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가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온 지 벌써 삼십 년이 되었다. 그것은 곧 욕망을 채우지 않는 한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인간 세계에 숨긴 채로 살아온 지가 벌써 삼십 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가끔 지옥에서 찾아오는 나나리와 로로를 제외하고서는 만나는 악마들도 없이 유유자적 흘러가는 일상은 를르슈가 살아온 시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끔 굶어죽을 것 같은 배고픔이 찾아올 때에는 로로와 나나리가 가져다 준 인공정액이나 급한대로 남자를 찾아 끼니를 해결하면 되는 것만 빼면, 를르슈는 어쩌면 인간의 삶이 저에게 가장 잘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악마들 앞에서 했다가 다들 코웃음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다. (특히 리발이 ‘를르슈가 인간이면 그 세상이 지옥이지!’ 같은 말을 했다.)
를르슈가 인간 세계에서 은신처로 삼은 곳은 다 무너져가는 성당이었다. 실제로 무너지고 있는 벽면을 를르슈가 겨우겨우 나무와 철판을 덧대다가 보수공사를 해놓았기 때문에 성당 꼴을 갖춘 폐건물이었다. 십자가는 구색을 위해서 치우고 있진 않지만 어떤 신성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십자가라고 하더라도 악마에게는 독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이 근처에는 다 무너져가는 성당을 찾으러 올만큼의 신자도 없고, 를르슈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침묵과 정적을 즐기며 십자가 아래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낮과 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도 즐겁고, 드물긴 하지만 보이는 인간들의 옷차림도 그에 따라 바뀌는 것도 즐겁다. 를르슈는 우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제복을 입은 채로 삼십년을 버텼다. 옷이 세월을 이기지 못할 때에는 마력을 써서 새옷처럼 갖춰입었다. 삼십 년째 성당이었던 폐건물에 살고 있고, 그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이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생활에 녹아가고 있던 중에 그가 나타난 것은 더운 여름의 밤이었다.
를르슈가 보냈던 그날의 낮은 해가 높이 떠 있어서 마치 지옥불에 몸을 담근 느낌이었다. 여기서까지 지옥을 맛봐야하겠냐며 를르슈는 평소라면 갖춰 입을 사제복도 건성으로 입은 채로 책상에 거의 눕다시피한 채로 독서에 몰두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한 페이지에 물 한 모금, 두 페이지에 물 한 컵, 열 페이지 쯤에 욕실에 들어가 찬물에 몸을 담근 채로 독서를 하다가 책을 욕조에 빠뜨리고 말았다. 제법 흥미롭게 읽고 있던 인간 세계의 책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해가 잘 드는 곳에 젖은 책을 널어놓고서, 를르슈는 물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욕조에서 낮잠을 잤다.
그리고 그 낮잠의 여파로 잠을 이루지 못한 여름 밤을 지새고 있던 때였다.
를르슈가 지옥에서 막 올라와서 찬 겨울 바람을 맞으며 만들어두었던 가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던 것이 시작이었다. 쿠당탕, 쾅, 콰앙! 아예 때려부시는 소리는 바람 한 점 안부는 더운 여름에 듣기에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람이다. 인간이다.
피해야하나.
를르슈는 긴장 상태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2층짜리 낡은 이 건물에 가벽을 때려부술 정도라면 2층까지 올라오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를르슈는 마력을 써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인간 배로 다가오는 긴장이 마력을 허투루 썼다는 생각도 안 들게 했다.
끼익, 끼익, 낡은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것은 마물도 악마도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살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죽지 않는 악마라고 하더라도 쾌락을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끼는 를르슈에게는 몸을 사려야할 때였다. 안 그래도 인공정액은 공수해온 양이 떨어져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귀찮은 나머지 마력에 대한 식사 역시 게을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당한다면 골치 아플 전개가 펼쳐질 것이 뻔했다.
살기를 품은 인간은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살기를 품은 만큼 긴장하고 있고, 그만큼 빈틈이 없기 때문에 를르슈의 마력이 발휘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를르슈는 전투 쪽에 능한 편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인간이 빈사 상태가 아닌 이상 지금의 를르슈에게 승산은 희박했다. 죽지 않는 몸이 유일하게 승부가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를르슈의 방문 앞까지 다가온 인기척은 갑자기 멈추었다. 아마 문 너머에 있을 를르슈의 기척을 읽은 것 같았다. 를르슈는 숨을 삼키며 문 건너의 벽에 몸을 바짝 기대었다. 끼익거리는 바닥소리가 숨통을 조여왔고, 문 너머, 벽 너머,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인간의 기척은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 를르슈가 기대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벽의 파편들이 를르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를르슈는 흙먼지와 함께 형편 없는 모양새로 주저 앉아 콜록거리면서 저에게 지는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달빛에도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는 팽팽한 긴장을 담은 채로 를르슈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색의 옷을 두르고 있는 남자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뭐하는 놈이냐, 하고 외쳐보기도 전에 를르슈는 정수리에 떨어진 파편에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를르슈의 얼굴을 본 남자는 그 살기와 긴장을 담은 주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를르슈는 벽돌을 맞고 기절한 악마는 저가 유일무이한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웠다. 남자가 정신을 잃어가는 를르슈에게 외친 말은 를르슈를 더 창피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사람이 괜찮길 바라면 벽을 부수지 말았어야지…. 그 말을 소리내어 하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감기는 눈을 막을 수도 없었다.
불쾌한 통증과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때, 를르슈는 이미 온 몸이 묶여있는 채였다. 욱씬거리는 팔에 있는 힘껏 힘을 주어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묶여있는 동안 체력이 어떻게 소모된 것인지는 몰라도, 마력은 지금의 현상 유지에 바닥이 난 듯 했다. 인공 정액은 벽장 서랍 안쪽에 있었지만 벽이 무너지면서 벽장도 산산조각이 났다. 를르슈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인간 밖에 없었다. 지금 인간이라고 해봤자 벽을 부순 그 남자 밖에 없을 테지만.
를르슈는 한숨과 함께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나저나 그 남자를 어떻게 꼬신담. 인간과는 물론이고 악마와도 섹스를 해본 적이 없는 를르슈는 커다란 문제에 당착하고 말았다.
를르슈의 마족들은 대부분 섹스나 그에 준하는 행위를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지옥에 사는 친족들은 대부분 노예나 파트너를 구한 채로 생명 유지를 하고 있는 편이지만, 를르슈는 굳이 맛없는 인공 정액을 먹어가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섹스는 해본 적이 없지만 짐승들처럼 뒤엉키는 것이 일상인 지옥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싫어지고, 그 꼴을 보다 못해 지옥에서 기어나온 것이 삼십 년 전이었다. 급할 때는 펠라치오까지가 한계였다. 모르는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기도 싫고, 뒤로 남자를 받거나 여자를 안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악마에게 홀려서 정신이 나간 인간들의 상대라니, 죽어도 싫었다.
싫은 것 투성이지만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를르슈는 제 영역에 들어온 남자의 정기를 먹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결심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인기척은 물론이고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이에 죽어버렸나? 그렇다면 를르슈도 죽는 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폐건물이 있는 공터. 일부러 이 음산한 곳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묶여있는 끈 조차 풀 수 없는 마력 제로 상태의 를르슈는 로로나 나나리가 와주지 않는 이상 아사하고 말 것이다.
섹스하지 못해서 아사한다니.
인간이 부순 벽 때문에 기절한 것 이상으로 부끄러운 악마의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 를르슈가 그 걱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벽에 겨우 매달린 문짝으로 벽을 부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아, 벽을 부순건 죄송해요. 아무래도…좀 긴장해서 그런가.”
“긴장한다고 벽을 부수는 게 사람인가?!”
“그, 그렇죠? 일이 처리되는대로 다시 고쳐놓기는 하겠지만.”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보는 남자의 제대로 된 얼굴은 꽤나 봐줄 만 했다. 남자는 동양인이었고, 특유의 어린티가 묻어나는 둥근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눈과 다르게 를르슈에게 말투에는 가시가 있었다.
“근데 사람이 아닌 거 같네요, 당신.”
악마인 걸 들켰나? 설마 눈앞의 남자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엑소시스트였나.
를르슈는 쓸데없는 곳에서까지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마른침조차 삼켜지지 않을 만큼 입이 바싹 말랐다. 정체를 들켜서 성수에 맞아 죽는 멍청한 악마가 제 자신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를르슈의 타들어가는 속과 다르게 남자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인데 이렇게 예쁘면 보통 그렇게 생각하죠?”
“무슨, 소리를…….”
“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확실하게 남자인 걸 알겠네요. 근데 이런 곳에서…. 음, 신부는 이런 곳에서 사나요? 너무 낡았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는 를르슈가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를르슈가 이 곳에 사는 신부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속터지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으니 섹스는커녕 펠라를 해줄테니 바지를 벗어달라는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력으로 홀릴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를르슈가 진심으로 유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댁은 남의 성당을 잘도 때려부수고선.”
“미안해요. 한숨 돌리려고 왔는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사람이 있다면, 허락을 구하고.”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
정말 미안한 것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화를 낼 생각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체력이 없는 것이었지만. 를르슈가 곱게 입었던 사제복은 바닥에 흩어진 채였다. 를르슈의 시선이 그곳으로 닿자 남자는 급하게 옷을 주우면서 말했다.
“이것도 미안해요.”
“……왜 옷을 벗긴거야?”
“무기가 있나 확인해보려고요.”
“여긴 신부 혼자 사는 성당이야. 무기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걸 몰랐으니까요. 정말 미안.”
“무기가 없는 걸 아니까 이제 풀어줄 생각은 없어?”
“아아, 그래야죠..”
남자는 를르슈의 뒤로 돌아서며 묶인 끈을 풀 것처럼 만지고만 있었다. 답답한 팔이 뒤틀린 채로 있는 것이 아파서 빨리 풀어달라고 재촉하자, 남자는 애매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전히 풀지 않은 채로 를르슈의 뒤에 서 있었다.
“왜 안 푸는 거야?”
“풀려고 하니까, 뭔가 이상해서.”
남자는 를르슈의 뒷목을 더듬었다. 그의 체온은 보통 이상으로 뜨거웠다. 하지만 건조한 손바닥으로 닿아오는 것에 를르슈는 낮게 신음했다.
“신부라는 거, 거짓말이지?”
정체가 들통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자는 태연하게 를르슈의 목을 주무르며 그의 낮은 체온을 즐기는 것처럼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나빠. 그의 낮아진 목소리가 를르슈의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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