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루 이후
제로 스자쿠 X 허무슈
제로는 보통 나나리 명예고문과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외의 일에는 단독임무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오늘처럼 나나리가 올 수 없는 분쟁지역에 제로와 흑의 기사단만 움직인다거나, 하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곳은 대부분 나나리가 있는 곳이었다. 점점 복구되어가고 있는 팬드래건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 비행기는, 공항에서 제로가 머무는 저택까지 단숨에 이어주는 리무진으로 바꿔 타야했다.
그때까지 이 를르슈가 얌전히 있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스자쿠는 눈가리개가 흠뻑 젖을 정도로 울고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크게 지르길래 재갈까지 채운 것도 3시간 전의 일이었다. 완전 포로 취급, 그것보다 질이 나빴다.
한때는 그의 명령을 받으며 움직였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는 휘둘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자쿠는 갑자기 손발을 펄쩍거리며 뛰는 를르슈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대체 또 뭐야….”
C.C.는 이런 를르슈랑 1년을 보냈다니, 여러모로 마녀라고 부르고 싶었다. 성녀, 비슷하긴 하군. 스자쿠는 벌벌 떨면서 뒤로 묶인 팔다리를 어떻게 할 줄 모르다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는 를르슈의 모습에 뭘 하고 싶어하는지 가늠도 안 되었다.
말을 하라고 재갈을 풀어줄까 하다가, 방금 전 경비병이 달려올 정도로 악을 써댔던 것을 떠올리면 그만두기로 했다. 뒤로 묶인 팔다리로 어기적거리던 를르슈는 눈물을 또 줄줄 흘렸다.
그리고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그 액체를 보고서, 스자쿠는 아연실색했다.
말을 하는 건 정말 중요했다.
의사소통의 절반은 행동과 말이다.
그 절반을 잃은 를르슈는 스자쿠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을 풀어주고, 눈을 풀어주었다. 억울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를르슈의 눈을 보고 있자니 자기 죄가 얼마나 싶은지 스자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소리도 못 지를 정도로 목이 잠겨 있는 를르슈는 스자쿠를 보고서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그래, 내가 잘못한 거겠지.
사람을 시켜서 다른 옷을 가져와 입힐까 하려다가, 그랬다가는 를르슈의 정체가 들킬 것 같아 곤란했다. 우선 화장실에 들이밀고 휴지로 뒤처리를 해주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어깨를 붙잡고 이를 악문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어린애라도 이런 실수를 할 때 자존심이 상하지…. 스자쿠는 물에 적신 티슈로 아래를 잘 닦아주었다. 마른 티슈로 한 번 더 닦아주니 를르슈는 히끅, 하고 소리를 냈다.
무엇을 입혀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있는 젖지 않고 말라있는 새 옷은 스자쿠의 제로 복장 밖에 없었다. 스자쿠가 가지고 있는 다니는 스페어의 제로 복장 팩에는 따로 속옷을 챙기진 않았다. 스자쿠는 하반신 알몸으로 주저 앉아 추운지 제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를르슈를 보았다.
이거 어떻게 입히지.
디자인한 것은 를르슈다. 갈아입을 때마다 정말 번거롭고 정신사나운 옷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본인은 즐겨 입었으니 상관은 없다만, 심플한 옷, 넣고 빼는 것이 간편한 옷을 좋아하는 스자쿠에게는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 디자인한 장본인은 스자쿠가 등 뒤에서 끌어안고 바지를 입히려고 하자 흐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지, 바지 입어야지, 를르슈.”
노 팬티지만 입어줘. 안 그러면 제로의 사회적 이미지가 망가진다. 죽었지만 너에 대한 이상한 소문도 돌지도 몰라. 스자쿠는 를르슈의 발목에 겨우 바지 끄트머리를 채워넣었다. 를르슈는 다리를 움츠리며 다시 발을 빼려고 했다. 일부러 허벅지를 눌러 다리를 뻗게 해, 바지를 힘껏 끼워넣었다.
아앗, 하고서 를르슈가 바지 한 가운데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껏 C.C.가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해줬지만 다 쓸모없어질 것 같았다. 그 가운데는 를르슈의 성기가 있는 부분이었다. 본인의 무지막지함을 평소에도 알고 있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고통에 애도를 표했다.
새로운 바지—제로의 옷 절반—를 입은 를르슈는 바지 구경을 조금 하다가 스자쿠의 바지를 보았다. 를르슈는 스자쿠보다 워낙에 말랐고, 또 그 사이에 마른 모양인지 달라붙는 재질인 바지가 넉넉하게 품이 남아돌았다.
스자쿠는 제 허벅지 근처에서 손을 뻗어 만지작거리는 를르슈의 손을 내쳤다. 바지를 만지고 싶은지 를르슈의 입술이 추욱 처졌다. 하지만 스자쿠에게는 그것을 달래줄 기력이 없었다.
화장실 하나 제대로 못가리는 남자의 뒷처리를 해줬다.
C.C.는 대단한 여자였다.
팬드래건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덕분에 를르슈의 바지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팬드래건으로 향하는 리무진에 타면서 를르슈는 반쯤은 졸고 있었다. 완전 애나 나름 없었다.
졸고 있는 를르슈는 제로의 가면에 놀라지도 않고 스자쿠의 옷자락 끝을 쥐고서 저택 안까지 들어왔다. 를르슈의 짐가방을 들고 있는 스자쿠를 알아차리고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살아야한다는 생존본능, 그런 것도 있는 걸지도 몰랐다.
스자쿠는 침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가면을 벗었다. 짐가방도 침대에 내던졌다. 를르슈도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씻고 자야하는데. 를르슈를 침대 위에 얹어놓고서, 스자쿠도 그 옆에 드러누웠다. 나나리한테 보고도 해야하고, 흑의 기사단 보고도 받아야하고, 슈나이젤한테도…. 할 게 많았지만 를르슈를 반나절 돌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스자쿠는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지, 하고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확인을 했다. 검은 머리, 하얀 피부. 어라, 를르슈?
아직 제로 레퀴엠까지 시간이…. 아니, 그건 이미 이루어졌는데.
스자쿠는 를르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살아있어? 자는 거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를르슈의 눈이 떠졌다. 평소처럼 날이 서있고, 자신만만하고 오만방자한 그런 눈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스자쿠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맞아, 넌 를르슈가 아니지.”
스자쿠는 어제의 일을 재차 떠올렸다. 를르슈는 멍한 인상을 더욱 멍하게, 흐릿할 정도로 비몽사몽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스자쿠는 급하게 화장실로 데려갔다. 여기가 화장실이야, 라고 말하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어제는 스자쿠가 묶어놔서 볼 일을 제대로 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화장실은 혼자서 잘 다니는 걸 수도….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온 김에 욕실 불까지 켰다. 카구야나 나나리의 선물로 들여놓은 입욕제(대체 제로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중 모양이 재미있는 걸 골랐다.
“목욕하자, 를르슈.”
목욕, 이라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옷을 위에서부터 하나, 둘, 벗더니 어제 스자쿠가 입혔던 바지까지 싹 다 벗었다. 대신 안감이 다 뒤집혀 나올 정도로 엉망으로 벗었다는 것에 스자쿠는 머리가 띵했다. 기본 매너라는 게 있어, 를르슈…. 빨래는 내가 하는 게 아니지만, 아니 네 빨래는 내가 하겠지만.
아무튼 샴푸로 한 번, 컨디셔너를 한 번, 바디워시를 한 번, 열심히 닦은 를르슈의 몸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거 넣을거야. 물을 다 받은 욕조에 토끼 모양의 입욕제를 풀어넣자 보라색 물이 퍼지기 시작했다. 를르슈의 입술이 헤에, 하고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를르슈야?’
‘그냥 애일 뿐….’
‘제로가 애 보기라니.’
‘걸리면 골치 아프겠지….’
‘나나리와 카렌에게 맡긴다고? 더 난장판이 될 거야.’
를르슈를 욕조 안에 넣어두고 스자쿠도 옷을 벗었다. 한숨 잤다지만 피곤한 몸에 뜨거운 물이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물 안에서 멍하니 있던 를르슈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마지막 바디워시까지 씻어내며 를르슈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빤한 시선에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를르슈.”
를르슈가 아니지만, 를르슈 말고는 따로 부를 이름이 없었다. 제로? 제로는 나니까.
“…~.”
“뭐라는지 모르겠어.”
“!”
“그래, 그래, 얌전히 잘 있네.”
를르슈의 물에 젖은 검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면,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 눈을 휘며 웃었다.
아, 이런거 알지. 무슨 느낌인지 익숙하다. 아서 주니어가 드물게 애교를 부릴 때다.
“아, 아서 주니어. 밥 까먹었다.”
“?”
“여기서 기다려, 를르슈.”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당부하고서 빨리 가운을 입었다. 아서 주니어는 방 안에 가둬놓고 기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영역, 즉 제로의 저택 안을 자유롭게 오가는 아서 주니어는 식사는 대부분 스자쿠의 침실에서 하는 편이었다. 스자쿠가 없는 사이에는 식당에서 해결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제 스자쿠가 돌아왔으니 오늘은 여기에 왔을지도 모른다.
가운을 입은 스자쿠는 커텐을 내린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야아아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잠시만 기다려. 스자쿠는 몰래 들여온 고양이 사료와 아서 주니어가 잘 쓰는 그릇을 꺼내왔다. 물 그릇도 잊지 않았다. 아서 주니어는 야아아옹, 또 길게 울었다.
착하지, 잘 기다렸어. 스자쿠는 아서 주니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아서 주니어는 스자쿠의 손길에도 얌전했다. 이러면 꼭 주인인 걸 알아보는 거 같다니까. 스자쿠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보다가, 눈을 돌렸을 때의 참상을 잊지 못했다.
“~~!”
“를르슈!”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아니, 애들은 기다릴 줄 모르지….
알몸으로 아직 따끈따끈한 몸을 하고 나온 를르슈는 고양이와 스자쿠를 보고서 뭐라고 반응은 했으나 여전히 알아먹을 순 없었다. 홀딱 벗고 나온 를르슈 때문에 바닥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스자쿠는 다시 를르슈를 욕실에 집어넣었다.
“~!”
“몰라, 몰라. 벗고 나오면 어떡해!”
“~~!”
“기다리라고 했잖아. 착한 아이는 기다려야지.”
“…….”
“그래, 이제 마지막으로 씻고 나와서, 아서 주니어 소개 시켜줄게. 그럼 돼?”
를르슈는 말이 길어지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되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옹야옹, 구경시켜 줄게.”
야옹야옹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서 손으로는 벌써 고양이를 쓰다듬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고양이는 또 어떻게 알고 있담.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남아있는 한 벌의 가운을 입히고서 밖으로 내보냈다.
슬프게도, 그 사이에 식사를 마친 아서 주니어는 바깥으로 나가버렸고, 스자쿠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를르슈의 아아악, 하고 우는 소리에 또 정신이 혼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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