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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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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립밤

DOZI 2026.10.23 12:50 read.166 /

“스자쿠, 너 립밤 사야 된다고 그랬지?”

 

출근하고 나서 일을 열심히 한 뒤에, 그 노동의 결실처럼 점심시간에 만난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립밤 하나를 내밀었다. 립밤이라는 것이 원체 그렇듯 작은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남자가 들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운 핫핑크의 아기자기한 액세서리가 붙어있는 디자인이었다. 스자쿠는 며칠 전에 쓰고 다니던 맨즈 립밤이 떨어졌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누가 봐도 이런 귀여운 립밤을 받을 줄은 어떻게 알았으랴.

 

“이거… 를르슈가 산 거야?”

“그럴 리가. 나나리가 인터넷으로 샀는데 색감이 생각했던 게 아니래. 아직 한 번도 안 쓴거니까 편하게 써.”

“편하게… 쓴다고 해도 디자인이 좀….”

 

익숙한 일이었다. 를르슈가 사놓고 실패한 옷이나 화장품, 음식들을 해치우는 것은 스자쿠의 몫이었다. 옷 같은 경우는 대체로 디자인은 무난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사이즈가 크게 나와서 스자쿠가 편하게 입을 수 있었고, 화장품 같은 경우도 스킨케어 종류여서 아낌없이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음식 같은 경우 를르슈의 취향이 아니었을 뿐, 스자쿠의 입에는 그럭저럭 맛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를르슈를 거쳐서 오는 나나리의 물건들이 처치곤란이었다. 를르슈가 고르는 것이야 무난하니 쓸만 했다고 치더라도, 를르슈가 받아오는 나나리의 물건들은 를르슈 본인도 쓰기 힘든 것이니 스자쿠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스자쿠라고 해서 여자 화장품이나 여자들이 쓸법한 물건들을 쓰는 것이 쉬운 게 아닌데, 를르슈에게 한 번 불평하고 나면 를르슈는 이렇게 말했다.

 

“근데 넌 귀여우니까 이런 거 써도 되지 않아?”

 

이번에도 그 말이었다. 스자쿠는 귀여우니까 팬시한 디자인의 물건들을 써도 된다는 결론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를르슈는 잘생겼으니까 더 잘 어울리는 거 아닌가.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가도 를르슈가 ‘넌 진짜 귀여우니까 자신감 가져!’라고 말하는 것에 내쉬던 한숨도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립밤은 색깔이 너한테 잘 맞을 거 같긴 하더라. 어디 한 번 발라봐.”

“지금? 곧 밥 먹을 텐데?”

“괜찮잖아.”

 

스자쿠는 를르슈가 원하는대로 립밤을 꺼내서 입술에 쓱 문질러보았다. 슬쩍 봐도 엄청난 핑크색이었다. 나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 게 이런 쨍한 핑크색이라고? 스자쿠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를르슈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하면서 입술 끝에 립밤을 발랐다.

 

“음… 입술만 보이네.”

“뭐야, 그거. 안 어울린다는 거잖아.”

“아냐, 나 원래 너 볼 때 입술만 봤으니까 더 그렇게 보이는 거 같기도 해.”

“그거 지금 만든 말이지?”

“아니라니까. 잘 어울려. 끝까지 써라, 스자쿠. 그거 비싼 거야.”

 

그렇게 비싼 거면 를르슈가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를르슈가 갑자기 대뜸 뽀뽀를 해줬다. 쪽, 하고 스자쿠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를르슈의 입술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사람 많은 길바닥에서 뽀뽀하는 직장인 남자 둘이야 이제 이 거리에서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부끄러움을 탄다는 설정이 있는 를르슈 치고는 과감했다.

 

“너무 진하게 바른 거 같아서 좀 덜어주려고.”

 

스자쿠의 입술에 반쯤 남은 컬러 립밤의 흔적을 덜어낸 것이라고 말한 게 를르슈가 키스해준 이유였다. 낭만이 조금 없네요, 대표님…. 스자쿠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웃으면서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손을 잡고 식당까지 걸어갔다. 오늘은 뭐 먹지, 하는 생각이 컬러 립밤의 쇼킹한 핫핑크를 잊게 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나서, 건조해진 입술에 를르슈가 줬던 립밤을 바르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지노가 스자쿠를 보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입술 밖에 안 보이잖아. 스자쿠.”

“립밤 때문에 그래.”

“립밤? 무슨 립밤이 색이 그렇게 진해? 아니, 그 전에 너무 안 어울리는데?”

“를르슈는 어울린댔어.”

“아아… 그거 선배가 사준 거야?”

“정확히 말하면… 나나리가 샀는데 색깔이 별로래서 를르슈가 쓴다고 했는데 를르슈도 쓰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나한테 줬어.”

“그럼 선배가 사준 거도 아니잖아?”

“비싼 거래.”

“어디건데?”

“잘 모르겠는데.”

 

스자쿠는 지노에게 를르슈가 줬던 립밤을 내밀었다. 지노는 스자쿠가 내미는 화려한 핑크색의 립밤을 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런 걸 쓰겠다고? 스자쿠 너 진짜 재미있네! 지노가 비웃었지만, 스자쿠는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네가 뭘 알아, 나는 이런 게 익숙한 를르슈의 남자야…….

그렇게 지노와 스자쿠가 떠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카렌이 그 립밤을 보았다. 오, 이거 좋은 건데, 라고 말하는 카렌의 말에 지노와 스자쿠는 귀를 쫑긋 세웠다.

 

“입생로랑이잖아. 가격대 제법 있어. 립밤 치고는 사치스러운 걸 쓰네, 스자쿠.”

“입생로랑? 생 로랑이랑 다른 거야?”

“생 로랑은 어떻게 알아?”

“를르슈가 좋아하거든, 거기 옷.”

“아, 진짜 안 궁금해…….”

 

카렌이 입생로랑 립밤 좋아, 라고 말하는 거에 지노가 웃으면서 하나 사줄까, 하며 말을 붙였다. 내가 사면 되는데 왜 사주려는 거야? 카렌이 칼같이 선을 긋는 거에 지노가 조금 주춤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스자쿠는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사이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나중의 이야기였다.

아무튼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받은 립밤은 입생로랑 캔디 글로우 립밤인 듯 싶었다. 컬러는 스자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입술만 둥둥 튀는 핑크였지만 스자쿠는 꿋꿋하게 립밤을 바르고 다녔다. 나는 를르슈의 남자니까 이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 를르슈랑 뽀뽀할 때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유지할 테야. 그래서 더 많이 뽀뽀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립밤을 보다 더 부지런히 바르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나나리를 만났다. 셋이서 를르슈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타이밍 좋게 전철을 타고 가던 스자쿠랑 나나리가 마주친 것이었다. 나나리를 알아본 스자쿠는 그녀에게 말을 걸면서 반가워했다.

 

“오랜만이네, 나나리. 더 예뻐진 거 같아.”

“헤헤, 감사합니다. 스자쿠 씨도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오늘 너무 예쁘게 입고 왔는데? 근데 안 추워?”

“이 정도면 버틸 수 있어요. 오랜만에 셋이서 보는 거라 기합 넣었거든요.”

 

나나리가 옷차림에 기합을 넣었다는 말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스자쿠는 싱긋 웃으면서 나나리를 를르슈의 집까지 에스코트했다. 역에서 를르슈의 집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잠깐 나누다가, 나나리가 ‘잠깐만요’라고 말하면서 립밤을 꺼내더니 자기 입술에 슥슥 문질렀다. 스자쿠는 나나리가 꺼낸 립밤이 자기가 를르슈에게 받은 립밤이랑 똑같은 디자인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와, 나도 그거 있어. 를르슈가 줬어. 색은 좀 다르지만.”

“아… 설마 제가 드렸던?”

“맞아, 나나리가 안 쓴다고 나한테 줬어.”

“……그거 컬러가 스자쿠 씨한테 맞던가요?”

“음.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내 신조대로 말할까?”

“…솔직하게?”

“다들 엄청 안 어울린대. 입술만 보인대.”

“그럼 신조대로 말씀하시면…?”

“그래도 를르슈가 나한테 잘 어울린댔어. 그래서 쓰고 있어. 벌써 절반이나 썼어.”

 

스자쿠는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는 립밤을 꺼내보였다. 정말 절반이나 쓴 스자쿠의 립밤을 보면서 나나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나나리? 스자쿠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나나리에게 묻자, 나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자꾸 안 쓰는 거 스자쿠 씨한테 주는 거 별로 안 좋아보여요.”

“응? 아냐, 아냐. 안 그래도 돼. 나도 잘 쓰고 있어.”

“그치만 지난 번에 제가 안 쓰는 향수도 스자쿠 씨가 쓰셨잖아요.”

“아, 미스 디올이었던가…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무튼 그거 처음 쓴 날에 다들 내가 를르슈랑 헤어지고 여자랑 사귀는 줄 알았었지.”

“…그리고 저번에 히팅 뷰러도 스자쿠 씨가 쓰신다고 들었고.”

“히팅 뷰러하고 나면 눈가가 따끈따끈해지고 속눈썹이 올라가서 좋아.”

 

나나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스자쿠 씨, 저도 반성할게요. 오라버니라면 더 좋은 주인을 찾아주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스자쿠 씨한테 줘버리는 건지… 오라버니도 너무하세요. 나나리의 말에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짜 괜찮아!’라고 말했다. 

 

“그래도 를르슈도 상식이 있어서 나한테 나나리가 안 입는 옷은 주지 않아!”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

“…….”

“나나리한테 한 번만 부탁할게. 를르슈한테 말해줘. 나 이제 진짜 여자 화장품 그만 쓰고 싶다고….”

 

스자쿠는 이제껏 참아왔던 서러움을 겨우 털어놓았다. 나나리는 스자쿠의 손을 꼭 붙잡고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달에 를르슈는 나나리가 사이즈 미스로 잘못 산 스포츠 브래지어를 스자쿠에게 내밀었다. 그 아무리 스자쿠라고 해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자쿠는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