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아르바이트 삼매경 중이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겠다는 뜻으로 대학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저지른 스자쿠는, 반항의 대가로 집안에서의 모든 경제적 원조가 끊기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해야만 했다. 각오는 했었지만 스스로 일해서 월세도 내야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므로, 스자쿠는 불철주야 일하기로 결심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성공한 정치가인 아버지는 스자쿠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엄격하게 굴었다. 19살까지는 미성년자이고, 아버지가 시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따라왔다. 그래서 대학까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로 진학하기까지 했다. 스자쿠의 모든 인생은 아버지가 다 설계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만든 편리하고도 잘 짜여진 스자쿠의 엘리트 인생 코스는, 대학교 입학식 날에 어느날 무너지고 말았다. 계기는 사소했다. 입학식을 위해 강당에 모여있는 신입생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다들 대학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그 사이에서, 자신만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즐기지 못하고 있고,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이 대학교 입학식에 있는 자체가 아버지의 뜻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증거였으니까.
스자쿠는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자퇴를 신청했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속내는 모르지만, 명문가 쿠루루기 집안을 알고 있는 학과장 교수가 거듭하여 말린 끝에 겨우 휴학으로 끝이 났다. 스자쿠의 휴학 소식은 아버지의 귀에 바로 들어갔고, 스자쿠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했다.
그 이후로 스자쿠의 삶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열악하고 각박해졌다고는 할 수 있지만, 스자쿠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일을 배우며 돈을 버는 것도 즐거웠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지. 나 스스로가 원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지.
사람들은 이제 시작되는 20살의 청춘을 아르바이트에 쏟는 것은 아깝지 않냐며 스자쿠를 걱정했다. 스자쿠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청춘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면, 스자쿠는 지금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뜻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라면 얼마나 행복한지, 스자쿠는 이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스자쿠는 그 행복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하나 추가해서 한 잔 주세요.”
바로 지금 눈앞에서 스자쿠에게 주문을 하고 있는 이 남자 때문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무얼 하는지도 모르지만, 이 남자 덕분에 스자쿠의 카페 아르바이트는 점점 일상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는 시급도 적고 해야 할 일도 많고, 외워야 할 레시피도 많았기 때문에 스자쿠에게는 그다지 좋은 아르바이트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스템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카페였다. 스자쿠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까지 한두 달 정도만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접게 된 것은 바로 이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에는 냉정한 어른 같았다. 아직 카페 일에 익숙해지지 못한 스자쿠가 만드는 음료가 늦게 나오는 것을 보고서 혀를 차던 모습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예쁘고 잘생겼는데 사람이 참 예민하다고 생각하며 스자쿠는 그의 번호를 불렀다. 그가 다가오면 왜인지 모를 박력 때문에 스자쿠는 긴장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캐리어에 담아달라고 말하는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누그러진 듯 했다. 다행이다. 스자쿠는 그에게 뒤늦게나마 점수를 딸 요량으로 음료들을 잽싸게 캐리어에 담으려고 할 때였다. 그때 점장이 다가와서 스자쿠에게 다음 음료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스자쿠는 그 남자를 그저 무사히 보낸 손님 한 명 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스자쿠가 아닌 점장이 캐리어에 음료를 담아주고 나서, 남자는 스자쿠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음료가 너무 늦게 나와서 화가 났나? 내가 너무 굼떴나? 하지만 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억울함과 속상함을 감추고서 스자쿠는 겨우 웃어보였다. 설마 웃는 낯에 침을 뱉으랴,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최대한 씩씩한 목소리로 나중에 또 와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남자는 그대로 잠시 굳어있다가, 바로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동안 잔잔하게 느껴졌던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스자쿠가 8잔의 요거트 스무디를 만들던 날, 스자쿠는 진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지적이고 냉랭한 분위기의 남자는 8잔의 요거트 스무디를 주문하면서, 스자쿠가 혼자서 주문을 다 처리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수 있다는 말에도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스자쿠는 8번의 믹서기 설거지를 하면서 한숨을 몇번이고 삼켰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음료 늦게 나왔다고 짜증냈으면서, 왜 지금은 기꺼이 기다려주는 거지?’
게다가 스자쿠를 쳐다보는 시선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는 것에 예민한 스자쿠는 노골적으로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스무디 8잔의 그 남자는 다음날에도 카페를 찾아왔다. 살인적인 주문을 했던 것 치고는 심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스자쿠는 그에게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왜 스무디만 8잔 사갔는지 궁금했고, 지금은 왜 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키는지도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남자는 ‘아뇨’, ‘네’라고만 대답하고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뿐이었다. 스자쿠는 미스터리한 그 남자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스자쿠를 계속해서 쳐다보는 시선은 감추지 않고, 그러면서 스자쿠에게 더 이상의 말 한 마디를 걸지 않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주문하고 있는 이 남자.
하지만 오늘은 특이하게도 이 남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하나를 추가하고 있었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스자쿠는 손님도 없이 한산한 카페에서 주문을 받다고 무심코 말을 걸고 말았다.
“샷 하나 추가……. 오늘 많이 피곤하세요?”
“네?”
“아뇨, 평소보다 커피를 더 진하게 드시는 거 같아서요.”
“아아…….”
“그러면 밤에 잠이 별로 안 오지 않아요?”
스자쿠의 말에 남자는 당황한 듯 했다. 그렇겠지, 커피를 파는 주제에 커피 많이 마시면 잠 안 오지 않냐고 물어보는 건 안 팔고 싶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으니까. 스자쿠는 스스로의 멍청한 질문에 한숨을 삼키면서 주문을 입력했다.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샷 하나 추가해서.
“죄송합니다. 카드로 계산하시죠?”
“아… 네.”
“카드 받았습니다. 바로 커피 드릴게요.”
“네.”
스자쿠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에게도 의문이었다. 남자는 스자쿠의 질문에 당황한 것처럼, 오늘은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멍청해 보이는 카페 직원에게 이제 흥미가 떨어진 게 아닐까…. 스자쿠는 평소라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자 어딘가 기운이 빠졌다.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감이 들었지만, 몸은 재빠르게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고 샷 하나를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고 있었다.
벌써 3개월째. 시급도 별로고 일도 많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이유였던, 이 남자와의 만남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울적해졌다. 스자쿠가 커피 준비를 마치자마자 남자는 타이밍 좋게 스자쿠의 앞에 바로 왔다. 타이밍이 좋은 게 아니라, 사람을 살피는 센스가 좋은 거겠지. 완벽한 어른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남자는 스자쿠에게 질렸을 지도 모른다.
스자쿠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나중에 또 오세요!’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을 해서… 오늘은 잠을 적게 잤어요.”
“네…?”
“그냥 아메리카노도 나쁘지 않은데, 3시부터 회의가 있는데 그때 정신 차려야 해서… 샷 추가 한 거예요.”
“아.”
“커피 많이 마시면 잠 못자는 건 맞는데, 오늘은 불가항력이에요.”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네! 나중에 또 오세요!”
스자쿠는 저에게 샷 추가를 한 이유를 설명해준 그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카페 음악에 뒤섞였는데도 또렷하게 들렸던 그 감각이 낯설었다. 스자쿠와 간간히 시선을 맞추면서 살짝 휘어지듯이 웃는 눈도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하셨구나.’
‘오늘은 잠을 적게 자셨다고….’
‘3시부터 회의가 있으셔서 샷 추가를…….’
‘커피 많이 마시면 잠 못 주무시는 편이시구나.’
‘오늘은 불가항력…….’
스자쿠는 30분 후 퇴근하기 위해서 유니폼을 갈아입을 때도 그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그 남자의 이름도, 하는 일도 알 수 없지만, 어제 야근을 해서 오늘 잠을 적게 잤고, 3시부터 회의가 있어서 샷 추가를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스자쿠가 물어보았던 질문들에 모두 성실하게 대답해준 것이었다.
냉랭하고 예민한 분위기의 어른인 줄만 알았는데, 스자쿠 같은 애송이에게도 상냥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스자쿠는 ‘상냥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엄청 상냥하게 대답해주셨어.”
스자쿠가 질문했던 것들에 풀어서 앞뒤 맥락까지 붙여서 설명해주는 상냥함. 스자쿠는 그의 상냥함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그때 스무디만 8잔 주문한 건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었겠지? 이것도 나중에 물어보고 싶다.
다음 아르바이트인 술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스자쿠는 오래도록 그 남자의 생각을 했다. 한 번 올라간 스자쿠의 입꼬리가 왜인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자쿠는 알 리가 없었다.
* * *
그날 오후 1시 36분, 스자쿠에게 커피를 받고 나온 를르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스자쿠는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본 거지? 그냥 오늘은 샷 추가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되게 의외였나? 그 이유를 너무 구구절절 설명했나? 아니, 하… 왜 그렇게 대답했지? 커피 많이 마시면 잠 못 잔다고 한 주제에 왜 샷 추가를 했냐고, 나는!’
그리고 오후 3시, 를르슈는 회의를 대차게 말아먹었다. 옆에서 보조해준 C.C.가 아니었다면 를르슈의 사업은 나락으로 갈 뻔했다. 를르슈는 얼음이 다 녹은 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키면서 C.C.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대체로 C.C.의 잔소리는 를르슈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다거나, 네 나이가 몇 개인데 대체 아직까지도 내 도움이 필요한거냐고 따지거나… 잔소리 주제에 를르슈의 성질머리를 긁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를르슈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잔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C.C.는 자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얼음이 다 녹은 밍밍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있는 를르슈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대체 왜, 회의 준비 하다 말고 카페를 가는데? 너 카페에 뭐 숨겨둔 거 있어? 몰래 애인이라도 만나?”
그러자 를르슈는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기도로 삼켰는지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해댔다. 커헉, 큭, 크흑, 컥! 꼴사나운 를르슈의 모습에 C.C.는 우선 이것도 회사의 대표이니 숨은 붙여놔야 한다는 생각에 등을 두드려주었다. C.C.의 손길을 받고서 진정한 를르슈가 하는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뭐, 무슨, 애, 애인, 같은, 헛소리를….”
“헛소리면 헛소리라고 하면 되지 왜 사레를 들리고 말을 더듬어? 너 진짜 카페에 애인 있어?”
“아, 아니라고.”
“아닌데 말을 왜 더듬냐고.”
“아, 안, 안 더듬었어.”
“뭐라는 거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
C.C.의 추궁에 를르슈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를르슈의 손해였다. C.C.는 이제는 말하지 않겠다고 입을 다무는 를르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카페에 애인이 있든 말든 나는 상관 안하는데 그래도 일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
“다음 번에 또 이러면 그땐 진짜 안 봐줄 거다. 알았어?”
“알겠어.”
이제서야 알겠다고 고분고분 대답하는 를르슈를 보면서 C.C.는 머리를 감싸맸다. 너 때문에 내가 늙어, 알아? 를르슈는 그녀가 떠들던 말던 샷 추가를 했음에도 얼음이 다 녹아서 맛이 연해진 아메리카노를 오랫동안 음미했다. 회의 하나를 말아먹었음에도, 커피는 오늘따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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