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는 금방 가야한다면서 계속해서 거실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아무리 C.C.래도 자기 고양이를 두고 가는 건 걱정되겠지. 스자쿠는 티백이지만 녹차라도 들고 가라고 했다. 머뭇거리던 C.C.는 결국 식탁 의자를 끌어내고 앉았다.
“우선 여기서 지내는동안 ‘를르슈’를 다르게 불러야할 거 같은데. 우리 를르슈도 있고.”
“아, 그건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대답은 안하거든.”
“…응?”
“밥도 잘 안 먹고, 잘 움직이지도 않아. 대부분 누워지내거나, 이불에서 안 나올거야. 그렇다고 마음대로 운동을 시킨다고 꺼내면 소리를 지르거나 우니까…. 심할 때는 토할 때도 있어. 아, 그래도 화장실 교육은 시켜놨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손이 덜 가겠네….”
“응. 애들한테도 잘 설명해줘. 특히 줄리어스.”
“스트레스에 약하고, 우선 먹기는 먹지?”
“사료 편식은 안 해.”
한숨을 몇 번 쉬던 C.C.에게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길게 떠날거면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아?”
“비행기를 못 견딜 거 같아서.”
“음…. 우리 애들은 잘 견디는데.”
“너도 그때 봤잖아? 쟤는 죽다 살아난 얘야. 위험한 일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굳이 도박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때’라는 것은 세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를 말했다. 원래 수인은 한 배에서 한 마리가 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드물게 세 쌍둥이였다. 드문 케이스를 앞두고 설레던 수인 동물병원장 로이드와, 평소 로이드네 병원에 주인을 잃은 수인들을 자주 데려다주던 스자쿠(할큄을 당하던 중이지만 꿋꿋하게 품고 온다.)는 그 세 쌍둥이가 태어나는 걸 보았다. 어미 고양이의 주인은 C.C.였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했다.
더 이상 고양이는 안 키울거야. C.C.의 말에 스자쿠가 세 쌍둥이를 키우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세 마리 중에 한 마리가 죽을 위기에 처해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남은 두 마리는 스자쿠의 손 끝에 매달리며 그의 온기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네가 키워. 남은 하나는…. C.C.는 죽지 않으면 자기가 키우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두 마리는 조금 말랐지만 그래도 집에 데려올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게 를르슈와 줄리어스. 남은 한 마리가 C.C.가 데리고 간 ‘를르슈’였다.
“를르슈랑 줄리어스가 괴롭히진 않을거야. 둘 다 착하니까!”
“흠, 아주 낙관적이군. 나는 네 를르슈가 걱정이 된다만….”
“를르슈가 왜? 줄리어스도 잘 돌보는 형인걸. 나 밥 먹는거로 잔소리 할 정도로 꼼꼼해!”
“그게 그 녀석의 문제니까 그런거야. 아무튼 차는 잘 마셨다. 이제 가 봐야 돼.”
스자쿠는 짐을 들고 나가는 C.C.를 따라나섰다. 바닥에 주저 앉은 ‘를르슈’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대신 C.C.가 따라 나서는 것에 네 발로 기어가며 C.C.의 뒤를 따라갔다. 움직이기는 하는구나. 그렇지만 C.C.에게 손을 내밀거나 꼬리를 흔드는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잘 다녀와, C.C. ‘를르슈’도 다녀오세요, 하자.”
“…….”
“말은 안 한다고 했잖아. 다녀올게, ‘를르슈’.”
C.C.는 바닥에 눌러붙은 ‘를르슈’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구두를 신고 나갔다. 시무룩해진 를르슈의 옆에 딱 달라붙은 줄리어스는 형을 신경 쓰느라 인사도 못했다. 앗, 손님이 왔다 갈 때에는 인사해야하는데. 줄리어스가 불안한 눈으로 스자쿠를 쳐다봤지만 스자쿠는 두 고양이는 신경도 안 쓰이는 듯, 바닥의 ‘를르슈’만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 안 했는데….”
“어차피 C.C.니까 해도 안 해도 괜찮아.”
“그래도 손님이니까.”
“괜찮아, 줄리어스.”
오히려 를르슈에게 괜찮다는 소리를 들어버린 줄리어스는 저도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계속 바닥에 두는 게 괜찮은가 고민했다. 러그가 있는데까지만 가줘도 좋을 거 같은데. 여긴 좀 추울지도 모르니까. 난방을 해도….
“‘를르슈’? 여긴 춥지. 조금만 움직여서 따뜻한 데로 갈까?”
“…….”
“내가 ‘를르슈’를 안아도 돼?”
손바닥을 내밀어서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비쳐도 ‘를르슈’는 묵묵부답이었다. 앙칼지게 대답하는 줄리어스의 반응이 감사할 정도다. 스자쿠는 난방은 조금 높혔다. 인간인 스자쿠에게는 덥지만 고양이들이 감기에 걸리는 것보단 나았다.
우선 C.C.가 맡긴 짐들을 꺼내놓고….
“를르슈!”
고양이지만 누구보다 똑똑한 를르슈를 불렀다. 불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스자쿠의 앞에 온 를르슈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왜 그래? 뭐가 이상해? 배 아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왜 불렀어?”
“새 친구, 아니 원래 동생이었으니까, 음…. 아무튼 내가 없을 때 ‘를르슈’를 부탁해. 를르슈라면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해.”
“……계속 ‘를르슈’라고 부르는거야?”
“저 아이도 집에 돌아가면 원래 이름이 를르슈인데 내가 함부로 바꿀 순 없지. 크기가 좀 차이가 나면, 큰 를르슈, 작은 를르슈…. 세 명 다 쌍둥이니까 힘들겠구나, 그건.”
“…….”
“그럼 우리집 를르슈를 를르슈라고 부르고, 저 아이를 루루라고 부르자!”
“나도 어렸을 땐 루루였잖아! 셜리도 나를 아직도 루루라고 부르고!”
“루루도 싫어? 그럼 뭐라고 부르지? 슈? 약간 달콤한 느낌?”
“슈도 내 이름에서 따온 거잖아!”
“어쩔 수 없지? ‘를르슈’를 를르슈한테서 따온 건데.”
“…….”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무어라 한 마디를 보태려다가, 먼저 치고 나오는 스자쿠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를르슈 답지 않네. 이런 걸로 심술을 부리다니.”
그 말에 이번엔 줄리어스가 참지 않았다. 줄리어스는 손톱을 세워 스자쿠의 뺨을 할퀴었다. 세 줄의 빨간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스자쿠가 악, 소리를 냈다. 를르슈는 핏방울이 튀는 것과 동시에 튀어나가려는 줄리어스의 몸을 붙잡았다.
“줄리어스! 그러지 마!”
“스자쿠가 나빴어! 를르슈는 한 명 뿐인데!”
그 사이에 스자쿠가 달려간 곳은 ‘를르슈’가 있는 곳이었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C.C.가 두고 간 자기 이불 사이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덜덜 떠는 ‘를르슈’의 옆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스자쿠.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별 거 아니었어. ‘를르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지만, 무서운 건 없어. 아무것도….
줄리어스까지 울 것 같은 얼굴이기에 를르슈는 제 동생을 달랬다. 스자쿠를 할퀼 일은 아니었어. 손톱은 안 아파? 줄리어스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우리만 모시는 게 아니야?”
“…그런가봐.”
모시는 게 아니라, 우리는 키워지고 있는 수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랑 받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펫.
를르슈는 ‘를르슈’와 스자쿠가 같이 있는 모습에 등을 돌렸다.
“뭐가 불만이십니까, 줄리어스 경.”
“불만 같은 거 없어? 너는 ‘를르슈’나 돌봐!”
“‘를르슈’는 얌전하니까 괜찮아. 너처럼 사료 캔을 엎거나 물통을 엎거나, 화분을 엎거나. 아니, 나무 화분은 어떻게 엎은거야? 너보다 더 무거운데!”
“내가 못하는 건 없어.”
“왜 갑자기 반항기야, 줄리어스.”
“에너지 보존 법칙을 따르고 있는거야. 원래 이 집안의 반항 에너지는 나와 를르슈로 조절 가능했지만, ‘를르슈’가 오면서 갑자기 반항 에너지가 떨어졌지. 그 에너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스자쿠는 빨대가 딸린 물통을 줄리어스에게 먹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요새 줄리어스는 사고뭉치였다. 베란다 유리창을 안 깨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를르슈’와 캣 타워 위에서 책을 읽는 를르슈.
를르슈가 ‘를르슈’를 잘 돌봐줄 것이라는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를르슈는 ‘를르슈’를 필요 이상 접촉하지 않고, 아침에 이불에서 ‘를르슈’를 끌어내는 건 줄리어스고, 밥을 먹이는 건 스자쿠의 몫이었다. 스푼을 잘 쓰지 못하는 ‘를르슈’는 스자쿠가 떠먹여줘야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사이에 를르슈는 빠르게 먹고 식탁에서 일어나거나, 줄리어스는 접시를 엎어버린다.
각오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각오한 적은 없다!
“를르슈,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랑?”
“응. 를르슈 말고 의지할 사람이 없네.”
를르슈 밖에 없어, 라는 말을 했음에도 를르슈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했다. 줄리어스는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이 없고, ‘를르슈’는 또 이불에 몸을 묻은 채로 자고 있었다.
“최근에 줄리어스가 왜 저럴까?”
“…형제라고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어떻게 알아?”
를르슈도 만만치 않군. 스자쿠는 턱을 괴며 옆자리에 앉은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했던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를르슈는 ‘를르슈’가 싫어?”
“…….”
“하지만 ‘를르슈’는 다른 고양이들이랑 다르게 얌전하고, 살짝 아프기도 하고. 뭐, 길게 말해도 소용 없지. 불쌍한 애야. 를르슈가 잘 대해주면 좋겠어.”
“…….”
스자쿠의 빤한 시선에 를르슈는 두 손을 내밀었다. 어렸을 때 자주 했던 안아달라는 사인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품에 안았다. 가슴팍에 뺨을 부비던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꼬리도 흔들고 귀도 쫑긋거리면서 애교를 부렸다.
“스자쿠한테 를르슈는 나 밖에 없지?”
“응?”
“나한테 스자쿠는 스자쿠 밖에 없는데, 를르슈는 나 말고 또 다른 애가 있다는 거 싫어.”
“…아, 싫었구나.”
“그렇지만 쟤는 내 동생이고, 스자쿠가 부탁하지 않아도 잘 대해줄 거야. 그리고 나도 줄리어스도, 쟤 안 괴롭히잖아.”
“그렇긴 하지만….”
대신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까ㅠㅠ
“빨리 맹세해. 나 말고 다른 를르슈는 이제 없다고. 이번만 예외야.”
“맹세합니다.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를르슈 뿐이다.”
“어느 를르슈?”
“지금 내가 안고 있는 를르슈.”
“응. 줄리어스도 우리집에 있는 줄리어스 뿐이야. 이제 안 돼.”
“그럼, 그럼.”
를르슈는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 아직 두 마리 모두 자기 세계에 빠져있으니 여기를 볼 리는 없겠지. 스자쿠의 뺨에 빠르게 키스한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라도 맹세했으니까 줄리어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할게. 스자쿠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 111 | 하얀 저승사자는 백마를 탈 수 있는가 | 2020.03.03 |
| 110 | 살아있는 나이트 오브 제로와 환생한 를르슈 | 2020.02.24 |
| > | 고양이 를르슈 x 고양이 줄리어스 x 고양이 허무슈 | 2020.02.24 |
| 108 | 고양이 를르슈를 임시보호 중인 스자쿠 | 2020.02.24 |
| 107 | 1+1+1=3 | 2020.02.22 |
| 106 | 아리에스의 백설공주 | 2020.02.19 |
| 105 | 1+1+1=3 | 2020.02.01 |
| 104 | 전야 | 2020.01.27 |
| 103 | [소설] 미완 ?? | 2020.01.27 |
| 102 | 세일러복과 드레스 | 2020.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