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의 성을 따르고 있는 이상 를르슈는 무력한 것이다. 나나리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에 급하게 귀국했더니 들이닥치는 짐덩이가 를르슈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했다. 브리타니아에 머무는 그 기간동안에만 잠시만 맡아주길 바란다는 슈나이젤의 말에, 우선 그의 신세를 졌던 입장에서 거절하기는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나나리의 간병이 먼저였기 때문에 알겠다고 대충 둘러댔지만.
도착한 것은 관이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쓰는 관. 를르슈의 어머니도 이런 비슷한 관에 묻혀서 죽었다.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이 있는 집안에 시체가 들어있는 유무와 다르게 관은 불길하다.
제일 기분 나쁜 것은 관뚜껑 위에 적혀 있는 ‘Zero’라는 글자였다. 몇 세기 전에 세계를 구한 영웅의 관을 왜 집안에 들여놓고 있어야할까. 슈나이젤이 사이비 종교에 입문했다는 소문은 듣지도 못했는데. 제로라는 글자 앞에 무언가 흐릿하게 더 적혀있다 사라진 흔적이 있었지만, 아마 세기의 영웅을 기리는 문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를르슈는 그 관을 지하 창고에 갖다두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슈나이젤이 보낸 것이니 정중하게 대해야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당시의 를르슈는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나리였다.
이제 열 다섯살이 된 나나리는 이제껏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컸다. 환절기 때마다 감기에 걸리거나, 컨디션이 자주 무너지는 를르슈와 다르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를르슈가 일본에서 잠시 유학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에도 씩씩하게 아리에스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한 것도 나나리였다. 오라버니가 늘 걱정이에요. 건강을 꼭 챙기세요.
그런 나나리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승마는 를르슈도, 나나리도 브리타니아의 집안에 입적된 이후부터 줄곧 배워온 것이기에 나나리가 갑자기 낙마를 할 이유는 없었다. 말에서 떨어졌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나리는 울먹거리면서도 자기는 괜찮다고 했다. 떨어지면서 근육이 놀란 게 틀림 없어요. 그렇지만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는 모르겠어요.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은 불명이었다.
를르슈가 일본에서의 모든 일을 그만두고 돌아오게 된 것은 나나리가 눈을 뜨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고민이 있어도 언젠가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항상 활기찬 나나리가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눈이 떠지지 않아요. 오라버니, 무섭습니다. 제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요.
귀국한 를르슈는 아리에스의 저택으로 곧장 향했다. 그 사이 나나리의 상태는 더 나빠져서, 하루의 절반 이상은 고열에 시달렸고, 건강했던 몸은 야위어가고 있었다. 를르슈가 손을 잡아줄 때 겨우 숨을 고르는게 고작이었다.
나나리가 아픈 이유를 알 수 없다.
이제 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
검사 결과로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 남은 것은 정신적인 이유 뿐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큰 사건을 빼고는 나나리도, 를르슈도 크게 고통받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 먼저 돌아가셨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 남매를 받아준 것은 아버지의 먼 친척인 브리타니아 가문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후계자였던 슈나이젤이 를르슈와 나나리를 거두어 주었다.
를르슈의 뛰어난 지력을 오로지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에게만 써야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만 지킨다면, 두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고아원에 들어가서 나나리와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불안감에 휩쓸리고 싶진 않았던 를르슈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브리타니아 가문의 사람들이 사는 곳과 조금 먼 아리에스에 성 같은 저택을 얻었다. 브리타니아의 성을 따르게 된 이상 최고의 교육도 받았다. 사치스럽다고 표현할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잃어 외로워진 남매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지금은 나나리의 병문안을 기꺼이 오며, 빨리 낫길 바란다며 기도하는 가족이 되었다.
심리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서 를르슈는 모순을 찾으려고 했다. 나나리는 행복하게 잘 지내며,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고, 다툼을 하더라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아이가 하루 아침에 걷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은.
신의 저주라도 받은 것 같아….
를르슈는 신을 믿지 않는다. 종교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브리타니아 성교회에 이름을 올려두긴 했지만 그건 브리타니아의 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가풍인 것이다. 신도로써 불성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를르슈가 불성실한 것이다. 나나리는 다니고 있던 학교도 성교회가 설립한 학교를 다니고 있고, 매주 학교에서 기도문을 외우는 것도 성실하게 한다. 신학 과목도 좋은 성적을 받는다. 를르슈에게 거짓말도 못하는 아이가 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주를 받는다면 를르슈가 아닌가. 왜 나나리가.
“물건은 잘 받았습니다. 우선 창고에 넣어뒀습니다만.”
‘창고? 나쁘진 않지만 그 사람한테 너무한 게 아닐까.’
“사람이 들어있나요? 아, 하긴 사람은 죽어도 사람이죠.”
‘를르슈, 내가 무슨 물건을 보냈는지 제대로 말을 하지 않고 보낸 건 미안하지만, 우선 너도 너의 입장을 제대로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새벽까지 아픈 나나리를 돌보고 나서 돌아온 전화를 받으니 슈나이젤이었다. 물건은 잘 받았니, 로 시작하는 전화에 를르슈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본에서 멋대로 돌아온 것도 봐준 건 나란다. 사쿠라다이트 연구의 핵심인 네가 무책임하게 브리타니아로 돌아왔는데, 그걸 수습한 것도 나고. 네가 아리에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나리의 신변을 보호한 것도 나다.’
“…그건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면 아리에스에 머무는 동안 그 물건의 연구를 부탁해도 될까?’
“미이라라도 들어있습니까? 아쉽게도 제 분야는 고고학이 아니라서요.”
‘네 머리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훌륭하기로 유명하지.’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나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거절하고 바로 브리타니아의 성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아리에스에 있는 동안에만…. 나나리가 나으면 물건은 바로 본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물론, 그리고 너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할 일을 하고 아리에스로 오면 된단다.’
“알겠습니다. 제가 받은 건 제로의 관 같습니다만.”
‘그 관은 우리 집안에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야. 내가 맡게 된 것은 비교적 얼마 안 되는데…. 처음엔 박물관에 팔까 했지만, 진작에 갖다 팔 수도 있는 물건을 아직까지도 모셔두고 있는 게 이상하고. 그리고 그 물건을 함부로 버리면 마왕의 저주를 받는다는데 무섭잖아.’
“형님이 그런 미신을 믿을 줄이야.”
‘그리고 이제 와서 제로가 사람이었고 관에 묻혀서 죽었다고 하면 세계적인 영웅에 대한 실망이 클 거 같아서. 히어로에 대한 로망은 지키고 싶은 소년의 마음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었나봐.’
“…….”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 집안에서 계속 지켜왔다는 것, 그리고 제로의 관이라는 것이 전부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제로의 정체.’
“영웅에 대해서 실망하고 싶지 않다고 하신 건 형님인데요.”
‘하지만 소년은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진실에 대해서 알고 싶은거야. 를르슈, 원하는 결과를 내게 보여주도록.’
그렇게 전화는 끝이 났다. 머리도 식힐 겸 나나리의 상태를 살폈다. 드물게 안정된 모습에 조금 희망이 생겼다. 빨리 낫길 바라. 나나리의 이마에 키스하며 를르슈는 방을 나섰다.
창밖을 내다보면 하늘은 벌써 어둠이 걷히는 보랏빛이었다. 나나리가 먼저 낫는 게 우선이지만, 만약에 이 투병 생활이 장기간이 되면 를르슈는 아리에스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재수없는 관짝을 맡아두는 시간도 동시에 늘어난다.
하루 빨리 저 물건을 치우는 것. 나나리가 빨리 낫는 것이 아니라면 방법은 하나다.
제로의 정체를 밝혀낸다.
해가 뜨는 아침까지 짧은 시간을 자고 일어난 를르슈는 다시 나나리를 살핀다. 이름을 부르면 나나리는 손을 뻗었다. 오라버니. 부르는 목소리에 손을 잡아주면 나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를 하고 싶냐는 말에 나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자고 싶어요. 를르슈는 초조한 마음에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불안함을 눈치챈 것인지 나나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점심은 오라버니와 함께 먹을게요.
식당으로 쫓겨나듯 내려온 를르슈는 들어가지 않는 식사를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나나리의 몸에는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을 때마다 벨이 울리게 만드는 장치가 붙어있다. 또 불편하면 바로 부를 수 있게 호출 벨도 가까이에 뒀다.
지하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다. 원래 물건을 쌓아두는 성격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지하 창고가 아니라 바로 옆에 두는 습관이 있다. 를르슈는 먼지가 가득한 지하 창고에 전기가 아직도 들어오는 것이 신기했다.
제로의 관을 앞에 두고서 사진을 찍고, 가지고 온 종이에 보이는 내역을 적는다. 어차피 고고학은 교양으로도 배우지 않아서 모른다. 제로의 활약에 대해서는 역사 시간에 주구장창 배우지만.
관에 들어간 몇 세기 전의 시체를 마주할 자신 같은 건, 솔직히 없다.
운이 안 좋아 썩지 못한 시체가 흉한 꼴이라면 비위가 상한다.
제로는 영웅이었으면서 왜 흙에 묻히지도 못하고, 브리타니아의 가문에 의해서 관에 갇힌 채로 지냈나. 슈나이젤처럼 정통성을 따질 수 있는 후계자의 손이 아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에게 자기 정체가 밝혀지는 게 좋을 리도 없을 테고.
무거운 관의 뚜껑을 힘을 주어 겨우 열었다. 역겨운 냄새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딱히 다른 냄새도 없다.
어제 막 관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썩지 않은 시체가 있다. 제로는 가면을 쓴 사람이다. 관 속의 시체에는 가면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가면도 없다. 흔히 제로의 복장이라고 생각하는 그 옷도 아니다.
얼굴을 드러낸 이 시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녹슨 칼.
“제로의 정체가 아시안이라고 예상했었지만….”
제로가 활약하는 곳은 언제나 에리어11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으니. 를르슈는 종이에 대충 휘갈겨 쓴다.
검은 옷. 칼. 갈색 머리. 아시안 남자. 10대 후반 20대 초반 예상. 부패가 심하지 않음. 가면 없음.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채로 관에 누워 있는 시체 근처로 다가갔다.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 를르슈는 시체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한 가닥 정도면 되려나. 곱슬머리에 손을 뻗다가 구부린 몸이 무게중심을 잃고 옆으로 무너졌다. 젠장. 종이와 펜이 다 흩어졌다. 게다가 머리카락만 만지려고 했던 팔이 미끄러져서 시체의 가슴팍으로 내려갔다.
옷감이 부드럽게 손을 받는 것과 동시에 를르슈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거짓말.”
거짓말 같은 일은 그 다음에도 일어났다.
를르슈가 급하게 떼어낸 손을 잡아채는 것. 감겨있던 두 눈이 떠지는 것. 곧게 누워있던 두 다리가 힘을 주고 굽어지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시체는 할 수 없다.
“넘어졌어?”
시체는 말할 수 없다.
“아, 손을 이렇게 잡으면 일어나기 힘들겠네.”
시체는 손을 잡지도 않는다.
“여기는 어디일까…. 괜찮다면 알려주지 않을래?”
를르슈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시체.
일련의 사건을 납득하기에는 를르슈의 뇌는 과부하에 걸려있었다. 나나리는 어떡하지. 를르슈가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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