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전 8시. 오늘 강의가 없는 스자쿠는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는 새벽 늦게까지 아르바이트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은 운동을 쉬기로 한 것이었다. 평소라면 더 일찍 일어나 공원이라도 두세 바퀴 뛰었겠지만, 아르바이트의 여파는 상당했다. 그래도 눈을 떠야 한다. 오늘은 를르슈랑 브런치 데이트를 하기로 했으니까!
스자쿠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은 11시였으니 지금부터 느긋하게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 되겠지.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하면서 샤워를 하려고 할 때였다. 스자쿠의 휴대폰이 울렸다. 를르슈로부터의 전화였다. 스자쿠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앞으로 세 시간 있으면 만날 텐데 벌써부터 전화를 주다니! 를르슈도 참~!
“여보세요?”
‘여보세요? 스자쿠 씨! 저 나나리에요!’
“응? 나나리? 무슨 일이야?”
‘오라버니가 죽었어요!!!’
그 말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씻지도 않고 현관문을 박차고 를르슈네 집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를르슈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은 말을 했지만 나나리는 ‘오라버니가 죽었어요, 안 움직여요.’ 같은 불길한 말만 해댈 뿐이었다. 스자쿠는 자기 집의 현관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나리의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은 했던 것 같았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안심하라고, 를르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저에게 하는 소리인지 나나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맞아, 를르슈가 죽었을 리가 없어. 를르슈가 안 움직이는 건 아마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걸거야. 그렇지만 늦둥이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그 남자가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움직이지도 않는다는건… 정말 죽은 거 아니야?! 스자쿠의 불길한 상상은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 스자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17층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를르슈의 집앞까지 온 스자쿠는 꾹 쥐고 있던 전화 너머의 나나리가 아앙, 하고 우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스자쿠는 현관 너머에서 들리는 나나리의 울음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를르슈가… 죽은 거면 어떡하지?
스자쿠가 초인종을 누르자, 엉엉 울던 나나리가 울음을 그치고서 부스럭거리면서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금을 해제하고 겨우 문이 열리고 나면 눈물 콧물 범벅의 나나리가 스자쿠의 품에 안겨들었다.
“흐아앙, 스자쿠 씨…!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안 움직여요…!”
“아냐, 나나리. 별 일 아닐 거야. 를르슈는 방에 있어?”
“네에, 제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시고, 침대에서 계속 누워만 계시고… 눈도 못 뜨시고!”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스자쿠는 나나리에게 잠시 거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를르슈의 방으로 들어갔다. 를르슈의 방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나리가 헤집어 놓은 물건들만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방 안을 보고서 스자쿠는 마음을 다잡았다. 를르슈도 평소랑 같겠지, 그럼. 스자쿠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를르슈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불 더미에 파묻혀 있는 를르슈는 미동조차 없었다. 정말 를르슈가……? 스자쿠는 떨리는 손끝으로 를르슈의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안색은 좀 좋지 않은 를르슈가 보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스자쿠는 아직 따끈한 를르슈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를르슈,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입술을 굳게 닫고 있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를르슈, 를르슈, 를르슈…! 를르슈가 눈을 뜰 때까지 부를 생각이었던 스자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를르슈를 불렀다.
거실에 있던 나나리가 놀라는 것도 모른 채로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귓가에 우렁차게 를르슈의 이름을 부르고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 되어버리면, 그제서야 를르슈가 입을 열었다. 를르슈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스자쿠의 귓가에 겨우 닿았다.
“시… 끄러워.”
“를르슈?! 살아있지?!”
“시끄럽다고…….”
“나나리, 살아있어! 를르슈 살아있어!”
“진짜요?! 오라버니!!”
나나리가 방으로 뛰어들어와서 를르슈의 침대에 올라탔다. 를르슈의 몸을 강하게 치는 충격과 함께 크흑, 하고 를르슈가 신음하며 이불을 그러쥐었다. 를르슈는 눈을 겨우 뜨면서 스자쿠와 나나리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아파, 머리 아파, 너무 아파. 를르슈의 아프다는 소리에 스자쿠와 나나리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나리를 보고서도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스자쿠는 나나리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 를르슈가 많이 아픈가봐, 나나리한테도 옮을 수 있으니까 나나리는 밖에서 기다려줄래? 그러자 나나리가 거세게 반항했다. 왜요?! 스자쿠 씨는 있고 저만 나가요?! 싫어요!! 오라버니 옆에 있을 거예요!! 말싸움의 논리에 약한 스자쿠는 그런 나나리를 설득시킬 만한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나나리…….”
“네, 오라버니!”
“밖에서 기다려줘….”
“네? 왜요?!”
“감기 옮을 거 같으니까…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줘…….”
“스자쿠 씨는요?! 스자쿠 씨만 옆에 있고 왜 저는 안 돼요?!”
“스자쿠는 멍청해서 괜찮아…….”
그 말에 나나리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저도 멍청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나나리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나가서 기다릴게요.’라고 말하며 거실로 나섰다. 멍청해서 괜찮다는 스자쿠만 를르슈의 옆에 남았다. 뭔가 씁쓸한 스자쿠는 이불 사이에 파묻힌 를르슈가 얼굴만 쏙 내밀고 있는 것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파? 병원 가야지.”
“걸을 기운도 없어.”
“내가 안고 병원 가면 되지 않아?”
“약 먹으면 되니까 유난 떨지 좀 마…….”
“못 움직일 정도로 아프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시끄러워…….”
를르슈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한껏 더 찌푸리면서 스자쿠를 맥없이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날카롭게 빛났을 그 안광이 흐릿한 빛으로 일렁이는 것 같아서 스자쿠는 마음이 아팠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손짓했다. 스자쿠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나면 를르슈가 더운 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나리는 유치원에 보내고… 오늘은 C.C.네 집에서 재우도록 해. 어머니랑 같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아아, 그러네. 유치원 가야할 시간이네.”
“부탁할게.”
“응!”
를르슈의 부탁대로 스자쿠는 나나리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해야만 했다. 나나리는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를르슈 말을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실지도 몰라, 같은 말을 하면서 달래보았지만 나나리는 오라버니가 없으면 선물 따위 소용없다면서 다시 한 번 와앙 울어버릴 기세였다. 다시 를르슈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나리를 붙잡고서 스자쿠는 자신의 지능이 덜 떨어진 것에 탄복하며 말했다.
“를르슈는 나나리가 유치원에 가줬으면 하는데…. 나나리가 유치원에 안 가면 를르슈는 되게 속상할 거야. 를르슈 마음이 아파도 괜찮아?”
“…싫어요! 오라버니랑! 있을 거예요!”
아~ 진짜!! 나나리를 어떻게 달래지?!
스자쿠는 자신의 논리로는 나나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를르슈가 나한테 나나리를 부탁했는데. 나는 를르슈의 작은 부탁마저도 들어줄 수 없는 무능한 남자친구구나…. 스자쿠는 눈물이 조금 날 거 같았다. 탈주하려는 나나리의 어깨를 붙잡고서 스자쿠가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참기 위해 어깨를 들썩거리자, 나나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자쿠 씨, 울어요?”
“…응. 눈물이 조금 날 거 같아.”
“제가 유치원에 안 가서요?”
“사실은… 응, 맞아. 를르슈가 나나리는 유치원에 가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인가봐.”
“그래서 울어요?”
“울면 안 되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음, 그냥 제가 유치원 갈까요?”
“가줄 거야?”
“가기 싫은데, 스자쿠 씨가 울면 오라버니가 슬퍼하니까요…….”
근데 나나리, 너 방금 전에는 를르슈 마음 아파도 괜찮다며… —같은 말을 하진 않았다. 스자쿠는 눈물을 무기삼아 나나리에게 유치원 원복을 입히고 가방까지 들게 했다. 이제 곧 유치원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나나리는 를르슈의 방을 힐끔 쳐다보면서 ‘오라버니께 인사하고 싶어요’ 같은 말을 했지만 스자쿠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핑계로, 그리고 나나리가 또 를르슈를 보고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갔다.
“저기, 나나리….”
“네?”
“오늘은 C.C.네 집에서 마리안느 씨랑 같이 자는 게 어떨까?”
“왜요?”
“를르슈가… 어… 그러니까 를르슈가… 아파서… 나나리한테 감기 옮을까봐 그렇대.”
“그럼… 오라버니 옆엔 스자쿠 씨가 있어요?”
“응? 내가…? 아, 응! 내가 있을 거야. 를르슈 혼자 있으면 불안하니까.”
“그럼 괜찮아요.”
“그래?”
“스자쿠 씨가 멍청해서 다행이에요.”
“…응.”
멍청하니까 감기에 안 걸릴 정도로 단순한 스자쿠라서 다행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나나리는 아파트 앞에서 유치원 버스를 타고 떠났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C.C.에게 전화를 했다. 나나리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를르슈가 아파서 나나리한테 감기 옮을까봐 걱정을 해. 를르슈 감기가 떨어질 때까지 당분간 나나리를 부탁해도 될까? C.C.는 안될 것은 없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나리 없이 너네 둘만 붙어 있으면 를르슈가 나을 순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한테는 찬스잖아.’
“저기, C.C.? 를르슈는 환자야. 나는 환자한테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나나리는 내가 데리러 갈게. 유치원에도 미리 말해두마.’
“응. 고마워.”
C.C.와의 통화가 끝나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집으로 돌아갔다. 를르슈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물과 감기약을 찾았다. 항상 를르슈의 집에 구비되어 있는 비상약 상자에서 감기약을 들고서 를르슈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서는 를르슈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콜록거리고 있었다.
“를르슈, 언제부터 아픈 거야?”
“몰라…….”
“못 움직이겠어?”
“어.”
“약이랑 물 가져왔는데 먹을 수 있어?”
“…일으켜 줘.”
겨우 일으킨 를르슈의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를르슈가 추워, 하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는 것에 스자쿠는 안쓰러워하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끈한 스자쿠의 체온에 를르슈는 조금 안심한 듯, 스자쿠에게 몸을 기대면서 더운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 몸, 엄청 뜨거운데… 추워?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땀에 젖은 를르슈의 앞머리를 넘겨주면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약을 내밀었다.
“물은 마실 수 있어?”
“마셔야지…….”
“여기 있어.”
작은 알약 두 알을 내밀고 물이 담긴 컵까지 손에 쥐어주고 나면, 를르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약을 삼키고 물을 겨우 흘려보냈다. 두 모금을 겨우 마시고서 컵을 내려놓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그를 겨우 다시 침대에 눕혔다.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아주었다.
“약 먹었으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서 죽이라도 먹을래?”
“먹을 기분이 아닌데….”
“그런 기분이 아니어도 먹어야 돼. 먹어야 빨리 나을 힘도 생기지.”
“결국 먹일거면서 왜 물어봐…?”
를르슈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뒤척였다. 침대의 한 구석으로 돌아서더니, 침대의 절반을 비울 정도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스자쿠, 나 추워….”
열이 올라 땀에 젖어 촉촉한 를르슈의 몸, 평소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를르슈의 뺨 같은 것이 스자쿠를 유혹하고 있었지만, 스자쿠는 자신이 C.C.에게 했던 말(“를르슈는 환자야. 나는 환자한테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아.”)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약은 남자였기 때문에, 를르슈가 비워둔 침대 한 구석에 몸을 밀어넣었다. 이불 사이를 파고들면서 를르슈의 몸을 끌어안았다. 를르슈는 닿아오는 스자쿠의 뜨거운 체온에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군….”
“그거 좋은 거지?”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 스자쿠….”
“당연하지.”
손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열이 올라있던 를르슈를 끌어안을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스자쿠에게만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드는 것에, 어제보다 더 푸석하게 말라버린 를르슈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프지 마, 를르슈. 스자쿠는 마른 를르슈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닿을 만큼의 키스를 했다.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자는 줄 알았던 를르슈가 희미한 시선을 보냈다.
“나 환자야, 알아…?”
“응, 알고 있어.”
“너 그러다… 감기 옮는다고.”
“괜찮아, 나 멍청하니까 감기 안 걸리는 거 알잖아.”
스자쿠의 마지막 말에 를르슈가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한 건지 를르슈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면서, 그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나아서 나나리 오기 전에 섹스 한 번 해주면 좋겠다.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그의 쾌유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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