더 이상의 정보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아.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스자쿠의 방 탐색을 멈추었다. 사람이 사는 방이지만, ‘쿠루루기’ 스자쿠가 산다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를르슈는 집 주변을 살폈다. 다른 민가와 떨어져 있는 스자쿠의 집은 바로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 두 개와 가까웠고, 차고에는 낡은 차 한 대가 있었다. 차 안을 겨우 들여다보면 시트가 흙투성이인 것으로 보아, 어제 스자쿠가 실컷 떠들며 말했던 시장에 갈 때 쓰는 차인 듯 싶었다.

스자쿠에 대해서 주변 이웃들의 평가를 알고 싶었지만, 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는 것도 일이었다. 체력이 회복되는대로, 한 번 이야기를 들으러 가봐야지…. 를르슈는 잡초들이 푸릇푸릇한 마당을 지나 다시 스자쿠의 집으로 들어왔다.

를르슈의 결론은 이러했다. 스자쿠는 정말 농사일에 진심이고, 책장 세 칸을 모두 먹는 것과 키우는 것에 할애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이상하리만큼 세간살림은 최소화하고 있는 것이 신경쓰였다. 꼭 스자쿠의 몸 하나만 빠져나가면 그만인 집처럼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 감이 안 잡히는군.”

 

그나마 두 번째로 물건이 많은 곳은 냉장고였다. 고기가 꽤 많이 쌓여있는 것을 본 를르슈는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어젯밤, 계약 조건으로 말했던 스자쿠의 호의가 갖고 싶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친구가 되어, 호의를 얻는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호의를 보이는 순간에, 를르슈는 그를 보기 좋게 탈탈 털어먹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보란 듯이 등 뒤에 비수를 꽂아줄 생각도 있었다. 쿠루루기 겐부에게서 당한 수모를 그 아들에게서 되갚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스자쿠의 마음에 든 것 같고, 또 를르슈는 사람의 호의를 얻는 법에 대해서 무척이나 능통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우선 먹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고로. 를르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쉬운 방법인 먹는 것으로 회유하는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스자쿠의 수준을 너무 쉽게 보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 남자는 쉬워보이는 듯 어렵고, 어려워보이는 듯 쉬워보이는 것이 그 실상이라고 생각하면… 뭐 나쁘지 않은 선택지인 것 같았다. 를르슈는 느긋하게 요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12시 30분.

 

“…아, 맞다. 를르슈가 있었지, 참.”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를르슈가 스자쿠의 들어오는 소리에 나오자, 스자쿠가 한 말이었다. 마치 를르슈가 있다는 것을 까먹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살짝 열이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그의 마중을 했다.

 

“메모도 성실하게 하고 갔는데 잊을 건 또 뭐야? 섭섭하게.”

“아마 갔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어라, 근데 이 냄새는 뭐야?”

“아침에 대한 답례라고 해야할까, 멋대로 부엌을 써서 미안해. 냉장고에 고기 밖에 없어서 적당히 햄버그를 했는데.”

“적당히 햄버그?! 우와, 대단해!”

“정말 적당히 만든 거니까 크게 기대하지는 말고.”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햄버그 좋아!’ 라는 유치원생 같은 감상을 남기면서 손과 얼굴을 씻고 오겠다고 했다. 곧 머리카락까지 물에 흠뻑 젖은 스자쿠가 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나오면서 환하게 웃었다.

 

“좋은 냄새니까 분명 맛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고.”

“를르슈도 같이 먹을 거지? 아, 혹시 벌써 먹었어?”

“집 주인을 두고서 의리 없게 혼자서 밥을 먹진 않아.”

 

를르슈가 냄비에서 꺼낸 햄버그에 스자쿠는 크게 감동했다. 이런 거야, 이런 거! 내가 원했던 거! 스자쿠는 눈물까지 글썽이려고 했다. 이 정도로 우는 거면… 다른 거에는 진짜 대성통곡하는 거 아니야? 를르슈는 한 입 먹고 ‘우아앙’ 소리를 진짜로 내는 스자쿠를 보며 살짝 기겁했다.

 

“를르슈는 요리를 잘하는구나!”

“싫어하진 않아.”

“나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밥을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

“쉽지 않지만, 맛있게 먹어줄 사람을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

 

그 말에 스자쿠는 놀란 눈을 하며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를르슈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그럴 리가 있나.”

“에헤헤, 그렇지. 그럼 누구를 생각하면서 요리해?”

“…….”

“여자친구?”

“아니야. 여동생이다.”

 

여동생? 스자쿠는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를르슈는 이 정도는 솔직하게 대답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여동생이 맛있는 걸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잖아?”

“여동생을 되게 좋아하는구나, 를르슈.”

“물론이지.”

“그럼 여동생이랑 여자친구, 둘 중에 누가 더 소중해?”

“그런 질문은 많이 받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동생이다. 여동생을 우선시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친구는 솔직히 사귀고 싶지 않으니까.”

“흐음.”

 

스자쿠는 마지막 햄버그를 한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맛있게 먹는 그 모습에 를르슈는 어딘가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스자쿠의 마지막 말 한 마디로 그 뿌듯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를르슈, 동정이지?”

“뭐?!”

“아니,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여자친구 못 사귀어봤겠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를…!”

 

이 자식이 먹여준 은혜를 이렇게 갚아?! 를르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에 스자쿠는 아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전언 철회를 선언했다.

 

“그럴 리가 없지. 를르슈 같은 사람이 여자친구가 없을 리가. 내가 실언을 했어. 그냥 해본 소리야. 미안, 정말 미안. 그러니까 봐줘.”

“…앞으로 이런 농담은 안 해줬으면 좋겠군.”

“당연하지. 안 해.”

 

스자쿠는 하아,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턱을 괸 채로 를르슈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를르슈에게 확실하게 닿았다.

 

“를르슈한테 너무 고마운걸.”

“뭐가?”

“햄버그다운 햄버그를 먹은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솔직히 진짜 울 뻔했어.”

“…원한다면 점심은 내가 계속 만들까?”

“정말?”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하고 스자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점심 굶고 그냥 일하거든, 어차피 낮에는 집에 잘 들리지도 않고….”

“뭐?”

“아무도 없는 집에는 별로 오고 싶지 않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 있어.”

“…….”

“오늘도 그러겠거니 하면서 왔는데, 뭔가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시선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로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고 있는 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를르슈였다.

 

“내일은 뭐 먹고 싶어?”

 

평범한 말이었고, 아무 뜻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냉장고에는 텃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과 고기 덩어리가 고작이었고, 구비된 조미료도 거의 없다시피한 부엌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이라는 것은, 를르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를르슈는 뭐든지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

 

“아무래도… 오므라이스일까?”

“오므라이스?”

“가운데에 깃발 꽂고.”

“깃발?”

“응. 그리고 케찹으로 하트 모양을 그린 다음에.”

“하트 모양…?”

“주문을 외워줘. 모에모에 큥.”

 

장난스럽게 이어지는 스자쿠의 대화 흐름에 를르슈는 ‘모에모에 큥…?’ 하고 따라 읊었다. 아하하, 하고 또 터지는 스자쿠의 웃음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상적인 흐름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를르슈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화를 냈다.

 

“하하, 그래도 오므라이스 먹고 싶은 건 진짜야.”

“됐어, 그런 걸 해줄 리가 없잖아!”

“모에모에 큥은 안 해줘도 된다니까? 아, 하트 모양 케찹은 해주는 게 좋아.”

“둘 다 싫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농락당했다는 것은 짜증은 났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오므라이스란 말이지, 하고 혼자서 마음 속에 메모까지 해두었다. 냉장고 속의 재료들을 떠올리면 그럭저럭 만들 수 있었으니까,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