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어느때보다 길어지고 날씨는 한층 더 무더워지는 날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봄보다는 더 가벼워졌다. 어느덧 다가온 여름에 대해서 모두들 들떠있는 와중에, 를르슈는 우울한 얼굴로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눈앞에 놓여있는 케이크 접시를 보고서 를르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앙증맞은 당근 모양의 초콜릿 장식이 되어있는 케이크가 를르슈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를르슈는 그 케이크가 영 달갑지가 않았다.
“전하, 케이크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주변에 있던 메이드가 의아한듯이 물어보면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케이크는 멀쩡했다. 오늘도 아리에스의 파티쉐가 정성들여 만든 것이 틀림 없었다. 여름 당근이 제철이라면서 요즘 들어 당근이 들어간 요리도 많이 올라오고 다양한 당근 파티가 아리에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를르슈로서는 곤혹스러웠다. 당근은 를르슈가 싫어하는 음식 중에 하나였다. 기본적으로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를르슈지만, 당근 만큼은 어려웠다. 그 특유의 달달한 맛이 혀끝에서 찝찝하게 남는 게 싫었다. 하지만 음식을 남기는 건 나쁜 거라고 배웠기에, 식사에 올라오는 당근은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나 간식 시간까지 당근을 마주해야한다는 사실은 너무 가혹했다.
“오늘은… 간식 안 먹을래.”
“네?”
“배도 안 고프고. 어머니는 어디 계셔? 어머니한테 갈래.”
사실 당근 케이크만 아니었다면 기꺼이 티 타임을 즐겼을 테지만, 를르슈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당근이 싫어서가 아니야,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그런거야. 를르슈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리안느 님은 지금 의사와 함께 계셔서요.”
“나나리 보러 가신 거야?”
“네, 전하.”
를르슈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곧 태어날 여동생 나나리를 위해 의사를 만나러 갔다면 어머니는 저녁에 돌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를르슈 혼자 아리에스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배가 산처럼 부푼 어머니는 를르슈에게 여동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를르슈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배가 부풀어오르는 걸 보고서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끝없이 배가 부풀다보면 펑하고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어머니 옆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이제는 그런 걱정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기’에 대해서 배운 를르슈지만, 그러는 를르슈 또한 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빈 자리는 왠지 크게 느껴졌다. 오늘은 뭔가 다 별로였다. 간식은 당근 케이크에, 놀아줄 어머니는 아기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그래도 오늘은 나이트 오브 세븐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스자쿠가 온다구?”
“네, 마리안느 님께서 부탁하셨대요. 곧 오실 거예요.”
어둡게 가라앉을 것 같은 분위기는 금방 밝아졌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온다는 말에 창문 너머로 현관 쪽이 제일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서재로 달려갔다. 뛰시면 안 돼요! 메이드의 말에도 를르슈는 발을 구르며 달렸다.
헐떡거리며 창틀에 몸을 기댄 를르슈는 재빨리 밖을 살폈다. 현관에 나가는 것은 어머니의 허락이 있을 때 말고는 쉬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스자쿠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곧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현관 앞에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차가 오고 있었다. 차문이 열리고 나면 익숙한 푸른색 망토를 두른 사내가 나타났다. 스자쿠였다.
스자쿠! 를르슈는 창문에 바짝 기대면서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밖에서 들릴 리가 없는게 분명한데도, 스자쿠는 를르슈가 있는 서재 쪽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전하, 하고 부르는 입모양도 보였다. 를르슈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스자쿠의 모습이 보였다.
스자쿠랑 얼른 만나고 싶어졌다.
*
“눈이 좋으시네요, 나이트 오브 세븐.”
“예전에 마리안느 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전하께서는 저쪽 방에서 자주 기다리신다고.”
“그렇군요.”
“마리안느 님은?”
“잘 지내십니다. 오늘은 검진이 있는 날이라 자리를 비우셨지만요.”
나이트 오브 세븐을 마중 나온 메이드는 그를 아리에스로 안내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항상 밝은 얼굴로 아리에스의 일을 도맡아 하는 그녀의 한숨에 스자쿠가 의아한듯이 쳐다보았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 요새 편식을 하셔서요.”
“전하께서 편식을?”
“네. 당근을 잘 안드세요.”
“……당근.”
“케이크로 드시면 좀 드시지 않을까 해서 준비해봤는데도 영….”
스자쿠에게 푸념을 늘어놓으며 메이드는 곧 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보면 전하께서 아무리 의젓하셔도 아이는 아이죠.”
“그래도 편식은 별로 좋은 게 아닌데….”
“전하 스스로는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딱히 말씀은 안 드렸는데 요즘은 좀 심해지셔서… 아, 나이트 오브 세븐! 이건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비밀로 하라구요?”
스자쿠는 뜻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드는 그런 스자쿠의 반응에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전하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구요.”
“그럼 더더욱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아직까진 마리안느 님도 별 말씀을 안 하시는 거 보면…. 아, 그리고 아이들도 크면 또 저절로 먹기도 하니까요.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인상 푸세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전하를 걱정해주시는 건데요, 뭘.”
대화가 끝이 날 무렵에 아직 열리지 않았던 문 쪽에서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는 작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머, 전하. 갑자기 여시면 안됩니다! 그치만, 빨리 안 열어주니까 안 들어오는 거 아니야? 를르슈의 목소리와 다른 메이드의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스자쿠가 오는 사이를 참지 못하고 를르슈가 문으로 달려든 모양이었다. 스자쿠를 발견한 를르슈는 활짝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다가왔다.
“스자쿠!”
“를르슈 전하. 마중을 나와주셨군요.”
“너무 안 와서 걱정했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작은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장갑을 낀 손이 제 손을 감싸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를르슈는 걱정했다는 말과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를르슈의 웃는 얼굴에 스자쿠는 덩달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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