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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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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at 9

Re:play / DOZI 2020.05.31 17:36 read.123 /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은 기분일 뿐, 기상은 최악이었다.

L.L.는 스프링이 다 죽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돌아다닌 여파로 근육통이 생긴 팔다리가 욱씬거렸다.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을 딛고 일어서서 샤워를 한바탕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면 다시 침대에 드러눕고 싶을 만큼 피곤해졌다.

엊그제까지의 L.L.라면 아마 드러누워서 죽은 듯이 잠을 잤을 것이다. 하지만 스자쿠를 만난 어제, 오늘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L.L.는 이 정도 피로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처럼 무턱대고 쫓아가는 것은 너무 대책이 없었다.

L.L.는 우선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서 들이치는 햇살을 걸러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두워진 시야를 눈을 감아 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밀어넣고, 머릿속에는 반짝이는 빛들을 따라서 생각을 이어갔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꿈을 꾸고, 쿠루루기 스자쿠를 만난다. 

그는 꼭 를르슈가 저를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찾아내지 못하면 직접 나타나기까지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L.L.의 사고회로가 아무리 가열차게 돌아가더라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없는 체력으로 생각까지 하고 있으려니 입안이 바짝 마르면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괜한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L.L.는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세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몸은 땀투성이고 옷은 다 젖어있었다. 가장 최악인 점은 해가 또 다시 다 져서 저녁놀도 지고 있는 때였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하늘을 보면서 L.L.는 작게 혀를 찼다. 스자쿠를 만날 수 있는 날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급한대로 가지고 있는 옷가지 중에서 좀 깔끔한 것을 꺼내놓고, 휘청거리는 몸으로 겨우 샤워를 하고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쳤음에도 쉽게 나가지 못한 것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붉은 등의 향연 때문이었다.

어제와 같은 꼴을 당하기는 싫어서 긴 천조각을 어제보다 더 튼튼하게 싸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모처럼 깔끔한 옷을 입은 보람이 없게 거적데기 같은 옷을 몇 벌 꿰어입고 나면 완벽한 거지꼴이 되었다. 이로써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건든다면 그건 정말 취향이 이상한 변태일 뿐이다.

그리고 5분 뒤, 그 변태에게 붙잡힌 L.L.는 또 여자냐고 물어보는 그 말에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치솟는 열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한 것도 위험신호였다. 기어스를 쓰지 못하면 모처럼 스자쿠를 만나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스스로를 꾸짖듯 그렇게 속으로 악을 써도 몸은 이미 ‘좋은데 가서 할까?’하면서 L.L.가 나온 호텔로 다시 돌아가려는 남자의 방향대로 이끌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천조각이 얼굴에 달라붙어서 말하는 것도, 숨쉬는 것도 불편했다. 

 

“아이고, 예쁜 얼굴 상하겠어. 아가씨, 얼굴 좀 볼까?”

 

누가 아가씨라고…! L.L.는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보기 좋게 넘어진 꼴을 보고서 남자가 허허 웃으면서 일으키다가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결국 계속 목구멍 너머를 맴돌던 구토감이 바로 올라왔다.

거의 먹은 것이 없다시피한 속을 게워내고 나면 남자는 욕지기와 함께 L.L.를 걷어찼다. 자기가 게워낸 토사물 위를 뒹구는 것은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손에 계속 닿아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젠장, 남자잖아! 빌어먹을, 시간 낭비를 했어!”

 

자기들이 여자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달라붙은 주제에. L.L.는 찢어진 입안에서 나는 피를 꿀꺽 삼켰다. 비린 피냄새에 다시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남자가 멀어지고 나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껴입은 겉옷만 벗으면 스자쿠를 만나러 가도 볼품 없는 꼴은 아닐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옷에서 냄새가 날까 싶어서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았지만, 머리가 멍한 탓에 무슨 냄새인지 구별도 가지 않았다. 땀 냄새인가, 먼지 냄새인가. 아무튼 그렇게 향기롭지는 않지만 역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L.L.가 멍하니 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L.L.의 위를 덮었다. 어두워진 시야에 이번엔 또 어떤 자식일까 싶어서 쏘아보는 눈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는 스자쿠가 서있었다. 

 

“스, 자쿠.”

“여기서 장사를 하는거야? 어디 가게야?”

“장사?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

 

스자쿠는 봉투를 나눠든 두 손을 한 손으로 옮겨들면서, L.L.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몸에 L.L.의 손목이 헛돌았지만, 스자쿠의 악력으로 어떻게든 일어나게 되었다.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체력 바보! L.L.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장사 하는데 얼굴을 가리면 어떡해? 가진 건 그거 밖에 없어 보이던데.”

“무, 무슨 소리야!”

 

가진 게 얼굴 밖에 없어보인다니, 분명 칭찬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자쿠는 태연하게 말했다.

 

“얼굴 말고도 다른 장사수법이 있어? 기술도 있는거야? 체력은 없어보이는데.”

“너 말이야, 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너야말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쫓아왔던 주제에.”

“으으….”

 

L.L.는 갑자기 휘청거리는 시야에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쿵, 하고 무너지는 것에 스스로도 놀라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버렸다. 스자쿠가 어깨를 붙잡아줘서 아예 땅으로 고꾸라지는 것은 막았지만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너, 열 엄청 나는데.”

“어쩐지, 아팠어.”

“집이 어디야?”

“없어.”

“일행은?”

“아무도 없어.”

“…….”

 

집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그저 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만으로 버텼던 나는 너무 한심하지. L.L.는 고개를 떨군 채로 스자쿠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스자쿠는 L.L.의 팔을 제 목에 두른 채로, 곧 쓰러질 것 같은 L.L.를 제 몸에 바짝 붙이게 만든 다음에 부축을 했다. 

 

“나랑 똑같네. 나도 집 없고, 일행도 없어.”

“뭐? 어제 그…….”

“나는 나츠미 씨한테 팔렸지만, 거기는 나츠미 씨 집이고, 나츠미 씨는 내 가족이 아니니까.”

“그 여자가 들으면 섭섭하겠어.”

 

어제 잠깐 보고 들었던 그녀는 스자쿠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았다. L.L.가 굳이 없더라도 스자쿠는 그런 애정을 받으면서 커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외로워 보이진 않았다. 

 

“상관 없어. 나는 애완용으로 키우는 거라고 그랬거든.”

“……그래, 알겠어. 이제 좀 놔줄래? 네가 하도 꽉 잡아서 아프다.”

“어떡할 건데?”

“집은 없어도 당분간 머물 곳은 있거든.”

“러브 파라다이스 호텔?”

“어, 어떻게 알고 있어?!”

“거기서 나오는 걸 봤으니까.”

“그럼 처음부터 봤다는 거잖아!”

“뭐…. 그렇긴 해.”

“빨리 도와줬어야지! 널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나를 왜?”

 

너는 어제 처음 만났는데 이상한 소리를 해. 스자쿠는 L.L.를 살짝 놓아주고는 그렇게 말을 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져서, L.L.는 그것을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다. 허공을 헛도는 L.L.의 손에 스자쿠가 혀를 차며 대신 이마를 닦아주었다. 

저보다 어린 소년의 손이, 어른 흉내를 내며 이마를 닦아주는 손길에 L.L.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타인의 온기를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서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왜 반말이야? 아무리 봐도 내가 더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어제 한 번 보고 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스자쿠의 질문에서 겨우 빠져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대로 그냥 몸을 돌려서 호텔에 들어간 다음에, 그냥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남창으로 팔렸다고는 하지만 그 나츠미라는 여자는 믿을 만 한 것 같았다. 사람 보는 눈이야 워낙 없는 L.L.였지만, 스자쿠가 자기 몸을 맡길 정도의 여자라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스자쿠는 늘 진짜를 찾을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나를 왜 찾으러 왔어?”

 

결국 다시 대화는 원점이었다. L.L.는 대답 대신에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다시 돌아가게.”

“어디로?”

“신경 끄는 게 좋을걸. 너는 나츠미라는 여자한테 돌아가.”

“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상관없잖아!”

“아픈 사람을 보고서 그냥 내버려둘 정도로 못되진 않았어, 나.”

 

발버둥을 치는 L.L.를 스자쿠는 잡아당겼다. 스자쿠의 목에 또다시 팔을 빼앗긴 채로 L.L.는 끌려가듯이 걷게 되었다. 

 

“어디로 가는거야?!”

“나츠미 씨네 집.”

“마, 마음대로 데려가면 안되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적어도 내 의사는 물어봐야 할 거 아니야?!”

“나를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

“…….”

“나도 오래는 못 머물게 해줘. 아마… 길어 봤자 일주일이 고작일 거야. 그 사이에 빨리 낫고, 돌아가면 되잖아.”

 

일주일. 

그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L.L.는 숨이 턱 막혔다. 꽈악 조여오는 숨통에 볼을 타고 툭툭 흘러내리는 눈물이 스자쿠의 옷자락을 적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울 정도로 아프면서.”

“아, 안 울어.”

“거짓말.”

 

거짓말, 일주일, 거짓말, 일주일.

 

“엄청 울고 있는데?”

 

L.L.를 괴롭혔던 그 단어들이 스자쿠의 입에서 쏟아질 때마다 괴로웠다. 스자쿠는 L.L.가 우는 것을 달래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떨치고 가지도 않은 채로, 애매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어제 보았던 그 집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면 어제 보았던 나츠미라는 여자가 스자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하고 스자쿠를 바라보던 나츠미는 그 뒤에 따라오던 L.L.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왔던 잡상인…이 아니라, 이젠 손님인건가?”

“죄송해요, 나츠미 씨. 함부로 손님을 데려와서….”

“아냐, 스자쿠 군이 데리고 온 이유가 있겠지? 어머,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어디 아프신 분인가.”

“네, 열이 좀 심해요. 괜찮다면 제 방에서 머물게 해도 될까요?”

“아냐, 손님 방을 준비하면 돼.”

“그럼 제가 준비할게요.”

“그러렴. 손님은 그럼….”

“제 방에서 잠깐 머물게 할게요.”

“응접실이 아니어도 괜찮을까?”

 

나츠미의 호의에 스자쿠는 익숙한 듯 했지만, L.L.는 그녀의 상냥함에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체 뭘 믿고 이런 남루한 이방인에게 응접실이나 손님 방을 내어주겠다고 하는 것인지. 그만큼 스자쿠를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L.L.로써는 무언가가 못마땅했다. 

스자쿠가 시선으로 어디에 머물고 싶냐는 듯이 쳐다보기에, L.L.는 고개를 내젓고서 스자쿠의 방이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나츠미는 L.L.의 목소리를 듣고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예뻐서 여자인 줄 알았어요.”

 

익숙한 취급이다. 이젠 좀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극악무도한 황제로 몰리는 것이 차라리 심적인 면에서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스자쿠는 다시 L.L.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방금 전처럼 질질 끌려가는 모양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움직이는 팔다리로 스자쿠를 뒤쫓아가는 모양새가 엉성하게 느껴졌다. 

나츠미의 집은 어딘가는 일본풍이며, 또 구석구석은 일본과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닫이문이 닫혀있었지만, 스자쿠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자기 방에 들어갔지만 문을 닫지 않는 스자쿠는 불편하면 문을 닫고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L.L.가 머물 손님 방을 준비해야하니 곧 나가야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 나갈 것처럼 굴다가, L.L.가 휘청거리는 것에 붙박이장에 넣어둔 이불을 꺼내면서 그를 그 위에 눕혔다. 

 

“어제 빨아둔 거니까 괜찮아.”

 

나츠미 뿐만이 아니라 스자쿠도 다정하다. 그는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L.L.를 이불 위에 눕혀놓고서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손님 방이 준비되면 깨울게.”

 

스자쿠의 발 소리가 바닥을 치며 사라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손님 방을 부지런히 쓸고 닦을 동안에 L.L.는 오랜만에 아팠다. 

코드는 늘 불안정한 상태인 것 같고, 기어스의 조각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C.C.는 언제 저를 찾아낼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태에서 만나는 스자쿠는 영문 모를 친절을 베풀며, 속을 모르겠는 어떤 여자와 살고 있고, 그는 팔린 남창이며….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서 L.L.의 머리는 엉망이 되었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봐. 눈 좀 떠! 뭐라는 거야, 시끄러워. 자게 내버려둬. 죽은 듯이 자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눈 좀 떠봐! 열이 너무 높은데. 죽으면 안 돼, 일어나! 

 

를르슈! 

 

“…윽!”

“일어났다, 다행이야. 의사를 부를까 했다구!”

“스, 스자쿠?!”

 

갑자기 시원해진 시야는 스자쿠의 반짝이는 초록색 눈으로 가득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L.L.는 방금 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스자쿠는 이내 곧 퉁명스러운 그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L.L.의 손발을 주무르면서 괜찮냐고 물어봤다. 

 

“나츠미 씨는 친절하지만, 여기는 의사를 출장으로 부를 만큼 여유롭진 않단 말이야. 일꾼도 나 하나뿐이고.”

“아, 아아…. 미안하다. 정신이 없어서.”

“아냐, 열 좀 재볼까.”

 

스자쿠는 L.L.의 이마에 제 손을 갖다대고서는 약간 내려갔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미지근했다. 그러고 보면 스자쿠의 손은 늘 뜨거웠는데. 미지근하게 느껴지다니, 열이 올라도 제법 올랐던 모양이었다. 코드를 가진 주제에 병에 걸릴 수도 있나?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품으면서 스자쿠의 체온을 느꼈다. 

 

“손님 방으로 갈 수 있겠어?”

“괜, 괜찮은데.”

“내 방이 더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굳이 여기에 안 있어도 된다는 뜻이야!”

“하지만 나를 찾으러 왔잖아?”

“응?”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잖아.”

“아, 그건, 그렇지만.”

“그럼, 내 손님으로 조금만 머물다 가.”

“…….”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시간은 조금 밖에 못 주지만.”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L.L.에게 손을 내밀었다. 

 

“근데 이름이 뭐야?”

 

L.L.는 그 질문에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나를 부른 건, 네가 아니었던가. 를르슈, 라고 불러주지 않았나? 하지만 스자쿠는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L.L.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지금 나츠미라는 여자의 호의 안에서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스자쿠 역시 기어스의 조각이라면, C.C.가 여기를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스자쿠의 일생이 평온하길 바란다면 ‘를르슈’의 이름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게 L.L.가 내린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를르슈로써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편이 좋다. 

스자쿠에게는 스자쿠의 인생이, L.L.에게는 L.L.로서의 목적이 있으니, 서로 연관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모든 이성이 ‘를르슈’를 옭아매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를르슈, 를르슈 람페르지다.”

“이상한 이름이네.”

 

다시 태어나도 스자쿠인 너만 할까. L.L.는 그 말을 삼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스자쿠는 두 번 돌아보지 않고 L.L.가 머물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손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L.L.의 기억 속에 있는 스자쿠는 이렇게 정리 정돈에 철저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 스자쿠는 시선을 먼 곳에 둔 채로 중얼거렸다. 

 

“나츠미 씨가 거의 대부분을 정리해줬어.”

“어쩐지, 네가 할 것 같진 않더라.”

“그러는 너도 이런 일을 잘할 것 같진 않은데?”

“너보다는 잘할 걸.”

 

빈정거리는 L.L.의 말에도 스자쿠는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츠미에게 나중에 꼭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말했다.

 

“그럼 나츠미 씨는 어디 있어?”

“마당으로 가셨던 것 같은데.”

 

마당이 어딘지 모르니 안내를 부탁하는 것처럼 쳐다보면, 스자쿠는 따라오라고 말을 했다. 일본풍을 따라하고 있지만 내부는 소소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 기묘한 저택은 누구의 취향일까. 하지만 그 분위기 속에서 스자쿠는 어울리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L.L.는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착각이길 빌었다.

모처럼 스자쿠를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곳이다. C.C.가 올 때까지, 적어도 기어스의 조각으로 인식되기 전까지는 행복하게 살아있으면 했다. 그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도 잘 살았으면 했다.

저로 인해서 가장 최악의 길로 내닫게 된 불행한 사람.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스자쿠의 등을 쳐다보고 있으면 L.L.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손끝을 말아쥐며 주먹을 쥐게 되었다. 그것을 꾹 억누르게 되는 습관 중 하나였다. 

 

“집이 넓네….”

“나츠미 씨 남편이 사다 준 집이래. 원래는 고전식 저택이었지만 나츠미 씨 취향에 맞춰서 개조했어.”

“그래? 어쩐지 겉과 다르게 내부는 좀 특이하더군.”

“그런 거, 잘 알아봐?”

“아아, 본 게 있으니까.”

 

예전에 머물렀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시절에 머물렀던 쿠루루기 저택과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의 스자쿠와 지금의 스자쿠는 다르며, 그때의 를르슈와 현재의 L.L.가 다른 것과 똑같다. 그런 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에 L.L.는 부드럽게 대답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소년 티가 나면서도, 다른 곳은 어른스러운 스자쿠는 더 캐묻지 않았다. 

 

“를르슈라고 불러도 돼?”

“마음대로. 나는 스자쿠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반말은?”

“해도 돼.”

“몇 살인데?”

“너무 오래 살아서, 기억도 안 나.”

“……거짓말쟁이.”

“진짜야.”

“못 믿겠어. 를르슈는 나츠미 씨보다 어려보이는데?”

“거짓말도 아닌데 안 믿으면 네 손해지, 뭐.”

 

L.L.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 같은 사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스자쿠에게 궁금하던 점을 물어보았다. 

 

“그럼 너는 몇 살인데?”

“열네 살.”

“흐음…. 어리군.”

“그러니까 몇 살인데!”

“……뭐, 적당히 열네 살 정도로 해둘까?”

“뭐? 적당히?”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마당에 다다르면, 낡은 신문 뭉치를 마당 구석에 몰아서 쌓아두고 있는 나츠미가 보였다. 나츠미 씨! 스자쿠의 목소리에 나츠미는 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보아도 애정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스자쿠를 사랑하고 있다.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L.L.는 그것을 느꼈다.

 

“이쪽은 를르슈, 를르슈 람페르지에요,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아서 인사를 드리러 왔대요.”

“안녕하세요, 를르슈 씨. 나츠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를르슈 람페르지입니다, 나츠미 씨.”

 

나츠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 나츠미의 나긋한 손이 L.L.의 손을 가볍게 잡아왔다. 성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나츠미가 익숙해요. 나츠미의 이어지는 자기 소개에는 그녀 특유의 부드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스자쿠 군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그건…….”

 

L.L.의 이어지려던 말은 스자쿠의 그의 답변을 기대하는 듯한 시선에 곧 막히고 말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너는 믿을까. L.L.는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꿈에서 만났다고 하면 될까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꿈인지도 믿을 수 없고,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곳에서의 만남에 대해 스자쿠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L.L.는 어떠한 속내도 비치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나츠미는 낭만적이라고 말했지만, L.L.가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다. 이 곳에서 또 L.L. 혼자 다른 시간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는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L.L.의 목적은 정해졌다. 

지금 사는 스자쿠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 유유히 떠나는 것. 만족할 만큼만 보고서 미련을 가지더라도 떠나는 것. 나츠미와 스자쿠의 삶을 응원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미련도 지우고 가는 것이다. 

그것은 꿈과 같은 소망이라 스스로도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나츠미의 집에 들어 사는 첫날에 스자쿠는 두 번째 외출을 하는 겸, 러브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L.L.의 짐을 싸들고 왔다. L.L.의 몇 없는 짐을 보고서 그는 혀를 찼다. 빨래는 그 사이에 다 마른 것까지 싸들고 온 스자쿠를 보고서 L.L.는 의외의 곳에서 스자쿠가 철저한 것을 새삼 깨달았다. 

너를 너무 얕보고 있었던 걸지도.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스자쿠가 외출을 한 사이에 나츠미와 대화를 나누었다. 

 

“스자쿠 군은 제가 지내던 기방 근처에 살았던 애라, 그동안 마음이 가기도 했고, 이 집으로 시집올 때 꼭 데려가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츠미는 원래 저 붉은 등이 켜지는 골목에서 몸을 팔던 여자라고 했다. 머리가 워낙 좋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서 나긋나긋하게 구는 것이 매력이라, 그녀에게 목을 맨 남자들이 제법 있었다고 했다. 그 중에서 부자를 고르고 골라 이 저택 하나 정도는 내줄 수 있는 남자의 첩으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비록 첩살이이지만, 스자쿠와 함께 있는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남편을 둬서 크게 외롭지는 않다고 했다. 오히려 남편이 있는 것이 이젠 어색할 지경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녀는 여유로워 보였다. 

스자쿠는 어느 날 집창촌으로 굴러 들어온 아이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누군가의 빚에 의해 떠밀려온 것이겠지만, 스자쿠 만큼은 누구도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남창촌에서는 그의 귀여운 외모에 제법 돈을 벌겠구나 싶어서 데리고 갔다가 허구헌날 손님과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 스자쿠 때문에 돈만 더 들고. 들인 돈이 아까워 바로 내쫓지도 못한 채로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다.

저를 팔았던 본가에 스자쿠 또래의 막내동생이 있던 나츠미는 그가 가여워서 정을 주기 시작했고, 저 또한 정이 들어 결혼을 할 무렵에는 덥썩 사들고 데려왔다고 했다. 스자쿠가 머물고 있던 남창촌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주고서 데려왔다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의 몸값이라는 게, 결국 스자쿠 군의 자존심을 돈으로 주고 산거잖아요? 저는 비싼 남자가 좋거든요.”

 

L.L.는 그녀의 자랑인지 자조일지 모를 내용에 쓰게 웃었다. 

 

“저는 스자쿠 군이 좋아요, 를르슈 씨.”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스자쿠 군은 모르는 것 같아서….”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우리집에 오려고 하지 않았어요, 스자쿠 군.”

 

나츠미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그래서 제가, 소원을 세 가지 들어줄 테니 제발 함께 가달라고 부탁했어요. 혼자서는 너무 무섭다고. 그랬더니 같이 와주겠다고 했어요. 당신이 여기에 머물게 해달라는 게 두 번째 소원이었답니다.”

“그럼, 벌써 첫 번째 소원을 썼다는 건가요?”

“그렇죠.”

“물어봐도 괜찮나요?”

 

L.L.의 말에 나츠미는 고개를 부드럽게 저었다. 

 

“그건 저와 스자쿠 군의 비밀이랍니다.”

 

두 번째 소원은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지만요.

그리고 스자쿠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츠미는 이제 곧 자야할 시간이라면서, 야식이 필요하다면 말을 하라고 했다. 나름 주방일도 도왔으니 요리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소녀처럼 앳되어 보였다. 

L.L.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스자쿠가 손님 방으로 짐을 날라주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스자쿠의 부지런히 움직이는 몸을 보면서, 나츠미와 스자쿠가 만든 비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딘지 모르게 그 비밀을 저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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