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이란 대체 무엇일까?
쿠루루기 스자쿠는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번갈아 비쳤다. 스자쿠는 불이 들어온 수술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저에게 사과하는 그 남자의 머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은 머리통.
반들거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머리카락.
엉망으로 뒹굴었을 텐데도 머릿결이 곱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감이 없는 건 지금의 상황일까, 아니면 이제까지 스자쿠가 걸어온 과거일까. 아무것도 현실감이 없다. 눈앞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조차도.
교복을 입은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남자를 일으켰다.
“됐으니까 일어나세요. 어차피 당신이 운전한 것도 아니니까.”
누군가는 스자쿠를 매정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일한 핏줄인 아버지가 지금 수술실 안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인데도, 스자쿠는 그런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던 삼도천을 건너던 상관없었다. 살면서 100일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이다. 스자쿠에게 아버지란, 핏줄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오히려 수술실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이 남자였다면 스자쿠는 좀 더 동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닿자, 스자쿠는 어제의 교통사고가 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루루기 겐부의 후처로 들어온 이 남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만 살아남은 그 비운의 교통사고는 다행이었다. 빗물이 바퀴가 미끄러져 절벽으로 고꾸라진 차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그 참상 속에서 기적적으로 찰과상만 입은 이 남자는….
‘아버지랑 잤을까?’
스자쿠는 미망인으로 남은 이 남자에 대해서 불경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당신, 아버지랑 잤어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스자쿠는 남자를 수술실 앞에 남겨두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떠드는 변호사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변호사는 만에 하나, 쿠루루기 겐부가 죽는다면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스자쿠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스자쿠는 만에 하나, 라는 그 가정이 웃기기만 했다.
확신하건대, 아버지는 죽었다. 저 수술실 너머에 있는 아버지는 고깃덩이가 되어서 전도유망한 실력 있는 의사를 절망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이 눈앞의 변호사마저도 ‘스자쿠 군, 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라면서 스자쿠를 위로하고 있었다. 저승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 남자…? 아, 를르슈 씨를 말하는 거구나. 를르슈 씨의 일은 걱정할 거 없어.”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나요?”
“아마 본인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냥 일본에서 조용히…. 아, 정말 만에 하나의 이야기지만, 너의 재산 상속과는 무관한 사람이니까 걱정할 필요없어. 법적으로도 그건 다 이야기가 되어 있으니까. 스자쿠 군은 그냥 아버지의 쾌유만 빌어주면 된단다.”
“…….”
아버지의 명복 조차 빌어주고 싶지 않은 스자쿠는, ‘그냥 일본에서 조용히’ 지낼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 중에서, 스자쿠는 어떤 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만 탐할 수 있다면 그 남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갖고 싶었다. 아직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 반들거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머리카락. 쓰다듬어주고 싶은 그 머릿결 같은 것을 손끝에서 굴려보고 싶었다.
매미가 우는 19살의 7월 10일.
스자쿠는 아버지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가족들만 조촐하게, 라고 하기에는 신랑인 아버지 측에는 어머마어마한 거물급 인사들이 모이는 이 결혼식은 경비에 만전을 가하고, 언론에서도 사진도 없이 딱 한 줄만 나갈 형식적인 결혼식이었다.
하나 뿐인 친아들의 생일에 맞춰서 하는 결혼식이라니, 끔찍한 아버지다.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의 아내가 될 남자를 바라보았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스자쿠보다 10살 많은 남자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11번째 황자, 17번째 황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본의 사쿠라다이트를 위해서 팔려온 남자였다. 겐부의 옆에서 여자인 것마냥 시로무쿠를 입고 있지만, 그의 골격은 엄연히 남자인 것을 드러내고 있어, 이 결혼식은 꼴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를르슈는 더위를 타고 있는지, 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시선이 닿았다.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에는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번갈아 비쳤다.
설풍이 몰아치는 19살의 12월 5일.
스자쿠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서 를르슈와 함께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갔다.
시끄러웠던 사람들도 집안까지는 들어올 수 없었다. 사용인조차 퇴근한 이 조용한 집안. 스자쿠는 한 번도 반가운 적 없던 이 집이 퍽 그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스자쿠를 불렀다.
“저기.”
“스자쿠라고 부르면 돼요.”
“…스자쿠 군.”
“스자쿠.”
스자쿠는 휴대폰의 잠금화면을 풀면서, 그리고 메시지 어플에 들어가서 아무나 클릭하여 시시껄렁한 대화들을 훑었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경은 오직 자신을 ‘스자쿠’라고 불러줄 를르슈에게 쏠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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