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Don't cry, baby (R18) http://very2ndplace.com/CG2/2557
임신, 유산 주의!
지금 당장 벗지 않으면 입고 있는 모든 옷을 다 찢어버릴 것 같은 스자쿠의 시선에, 를르슈는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추위로 꼿꼿하게 서기 시작하는 유두 끝을 스자쿠가 손으로 매만졌다. 하아, 하고서 깊게 한숨을 쉰 스자쿠는 키스를 했다.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입술은 차갑게 느껴졌다. 더 이상의 변명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을 키스로 틀어막았다. 혀뿌리가 아려올 정도로 깊은 키스가 몇 번이고 이어진 탓에 를르슈는 입술 끝이 쓰라릴 정도였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북받쳐 터진 눈물 때문에 시야는 얼룩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가만히 굳은 를르슈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나서 구멍을 푸는 손길은 거칠었다. 그저 풀기만 하는 손끝에는 쾌락을 주겠다는 의미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를르슈를 쾌락으로써 능욕했던 스자쿠는 이제 그것마저도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믿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것을 아래로 받으면서 숨을 꾹 억눌렀다. 새어나가는 울음소리에 스자쿠가 입을 막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입 안쪽 살을 깨물어가면서 소리를 참고 있으면, 이번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스자쿠가 다시 입술을 가까이 했다.
이제 키스는 싫었다. 고개를 돌려서 피하고 있으면 스자쿠가 를르슈의 뺨을 때렸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꼐 를르슈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지간해서는 손찌검을 하지 않는 스자쿠의 따귀에 를르슈는 다시 눈물이 터졌다. 드디어 좀 멈추나 싶었는데 제 처지를 다시끔 되새기는 그 폭력에 를르슈는 고개를 돌려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거부할 권리는 없어, 를르슈.”
“…나, 난 거짓말 안 했어.”
“또.”
스자쿠가 를르슈의 몸을 쾅하고 들이받는 느낌에 를르슈는 훌쩍거렸다. 아으, 응…. 이제 벌어진 입술에서는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신음이 들렸다. 그저 뒤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인데도 를르슈는 그 들어찬 느낌에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연민이라도 얻고 싶었어? 불쌍하게 보여서 내가 그만두길 바랐어?”
“하으, 윽! 아니, 야…. 난, 안 그랬어…!”
“를르슈!”
분명 울고 있는 것은 를르슈였는데, 를르슈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스자쿠의 목소리도 눈물로 젖어있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고개를 저으면서 시트에 제 뺨을 부볐다. 그럴 리가 없지. 스자쿠가 울 리가 없어. 아무리 그렇게 잘 우는 녀석이래도, 지금 상황에서 울지는 않을 거야. 를르슈는 희미해지는 머릿속으로 스자쿠의 것을 더욱 조였다. 스자쿠가 숨을 참으며 후욱하고 숨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정말 최악이야. 비열하고, 악랄해….”
어떻게 아이까지 이용하면서.
를르슈는 제 귀를 의심했다. 스자쿠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를르슈의 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뜨거웠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깨물었다. 피가 동그랗게 맺혀서 잇자국대로 부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스자쿠가 울고 있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신경이 쓰였다.
—어째서 우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 했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를르슈가 몸을 돌려 스자쿠 쪽으로 돌아보려고 했다. 그러자 스자쿠가 그의 뒤통수를 침대에 처박았다. 그대로 베개에 억눌린 숨 때문에 를르슈는 돌아볼 수 없었다. 스자쿠의 또 다른 손이 제 얼굴 바로 옆에서 그의 몸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엉덩이만 높이 들린 채로 빠른 스퍼트가 이어졌다. 하으, 으응! 아아앙! 를르슈가 짓눌린 신음으로 크게 울었다. 스자쿠의 정액이 안쪽에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 아직도 울고 있어? 를르슈는 왜인지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한 섹스는 체력을 빠르게 갉아먹었고, 를르슈는 입술을 열 힘조차 없이 잠에 빠져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
를르슈는 꿈 속을 걷고 있었다. 그것이 꿈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나나리가 눈을 뜨고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의 팔목을 붙잡은 나나리의 작은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나리? 를르슈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면, 나나리는 고개를 돌아보며 를르슈에게 대답했다.
“왜요, 오라버니?”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리에스로 돌아가는 길이잖아요?”
이번엔 나나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를르슈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돌아보는 눈에 비친 제 모습은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더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나나리의 대답이었다. 아리에스로 돌아가는 중이라니. 아리에스에는 돌아갈 수가 없다. 언제 어머니를 죽였던 테러리스트가 를르슈와 나나리를 죽이려고 할 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 우리는 그래서….
“그럴 수가 없지. 우리는… 애쉬포드 학원에서 살고 있잖아.”
“무슨 소리에요, 오라버니. 애쉬포드 학원이라뇨? 거기가 어딘가요?”
걷다가 잠깐 잠이라도 드셨나요? 오라버니답지 않네요. 나나리가 하는 말에 를르슈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오라버니, 쉬지도 않고 계속 일하셨죠. 많이 지치셨나봐요.”
“…….”
“아리에스에 가서 티 파티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오라버니가 이렇게 피곤해하시면 그냥 쉬어야겠어요. 저도 오늘 함부로 다른 곳에 허락 안 받고 놀러 나간 건 반성할게요.”
“…….”
“그렇지만 어머니도 브리타니아 밖에 계시고, 오라버니도 바쁘고…. 저는 외롭단 말이에요.”
지극히 현실감이 떨어지는 꿈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건강한 나나리가 있는 꿈이라니.
를르슈는 입맛이 썼다. 나나리의 말대로 이 길은 아리에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어른들 몰래 아리에스 밖을 빠져나갔던 황궁 어딘가의 샛길이었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즉 아리에스 근처에 다 왔을 무렵에, 누군가가 둘을 불렀다. 를르슈 전하, 나나리 전하! 외치는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다.
“누구지?”
“오라버니, 오늘 정말 이상하시네요. 저 목소리는 ———잖아요?”
“……뭐?”
나나리의 목소리는 어딘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그 둘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립고 귀에 익은 목소리다. 를르슈를 부르는 호칭은 낯설지만, 를르슈의 마음을 달래주는 목소리. 믿고 기댈 수 있는 친구와 같은.
를르슈가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를르슈의 팔을 다시 꽉 붙드는 손길이 있었다. 나나리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억센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매섭게 눈을 뜨고 있는 남자가 를르슈를 노려보고 있었다.
“를르슈.”
를르슈는 그 남자를 모른다. 하지만 그 남자는 를르슈를 아는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아,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이 목소리. 방금 전에 를르슈와 나나리를 불렀던 남자의 목소리와 똑같다. 날이 선 녹색 눈동자.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색의 망토. 를르슈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스자쿠.”
“너는 정말 최악이야.”
“…….”
“비열하고 악랄해.”
“…나는, 스자쿠.”
“어떻게 아이까지 이용하면서.”
“아니야! 몰랐어, 정말이야!”
를르슈의 외침에도 스자쿠는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를르슈에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스자쿠의 뒷모습에 를르슈는 그를 불렀다. 스자쿠, 스자쿠! 발은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를르슈를 부르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꿈 속의 소리였다. 를르슈 전하, 전하! 한쪽에서는 를르슈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너는 정말 최악이야. 다른 곳에서는 나나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라버니, 어디 계시나요?
를르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은 이미 피로 물든지 오래였다. 제로의 가면을 쓰고 나서부터 이 손의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것이라고 각오는 했었다. 그 각오를 헛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나나리를 위해서, 브리타니아를 부수기 위해서. 제로로써. 를르슈는 그 피투성이 손에 얼굴을 묻으면서 눈을 부릅떴다. 이 정도 희생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이런 꿈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할 수 있어. 깨어나면 되는 거야.
“그 아이는 무슨 죄야?”
다시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악몽은 쉽게 깨어날 수가 없다.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 를르슈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귀를 틀어 막았다.
“그 아이가 그렇게 죽은 건, 다 너 때문이야.”
“……아니야.”
“네가 그런 짓을 하니까, 아이가 대신 벌을 받은 거라고.”
“아니야.”
“너의 죄를 아이에게 묻다니.”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야, 난, 난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야.”
“비겁해.”
그렇게 또 도망가는 거야?
너 혼자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야?
나는? 너와 나의 아이는? 또 다시 버리고 가는 거야?
*
그 섹스 이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를르슈는 일주일 내내 혼자서 앓았다. 악몽에서 시달리며 몇 번이고 혼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꿈의 내용은 매번 바뀌었다. 대체로 를르슈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꿈이었지만, 그 중 최악은 아이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묻는 스자쿠가 나오는 꿈이었다.
스자쿠에게 아니라고 몇 번을 외쳐도, 그에게 아닌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현실에서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스자쿠는 일주일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을 감시 카메라로 를르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인 듯 했다. 그에게도 를르슈의 임신과 유산은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를르슈는 아리에스에서의 생활을 다시 재개했다. 먹고, 자고, 생활했다. 겉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를르슈의 정신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나나리에 대한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스자쿠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하루의 대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보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을 삼켰다. 먹은 음식은 대개 다 토해내고 말았다.
말라가는 몸을 보면서도 를르슈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나리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건사해야한다거나, 다시 제로로써의 활동을 하기 위해 스자쿠의 틈을 노린다거나…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가끔은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여기에 아이가 있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아이. 스자쿠와 저의 아이가 있었다. 자신이 제로가 아니고 스자쿠의 연인이었다면, 그 섹스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면, 충분히 사랑 받으며 태어날 수 있었던 아이가 죽었다. 이 피투성이 손이 아니라, 따뜻하고 깨끗한 손으로 안아줄 수 있는 아이.
내가 죽인 거야.
그런 생각에 휩쓸리는 날이면 를르슈는 베개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베개로 입술을 틀어막은 채로 울었다. 눈물로 번져가는 베갯잇은 금세 축축해졌다. 울고 있는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이름 하나 붙여주지 않았던 아이가 죽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울고 나면 꼭 꿈을 꾸었다. 그럴 때면 꼭 스자쿠가 나왔다. 하지만 를르슈를 탓하는 스자쿠가 아니라, 를르슈를 달래주는 스자쿠였다. 어느 때는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을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를르슈를 ‘전하’라고 부르면서 다정하게 말을 거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모습이기도 했다. 마치 를르슈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런 상냥한 세계가 있었다면, 그런 스자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런 꿈을 꿀 때면 더 깨어나기가 싫었다. 악몽이 길게 이어졌다. 현실이 악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계속 꿈을 꾸다보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를르슈는 악을 지르고 싶기도 했다.
내가 죽어야 끝나는 건가?
내가 죽어야지, 이 악몽이 끝나는 건가?
죽는 것이야말로 정말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은 이제 없었다. 편해지고 싶었다. 를르슈는 배를 그러쥐면서 헐떡거렸다.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탓에 눈시울이 뜨겁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믿었던 친구를 배신했고 사랑하는 여동생을 놓아버렸다. 모두 를르슈가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죄의 대가를 어떻게 치러야하는지, 죄를 누구에게 용서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를르슈는 이제 제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밤 를르슈가 자살시도를 한 것이다.
*
스자쿠가 그날 를르슈의 자살기도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서 혼자서 를르슈의 상황을 보고 있던 때였다.
어둑한 침실 안에서 를르슈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는 곧 컥컥대는 숨으로 울음을 참으려는 듯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이내 발소리가 들리면서 를르슈는 식당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뒤지는 소리와 함께……그리고 를르슈가 손목을 그었다.
의사를 부르고 상황이 마무리 되고 나서야 스자쿠는 를르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마르고 초췌해졌다. 핏기 없는 얼굴은 그가 꼭 죽어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죽으려고 했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나나리 때문에 그런 짓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아직 약에 취해 누워있는 를르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스자쿠는 중얼거렸다.
나나리라는 카드를 쥐고 있는 이상, 를르슈는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나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스자쿠와의 섹스도, 이름 없는 아이의 유산도 별 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약한 척 굴어도 다시 악에 받쳐서 움직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 이상으로 유약한 인간이었다. 하는 짓은 최악이고, 비겁하지만, 그는 나약하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를르슈의 마른 얼굴을 장갑을 낀 손으로 만져보며,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러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잖아.”
마치 널 용서해줘야할 것 같아.
를르슈에게 닿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스자쿠는 손을 거두었다. 연민을 품어서는 안 된다. 동정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유페미아의 원수, 나나리를 위한다는 변명을 앞세우고서 제 이기심을 채우는 남자다. 틈을 줘서는 안되는 상대라는 것을 자꾸 잊고서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지는 제 마음을 억눌렀다.
왜 그랬어, 를르슈?
몇 번이고 물어본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더 있다가는 어딘가가 무너질 것 같아서 스자쿠는 침실을 나서고 아리에스 밖으로 나왔다.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었다면, 분명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을 정원이 눈앞에 보였다. 황폐한 흙먼지투성이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를르슈와 나나리가 제대로 황자와 황녀로 성장했다면 이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겼을 것이다. 그들은 누려야할 것들을 박탈 당한 채로 일본으로 쫓겨왔고, 스자쿠를 만났다.
그 만남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어린 시절, 그 여름의 모든 것까지 거짓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