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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ial 6

Re:play / DOZI 2020.05.03 16:40 read.180 /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의 일상은 죽었던 오빠와 다시 만났다고 하더라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했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미한 차이다. 나나리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변화가 의미가 없진 않았다. 어디선가 그가 살아있고, 나나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더 한 번 고개를 들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는 여기에 있어요.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시나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나요?

 

나나리는 공식 석상에 나갈 때면 를르슈의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사람들 너머의 눈빛에는 이제 일상에 자리잡은 평화로부터의 안식이 느껴졌다. 그것은 를르슈의 희생이 만든 것이라서 너무나 소중하고 기쁘게 느껴졌다. 이런 저를 알고 계신가요, 오라버니?

나나리는 를르슈에게 편지를 여러 차례 썼다. 그러나 보낼 주소가 없어서 이젠 세어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편지들이 봉투 째로 서랍에 가득 들어찼다. 마음만 먹으면 를르슈와 C.C.가 떠난 곳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모처럼 설치해둔 핫 라인 전화의 벨이 울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여행은 꽤나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나나리의 연락은 오히려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을 지키는 것도, 부수는 것도, 나나리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오로지 지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녀는 를르슈의 죽음 이후부터 삶의 모순과 그것의 공포를 실감하고 있었다. 

소중하니까 멀리 두는 것 만큼 비겁한 이별의 변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소중하고 아낄수록 가까이에 두고서 사랑해줘야한다. 하지만 를르슈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지금, 그가 같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서로의 우애가 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신뢰를 져버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어스의 조각’이라는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를르슈는, 지르크스탄에서 헤어지기 전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단 몇 마디로 나나리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다. 

 

항상 사랑한다, 나나리. 

 

그 말만으로도 나나리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그 용기는 나나리를 홀로 서게 만들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에, 전화나 편지 같은 연락이 오지 않은 최근 5년 간의 일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나리는 어른이 되어갔고, 성인이 되어 이젠 명예고문 그 이상의 일을 맡아 본격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배후에는 제로와 슈나이젤이 있었다.

지르크스탄에서 화해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스자쿠는 나나리 앞에서 더 이상 가면을 벗지도 않았고, 를르슈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옆에 있는 제로가 제로가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두 눈이 빛을 잃었던 어린 시절, 그때 느꼈던 스자쿠의 상냥함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를르슈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나나리는 그렇게 느껴졌다.

 

—…… 여기에 오라버니만 계신다면, 이 고독함은 조금 줄어들까요?

 

나나리는 오늘자의 편지, 거의 일기에 가까운 종이를 정중하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가득 채운 서랍은 한 차례 비워서 모조리 다 태워버렸음에도 금방 가득 차서, 그것이 요즘 나나리의 고민이었다. 오늘의 것까지 서랍 안에 넣어놓고서 나나리는 휠체어를 탄 채로 침실 쪽으로 가려고 했다. 

순간 서재의 깊숙한 곳에서 전화가 울렸다. 나나리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아니라 낯선 벨소리였다.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나나리는 를르슈를 떠올렸다. 이 소리는 를르슈와 연락하기 위해 설치해둔 핫 라인의 전화였다. 벨이 울리고 있는 서재 안쪽을 열었다. 

전화는 더 큰 소리로 소리를 내며 나나리를 부르고 있었다. 나나리는 빨간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다짐한 듯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상대와 받은 나나리 모두 한참동안이나 침묵했다. 

 

‘나나리? 나야.’

“……오라버니.”

 

예전과 다를 바 없을 소년과 같은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나나리는 눈물이 고일 것 같은 것에 눈을 부릅뜨며 창가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잠기는 것이 드러났다. 전화를 받아서, 그동안 연락이 없다는 걸 속상했다고 들키면 안 되는데. 나나리는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다. 

 

‘그동안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해.’

 

연락을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를르슈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나리는 더 이상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오라버니의 마음에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요, 잘 지내시죠?”

‘아, 조금 손이 가는 일이지만 나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야.’

“다행이네요.”

‘…….’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안해.’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연락 주셔서 기뻐요. 아, 그,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라.”

‘괜찮아, 알고 있어.’

 

정말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 목소리에 나나리는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좀 더 빨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미안, 나나리도 바빠보이고, 여기 일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려서.’

“오라버니께 보낼 편지 쓸 시간 정도는 있어요.”

‘하하, 받아보고 싶네.’

 

아쉬운 그 목소리가 침묵으로 잦아들면서, 나나리는 를르슈에게 할 말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다. 오랜 시간 동안 보지 않은 오라버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편지로도 다 담지 못할 정도인데, 정작 목소리를 들으면서 말로 전하려니 문장조차 머릿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를르슈는 그러한 나나리의 초조함을 아는 것처럼 그 침묵에 대해서 왜 말이 없냐고 묻지 않았다. 

 

“일이, 바쁘지만…. 그래도 다 익숙해지고 있어요. 이젠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 뉴스로 이야기는 들었어. 나나리, 잘 해낼 수 있을거야.’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요.”

‘다행이네.’

 

긴장이 풀린 나나리는 최근에 편지에 적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아도 를르슈는 알아차릴 것이다. 실제로 많이 함축된 말들에도 불구하고 를르슈는 나나리가 고전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면서, 그런 문제에 부딪혔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나나리를 칭찬했다.

나나리는 웃음이 가득해지는 얼굴과 다르게 전화를 쥔 손끝이 차게 식었다. 를르슈는 세상과 벗어난 사람이고, 나나리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인데도 나나리보다 더 뛰어난 전략을 짜는 것에 능통했다. 새삼 그가 세계를 어떻게 정복했는지, 그것을 깨닫게 되니 오라버니와의 재회가 반갑기보다는 냉정해지면서 차분해졌다. 

여기야말로 오라버니가 있어야하는 자리인데.

나나리는 그 말을 삼키면서 를르슈의 말을 듣다가, 조금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해볼게요. 사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기가 어려워서요.”

‘슈나이젤이나 제로는…?’

“물론 그 두 분도 큰 도움이 되지만,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오라버니의 말씀을 들었으니 혼자서는 역시 무리인걸까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어. 나나리,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의지하는 게 좋아.’

“…괜찮을까요?”

‘제로라면 반드시 너의 선택을 믿어줄 거야.’

 

스자쿠는 그럴 거야. 

를르슈의 말끝에 불리는 그 이름에 나나리는 한동안 말없이 전화만 붙잡고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제 쿠루루기 스자쿠를 알았던 시간보다 제로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졌다. 를르슈의 제로보다, 스자쿠의 제로가 더 익숙해진 나나리는 그 시간을 홀로 보냈다는 것이 가끔은 외로웠다. 

 

“스자쿠 씨랑도, 연락 하시나요?”

‘응?’

“저는 제로 밖에 만날 수 없으니까, 스자쿠 씨의 이야기를 들은지는 벌써 한참이 지났어요. 오라버니는 스자쿠 씨가 잘 지내는지 아시나요?”

‘…….’

“제로는 잘 지내는데, 스자쿠 씨는 모르겠어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조용해졌다. 한참을 이어가던 정적 끝에 를르슈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스자쿠가 연락을 받지 않아.’

“네?”

‘…친구로써도, 질린 거겠지. 거짓말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미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후회가 되어서.’

“……그래서 저한테 전화를 하신 건가요?”

‘나나리.’

“네, 오라버니.”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로는 너무 약한 소리지만…. 마음을 남기지 않는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하아, 하고 이어지는 한숨에 나나리는 어느새 자기 나이가 를르슈가 황좌에 올랐던 그때보다 더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것은 제 오빠이기도 했지만,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소년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어린 고민을 하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괴로워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나나리는 이질감, 공포, 동시에 허무함을 느꼈다.

나나리는 코드와 기어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으나, 지금처럼 나나리와 를르슈 사이의 벽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저주 받은 힘—기어스라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 괴리감은 커져갈 것이고, 나나리는 그 시간을 홀로 살아갈 제 오라버니를 떠올리면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오라버니 답지 않은 이야기네요.”

 

내뱉은 말은 너무 차가운 말이어서, 듣고 있던 를르슈가 호흡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리는 차게 식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언제든 오라버니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도움이 된다면 제로를……. 스자쿠 씨에게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까요.”

 

방황하는 아이를 돕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나나리는 눈을 감았다. 깜깜하게 다가오는 어둠은 거의 10년 가까이 나나리와 함께였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를르슈와 스자쿠에게 서로가 있었다면, 나나리에게는 그 어둠이 유일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자 원수였다.

 

“미련을 가져도 좋아요. 오라버니가 만든 상냥한 세상에서, 오라버니의 마음 정도는 남아도 되잖아요. 언제라도 좋으니 그 마음을 쓰는 걸 보고 싶어요.”

 

어둠은 나나리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나나리는 오랜만에 눈을 감고 이야기를 했다. 이럴 때면 차게 식은 두 손을 덥혀주던 를르슈의 손이 닿았는데, 이제는 누구도 나나리의 손을 잡지 않는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나리 혼자 남아있었다. 

이것이 나의 마음. 남아있는 나의 미련. 

 

“스자쿠 씨에게 이야기는 해둘게요. 친구가…기다리고 있다고.”

‘…….’

“항상 사랑해요, 오라버니.”

 

그 이후로는 나나리는 실없는 이야기를 했다. 상대가 를르슈이지만, 그래봤자 아직 세상을 어리게만 보는, 자기 감정에 충실한 소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나리는 자신의 세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어른이 된 나나리 자신을 감추고서, 를르슈가 원하는 여동생인 나나리가 되어야만 했다.

오라버니가 지켜주고 싶어했던 나나리는 이제 없는데. 하지만 나나리는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어린 아이처럼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전화 너머의 를르슈는 나나리가 울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 * *

 

전화를 끊고 난 다음의 L.L.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마 형편없는 표정으로 울고 있을 것이다. 침대의 반대편에 누워있는 C.C.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질질 짤거면 그냥 따라오지 말지. C.C.는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되돌이켜 생각하면서 L.L.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기어스의 조각을 모으는 일에 걸리는 시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 번에 여러 개의 기척을 느낄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것은 늘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있어서, L.L.는 그 눈에 띄는 외모를 천으로 늘 감추고 다녀야했다. 안 그래도 약한 체력에 숨까지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회수 속도는 더뎌졌다. 

하지만 그 속도가 더뎌지게 된 이유는, 최근 기어스의 조각이 사람들 중에서도 아이들에게서 많이 회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텐데, 그 간절함은 어른보다 아이가 강한 것 같았다. 이틀 전에는 좀도둑질로 하루 생계를 빌어 먹고 사는 소년, 어제는 그 소년에게서 훔친 물건을 받아 팔던 시장의 소녀, 오늘은 L.L.과 C.C.의 물건을 훔치고 달아나려고 했던 소매치기 소년까지. 모두 죽였다.

C.C.는 사흘 연속 계속된 살인으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훌쩍훌쩍 울고 있는 L.L.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자기가 더 힘든 일을 한 것처럼 늘 피곤한 얼굴이었다. 열 살에서 열 두살, 그 정도나 됐겠지. 그 나잇대의 어린 아이들은 L.L.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듯 했다.

그것이 아자드와 할라인지, 를르슈와 나나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L.L.가 울음을 멈추고서 다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아마 이번엔 쿠루루기 스자쿠일 것이다. C.C.는 그가 나나리에게 전화를 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L.L.가 처음 전화로 쿠루루기 스자쿠를 상대로 지목했을 때, 그가 나나리에게 기대는 것을 포기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자쿠가 받지 않으니, 나나리를 통해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그 모습에, 새삼 L.L., 그러니까 를르슈가 얼마나 어린 남자였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C.C.로써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전화는 대기음만 길게 울릴 뿐, 사람의 목소리로 닿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받지 않는 스자쿠의 전화를 내려놓은 채, L.L.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제도, 엊그제도, 그 이전에도, 세상에 있는 를르슈와 나나리, 그리고 스자쿠를 죽였다.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기어스의 조각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비열함에 L.L.는 지쳐있었다.

그런 지친 마음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위로가 필요했다. 이 결론에 달하는 순간에, L.L.는 나나리를 떠올리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답을 알 수 없는, 스자쿠를 고른 그 감정의 이름을 찾고자 노력했다.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더 어둡고 칙칙하며, 증오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가벼운 이 마음을, 이 마음 때문에 L.L.의 끝나지 않을 삶이 더욱 피폐하게 느껴졌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언젠가 죽는다. 살아야한다는 기어스가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은 언젠가 노쇠하며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그가 죽기 이전에 감정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스자쿠의 도움이 더 절실했다. 이기적인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스자쿠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상하고, 스자쿠에게 마음이 남았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나리가 아니라 스자쿠를 찾고 있는지, 그 답은 여전히 L.L.의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L.L.와 이내 이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C.C.는 그의 사랑이 가엾게 느껴졌다.

C.C.는 두고 온 것들, 잃어버린 것, 떠나온 것들을 떠올렸다. 침대에 몸을 뉘이고서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고 나면 힘이 빠지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아예 눈을 꽉 감으면서 어둠 속으로 저를 밀어넣었다. 그리고서 수마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아직 수복되지 않은 C의 세계, 그래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이 괴로웠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되더라.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했지, 마리안느? 

 

C.C.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포기가 빨랐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에게 마음을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손에는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남에게서 받은 증오, 혐오, 경멸, 그런 감정들 사이에서 를르슈의 손이 다가왔다. C.C.의 더러운 상처투성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도 언젠가 이것도 사라질 따뜻함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도 지금 뿐이라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C.C.는 정말 오랜만에 욕심을 냈다.

그녀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저의 것이 되어주길 바라는 욕망은 한 번 지핀 불처럼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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