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루루기 스자쿠는 냉정하고 솔직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보다 8살 어린 황자님의 파격적인 사랑 고백은 없던 일로 하는 걸로. 아리에스 궁으로 그를 바래다 주면서, 제 옷자락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황자 전하는 스자쿠의 심란한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맹랑하고, 귀여운 고백을 할 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에서 그간의 를르슈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듣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우선 매일 같이 스자쿠 앞으로 온 다도회, 만찬회의 초대장에 를르슈의 이름은 한 번씩은 꼭 들어갔고, 그런 날이 없으면 를르슈가 친하게 지내는 황족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 달 가까이 저택을 비웠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를르슈는 노선을 바꾸어 사교계에 얼굴을 살짝 내미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달 후에 스자쿠와 조우함으로써, 자신의 방법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도 눈에 보였다.
어린 아이들이 흔히 하는 착각, 같은 걸로 넘어가면 좋을 일이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 고백과 를르슈의 입술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은인의 아들을 취한다는 것은, 스자쿠 같은 경우에는 배은망덕한 망할놈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은 케이스다. 과거 일본, 지금은 에리어 11에서 온 스자쿠는 운이 좋게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의 눈에 들었고, 그의 신체 능력을 우수하게 여긴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가 군인으로써의 그를 키웠으며, 그 성과는 지금의 황제 —사를 지 브리타니아가 손에 넣고 있다.
를르슈의 어머니, 형, 아버지, 모두가 엮여있는 것이 스자쿠였다.
그래서 를르슈는 더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스자쿠는 냉정하게 생각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주변에는 황족 아니면 귀족. 외국인은 더 드문데다가, 나 같은 특이한 경우도 드무니 정이 많은 그 황자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 그때의 고백은 없는 것이라고.
스자쿠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망토를 둘렀다. 오늘도 아리에스 궁에서 초대장이 왔다고 했지만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캐멀롯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이~건 심리적인 문제야,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렇죠~ 유로 브리타니아에서는 문제 없었으니까.”
“쿠루루기 경, 숨겨봤자 곤란한건 우리라는 거, 알고 있지?”
로이드는 스자쿠가 들어있는 실험체 벽을 탕탕 두드리며 물었다. 랜슬롯과 다르게 시뮬레이터이기 때문에 마구 대하는 것이 거침없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있는 스자쿠를 한 대 칠 수 없기 때문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로이드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스자쿠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심리적인 문제, 라고 정확하게 짚어낸 이상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스자쿠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저 시뮬레이터 안에서 깜깜한 화면을 노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쿠루루기… 아니, 스자쿠 군. 오늘은 시뮬레이션 이제 됐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
세실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스자쿠는 그녀의 곤란한 미소까지 보고 나니 더 이상 숨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땀 범벅의 스자쿠가 샤워를 하고 나서, 캐멀롯 안쪽의 탕비실에서는 티백(다행히도 아무것도 건들지 않은)을 동동 띄운 종이잔이 세 개 놓여져 있었다. 평소의 기사복으로 갈아입고 온 스자쿠는 작고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유로 브리타니아에서도 바빴으니까,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해볼까 해서….”
“뭔가 고민이 있다면 자력으로 해결해주길 바라지만 말이야.”
“로이드 씨!”
“농담이야.”
지금의 분위기는 캐멀롯 보다는 그 이전의 특파 분위기라 스자쿠도 편하게 앉았다.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면 세실은 어어,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스자쿠 군, 키 컸지?”
“아, 네. 겨울 사이에 또 컸나봐요.”
“대단하네, 어쩌면 시뮬레이터도 바꿔야할 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안 그래도 갑자기 들어온 지원금을 어디에 써야할 지 몰랐는데.”
“지원금이요? 슈나이젤 전하요?”
“아니, 음, 뭐,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지. 스자쿠 군의 패트런이기로 했으니까.”
“정확히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비밀 엄수라고 각서까지 쓰셨으면서.”
“아~ 그러네…. 유감이네, 스자쿠 군!”
로이드는 경쾌하게 웃으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를르슈 전하가 캐멀롯에 투자한 건 비밀이니까 어쩔 수 없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 이름에 스자쿠는 마시고 있던 차가 기도로 흘러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쿨럭대며 한참을 기침을 하고 있을 때, 로이드는 즐거운듯이 와하하 웃고 있고 세실만 곤란한 듯 눈썹을 무너뜨리며 웃고 있었다.
“르, 를르슈 전하요? 아직 어리시잖아요!”
“어리시긴 하지만, 영특함으로는 어디가서 지지 않으시니까…."
“어린애 돈을 어떻게 받으신거예요!”
“어, 어린애가 줄 액수가 아니었어! 아, 이건 변명인가, 아무튼…. 그, 그러니, 음~ 그러네요, 그렇죠, 로이드 씨?!”
스자쿠는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로이드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더니 길게 숨을 토했다.
“너도 적당히 전하를 피했으면 우리도 이런 돈 안 받았어!”
“전하를 피하다뇨?”
“본국에 돌아와서 아직 한 번도 아리에스 궁에 돌아간 적 없지, 스자쿠 군?”
“…파티 끝나고 데려다드렸…”
“그건 데려다 준거고, 직접 초대받아 간 적이 없잖아.”
“…….”
“전하께서 움직이실 정도면 초대장은 안 보냈을 리가 없고. 네가 잘못한거야. 어린애 고집을 무시하면 안~돼!”
“그건 불경한 발언이에요, 로이드 씨!”
옥신각신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스자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은 ‘나이트 오브 세븐’의 일과 중이니까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순간 강렬하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돌아가야하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튼 오늘의 시뮬레이션은 여기까지. 이후로는 아리에스 궁으로 가주는 게 좋겠어.”
“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반항할 경우, 마취총을 쏴도 된다, 라고 명령은 떨어졌는데.”
“누구한테서요?!”
“누구겠어~ 를르슈 전하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시간의 흐름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린애 돈 몇 푼 받았다고 저를 이렇게까지 아리에스 궁으로 보내려고 하는 두 어른의 모습에 힘이 빠졌다.
“전하가 가여워서 그래, 스자쿠 군.”
그 전하에게 고백 받아서 이렇게 정신 못차리고 있는 나는?
“한 번만 들러줘.”
지금 여기에서 거절하면 스자쿠는 아마 경질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장갑을 낀 주먹을 꽉 쥐면서, 스자쿠는 알겠다고 했다.
알겠다고 말한지 1분도 되지 않아, 아리에스 궁 소속의 차가 마중을 나왔다. 이것도 게산된거냐고 물어보자, 세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를르슈 전하께서…’라고 중얼거렸다. 다 거짓말 같았지만, 우선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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