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루루기 스자쿠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온 남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대해서 순응하며 살아왔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소위 말하는 깔려있는 레일 위의 길을 달린다는 것에 대해 반항도 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꽤나 만족스럽다. 아버지가 정해준 직업,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 그렇게 꾸려진 가정. 거기서 쿠루루기 스자쿠의 역할은 상냥한 남편과 견실한 후계자로서의 모습이었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스자쿠는 살아왔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것은, 이제껏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였을 지도 모른다.
*
를르슈 람페르지는 옆집에 사는 소년이었다.
나이는 열일곱, 고등학생, 어머니의 해외 출장이 잦아 거의 혼자 살다시피하는, 브리타니아 기숙학교에 머물고 있는 여동생을 끔찍하게 여기는. 그에 대해서 스자쿠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스자쿠의 아내 때문이었다.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 말이죠, 를르슈라고 하더라구요. 어머니가 바쁘셔서 거의 혼자 살고 있대요. 또 여동생도 있는데 그 애는 브리타니아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지내느라 전화로만 만나는 게 고작이라는데….”
“그래?”
“혼자서 지내는 게 외롭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또 익숙하다고 하는데, 그게 더 마음 쓰이는 거 있죠?”
그녀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자쿠는 건성으로 들으면서도 웃어주었다. 스자쿠의 모습에 아내는 신경이 쓰이는 만큼 잘 돌봐줘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스자쿠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를르슈라는 소년은 스자쿠의 인생에 옆집에 사는 소년에 불과했다.
스자쿠의 일과는 회사와 집을 오가며 가끔씩 본가에 불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 거리에는 아내와 아버지가 있었고, 그 둘에게만 스자쿠의 ‘역할’을 다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보기 드문 브리타니아인, 이라고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그 ‘를르슈’구나. 최근 아내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던 그 소년. 혼자서 살면서 가사일에도 능숙해서, 동네 슈퍼에서 만나면 아내보다 더 능숙하게 장을 보고 물건을 고르면서 꼼꼼하게 살림을 꾸려간다는 그 를르슈.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스자쿠의 존댓말에 소년은 눈꼬리를 낮추며 당황한 듯 웃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쿠루루기 씨, 맞으시죠? 옆집에 사는 람페르지라고 합니다.”
“아…. 그래,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네가 를르슈구나.”
“제 이야기요?”
“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아내가 많이 신경쓰고 있어서. 만나고 싶었어.”
“아, 저도요. 쿠루루기 씨 만나보고 싶었어요.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라고 말하는 소년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스자쿠는 그와의 만남이 기쁘다고 말하는 를르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는 장바구니가 흘러내리는 것을 겨우 쥐면서, ‘그래, 나도.’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라고 저에게 배웅하며 옆집으로 들어가는 를르슈의 뒷모습에 스자쿠는 꼼짝없이 굳어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으로, 스자쿠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류의 만남이었다.
*
를르슈는 예의가 바른 첫인상과 다르게 꽤나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주말 출근이니 뭐니 하면서 회사를 하루 쉬는 날이었다. 세상은 스자쿠의 빈 자리가 있음에도 크게 흔들리는 것 없이 스스로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아내는 잠시 모임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스자쿠는 혼자서 집을 보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는 그 시간에, 옆집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라, 를르슈? 학교 안 갔어?”
대문 밖으로 나오기까지 한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놀란 듯 했다. 그는 교복 차림도 아니었다. 평범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늘씬하게 빠진 몸에는 맞춘듯이 잘 어울렸다. 어디에 놀러 나가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학생은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하는 법이었다. 스자쿠는 으음, 하고 조금 엄한 어른의 모습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를르슈는 찔리는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출석 일수는 잘 세고 있으니까 유급은 걱정 없는데….”
“그런 변명을 하라는 게 아니잖아. 왜 학교 안 갔어? 누가 괴롭혀?”
“그럴 리가요.”
“그럼 왜 안 갔어?”
“…….”
대답이 없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뭐, 더 이상 캐묻진 않을게. 네 사정도 있겠지. 그렇지만 늦어도 학교는 가야 돼.”
“하하, 괜찮아요.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
“어머니가 알고 계시면 더 큰일이지!”
“……쿠루루기 씨는 이상하네요.”
보통은 이런 애, 상대 안하고 내버려두던데.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를르슈는 신경이 쓰이는 걸. 그의 움츠러든 어깨를 툭툭 털어주면서 스자쿠는 말했다.
“어디 가려던 중이었어?”
“잠깐 역 앞에 가려고요. 그런데… 뭐, 이제 안 가도 돼요.”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뇨, 그냥 쇼핑이요.”
“쇼핑을 하려고 학교를 쉬어?”
“제 사정이 있다고 안 물어본다고 하신건 쿠루루기 씨에요.”
를르슈의 지지 않는 말대답에 스자쿠는 허어, 하고서 길게 탄식했다. 그래, 내가 한 말은 지켜야지. 스자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그런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학교 가게?”
“늦어도 학교는 가야된다고 하셨잖아요.”
“흐음…. 어른 말이라고 들어주는구나.”
“글쎄요.”
를르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른 말이라면 다 들어줄 정도로 착하진 않아서요. 어딘가 영악한 웃음이었다. 그런 발칙한 말에 스자쿠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잘 다녀와. 스자쿠의 배웅에 를르슈는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
금요일 밤이었다. 회식이 끝난 술집 앞에서 스자쿠는 술을 깰 겸 담배를 피던 중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섞인 소음 사이에서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집은 안락한 장소는 아니다. 거기에서도 스자쿠의 역할을 해내야만 하니, 어디도 편한 곳이 없었다. 이렇게 몰려있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다들 비키고 그냥 사라졌으면. 아니면 내가 사라지던가. 스자쿠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담뱃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을 때였다. 어둑한 길거리의 모퉁이 사이로 하얀 인영이 보였다. 하얀 셔츠, 검은 바지. 평범한 착장이었지만 그것에 시선이 가는 것은 그 뒷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였다. 그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하고 있었고, 청소년은 길거리에 있는 것이 위험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술집 주변의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위험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소리 내어 부르려고 했다. 를르슈, 위험하게 여기에 왜 있어, 라고 말하며 그를 타이르려고 했다.
그러나 곧 를르슈가 찾는 사람이 왔다. 스자쿠 또래의 남자였다. 구겨진 수트가 꼴사나운 남자는 를르슈의 앞에서 지갑을 꺼내보였다. 돈을 센다. 를르슈에게 건넨다. 확인한다. 를르슈는 그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그의 품에 반쯤 기댄 채로 걸었다.
이 거리의 끝에는 러브 호텔이 펼쳐진다. 를르슈와 그 남자는 거리의 끝까지 걸었다. 스자쿠는 그것을 뒤쫓다가, 어느 순간 그 둘을 앞질렀다.
를르슈를 데리고 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미쳤어? 그런 짓을 왜 하고 있어?!”
를르슈를 샀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지갑에 있는 돈을 있는대로 꺼내주며 스자쿠는 이를 악물었다. 를르슈를 호텔 밖으로 데리고 왔다. 그의 차게 식은 손을 그러쥐고서 미친듯이 걸었다. 빠른 보폭으로 걷는 스자쿠 때문에 뒤에서 를르슈가 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스자쿠는 이 거리의 막다른 곳까지 걸었다.
다시 스자쿠가 를르슈를 처음 보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를르슈가 한숨 고르고 있을 때, 스자쿠는 그에게 악을 지르듯 물었다. 스자쿠의 그 물음에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이 필요해? 용돈이 부족하니?”
“아, 아니에요.”
“일이 하고 싶다면 좀 더 떳떳한 일을…!”
“아니라고요!”
스자쿠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괜한 자존심에서 흐르는 눈물인지, 아니면 이런 수치스러운 상황을 들킨 것에 대한 서러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웃고 있던 를르슈가 울고 있는 지금이 믿기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놀란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감싸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화내서 미안. 그래도 너무 놀라서.”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어요.”
“그럼 왜 그랬어?”
“외로워서….”
를르슈는 울먹거리면서 스자쿠의 품에 기댔다. 외로워서 그랬어요. 를르슈의 눈물이 스자쿠의 셔츠자락을 적셔가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있는 소년의 눈물은 따뜻했다. 스자쿠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외롭다, 외로워,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아. 를르슈는 온몸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보통의 쿠루루기 스자쿠라면, 울고 있는 소년을 달래서 그를 집까지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알리고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어른으로써 그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달랐다. 스자쿠는 그를 데리고 집앞까지 왔다. 왼쪽으로 가면 를르슈의 집, 오른쪽으로 가면 스자쿠의 집이었다. 스자쿠가 향한 곳은 왼쪽이었다.
“집에 혼자야?”
“…네.”
울음으로 잠겨있는 를르슈의 목소리에 스자쿠는 무언가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 어딘가가 크게 고장이 나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를르슈를 앞세우고 그 집으로 향했다. 를르슈는 제 뒤를 바짝 따라오는 스자쿠에게 무어라 말하지도 않고서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항상 옆집으로만 느껴졌던 곳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집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거실 풍경 속에서 를르슈가 혼자 서있었다. 겨우 보이는 실루엣으로 그를 붙잡은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있는 를르슈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쿠루루기 스자쿠라면, 그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키스했다.
한 번 선을 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의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입술에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벌려 혀를 삼켰고, 스자쿠의 혀를 달게 빨아들이면서 헐떡거렸다. 히끅거리는 소리가 갸냘프게 울리는 것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밋밋한 가슴팍에는 유두가 바짝 서있었다. 스자쿠가 손끝으로 그것을 문지르면 를르슈는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소리로 울었다. 를르슈는 익숙하게 스자쿠의 손길을 이끌었다.
그는 남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몸을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스자쿠의 몸을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능숙한 그 모습에 스자쿠는 괜히 화가 났다. 그의 몸에 삽입하는 순간, 기분 좋게 울음을 터뜨리는 를르슈가 얄미워서 일부러 허튼 곳을 찌르며 피스톤질을 했다.
잘못했어요, 하고 우는 를르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것은 자신인데, 를르슈가 빌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기만 했다. 더 이상한 것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이성적인 사고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외치고 있었음에도, 스자쿠는 를르슈가 지쳐서 나가 떨어질 때까지 섹스를 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고, 벗어날 수 있었지만, 스자쿠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침대에 누워 있는 를르슈의 부어오른 눈가를 만지면서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 수가 없었다.
*
를르슈가 언제 또 외로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그의 집에 자주 찾아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집에 들리지 않았고, 를르슈는 홀로 스자쿠를 맞아주었다.
를르슈의 집에 있는다고 해서 무조건 섹스를 하는건 아니었다. 가볍게 키스만 할 때도 있었고,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서로 끌어안고만 있을 때도 있었다. 등을 맞대고 책을 읽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를르슈와의 시간은 잘 흘러갔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스자쿠에게 어떠한 역할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스자쿠에게 해방감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 해방감 이상으로 를르슈에게 끌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미궁 속이었다.
회사에서 늦는다는 핑계로 하루에 한 시간씩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섹스를 할 땐 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예 자고 가기도 했다.
이것을 외도라고 불러야 하는가?
우리 사이는 불륜인가?
스자쿠는 를르슈와 자신을 ‘우리’로 묶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놀라웠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반복하면서 를르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를르슈는 돌아보면서 웃었다.
“왜요?”
“를르슈는 이제 안 외로워?”
“…….”
무언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이 관계에 매듭을 짓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아니, 매듭을 짓는다면 보다 튼튼하게 매듭을 짓고 더 견고한 단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를르슈는 굳은 얼굴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을 기대했다. 무슨 말이었든 간에, 스자쿠는 그 말을 다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헤어지자, 그만두자, 찾아오지 말라, 그런 말들도 좋았다.
어쩌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를르슈라면 지금의 관계가 얼마나 비생산적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내린 정답에 대해서 스자쿠는 최선을 다해줄 생각이었다.
“외로워요.”
“왜?”
“결국에 쿠루루기 씨도 저 버리고 떠날 거니까요. 어차피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 너무 외로워요. 같이 있는 것도 외로워요.”
여전히 외롭다고 말하는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프다고 훌쩍거려 눈물이 고인 것을 모두 빨아들였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 위로 손을 훑으면서, 제가 이제껏 물고 빨았던 몸을 느꼈다.
“안 되겠죠….”
“뭐가?”
“쿠루루기 씨랑, 같이 있고 싶은데.”
“…….”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내가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더 어른이었으면….”
“를르슈.”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를르슈를 끌어안고서 그를 다독였다.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은 포옹 속에서 를르슈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를르슈의 정답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스자쿠는 울고 있는 를르슈를 품에 안은 채로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 아버지가 정해준 직업,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 그렇게 꾸려진 가정.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런 풍경.
울음을 멈춘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의 상냥한 키스에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됐다고 말했다.
“이제 그만두고 싶으니까 그런 걸 물어본 거 잖아요.”
“아냐, 를르슈.”
“그럼 왜 물어봐요?”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확실하게.”
“덕분에 확실해졌어.”
스자쿠는 를르슈와 이마를 맞대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스자쿠라고 불러. 나를 스자쿠라고 불러줘.”
*
그녀는 버려진 것이다. 상냥한 남편으로부터, 자신이 지키고 꾸려왔던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 여러 번 고민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마냥 흐리게 보였다.
그 안개 속에서 웃고 있는 소년과 마주했다. 옆집에 사는, 나이는 열일곱, 고등학생, 어머니의 해외 출장이 잦아 거의 혼자 살다시피하는, 브리타니아 기숙학교에 머물고 있는 여동생을 끔찍하게 여기는 그 소년. 꽃이 피는 듯한 유려한 웃음으로 저를 바라보는 소년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다. 망설이고 있는 그녀에게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빨리 이야기 할까요? 스자쿠가 기다릴 지도 몰라서요.”
“왜, 하필… 스자쿠 씨였나요?”
고작 나오는 첫 물음이 그것이었다. 그래, 나는 계속, 줄곧 이것이 궁금했어.
왜 하필 그였을까. 그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내 남편이고, 그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만드는 거야? 내가 무언가, 네게 잘못했다면, 제발 용서해줘. 그 사람을 돌려줘.
그런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추태를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필이면 스자쿠냐니, 그런 말은 좀 이상하죠. 스자쿠가 저를 고른 거예요.”
“…….”
“그런 말은 스자쿠한테 물어보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저는… 스자쿠를 고를 수가 없었거든요. 왜냐면, 당신이 있었으니까요.”
당신이라는 말에 그녀는 속이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비수가 박히다 못해 꿰뚫리는 감각. 소년의 말은 언젠가 그가 했던 말과 겹쳐지는 것 같았다.
‘왜 하필 그 애랑…! 당신 정말 미쳤어요?!’
‘미쳤다고 해도 할 말 없어. 나도 이제 한계야.’
‘다시 생각해봐요, 아니잖아요, 내가 더 잘할테니까.’
‘아니. 괜찮아. 당신은 잘해왔어. 앞으로도 잘하겠지. 근데 나는 아니야. 를르슈가 아니면 할 수 없어. 를르슈가 나를.’
‘…….’
‘나를 골라줬어.’
나는 를르슈를 사랑해주기로 했어.
그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과 달라보였다. 그럴 수 밖에.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것에, 소년은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건넸다. 안 돌려줘도 돼요. 그 손수건은 원래 남편이었던 그의 것이었다. 그 손수건을 골라준 것도 그녀였다.
그 손수건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그때는 알았을까.
소년은 손수건만 남긴 채로 떠나버렸고, 홀로 남은 그녀는 여전히 버려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