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가 회의를 말아먹고 스자쿠는 이름도 모르는 를르슈의 생각을 오래도록 했던 날이 지나고, 다음날이 왔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작은 를르슈 람페르지의 전화였다.
금요일 오후 1시 30분, 점심을 먹은 직장인들이 커피까지 알차게 마시고 나서 여유롭고 한적해진 때, 스자쿠의 퇴근까지 30분이 남았던 상황이었다. 스자쿠는 오늘은 그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서 어딘가 시무룩해져 있었다.
매일 매일 왔는데 오늘은 왜 안 오신거지? 어제 내가 이상한 질문 해서 그런가…? 근데 그거에 답은 상냥하게 잘 해주셨는데. 스자쿠는 의문만 남기는 그 남자를 떠올리며 휴대폰으로 SNS를 살펴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귀여운 고양이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그 남자 생각에 고양이를 봐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 사이에 퇴근하는 스자쿠와 자리를 맞바꿀 점장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날이 덥네—, 하고서 말을 거는 점장은 스자쿠를 보고서 오늘도 고생했다며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시켜줄게, 라고 말하는 점장의 말에 스자쿠는 미묘한 미소를 띄웠다. 오늘은 그 남자를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마무리하는 건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점장이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려고 안으로 들어가고, 스자쿠는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고양이 영상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울릴 일이 거의 없는 카페 안에 있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오늘은 발주한 물건들은 다 받았고… 뭐가 누락된 것도 없었는데. 스자쿠는 우선 전화를 받았다.
“네, 카페 라운즈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목소리, 전화 너머로 들려서 좀 낯설긴 하지만 그 남자였다. 스자쿠는 네에, 하고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늘이면서 대답했다.
‘혹시 커피 배달도 되나요?’
배달? 스자쿠는 평소에도 바쁜 점심시간의 카페에 배달 주문까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던 점장의 말이 떠올랐다. 배달은 안 되는데…. 근데 배달 주문을 안 받으면 오늘 그 남자를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아, 그건 싫은데.
“커피 배달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좀처럼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스자쿠가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안 되겠죠? 바쁘시니까.’
“아뇨, 지금은 안 바빠요.”
‘아, 그럼 되나요?’
“으음…….”
배달 주문이라도 받아서 그 남자를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배달 주문은 스자쿠가 함부로 받아서도 안 되는 거였다. 스자쿠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점장이 나왔다. 무슨 전화야? 스자쿠는 ‘잠시만요’라고 말하면서 수화기 마이크 쪽을 막고서 점장에게 말했다.
“커피 배달 되냐고 물어보셔서요.”
“안 된다고 하면 되잖아?”
“음……. 근데 오늘만 제가 퇴근하는 길에 갖다드리면 안 될까요?”
“뭐?”
“저랑 친한 손님이시거든요.”
그 남자와 몇 마디 해본 것도 아닌데 친한 손님이라는 거짓말을 해서 양심은 찔렸다. 하지만 점장 몰래 일을 치르는 것보단 나은 거 같아서 스자쿠는 조금 후련해졌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겠지. 스자쿠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그럼 나야 고맙지. 배달 주문 받아.”
와! 스자쿠는 막았던 수화기 쪽의 손을 풀고서 그 남자에게 대답했다.
“커피 배달 됩니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네? 되나요?’
“네!”
‘아…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8잔 부탁드려요. 주소는……—.’
스자쿠는 메모지에 그가 불러주는 주소를 적었다. 스자쿠도 알고 있는 유명한 회사 이름이 박힌 빌딩이었다. 확인 차 다시 불러주면 그 남자는 맞다고 말해주었다.
“받으시는 분 성함은요?”
‘를르슈 람페르지입니다.’
“를르슈… 람페르지…! 네! 확인했습니다!”
‘17층으로 바로 오실 수 있게 로비에 연락해두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스자쿠는 전화를 끊고 나서 재빠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커피를 만드는 스자쿠의 모습에 점장이 캐리어를 미리 만들어두다 말고 말을 걸었다.
“어떤 손님이길래 배달까지 가고 싶어해?”
“그냥 매일 와주시는 분인데, 저한테 되게 잘… 해주셔서요.”
“그런 분은 고맙지.”
“맞아요.”
“커피 값은 월요일에 출근할 때 주면 돼. 이번 주도 고생했다.”
“네!”
스자쿠는 점장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8잔을 만들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퇴근하는 옷차림을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나 요즘 너무 애 같이 입고 다니는 거 같기도 하고. 월급 받으면 옷부터 살까?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 8잔과 함께 카페를 나왔다.
바지 주머니에는 그 남자가 있을 빌딩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든든하게 넣어두었다. 스자쿠는 지도 어플로 빌딩 주소를 몇번이고 검색했다. 바로 가야지. 얼음이 더 녹기 전에. 커피가 쏟아지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는데, 스자쿠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적어두었던 빌딩 안으로 들어오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가 있었다. 경비로 보이는 사람이 커피를 주렁주렁 들고 있는 스자쿠를 보자마자 손짓했다.
“17층에 가는 커피죠?”
“아, 네!”
아, 맞다. 미리 연락해둔다고 하셨지.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시 출입증 드릴게요. 여기에 성함만 적어주세요.”
“아아, 네. 잠시만요….”
스자쿠는 밀어진 종이 위에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하게 적어 넣고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평범한 카드 한 장을 찍고 개찰구 같은 곳을 지나가면, 엘리베이터가 여러 대 있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가장 가까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과 함께 탔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스자쿠는 정말 어린애 같아보였다. 아니, 뭐… 어리다면 어리겠지. 나 아직 20살인걸. 스자쿠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17층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 시간은 짧았지만, 왜인지 숨막히는 분위기였다.
17층에서 내리는 건 스자쿠 혼자 뿐이었다. 스자쿠는 커피 8잔이 든, 양손의 캐리어를 꾸욱 쥐고서 내렸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 뿐이었다. 스자쿠는 심호흡을 하고서 문 옆에 있는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예, 무슨 일이시죠?’
“커, 커피 배달 왔습니다.”
‘커피 배달…?”
“를르슈 람페르지라는 분께서 시키셨는데요.”
‘아, 대표님이 시키셨구나. 네네, 열어 드릴게요.’
뭔가 떨떠름한 듯한 목소리가 끝나고 문이 열렸다. 스자쿠는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서면 누군가가 바로 반겨주진 않았다. 스자쿠는 어정쩡한 걸음으로 안쪽에서 시선으로 헤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을 하느라 바빠보였고, 스자쿠는 누구에게 를르슈 람페르지한테 가야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안쪽 방의 문이 열렸다. 스자쿠는 그나마 낯익은 사람을 마주했다. 그 남자였다. 스자쿠를 보고서 손을 흔드는 그 남자에게 스자쿠는 바로 걸음을 떼며 쪼르르 그 방으로 들어갔다.
“죄송해요, 오신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제가 좀 늦었죠?”
“아뇨, 적당한 때에 와주셨어요. 커피는 여기다 두시고…….”
스자쿠는 그 남자가 시키는 대로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리고 슬쩍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필요한 것 외에는 물건을 두지 않는 타입인 듯 했다. 바로 통유리창 너머로 빌딩 밖 거리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일상인 사람의 공간이었다. 스자쿠는 그가 정말 어른이고, 또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커피 값은 현금으로 드릴까요?”
“아, 네!”
“네, 잠시만요.”
스자쿠는 지갑을 꺼내서 현금을 건네는 남자의 긴 손가락을 보았다. 거스름돈이 필요없게 딱 맞춰놓은 금액이었다. 그 돈을 주고 받으면서, 힐끗 보이는 모양이 예쁘게 다듬어진 손톱 끝은 둥글었고, 그 손끝이 스자쿠의 손바닥을 살짝 스치고 나면 스자쿠는 기분이 좋아졌다. 붕붕 뜨는 기분이 들어서, 스자쿠는 기세 좋게 말을 걸었다.
“람페르지 씨는 멋진 데서 일하시네요.”
“아, 뭐어…. 그냥 그렇죠.”
“조금 궁금했거든요. 람페르지 씨 같은 어른은 어떻게 일하는지.”
“……별로 신기할 거 없죠? 아저씨의 방이니까.”
“아저씨라뇨! 람페르지 씨는 아저씨가 아니에요.”
스자쿠는 급하게 부정했다. 아저씨라는 단어에 이 를르슈 람페르지라는 남자를 담기에는 예의가 아니었다. 스자쿠의 강한 부정에 를르슈는 소리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스자쿠는 커피 배달을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 또 커피 배달 오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자신이 왜 여기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우와, 너무 오래 있었죠? 저 이제 가볼게요. 커피 주문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번거롭게 배달 시켜서…….”
“람페르지 씨 주문이면 배달 언제든지 올게요!”
“…정말로요?”
“네! 아, 근데 1시 넘어서 시켜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그땐 좀 한가하니까.”
“오늘처럼?”
“네,”
“좋아요.”
를르슈의 나긋한 대답에 스자쿠는 들뜨는 기분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되게 운이 좋다. 스자쿠는 문을 열어주는 를르슈를 따라서 밖으로 나섰다. 스자쿠를 배웅하면서 를르슈는 일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제 방에 커피 시켜놨으니까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어른 같아서, 스자쿠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내일은 카페에서 보면 좋겠네요.”
“헤헤, 람페르지 씨가 와주시면 저야 좋죠.”
“…근데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네?”
“나만 이름 알려주는 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네…?”
그렇게 말하면서 어딘가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아, 무슨 질문이었더라…? 뭐가 불공평하다고 하시는 거지…? 스자쿠가 그 질문을 곱씹고 있을 때, 를르슈가 눌렀던 버튼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스자쿠는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를르슈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 이름… 말이죠?”
“네.”
“뭐였죠…?”
스자쿠의 되물어보는 질문에 를르슈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자기한테 묻냐는 듯한 시선에 스자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다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스자쿠는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 몸을 움직이니까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자쿠는 멍청했던 방금 전과 다르게 빠릿한 대답을 했다.
“저는 스자쿠, 쿠루루기 스자쿠에요!”
“아… 쿠루루기 씨군요.”
“편하게 스자쿠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아, 그럼 이제 진짜 갈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람페르지 씨도요! 남은 하루도 힘내세요!”
스자쿠는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흔드는 를르슈의 모습을 보았다. 를르슈와 시선이 마주치고 나면, 문이 닫히는 알림음에 파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하는 말을 들었다.
“스자쿠 씨도 힘내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스자쿠는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주저 앉아버렸다. 우와, 우와, 우와. 계속 그런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열이 오른 뺨을 문질렀다. 화끈거리는 뺨을 슥슥 만지면서 스자쿠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스자쿠라는 이름이 이렇게 특별하게 들릴 수가 있나. 그건 고작 내 이름일 뿐인데. 람페르지 씨가 말해주니까 되게… 되게…….
“되게 좋다.”
스자쿠는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알림음에 벌떡 일어섰다. 열이 한순간에 올라서 머리가 빙글 도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약간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면 그런 기분이고. 스자쿠는 임시 출입증을 반납하고 빌딩 밖으로 나섰다. 처음엔 마냥 긴장되었던 빌딩 밖도, 위에서 람페르지 씨가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두근거렸다.
* * *
“쟤구나?”
“제발 닥쳐.”
“딱 보기에는 되게 어린데. 고등학생 아니야?”
“닥치라고 했지.”
“고등학생이면 그거 범죄다, 너?”
“C.C.!”
를르슈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문 뒤에서 나타나는 C.C.의 등장에 머리를 감싸맸다. 하필 보여도 저 여자에게 보이다니. 를르슈는 건수를 잡은 C.C.가 신나서 자신을 긁기 시작하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생은 아닐 거야. 고등학생이면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지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자신 있나보네? 너처럼 땡땡이 자주 치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잖아.”
“…….”
“아니 뭐, 고등학생 아니라 20살이라고 쳐도… 너랑 12살 차이 나는데, 양심은 있어?”
C.C.의 말에 그렇게 나이 차이를 계산해보고 나니 를르슈는 더욱 심란해졌다. C.C.는 를르슈가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들이면서 를르슈를 놀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양심이 있었으면 우리 마왕님은 굳이 여기까지 커피 배달을 안 시켰겠지. 양심이 없으니까 굳—이 불러서 굳—이 이름도 물어본 거잖아.”
“C.C., 요새 일이 많이 없나봐?”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더 양심 없네.”
“알면 좀 조용히 하지?”
“커피는 맛있네.”
C.C.는 를르슈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좋은 구경은 했지만 그 구경 좀 시켜줬다고 어제 회의 말아먹은 걸 덮으려고 하지 마. C.C.의 말에 를르슈는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놀려! C.C.는 사내에서 마왕 카리스마라고 불리우는 를르슈 람페르지의 이미지를 위해서 입은 닥치겠다고 억지로 맹세했다.
근데 굳—이 마왕의 소굴에 들어와서 커피 배달하고 간 그 남자애도 웃긴 거 같네. C.C.의 눈에는 우습기 짝이 없는 두 남자들의 모습은 다음날도 계속되는 것은 당연했다.
* * *
스자쿠가 고등학생인지 아닌지, 를르슈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 어려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는 한창 꿈을 품고 있는 듯 했고, 를르슈를 어른을 동경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 를르슈의 예상보다 한참 어린 것이 분명했다.
‘진짜 고등학생이면 어떡하지? 그건 진짜 범죄잖아.’
‘아니 20살이어도…… 12살 차이를…….’
주말 내내 스자쿠의 나이 때문에 고민하던 를르슈는 회사 대표라는 직권 남용을 저질렀다. 월요일 점심시간이 다 끝난 뒤인 오후 1시 10분에 카페에 갔다. 사람이 없고 한적한 카페 안에 흐르는 음악에 맞춰서 고개를 까닥이고 있는 유니폼 차림의 스자쿠가 보였다. 를르슈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는 그 움직임을 멈추고서 를르슈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람페르지 씨!”
“네, 안녕하세요.”
를르슈는 방금 전이 조금 무뚝뚝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굳긴 했지만, 스자쿠는 환하게 웃으면서 를르슈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점심시간 내내 기다렸는데.”
“아, 오늘은 좀 늦게 점심을 먹어서….”
“그러셨구나.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네. 스자쿠 씨는… 아, 못 드셨겠군요.”
“저는 2시에 퇴근하고 밥 먹을 거예요. 헤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스자쿠의 나이를 물어보고 싶은데,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어떤 타이밍에, 어떤 주제로 나이를 물어봐야 하지? 를르슈가 고민하는 사이에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주문할 음료를 물어보았다. 를르슈는 습관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결제를 마치고 나면 스자쿠가 경쾌한 움직임으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풀려고 애를 썼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는 거야. 아, 그래, 어려보이는데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거지. 항상 밝게 웃어주는데 늘 그러고 있는건 힘들지 않냐고 위로까지 해주는 거야. 어른답게 정중한 말투로, 너무 아이 취급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커피 나왔습니다!”
“네…….”
그렇게….
“오늘은 어제 로스팅한 원두여서 더 맛있을 거예요!”
“아아, 그렇군요.”
그렇게… 하자며. 어른스럽게 물어본다며.
“맛있나요?”
“네, 맛있어요.”
“람페르지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뻐요.”
“다행이네요.”
스스로에게 실망한 를르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스자쿠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나가야할 시간이었다. 나이에 대한 질문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 진짜 궁금한데. 확인해보고 싶은데. 스자쿠는 를르슈와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 또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를르슈는 저도 덩달아 웃어버리고 말았다. 서로 말없이 웃기만 하다가, 스자쿠가 입을 열었다.
“람페르지 씨는 오늘 퇴근 언제 하세요?”
“오늘은 아마 6시에 퇴근하겠죠. 별 일이 없으면.”
“저 오늘 저녁에 아르바이트가 없거든요. 이런 날 되게 드물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오늘 영화 보려고 했는데요.”
“네…….”
“저 오늘까지인 1+1 쿠폰 있어서 써야 해요.”
“아아…….”
“음… 그래서… 람페르지 씨가 괜찮으시다면 같이 보실래요?”
를르슈는 스자쿠가 꺼내는 영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구나, 1+1 쿠폰이 있구나, 오늘까지구나, 그럼 영화를 혼자 보는 건 아깝겠군…. 그래서 나랑 같이 보자는 건가? 어딘가 긴장한 스자쿠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를르슈는 ‘영화를 같이 보는 건 괜찮을지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괜찮아요. 영화 같이 보죠.”
“지, 진짜요?”
“네.”
“우와, 진짜로?”
“네? 네.”
“그럼, 그럼, 람페르지 씨는 영화, 어떤 거… 어떤 거 좋아하세요?”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것은 를르슈의 취향이 아니었다. 최신 트렌드를 파악할 때나 나나리가 불러줄 때 말고는 영화관에 가지도 않고, 보통 90분이 넘는 시간을 영화관에서 썩히는 것은 시간이 아까운 짓이었다. 그러나 스자쿠가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는 것에 를르슈는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그가 추가로 묻는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말에 를르슈는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사실 영화 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라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흠, 뭐라고 대답하지. 로맨스라고 말하는 건 너무 노린 거 같고, 코미디나 장르물을 말하면 괴짜처럼 보일지도. 를르슈는 고심한 끝에 무난하지만 무성의한 대답을 했다.
“아무거나 잘 봐요.”
“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시간 맞는 거 봐요. 6시 넘어서 제가 람페르지 씨네 회사 앞으로 갈게요!”
“그럴까요?”
“네!”
힘차게 대답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화관은 XX역 근처에요. 괜찮으세요? 스자쿠는 휴대폰의 지도 어플을 켜서 를르슈에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를르슈도 자주 가던 쇼핑몰에 있는 영화관이었다. 위치는 잘 알고 있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해주면 스자쿠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를르슈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연락을… 하려면 번호를 알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아, 그렇죠.”
를르슈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주었다. 스자쿠가 를르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를르슈가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에 스자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를르슈는 부재중 전화에 남은 스자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그러고 나면 통화목록에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이름이 남았다. 를르슈는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스자쿠도 번호를 저장했는지 방금 전보다 더 밝은 얼굴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6시에 연락드릴게요!”
“네….”
“오늘도 힘내세요!”
“네, 스자쿠 씨도.”
“네!”
를르슈는 그렇게 스자쿠의 전화번호를 얻고서 카페 밖으로 나왔다. 회사까지 돌아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기분 좋을 일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를르슈는 본능적으로 깊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깊게 생각했다가는, 를르슈 람페르지는 고장이 날 게 분명했다. 스자쿠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도 모자라서, 스자쿠와 영화관 데이트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 그것도 앞으로 약 5시간 후에 일어나는 데이트를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아니, 심장이 터지는 건 좀…. 를르슈는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귓볼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 * *
대략 4시간 하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오후 5시 50분이었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그제서야 현실을 파악하고 깨달았으며, 눈앞이 빨개졌다 하얘졌다 까매졌다를 반복하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우’ ‘우와’ ‘와’ 같은 소리를 멍청하게 내뱉는 를르슈는 자신에게 대표실이 따로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바쁜 C.C.가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신이 내린 타이밍이었다.
‘지금 보니까 수트가 엉망이잖아. 구김도 너무 많이 갔고.’
‘셔츠라도 갈아입을까? 이 셔츠는 얼굴이 너무 창백해보이지 않나?’
‘넥타이를 다른 색으로 할까?’
‘양말도 뭔가 이상해.’
‘머리라도 넘길까?! 아니, 갑자기 그러면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잖아!’
양말로도 모자라서 스자쿠에게 보일 리 없을 속옷까지 고민하던 를르슈는 6시가 다가오는 것에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어찌되었든 스자쿠한테 연락이 오면 내려가긴 해야할 텐데, 옷이 너무 신경쓰였다. 너무 직장인… 같잖아. 좀 꾸미고 싶어! 근데 갑자기 옷이 바뀌면 그쪽도 놀라겠지?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쿠루루기 스자쿠: 안녕하세요, 람페르지 씨!]
[쿠루루기 스자쿠: 저 조금 일찍 도착했어요. 천천히 오세요!]
그리고 스자쿠에게서 메시지가 오고 나서 를르슈 람페르지는 완벽하게 넉 다운 당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마냥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댄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계 초침은 오늘따라 더 빠르게 흘러갔고, 분침은 미친 속도로 60초마다 자리를 바꿨다. 그렇게 5분 정도 시계만 멍하니 보고 있던 를르슈는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각오를 다졌다.
“몰라, 미성년자만 아니면 돼.”
대체 를르슈의 옷차림과 스자쿠가 미성년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상관관계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를르슈는 그렇게 자신의 마인드를 정비했다. 를르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한숨을 삼켰다. 미성년자만 아니면 돼, 고등학생만 아니면 돼, 나도 양심이 있지, 아무튼, 오늘 넥타이 색은 좀 이상하지만, 아니, 양말도 너무 아저씨 같고, 아무튼, 아니, 그냥, 아, 몰라.
“람페르지 씨! 여기에요!”
근데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이잖아!!!
를르슈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스자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번에 입었던 고양이 일러스트 시리즈인지, 비슷한 고양이가 그려진 파란 티셔츠와 검은 청바지를 깔끔하게 갖춰 입은 스자쿠는 청량하면서도 귀여웠다. 정말 볼수록 고등학생이 틀림없었다. 별로 있지도 않았던 마왕 람페르지의 최후의 양심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많이 기다렸죠?”
“아니에요, 근데 바로 나오셨네요.”
“일이 빨리 끝나서요.”
일이 빨리 끝난 게 아니라 그냥 안 하고 나왔으니까.
스자쿠에게 그 사실이 들키지 않길 바라며 를르슈는 애써 웃었다.
“저녁 먼저 드실래요? 배고프시죠?”
“아, 뭐…. 영화는 몇 시에요?”
“맞다, 영화는 뭐 보실래요? 지금 도착하면 바로 볼 수 있는게…….”
를르슈는 스자쿠가 읊는 영화제목들 중 낯익은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거 되게 오래된 영화 아닌가? 를르슈가 중얼거리면, 스자쿠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개봉하는 거래요. 되게 유명한 영화인데 시간대도 괜찮고요. 를르슈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스자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를르슈가 언급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였다. 그런 영화를 패기롭게 골라온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고등학생이 대놓고 19세 미만 작품을 보자고 할 리는 없고. 그럼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 근데 요즘 애들은 또 영악해서… 나잇대에 맞지 않는… 근데 스자쿠 씨는 그럴 거 같진 않고, 아니 오히려 나잇대보다 더 어려보여서…….
“그럼 그거로 하죠.”
“어플로 예매할게요.”
“좋아요.”
예매를 마친 스자쿠는 좋은 자리를 잡았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스자쿠가 영화를 예매했으니 를르슈는 저녁을 사야만 할 것 같았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람페르지 씨는요?”
“딱히… 생각나는 건 없네요.”
“그럼 저 가보고 싶었던 데 가봐도 되나요?”
“어딘데요?”
스자쿠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의 이름을 댔다. 고기 좋아해요? 스자쿠에게 넌지시 물으면 스자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 계속 가보고 싶었는데, 저녁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안 맞아서 가본 적이 없거든요. 스자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가 앞장 서는 길을 따라갔다.
도착한 식당은 웨이팅이 있었다. 15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는 이야기에 두 사람은 기다리기로 했다. 대기석 의자에 앉아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바이트는 원래 많이 해요?”
“그렇게 많이는 안 하는데…. 평일에는 파트타임으로 두 개, 주말에는 풀 타임으로 한 개.”
“그럼 언제 쉬어요?”
“음… 안 쉬어요. 쉴 새가 없어요.”
“그럼 오늘 영화 보지 말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쉬려고 영화 보는 거예요! 람페르지 씨랑 영화 보는 거도 쉬는 거예요!”
“그래요?”
“네, 진짜로요.”
스자쿠는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를르슈는 안심했다. 잠시 찾아온 정적에 스자쿠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서 살다 보니까… 돈 나갈 데가 많네요.”
“혼자 살아요?”
“네. 본가에서 따로 나와서 사는 거예요.”
“독립하면 힘들죠.”
“그래도 제 힘으로 스스로 살아간다는 게 기분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스자쿠는 어딘가 씁쓸해보이면서도 후련해보였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요.”
를르슈는 자신이 했던 20살의 독립을 떠올렸다. 초반에는 스자쿠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독립해서 혼자 산지 10년이 넘어가다보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그런 마음을 떠올려보는 것은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망설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람페르지 씨 눈에는 제가 많이 어려보이는구나.”
“음.......”
“그럴 수도 있는데, 그거 왠지 되게 억울하네요.”
를르슈는 정말 억울한 눈빛으로 말하는 스자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를르슈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스자쿠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물론 람페르지 씨는 저보다 어른이고, 훨씬 멋있고, 잘생겼고, 또…….”
“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저도 마냥 어린 것만은 아니거든요?”
“예? 예.”
“그러니까, 그렇게 어린 건 아니라고요.”
“네….”
스자쿠는 맥없는 를르슈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듯 했다. 어딘가 날이 선 듯한 스자쿠의 분위기에 를르슈는 어색한 시선을 던지다가 생각에 잠겼다.
‘어리지 않다고 어필하는 걸 보면 고등학생이 아닐지도. 어쩌면 심하게 동안인, 내 또래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나이 차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내가 또 괜한 걱정을 하는게 아닐까?’
그래서 기세 좋게 물었다.
“그래서 스자쿠 씨는 몇 살이에요?”
“저 20살인데요.”
젠장!!! 진짜 12살 차이!!!
마음 한 구석에서 12살 차이에 를르슈 람페르지 최후의 양심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다 박살나지는 않고, 아슬아슬하게 금이 간 상태였다. 아무튼 고등학생은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 미성년자는 아니라는 거잖아. 이 정도면 선방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2살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은 를르슈에게는 없었다. 어딘가 마음이 크게 꺾인 기분이 들었지만, 스자쿠와 눈을 또 마주하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다시끔 올라왔다.
“람페르지 씨는요?”
“한참 많아요.”
“알려주세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말해주기 싫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미안하지만 그런 게 있어요.”
를르슈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나이를 밝히기를 거절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말도 안된다면서 무어라 따지고 싶다가도, 를르슈가 눈을 휘고 웃는 것에 그것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말하다 말고 조용해지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가 의아한듯이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으려고 할 때, 스자쿠와 를르슈의 대기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나이 이야기는 잠시 멈추었다. 스자쿠는 먹고 싶었다던 햄버그 스테이크를 시켰다. 토핑까지 알차게 더하며 시키는 스자쿠의 주문과 다르게 를르슈는 기본 정식으로만 주문했다. 스자쿠는 카페에서 일할 때의 움직임처럼 간결하고 깔끔하게 햄버그 스테이크를 잘라서 먹었다. 스자쿠가 햄버그 스테이크에 솜씨 좋게 토핑들을 섞어 얹는 모습을 보면서 를르슈는 꽤 즐거웠다. 왜 웃으세요? 한 입 가득 햄버그 스테이크를 씹어 삼키던 스자쿠가 물어보는 것에, 를르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스자쿠는 다시 몇 번 추궁했다. 를르슈는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스자쿠 씨가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요.”
“저 잘 먹어요?”
“맛있게 먹어주니까 좋아요.”
“헤헤.”
스자쿠는 단순하면서도, 를르슈의 기색을 살피면서 식사를 이어가는 섬세함을 보였다. 느리게 먹는 를르슈의 속도에 맞춘 스자쿠는 를르슈와 거의 동시에 접시를 다 비웠다. 를르슈는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다. 를르슈가 지갑을 꺼내려고 하자, 스자쿠가 먼저 카드를 꺼내서 점원에게 내밀었다.
“제가 살게요.”
“네? 왜요? 혼자 살아서 돈 나갈 데 많다면서요.”
“그건…! 아무튼 제가 살게요. 람페르지 씨 불러서 영화보자고 한 건 저니까요.”
“영화도 스자쿠 씨가 예매 했잖아요.”
“1+1 쿠폰이라 괜찮아요. 아, 감사합니다.”
점원에게 결제된 카드를 돌려받은 스자쿠는 기분 좋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를르슈는 저보다 12살이나 어린 스자쿠에게 얻어먹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잽싸지 못한 자신의 반사신경이 오늘따라 원망스러웠다. 를르슈는 앞서가는 스자쿠의 뒤를 따라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의 한숨소리에 스자쿠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저녁 산 게 그렇게 싫으세요?”
“…네. 자존심 상하네요. 스자쿠 씨보다 어른인데.”
“에헤헤, 그런 걸로 어른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뒤처지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이런 날도 있어야지 다음에 람페르지 씨가 사주는 날도 있겠죠.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다음’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감추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에서 걸었다.
영화관까지 걷는 거리에서 를르슈는 빨간 장미꽃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스자쿠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장미꽃을 손에 들고서 까르르 웃으며 걷고 있었다. 무슨 날이던가? 이벤트라도 있는 건가? 를르슈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길을 걷다보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서있었다.
‘성년의 날 축하 이벤트! 20살 인증하고 장미꽃과 향수 받아가세요!’
어떤 이벤트 회사에서 여는 기획인 것 같았다. 를르슈의 시선이 멈춘 곳에 스자쿠도 그 플래카드를 본 것 같았다. 성년의 날 이벤트. 20살. 를르슈는 20살이라고 말했던 스자쿠의 생각이 들어 바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저보고 저 이벤트를 하라고요? 장미도, 향수도 별로 안 갖고 싶은데.”
“아니, 그래도 모처럼 20살인데.”
“람페르지 씨가 하라면 하는데….”
엉거주춤하게 하겠다고 했던 스자쿠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직원이 설명하는 SNS 참여 이벤트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귀찮아요. 스자쿠는 바로 멀어졌고, 를르슈는 스자쿠를 뒤따라가면서 그러면, 이라고 말을 했다.
“제가 사줄게요. 장미랑 향수.”
“네?”
“축하해주고 싶으니까요.”
를르슈는 휴대폰으로 근처에 있는 백화점을 검색했다. 아슬아슬하게 닫을 시간이었다. 아, 이런. 지금 택시 타도 늦는데. 를르슈가 초조해하자, 스자쿠는 그를 다잡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우리 영화 보러 가야하잖아요. 원래 그런 거 잘 챙기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그래도 오늘은 평생에 한 번 뿐이잖아요. 저한테는 중요한 날이에요. 스자쿠 씨를 챙겨주고 싶어요.”
“진짜 괜찮은데.”
를르슈는 속상해보였다. 저보다 한참 어른일 를르슈가 그런 표정을 짓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었다. 아니, 원래부터 조금씩 느껴지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모습을 보면 기대하게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
“챙겨줄 거면 3개 다 챙겨주세요.”
“3개?”
를르슈는 뭐가 3개씩이나 되냐고 물었다. 스자쿠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택시를 금방이라도 부를 기세인 를르슈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서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미랑 향수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를르슈와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면 스자쿠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정직하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느낌에 를르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하얀 얼굴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스자쿠는 그의 뺨을 쭉 잡아 늘리면서 마지막 세 번째를 말했다.
“키스까지 챙겨주시는 거 아니면, 필요없어요.”
저보다 12살이나 어린 스자쿠에게 기습적으로 볼 키스를 당한 를르슈 람페르지는 제 손목을 붙잡고 영화관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것에 끌려갔다. 볼 키스. 스자쿠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볼 키스. 스자쿠의 입술이……. 를르슈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자쿠는 저를 따라오는 걸음이 느려졌다 빨라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며 를르슈가 당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스자쿠를 따라오는 를르슈는 그 키스가 싫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힐끔 뒤를 쳐다보면 장미꽃처럼 붉게 물든 를르슈가 고개를 숙인 채로 스자쿠를 따라오고 있었다.
손목을 붙잡았던 손은 느슨하게 풀어져, 나중에는 서로 손을 잡게 되었다. 긴장한 탓에 땀에 젖어 뜨거운 손바닥끼리 마주하고 나면, 를르슈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를르슈의 걸음이 조금 빨라진 것에 스자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자신의 옆에서 손을 잡고 걷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만이 아니라, 확인을 받고 싶어서, 스자쿠는 그를 돌아보며 불렀다.
“람페르지 씨…?”
그러면 아직도 홍조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를르슈가,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방금 전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키스까지 해놓고서, 이제 와서 ‘람페르지 씨’가 뭐야?”
스자쿠는 울컥 차오르는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부끄러워 하는 멋지고 잘생긴 어른, 를르슈 람페르지를 보고 있으면 한 마디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해요, 라는 말은 순식간에 입밖을 빠져나갔다. 스자쿠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고백은 를르슈에게 확실하게 닿았다.
두 사람의 연애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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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 18:31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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