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킹슬레이 X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그는 를르슈와 10개월을 같이 살았던 남자다. 무려 단 둘이서.
를르슈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저와 같은 키, 저와 같은 얼굴,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그의 이름은 줄리어스 킹슬레이. 작위는 따로 하사받은 것은 없지만 군사의 위치에서 유로 브리타니아를 호령하는 남자였다. 나이트 오브 세븐과 호흡을 자주 맞추었던 그가, 이제껏 를르슈의 호위를 맡았던 나이트 오브 세븐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를르슈는 제 손등에 입을 맞추는 줄리어스에게 드는 위화감을 지우려고 애썼다.
사실 이 남자는 를르슈의 쌍둥이 동생으로, 사실은 아리에스의 두 번째 황자로 자라났어야 했지만 황제와 다섯번째 황후의 손에 의해서 기어스 향단에서 자라나, 기어스라는 기이한 힘을 가지고 성장해 이 나라의 존속을 유지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제11황자라는 를르슈와 다르게 존재하는 그 박력이 남다른 남자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서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아있는 모양에 를르슈는 줄리어스가 불편하기만 했다.
“킹슬레이 경, 그럼 잘 부탁하지.”
“예, 를르슈 전하.”
이 남자의 카리스마는 압도적이다 못해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다. 예를 들면, 임페리얼 셉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유로 브리타니아의 대공을 유폐시켜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가 브리타니아 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의 지위를 황제와 동급으로 만들었던 임페리얼 셉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줄리어스 킹슬레이에게는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오만을 즐길 여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 같은 애매한 위치의 황자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도 그닥 없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줄리어스는 순종적이었다.
“쿠루루기에게는 전하께서 재상 보좌의 업무를 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래. 슈나이젤 형님의 일을 돕고 있다. 크게 어려울 일은 없지만 그래도 호위는 늘 필요하다고 다들 그래서….”
“아무렴. 전하께서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다들 안절부절 못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호위야 당연하지요.”
를르슈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답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대충 흘려들었다. 남을 말로 놀려대는 취미는 를르슈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조롱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경은 나와 닮았으니, 그런 경이야말로 호위가 필요하지 않은가?”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유로 브리타니아에 있던 시절, 나이트 오브 세븐의 호위를 받고 나니 약한 녀석들과 어울리기가 싫더군요. 그래서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위치로 올라 본국에서는 전하의 호위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킹슬레이 경이 지켜줘서 고맙군.”
“영광입니다.”
를르슈는 줄리어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안대를 바라보았다. 그 밑에는 반짝이는 적색의 눈이 있다고 들었다. 저주받은 마안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나라를 굳건히 하는 기어스의 힘을 경시하는 말이었다.
를르슈의 시선에 줄리어스는 안대에 손을 댔다.
“안대는 별 거 아닙니다. 폭주할 때를 대비하여 미리 막아둔 것 뿐입니다.”
“불편하지 않나?”
“없으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원근감이 없는 거에 익숙하거든요.”
안대 끝의 자수정이 반짝거렸다. 를르슈는 고개를 돌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일부터는 재상부와 군정청을 드나드는 것과 제레미아 고트발트까지 가세해서 일을 도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본격적이군요, 하고 말을 거는 줄리어스에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나이트 오브 세븐인 쿠루루기 스자쿠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위험한 일은 모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 를르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줄리어스는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저도 쿠루루기가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밀려있었던 잡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했죠. 전하도 저랑 비슷하시군요.”
“…스자쿠는 나를 못 미더워하니까.”
“저에게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위험한 일만 골라서 한다고 나중에 한바탕 잔소리를 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하니.”
“…….”
“어디에 있는 누구랑 똑같이 말한다고 신기해하더군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무어라 할 말이 없어질 때, 때마침 제레미아가 노크를 했다. 를르슈는 제레미아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들을 보며 오늘은 제레미아와 업무를 같이 볼 테니 줄리어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줄리어스는 아쉬워하는 내색도 없이 돌아갔다.
겨우 숨통이 트인 를르슈는 종이의 글자를 하나도 읽지 않으며 팔랑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레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를르슈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오라버니와 닮으신 분을 봤어요. 옷이 아니었다면 오라버니라고 부를 정도로요.”
“킹슬레이 경을 만났구나, 나나리.”
“아, 그 분이시군요. 스자쿠 씨 대신 오라버니의 호위를 맡으신 분!”
“응.”
저녁 식사는 나나리와 하면서 이른 오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를르슈는 고기를 씹으면서 그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안대가 정말 인상깊었어요.”
“그런 핸디캡이 있어도 뛰어난 책략가라고 하니까, 믿을 수 있는 인력이야.”
“나중에 같이 차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내보도록 할게.”
상냥한 나나리는 줄리어스의 꺼림칙한 느낌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동족혐오 같은 걸까. 를르슈는 식사를 적게 먹고 그만두었다. 나나리가 디저트를 먹는 것까지 보고서 침실로 올라왔다. 스자쿠의 빈 자리보다 줄리어스의 중압감에 숨이 턱턱 막혀서 잠이 쉬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 다 되어야 겨우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평소와 같이 학교에 가려고 일어난 나나리의 인사소리가 들려야했다. 멍한 머리로 몸단장을 간단히 하고 나온 를르슈는 2층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킹슬레이 경, 저는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나에게 손대지 마라, 나나리 황녀.”
“네?”
“너는 황제 폐하께도 그렇게 경솔하게 손을 올릴건가? 이봐, 나나리 황녀 전하. 나는 어디에 있어도 황제 폐하와 뜻을 같이 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쉽게 손을 올려서 불경죄를 물고 싶다면 계속…!”
“킹슬레이 경!”
교복 차림의 나나리가 놀란 눈으로 상처를 감추지 못한 채 떨고 있는 것에, 를르슈는 빠르게 그를 불렀다. 를르슈의 등장에 줄리어스의 눈은 가늘게 휘어졌다.
“를르슈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호위를 위해 왔습니다.”
“…나나리에게 무슨 소리를.”
“황녀 전하께 제 입장을 알려드린 것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침 식사를 하실 시간이시죠?”
“나나리와 함께 끝나고 갈 테니까 경은 재상부에서 대기하도록 해라.”
“전하의 옆을 한시라도 비우면 호위라고 할 수 없지요.”
“내가 불편하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지금 네가 모시고 있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다.”
“그 모시는 분의 명령 역시 황제 폐하께서.”
“당장 나가지 못해?!”
를르슈의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나나리가 움찔거렸다. 를르슈는 입을 틀어막았다. 보통 크게 소리를 내지 않는 를르슈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줄리어스는 그것이 흥미로운지 웃고 있었다.
“Yes, Your Highness.”
얄미운 대답이었다.
를르슈는 나나리와의 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했다. 나나리 역시 시무룩한 얼굴로 좀처럼 먹질 못했다. 나나리를 배웅하고 나서 를르슈는 재상부로 향했다. 문앞에서 보란듯이 기다리고 있는 줄리어스는 문을 열어주었다.
“너, 나한테는 이렇게 깍듯하게 굴면서 왜 아침에 나나리에게 그랬지?”
“를르슈 전하와 나나리 황녀는 다르시지 않습니까?”
“나나리도 존칭을 갖춰 불러라.”
“아침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녀는 저와 다른 선상에 놓인 사람입니다. 제 뜻이 황제 폐하의 뜻, 저는 폐하의 뜻만 따를 뿐입니다. 를르슈 전하를 모시라고 했지, 나나리 황녀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 뜻은 듣지도 않으면서 나를 모신다고?”
줄리어스는 저를 경멸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보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서로 같은 높이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줄리어스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듯 입을 열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생각 외로 어리광이 심하잖아. 황자로 크면 그렇게 되는건가?”
“뭐?”
“너도 나를 알고 있듯, 나도 널 알고 있지. 우리가 쌍둥이라는 건 서로 말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경과 출생이 같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위치는 달라. 난 황자다.”
“황족의 피는 나에게도 흐른다. 그리고 브리타니아를 강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나야. 기어스도 없이 머리 하나로 올라온 너와 다르게 나는 황제 폐하께서 칙명으로 만든, 특별 그 자체이다. 너랑 출발선부터 다르다고.”
“그래서 황제 대접이라도 해달라 이건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딱히 기쁠 것 같진 않지만, 너에게 마제스티라는 말을 들으면 꽤나 즐거울 거 같기도 하고.”
를르슈는 제 턱을 끌어올리는 줄리어스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를르슈, 너보다 먼저 나이트 오브 세븐을 손에 넣고 굴렸던 입장에서 조언하자면.”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 녀석은 손에서 빠져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녀석이라 애가 타는 건 어쩔 수 없어.”
봐, 너에게 한 번 가더니 나한테 돌아오지 않잖아?
줄리어스는 를르슈의 왼쪽 눈밑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까지 내쳐자 줄리어스는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않는 얼굴로 를르슈를 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녀석인가, 직접 확인해보니까 과연 그럴만 하군.”
“너의 호위 따위 필요없다. 그렇게 좋아하는 황제 폐하 옆으로 돌아가!”
“나는 네 명령 따위 들을 필요 없어.”
“나가!”
아침에 이은 명령에 줄리어스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에 주머니 안에서 총을 꺼냈다.
작고 가볍지만 사람 한 명을 죽이는 데에는 한 발의 총알이면 거뜬한 권총이었다. 를르슈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죽고 싶으면 계속 나가라고 해봐.”
“…이건 반란이다.”
“브리타니아에 황자 전하는 차고도 넘쳐. 너 하나 없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은 나이트 오브 세븐과 나나리 황녀 말고는 없지 않을까? 아, 우리를 갈라놓은 마리안느 황후까지 넣어줄까?”
“킹슬레이 경, 무례하다!”
“아니면 네 빈 자리를 내가 채우는 수가 있지. 안대 같은 건 풀어 없애면 끝이니까.”
다른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뜯어낸 줄리어스는 밝은 조명과 다르게 섬뜩한 안광을 번쩍거렸다. 붉은색의 눈이 흔들림 없이 를르슈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한 순간에 를르슈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줄리어스 킹슬레이의 명령에 따라라,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그런 것 따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중에, 머릿속이 뒤틀리는 감각에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안 되네. 그래, 쉬우면 재미없어, 를르슈.”
굳은 를르슈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줄리어스는 를르슈의 앞머리를 잡아올리며, 그와 눈을 다시 마주했다. 붉은 왼눈이 를르슈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시선이 머릿속을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명령을 들어.”
바닥을 짚고 있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 눈 안쪽이 번쩍번쩍거렸다. 를르슈는 몇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스스로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한 를르슈의 입술 끝에서는 줄리어스가 바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Yes, My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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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 10:07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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