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이번주 금요일에 미팅 있는데 올래? 4 대 4인데.”
“금요일?”
“응.”
리발의 제안에 를르슈는 고민하는 듯 휴대폰 속의 캘린더를 훑어보았다. 여러가지 일정들이 적혀있는 캘린더 속에서 금요일과 그 다음날인 토요일은 아무런 일도 없이 깔끔했다. 그 사이에 리발은 초조한 얼굴을 하면서 를르슈의 참석 여부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발 자식,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벌써 간다고 말한 거 같은데…. 를르슈는 그가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금요일과 토요일은 비워두는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미팅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이렇게 휴대폰을 보면서 일정을 살피는 척 하고 있지만 사실 리발의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게.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아자! 고마워!”
“항상 가던 곳이지?”
“응! 에리어11에서 봐!”
“에리어11, 알겠어.”
미팅이라는 자리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를르슈가 즐기는 술자리는 굳이 따지자면 모르는 사람들과 알아가며 술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무르익는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를르슈가 미팅 자리에 매번 나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애인이 필요해서? 그렇다면 를르슈는 진작에 애인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자타공인 수려한 꽃미남이었고, 쌍둥이 동생들에게 지극정성이라는 점을 빼면 나름 성격 면에서도 완벽한 남자였다. 미팅 자리에서 애인을 만드려면 이미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거의 매주 잡히는 미팅 자리에 꾸준히 나가고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사실, 를르슈는 애인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가 미팅 자리에 나가는 이유는 오로지 ‘에리어11’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이번주 금요일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레었다.
* * *
에리어11은 대학가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집이었지만, 그 거리에 있는 술집 중에 단언컨대 가장 큰 룸 형태의 술집이었다. 그러다보민 미팅을 하는 젊은 청춘남녀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평일과 주말을 나눌 것 없이 항상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를르슈가 그곳에 처음 가게 된 것은 학기 초의 분위기에 휩쓸려 미팅에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때도 리발의 부탁에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이었다. 다음날 동생들과의 약속을 어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를르슈는 시종일관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미팅 상대들은 를르슈의 등장에 모두들 들뜬 채로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기분도 나쁘고, 먹을 만한 안주는 끌리는 것이 없고 술 밖에 마실 게 없어서 를르슈는 들이붓는대로 다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이 마셨던 모양인지, 를르슈는 술을 따르다가 술잔을 엎지르고 말았다. ‘아, 이런. 씻고 올게.’ 를르슈는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끈적거리는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도 가관이었다. 칸칸이 토악질 하는 소리가 들려서 덩달아 속이 나빠지는 것 같아 를르슈는 세면대에서 손만 씻고 얼른 나왔다. 그때였다.
‘손님, 괜찮으세요?’
나오고 있던 를르슈가 조금 휘청거리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가게의 유니폼을 입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를르슈는 취기로 멍한 머리를 겨우 깨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상대는 곤란한 듯이 미간을 좁히면서 말했다.
‘제가 볼 때는 안 좋아보이시거든요, 잠깐 여기서 쉬다 가세요.’
‘네?’
‘여기가 찬 바람도 들어오고 그러니까 술도 좀 깰 거예요.’
‘그, 렇게까지 안 해도.’
를르슈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남자는 재빠르게 카운터 근처의 작은 창문을 열어주고 의자까지 내어주며 를르슈를 앉혔다. 실제로 찬 바람도 들어오고, 술도 깨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동생들한테서 오늘은 많이 늦냐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술 냄새가 가득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면서, 를르슈는 천천히 답장을 써내려갔다.
그럴, 것, 같, 네. 먼저, 자고, 있어. 최대한, 빨리…
‘이거 드실래요?’
‘예?’
‘초코우유인데. 이거 먹으면 속도 좀 가라앉을 거예요.’
‘초코우유?’
‘헤헤, 술 마실 때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를르슈는 메시지를 보내다 말고 남자가 내미는 초코우유를 받아들였다. 포장도 뜯지 않은 모양이 그대로인 초코우유는 시원했다. 마셔요. 남자가 하는 말에 를르슈는 홀린 듯이 그것을 뜯었다. 아, 빨대 줄게요. 남자는 카운터 어디에서 찾은 빨대를 를르슈에게 내밀었다. 그걸 입에 문 채로 쪽쪽 빨고 있으면 남자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왜 웃지? 를르슈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둥글게 휘는 것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를르슈가 빤히 맞추던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말을 걸었다.
‘초코우유 맛있죠?’
‘아, 네.’
‘근데 여기 안주는 별로죠?’
‘…직원이 그런 말 하면.’
‘만드는 사람도 별로라고 말해요. 재료가 특히. 근데 사람들은 술 마시러 자주 오는 거니까 클레임 같은 건 적은 편이지만.’
‘그런 건 힘들 거 같아요.’
‘뭐가요? 클레임?’
‘뭐, 이런 저런…. 여기는 술 마신 사람들 상대하는 거니까 더.’
‘일하면서 익숙해지는 거죠, 뭐.’
그와의 대화는 미팅의 상대들과는 다르게 잔잔하게 맞춰가는 기분이 들었다. 를르슈가 술이 깨는 것과 동시에 주방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크게 질렀다. ‘스자쿠! 메뉴 나왔어!’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금방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두 손 가득 냄비가 들려 있었다. 어디선가 시킨 메뉴인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를르슈에게 말했다.
‘술 깨면 들어가요. 그럼 저는 일하러 갈게요.’
그는 를르슈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서 다른 룸으로 바쁘게 움직였고, 를르슈는 조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창문을 닫고서 다시 자기 룸으로 돌아갔다. 머릿속에는 이상하리만큼 그 남자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이름은 스자쿠. 갈색 곱슬머리가 정리가 안된 것처럼 살짝 들떠있고, 녹색 눈동자는 시원하게 빛이 나는 남자. 검은색 유니폼이 훤칠하게 잘 어울리는… 를르슈는 계속 그 남자를 떠올리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카운터에서 를르슈는 자신이 계산을 하면서 그 ‘스자쿠’를 찾으려고 한 번 더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카운터에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할 뿐이었다.
에리어11에 또 다시 가게 된 것도 미팅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는 리발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떠보듯이 ‘에리어11로 가면 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리발이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했고, 를르슈는 또 다시 스자쿠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
두 번째 방문에는 다행스럽게도 스자쿠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를르슈를 알아보고서는 눈을 맞추고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룸까지 안내를 하는 동안 를르슈는 스자쿠가 저에게 말 한 마디를 더 건네지 않을까 했지만, 스자쿠는 안내를 하고 나서 바로 사라졌다.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했을 때에 스자쿠가 오지 않을까 했지만, 이번에는 금발머리를 세 갈래로 땋은 남자가 들어와서 호쾌하게 주문을 받았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어딘가 실망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남자를 보지 못해서 속상하다니. 를르슈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술을 또 마신 채로 휘청거리고 있으면 스자쿠와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또 다시 술만 들이켰다.
‘또 많이 마셨네요, 손님.’
‘아….’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또 우연인 척, 술을 엎지르고 손을 씻으러 나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나오고 있던 스자쿠와 마주쳤다. 를르슈는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이 술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초코우유가 없는데…. 아, 비타민워터 있다. 주류회사에서 홍보물로 들어온건데 드실래요?’
‘막 줘도 되는 거예요?’
‘손님한테 홍보하는 거니까 되겠죠. 자, 여기 앉아요.’
그러면 또 지난 번과 같이 를르슈는 카운터 구석 자리에 앉아서, 그가 내미는 파란색의 비타민워터를 마시고 있었다.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뭐라고 대화를 시작하려는 때에, 누군가가 스자쿠를 불렀다.
‘스자쿠! 또 농땡이 피우고 있지?’
‘농땡이라니, 실례야, 카렌. 무슨 일 있어?’
‘4번 룸에서 너 찾더라고. 내가 주문 받으러 가니까 싫대.’
‘하하, 그래? 잠시만요, 손님. 주문 받으러 갈게요. 카렌, 손님 술 깰 때까지만 잠깐 봐드릴래?’
카렌이라고 불린 여자는 알겠다고 말하면서 스자쿠의 등을 룸이 있는 통로 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은 카렌은 를르슈의 앞에 남은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후—, 피곤하네요. 미팅하러 왔으면서 왜 서빙하는 사람을 꼬시려고 안달인건지, 원. 그쪽도 미팅이죠?’
‘아, 네.’
‘재미는 있어요? 아, 재미 있으니까 오는 거겠죠?’
‘그럭저럭.’
‘나 같으면 그런 시끄러운 자리에서 술이 안 넘어갈 거 같은데…. 주정뱅이들이랑도 계속 떠들어야하고.’
‘…….’
‘으, 싫다, 싫어.’
를르슈는 말없이 비타민워터를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술 다 깼어요? 룸에서 토하면 안돼요. 카렌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반듯한 미소를 돌려주며 말했다. 안 그래요, 술 다 깼으니까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를르슈의 예의바른 말에 카렌은 흐음, 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스자쿠가 했으면 조금 더 귀를 기울여서 대답했을 말들을, 카렌이 하고 나니 별로 감흥도 없고 시큰둥하게 대답한 것에 대해서 를르슈는 고민을 했다. 미팅이 이루어지는 룸에 들어오고 나면 그 고민은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은 스자쿠에게 반해버린 것이라고, 를르슈는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겨우 두 번 본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반하다니. 하지만 를르슈는 그런 성애적인 의미의 방황을 하기 보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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