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를 직접 만났던 것은 큰 스트레스가 틀림없었다. 를르슈는 쇼핑을 했던 그날 이후로 일주일 가까이 자위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떨결에 갖게 된 금욕의 시간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정상궤도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좋겠는데. 게다가 를르슈는 요며칠 어떠한 꿈도 꾸지 않고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실로 얼마 만에 하는 상쾌한 기상인지. 를르슈는 아침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스자쿠와의 야한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뭐가 아쉬운 거지. 원래 이게 맞는 건데 말이야.’
근래 들어 최고의 컨디션으로 지내온 를르슈는 이제 스자쿠를 봐도 떳떳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 자신감을 계속 유지하는 거야. 를르슈는 되뇌면서 나나리와 함께 여행길에 나섰다.
낯을 가리지 않는 나나리는 새로 만나는 오빠의 친구인 스자쿠와 금방 친해졌다. 나나리와 스자쿠가 같이 있는 모습은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같이 앉을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서 스자쿠와 를르슈가 같이 앉게 된 것부터가 아마 를르슈의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창가 쪽에 앉은 를르슈에게 스자쿠가 말을 걸어왔다.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
“나나리랑 따로 앉는 거, 불안하지 않아?”
“뭐…. 나나리는 셜리도 좋아하니까. 그리고 24시간 내내 따라다니면서 간섭하는 오빠는 별로잖아.”
“그것도 그런가?”
스자쿠는 어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웃음이 신경쓰였지만,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지고 온 책을 펼쳐들었다. 스자쿠도 책을 든 를르슈에게 딱히 말을 걸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를르슈의 추측에 완전히 어긋나게, 스자쿠는 직구를 날려왔다.
“람페르지는 내가 싫어?”
그 질문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평온한 느낌이 ‘과자 먹을래?’라는 말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래서 를르슈는 한 번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람페르지는 내가 싫어? 싫다, 싫어한다…. 를르슈가 대답 없이 그 뜻을 헤아리는 동안,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를르슈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했을 때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꽤 망설이면서 대답했잖아.”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보니까 당황해서 그런 거야.”
“흐음…. 그래.”
알겠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대답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는 곧 입을 다물 것처럼 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나를 계속 피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물어본 거야.”
아마 일주일 전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를르슈는 그때의 행동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둘러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별로 그런 적은 없어. 그랬다면 오늘 오지도 않았을걸?”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렇구나, 하고서 짧게 말을 마칠 뿐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를르슈의 자신감은 애매한 용기를 내었다.
“굳이 따지자면 너는 싫은 것보다 좋은 쪽에 가까우니까.”
를르슈의 그 말에 스자쿠가 희미하게 웃었다.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자쿠의 눈은 이제 완전히 웃고 있어서, 보다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를르슈는 안심하고 펼쳐둔 책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묘하게 쿵쿵 뛰는 것 같은 심장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게 되었다. 좋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녀석을 상대로 어떻게 밤마다 그런 꿈을 꾸고, 그런 행동을 했을까. 를르슈는 의미 없이 책장을 넘겼다. 손끝이 다시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제부터 잘하면 되니까. 를르슈는 속으로 다짐했다.
‘근데 뭘 잘하면 되는 거지?’
옆자리에 앉은 스자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내 그마저도 지루한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든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책 읽는 척은 그만두기로 했다. 쿵쿵거리던 심장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었고, 바짝 긴장했던 몸은 이완되면서 피로를 호소했다. 책을 덮은 를르슈도 눈을 감았다.
* * *
를르슈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어둠을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떨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지는 걸까.
‘오랜만이다, 이 꿈.’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 떨어지는 느낌도 어딘가 반가운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위로 올라가야겠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떨어지는 것은 이 꿈 속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어둠을 향해 낙하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 덜 무섭게 느껴졌다.
“를르슈, 혹시 지금 무서워?”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공간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고민하던 를르슈의 마음과 다르게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무서워.”
“왜?”
“이제 영원히 못 보는 거잖아.”
를르슈는 스스로 내뱉은 문장에 놀랐다.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말은 자꾸만 흘러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또 다른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꼭 말하기를 머뭇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야 할 말을 전해야하는데 용기가 부족한 것처럼.
“괜찮아.”
그렇지만 상대는 그런 를르슈의 심중을 헤아린 것처럼 말했다. 어떠한 온기 몸을 끌어안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그 온기에 매달렸다. 손 안에 잡혔던 따뜻한 느낌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거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에 를르슈는 안된다고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 나는 무섭고 두려운데. 를르슈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불안해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멀어져가는 그가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널 찾아갈게.”
어떻게,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번에도 그는 를르슈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몇 번이고 너는 날 찾았으니까, 이제 내가 너를 찾을 차례야.”
완전히 텅 비어버린 손에 를르슈는 울고만 싶어졌다. 목이 메어와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분하고 슬펐다. 이제 정말 끝이고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밖에 들지 않는데 그는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말을 하는 걸까.
그 순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아래에서 환한 빛이 들어치기 시작했다. 아, 떨어진다, 부딪힌다, 이제 정말 끝이다. 손끝이 시려올 정도의 공포로 를르슈는 떨었다. 이제 더 이상 를르슈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너와 함께라면… 스자쿠, 너와 함께 있는다면.’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에 를르슈는 빛무리에 휩싸였다. 아프거나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를르슈!”
“오라버니!”
“람페르지…?”
누군가가 를르슈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에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람페르지, 라고 부르는 이름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런 이름으로 나를 부르다니, 그답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다운 선택이었다.
* * *
눈을 뜬 를르슈는 울먹거리는 나나리를 품에 안고서 습관적으로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저를 향해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려야 할 역을 하나 앞두고서 내릴 준비를 하던 중에, 잠이 든 를르슈가 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에 모두가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서 가위라도 눌린 게 아닌가 싶었는데다가 몇 번을 불러도 깨지 못했다고. 미레이의 간략한 설명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뒷목을 주무르며 그저 웃기만 했다. 잠깐 멀미를 했나봐요, 하고 둘러대고서는 를르슈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나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오라버니, 흐윽, 나나리가 계속 부르는데도, 흑, 일어나지 않아서…. 나나리가 괜히, 바다에 가자고 한 거 같고.”
“아니야, 나나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잠을 잘 못 잔 거 뿐이야. 지금은 멀쩡하지?”
“진짜요?”
“응. 진짜 괜찮아.”
나나리는 재차 정말로, 거짓말 하지 않고, 진심으로, 같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해서 를르슈에게 진심을 확인하려고 했다. 를르슈는 그때마다 다정한 목소리로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를르슈가 웃어주는 모습에 나나리는 안심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바다에 가서 무리는 하지 마세요.”
“물론이지.”
“나나리 옆에 계속 있어요.”
“하하, 나나리가 귀찮다고 해도 계속 옆에 있을 거야.”
나나리는 를르슈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걸었다. 나나리의 종종걸음에 맞추느라 를르슈의 보폭은 좁아졌지만, 그녀와 걸음을 맞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감동적이었다.
바다가 있는 역에서 내리고, 해수욕장까지 걸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바다의 활기찬 모습에 를르슈를 걱정하느라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파라솔을 빌리고 돗자리를 펼쳐놓고, 그 위로 짐을 하나 둘씩 내던지며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오겠다는 아이들은 시끌벅적했다. 를르슈는 컨디션이 안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짐 보기 담당이 되었다. 평소라면 나나리가 ‘같이 바다에 들어가요!’라며 졸랐을 테지만, 그녀는 를르슈의 상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 보채지도 않고, 오히려 수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를르슈를 잠깐 떠나는 것까지도 불안해했다. 를르슈는 나나리를 겨우 달래고 그녀를 미레이와 셜리의 손에 맡겼다.
시끄러웠던 주변이 조용해지자 를르슈는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파도의 움직임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도 구경하고, 돗자리를 깔고 앉은 모래사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놓았다 하는 모래장난도 했다. 혼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목덜미에 차가운 느낌이 닿아왔다.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면 스자쿠가 서있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를르슈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아이스크림 사왔어. 오래 기다렸지?”
“놀랐잖아.”
“하하, 그런 것 같더라. 다른 애들도 금방 올 거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옆에 앉아도 괜찮지? 이미 앉아놓고 나서 물어보는 것은 를르슈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래놓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상태를 걱정했다.
“람페르지, 몸은 괜찮아?”
“아아, 괜찮아.”
“다행이다. 그래도 무리해서 바다에 들어가지는 마.”
“얌전히 여기에 있을게.”
“근데 그러면 람페르지가 너무 지루하려나? 내가 옆에 있어줄까?”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피식 웃으면서 그러든지, 라고 말했다. 를르슈는 그가 옆에 있어줄 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모처럼 좋은 타이밍이었으니.
“굳이 람페르지라고 안 불러도 돼. 를르슈라고 불러.”
“음… 그래도 될까?”
“나도 널 스자쿠라고 부르면 되지. 그렇지, 스자쿠?”
“으, 응, 를르슈!”
를르슈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답하는 스자쿠는 어딘지 어색한 톤이었다. 뻣뻣하게 긴장한 느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게 우습기도 하면서도, 자신도 이름으로 불릴 때의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지기도 했기에, 를르슈는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베어물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돌아왔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품에 꼭 안겨서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를르슈와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모처럼 온 바다에 나나리가 놀아주지 않으면 더 속상할 거라고 를르슈가 말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곧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다른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면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떠들썩한 분위기를 눈으로 따라가며 즐기던 를르슈는, 이내 자신의 시선이 계속해서 스자쿠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그건 스자쿠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파라솔 밑에서 길게 드러누웠다. 따끈한 햇살로 일광욕이라도 즐길 생각이었다.
엉켜있던 실타래 같았던 감정들이, 기차에서 꿈을 눈을 뜨고 난 이후부터 제자리를 찾아 정리된 느낌이었다. 너무 아늑한 마무리에, 를르슈는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떨어지는 꿈도, 스자쿠를 상대로 야한 꿈도 꾸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 얼마나 돌아서 온 거야?’
무의식적으로 스자쿠를 계속해서 찾으면서 원해왔던 것이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하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었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영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애널자위까지 하는 것은 조금 너무 발칙한 짓이긴 했지만.
물론 많은 것을 기억하기에는 모든 것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스자쿠를… 아무래도 그를.
“를르슈?”
서술어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를르슈는 자신을 부르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바닷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스자쿠가 를르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서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미안, 자고 있었어?”
“아냐, 그냥 눈 좀 감고 있었을 뿐이야.”
“그랬구나. 난 좀 쉬러왔어.”
스자쿠는 자신만 집요하게 공격 당했다고 말했다. 바닷물 먹을 뻔 했어, 라고 작게 불만을 표하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키득거리면서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떨어지는 물방울과 물기를 대충 훑어낸 스자쿠는 를르슈가 내어주는 옆에 앉았다.
“를르슈,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글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어?”
“아니었어?”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뭐야, 그게.”
를르슈는 스자쿠와 눈을 마주하고서는 말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응?”
“간단히 말하면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스자쿠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꽤 진지했다.
“인생에 대한 고찰이 왜 쓸데 없는 생각이야?”
너는 이런 부분까지도 여전하구나. 를르슈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고작 중학교 2학년인데 고찰할 게 뭐가 있겠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든, 100살 먹은 할아버지든, 인생의 고찰은 중요한 거야. 어떻게 내일을 살아갈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잖아.”
“그래?”
“그렇고 말고.”
“멋진데.”
“뭔가 놀리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 아닌 거 같아. 난 진지해, 를르슈.”
“그래보여.”
를르슈와 스자쿠는 서로 만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웃어버린 것은 를르슈였다.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다며 스자쿠가 미간을 찌푸릴 때에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린 것이었다. 소리 내어 웃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도 가만히 있다가 같이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 를르슈가 말했다.
“스자쿠, 너 말이야.”
“응.”
“해바라기 좋아해?”
“해바라기? 뭐… 고른다면 좋아한다는 쪽이지.”
“그럼 둘이서 나나리를 데리고 해바라기 밭으로 가자.”
스자쿠는 인생의 고찰에 대한 이야기에서 해바라기 밭으로 화제가 바뀌는 것이 의아한 듯 했지만, 그러나 를르슈의 말을 장난이나 농담으로 넘기진 않았다.
“우리 둘이서?”
“그래, 너랑 나랑 둘이서. 아니, 나나리까지 하면 셋이구나. 셋이서 해바라기를 보는 거야.”
를르슈의 뜬금 없는 계획에도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름에 보러 가는 건가?”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해바라기는 여름에 보는 게 예쁘니까.”
“음… 방학은 얼마 안 남았고, 애쉬포드학원 근처에 해바라기 밭이 있어? 아니면 여기 주변이나.”
“그건 몰라.”
모른다는 즉답에 스자쿠는 맥이 빠진 건지 아니면 놀란 건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를르슈 너랑, 나나리랑 같이, 여름에 해바라기 밭을 갈 건데…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
“정리하면 그렇지.”
“알고서 가는 거 아니었어?”
“어차피 시간은 많아.”
“여름방학은 다음 주에 끝나는데.”
“이번 여름방학만 기회가 있는 게 아니야.”
를르슈는 초조함에 떠밀리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못을 박으며 말했다. 지금의 시간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일을 같이 이야기하는 스자쿠가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초조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기회?’라고 되물었다. 여전히 중요한 곳에서는 눈치가 없는 녀석이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스자쿠, 너는 나랑 올해까지만 알고 지낼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년의 여름이라도 괜찮지? 아니면 그 다음 해의 여름이라도 상관없어.”
“엄청 먼 이야기 같은데, 벌써 약속하는 거야?”
“그리 멀지도 않아.”
나는 엄청 먼 길을 돌아왔으니까. 를르슈는 놓쳤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려고 했다.
스자쿠의 검으로 가슴이 꿰뚫릴 때의 고통, 다시 살아나서 홀로 남겨졌을 때의 고독함, 계속해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자신의 소원을 직시하게 되는 그날까지도. 그리고 그 모든 결과로, 소원이 이루어진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너와 함께라면 뭐든지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만큼은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서 있는 힘껏 쿠루루기 스자쿠를 사랑할 것이라고 를르슈는 맹세했다.
그러한 를르슈의 맹세를 알 리가 없는 스자쿠는 짐 구석에서 휴대폰을 찾아내며 해바라기 밭을 검색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해바라기 밭이 있대’ 같은 말로 를르슈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를르슈는 그의 휴대폰을 힐끔 쳐다보는 척 하다가, 스자쿠와 눈을 맞추고서 그의 여전한 두 눈빛에 자신이 어떻게 담기는지 확인했다. 열렬한 사랑에 빠진 소년이 그 맑은 녹색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그걸 인식하고 나니 어딘가 부끄러워져서, 를르슈는 고개를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어디든 좋아.”
“응? 해바라기 밭이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거기면 더 좋고.”
“무슨 소리야?”
“너랑 간다면 어디든 좋다는 이야기야.”
를르슈는 스스로 뱉어놓고 나서도 너무 낯뜨거운 멘트였다고 생각했다. 스자쿠의 입장에서는 차갑게 자신을 피하던 친구가 갑자기 해바라기 밭을 가자느니, 사실은 어디든 좋다느니 이야기를 하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는 건 지긋지긋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다. 욕심이 많다고 해도 좋다. 눈앞의 스자쿠를 원하는 만큼 사랑하고 바라는 만큼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를르슈는… 생각보다 나를 꽤 좋아하나봐. 방금 전까지는 ‘굳이 따지자면 좋은 쪽’이라고 말했으면서.”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어줄 뿐이었다. 를르슈의 미소에 스자쿠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를르슈랑 간다면 어디든 좋을 거 같아.”
순간 바닷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파도가 일렁이며 내는 소리가 컸다. 물결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하고서 해수욕장 뒤로 펼쳐진 숲이 잎사귀를 흔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꽤 오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맴돌았다.
“…뭔가 고백한 기분이네.”
얼굴이 붉어진 스자쿠가 그렇게 말했다. 를르슈도 자신의 얼굴도 저렇게 빨갛게 변했을까 생각했다. 얼굴이 어딘가 뜨거운 느낌이 드는 걸 봐서 스자쿠보다 더 붉게 물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답 없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불만을 말하진 않았다. 다만 어색한 몸짓으로 손부채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덥다. 이제 물에 들어갈래. 를르슈도 발이라도 담글래?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모래밭에 있는 건 아쉽잖아.”
“좋아. 스자쿠, 손 좀 빌려줘.”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자쿠의 손은 여름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의 말들 때문인지 뜨겁고 축축했다. 를르슈의 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끼리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손을 붙들던 온기가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등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그러자 먼저 앞서가는 스자쿠가 를르슈를 돌아보면서 손짓했다. 를르슈는 그의 손짓대로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를르슈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서 바닷가 앞에 섰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가볍게 간지럽히면서 훑고 지나갔다. 모래알갱이가 발바닥의 모양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에 를르슈는 자신이 서있는 곳을 문득 돌아보았다.
햇볕이 따사로운 여름날, 사람들이 북적이는 바닷가, 쉬지 않고 몰아치는 파도가 일렁이는 곳. 그리고 눈앞의 스자쿠가 자신의 옆에 서서 웃고 있었다.
기어스는 소원과 닮았다.
나는 너를 위해서 몇 번이고 그 소원을 빌었다.
너와 함께 있는 내일을 바랐다.
그렇다면 이제는 너와 함께 내일을 살아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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