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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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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ial 8 (完)

Re:play / DOZI 2020.05.03 16:48 read.310 /

새벽은 스자쿠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시간이다. 특히 오늘처럼 꿈을 꾸고 난 새벽이면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다 튀어나와 스자쿠의 온몸을 감정으로 옭아맸다.

스자쿠의 꿈에는 유페미아가 나온다.

가장 아름다울 때의 그녀는 없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학살왕녀가 스자쿠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녀를 죽이는 것은 제로다. 살려내, 유피를 살려내! 발악하고 나면 제로는 가면을 벗는다. 그는 쿠루루기 스자쿠다. 아니, 제로다.

꿈이 끝나지 않는다. 이 현실은 꿈의 연장이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쿠루루기 스자쿠는 제로가 되었다. 그것을 인지한 것은 를르슈가 죽고 난 직후의 일 년의 반 정도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옛날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유페미아의 서류를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엔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날 밤에 스자쿠는 처음으로 유페미아의 꿈을 꾸었다. 

스자쿠, 스자쿠, 스자쿠…!

피투성이가 된 유페미아는 스자쿠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부짖었다.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이 구원인 것처럼 스자쿠를 불렀다. 유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스자쿠가 돌아서서 그녀를 잡으려고 하면, 유페미아는 점점 더 멀어졌다.

결국 그녀의 관 앞에서 스자쿠는 울면서 깼다. 눈물 범벅이 된 뺨을 쓸어보면서 자신이 과연 그녀를 위해서 울 자격이 있나, 그것을 깨닫고 나니 눈물도 멎어버렸다. 를르슈가 죽었다고, 유피는 행복해질 수 있어? 유피는 계속 그 지옥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

 

나는 유피를 구할 수 없어.

 

그녀를 사랑하는 코넬리아조차 유페미아를 구원할 수 없다. 이 세상 누구도, 죽은 그녀를 다시 구원할 수 없다. 를르슈의 죽음도 어떠한 답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한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면, 그렇다면 왜…….

 

스자쿠는 제 손으로 죽였던 를르슈의 살갗이 벌어지는 그 생생한 느낌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제로는 모든 것에 침묵하며 악의에 맞서 싸울 뿐이다. 소리를 질러서는 안된다. 들뜬 숨을 가라앉히면서 스자쿠는 새벽을 맞이했다.

그렇게 꿈이 몇번이고 반복되고, 스자쿠는 가면 속에서, 마치 그날처럼 울고만 있었다. 

꿈을 꾸지 않는 밤은 겨우 찾아왔다. 를르슈가 살아있고, 그가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스자쿠의 밤에 유페미아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는 해바라기 밭이 보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웃음 소리일까? 정말 행복해보여.

이 곳에 누구와 왔는지, 스자쿠는 잘 알고 있었다. 를르슈와 나나리이다. 이제 쿠루루기 스자쿠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 살아있지만, 모두 만날 수 없다. 그들이 순진무구하며 악의도, 호의도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때이다. 오로지 세 사람만의 세상인 해바라기 밭이다. 

웃는 소리와 아이들끼리 소근거리는 소리가 높은 해바라기 꽃 사이에서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스자쿠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자쿠.’

'스자쿠!’

'스자쿠…….’

 

소년 특유의 높고 앳된 목소리가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어딘가 유피와 닮아있는 걸. 스자쿠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백의 황제가 피에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기어스는, 소원과 닮지 않았어……?’

 

내 소원은 이루어졌어?

를르슈의 소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앞에는 제로가 서있다. 그는 분명 쿠루루기 스자쿠다. 그를 죽여놓고 나서 어떻게 그에게 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유피도, 를르슈도, 누구도 지키지 못한 채로…. 가만히 서있다가 주저앉은 스자쿠를 향해 제로가 걸어왔다. 그가 가면을 벗으면 쿠루루기 스자쿠의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피에 젖어 붉은 흙을 쳐다보고 있으면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의 머리를 겨누는 총구가 느껴졌다.

 

'살아야 돼, 스자쿠.’

 

가면 속의 목소리는 늘 기계음이 섞인 그것이 아니었다. 가면을 집어 던진 제로는 를르슈였다. 그는 그때와 똑같은 눈으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에게 기어스를 걸고 있다. 살아야한다고. 살아가라고. 앞으로를 계속해서.

스자쿠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그때에, 를르슈가 당긴 방아쇠와 동시에 저를 꿰뚫는 총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새벽이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자의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몇번이고 반복된다. 스자쿠가 죽기 전까지, 아마 평생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걸까?

 

그 생각은 늘 스자쿠의 행동을 앞서게 만드는 힘이었다. 죽기 위해서라면 스자쿠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제 어떻게든 살아가야한다는 맹목적인 목적 하나만 남아있었다. 그것이 속죄라면, 스자쿠는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꿈 속에서 우는 유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면, 나의 선택으로 불행해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살아가는 것이 벌이라면 그 벌을 달게 받겠다고.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 길인가…?

스자쿠는 어둠 속에서 달빛에 겨우 비치는 거울을 보았다. 가면을 벗은 제로의 얼굴은 형편없는 표정을 짓고서 절망하고 있었다. 이건 제로가 아니다. 쿠루루기 스자쿠, 죽은 사람의 얼굴이다.

그 참상 속에서, 그 해바라기 밭에서, 스자쿠는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지옥에 놓여있었다. 반복되는 꿈은 스자쿠의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죽고 싶어.”

 

스자쿠는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어차피 그곳은 제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별실이었으니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되는 소원이었다. 

 

“나는, 죽고 싶어.”

 

이제 무엇이 옳은 길인지 모르고 지금의 속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내가 이끌어나갈 자격이 있는가? 나는 그녀의 원수를 갚았는가?

스자쿠의 안에서 쉼없이 들어차는 물음표가 보이지 않는 상처를 파고들었다. 새벽의 보랏빛이 거울로 비쳐서 들어왔다. 서서히 동이 터오는 것에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나는 죽을 수 없어. 나에게는 기어스가, 살아가야한다는 저주가 걸려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지금의 나를 만든 하나의 파트part니까. 제로로써 활약하기 위해서는 기어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를르슈도, 나도 마찬가지다.

 

다시 살아난 를르슈도 고통스러울까?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울까?

나처럼 죽고 싶어할까?

나와 같이…….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로, 스자쿠는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제로의 업무는 늘 과중했고, 스자쿠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로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살아가고 있었기에, 그를 수마로 이끌고 가는 피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 * *

 

…자쿠! 

스자쿠! 

 

“스자쿠!”

“으악!”

 

깜짝이야.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스자쿠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해바라기 밭에 ‘또?’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이 악몽은 끝나지 않네. 스자쿠는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는 것은 매일 봐도 힘들었다. 

 

“스자쿠,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라.”

“…어라, 다르네. 를르슈잖아.”

“모르는 척 하길래 머리라도 다친 줄 알았더니.”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맞은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있는 를르슈를 멍하니 쳐다보자, 를르슈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어봤다. 문제? 문제라면 있지.

 

“왜 여기 있어?”

“그건 내 마음이지.”

“……이것도 기어스인가, 그런 거야?”

“그럴 수도.”

“성의 없게 대답하지 마.”

“하하, 나름 생각해서 대답하고 있다만,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

“재수없어.”

 

를르슈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너는 매번 그렇게 말을 해. 어쩔 수 없고, 그러니까 최대한 상황을 이용해야한다고.”

“결과적으로 좋으면 다 좋잖아.”

“…그게 아니야. 과정도 중요해.”

 

를르슈를 노려보던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이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벌써 한참 전이다. 이 교복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설었다. 목 부분이 답답해서 풀고 있으면, 를르슈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 다시 살아난 게 마음에 들지 않지?”

“별로.”

“정말?”

“응. 어차피 이 세계는 너와 상관없고…. 너도 상관없으니까 떠난 거겠지.”

“스자쿠 치고는 냉정한 답변이잖아?”

“제로로써는 문제가 없으면 됐어.”

“결과적인 이야기가 아니야, 과정에서의 문제다.”

 

스자쿠가 곧잘 하던 말을 따라한 를르슈는 말했다. 

 

“‘를르슈는 죽지 못한 스스로가 밉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겠지? 나를 얼마나 착한 위선자로 만들 셈이야?”

“그렇게 안 생각해. 그리고…….”

 

스자쿠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를르슈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어린애한테 책임을 떠맡길 정도로 약해빠지지도 않았어.”

“어린애? 나를 말하는건가?”

“그래.”

 

어린애다. 자신의 힘만 과신하고 맹신하는 어린애. 그 치기를 주체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에 세상은 정복되었고, 순수한 힘으로 만들어진 죽음은 세계를 평화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르슈는 어린애다. 코드라는 것을 받으면 아마 평생 성장하지 않은 채로, 그 시간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영겁의 세월을 보내더라도 그의 모습은 영원한 소년으로 남는다. 

지금의 꿈도 그것의 의식을 반영해서 애쉬포드 학원 시절로 를르슈를 바꿔놓았다. 그는 여기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스자쿠의 그런 무의식이 만든 꿈. 스자쿠는 제 손을 잡아 흔드는 힘에 시선을 돌렸다.

작은 를르슈, 스자쿠와 처음 만났던 시절의 를르슈가 있었다.

 

“너와 동갑이긴 하지만, 어린애 취급을 받을거면 확실하게 어린애 모습인 게 속이 편할 것 같아서.”

“동갑이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역시, 그때 때린 걸로는 부족했지?”

“너는 꿈에서조차…! 나한테!”

“스자쿠에게?”

 

작은 를르슈 앞에 스자쿠는 무릎을 꿇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스자쿠의 품에 안긴 를르슈는 우왓, 하고 놀란 목소리를 내다가, 나중엔 조용히 스자쿠에게 안겨 있었다. 를르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스자쿠는 울었다.

 

“……나한테,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아.”

“어떤 기회를 줘야하는데?”

“사과할 기회.”

“이미 충분히 받았어.”

“그렇지만 용서하지 않았잖아.”

“용서했어.”

“그러면 왜…왜 나를 두고 갔어?”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나리처럼 강하지 못해, 너처럼 똑똑하지도 않아. 네가 필요했어.”

“…….”

“외로워, 를르슈.”

“잘 보내놓고 나서 이제서야 후회해도 소용 없어.”

“후회…? 후회는 하지 않아.”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그 보라색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르던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를르슈는 어느때보다 평화로운 눈으로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나나리를 데리러 가자고 말할 것 같은, 그 천진난만하고 순진하며, 스자쿠를 향한 신뢰를 보여주는 눈빛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뭐가 이 정도야?”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정말 이걸로 충분해?”

 

스자쿠를 바라보는 눈은 무언가를 말하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정말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고 싶어, 라는 말은 를르슈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어린 를르슈도 기어스를 쓸까? 하지만 나는 이미 기어스에 걸려있는걸. 하지만 이건 꿈이니까 소용 없는 일이야. 스자쿠의 머리에는 많은 물음표와 마침표가 오갔지만, 입 밖으론 한 마디도 나가지 않았다.

 

“정말 바라는 게 없어?”

“……글쎄, 이대로도 좋아.”

“스자쿠.”

 

거짓말은 하면 안 돼.

어린 를르슈의 높은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라니, 그건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스자쿠는 그렇게 받아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었다. 를르슈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지간해서 보이지 않았던 그 눈물이 마치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스자쿠, 정말 이루고 싶은 소원 같은 건 없어?”

“…….”

“정말로?”

 

마치 소원을 들어줄 것처럼 말한다. 스자쿠의 머리에는 순식간에 많은 문장들이 지나갔다. 유피를 살려줘. 제로 레퀴엠을 멈춰줘. 를르슈를 돌려줘. 나나리를 혼자 두지 마. 그런 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한 문장 밖에 남지 않았다. 

 

“죽고 싶어.”

“…….”

“죽고 싶어, 를르슈.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제로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거야?”

“…….”

“내가 살아있는 게 잘못된 거야.”

“…….”

 

그런 스자쿠의 목을 끌어안으며, 를르슈는 아니라고 말했다.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야하냐고 묻는다면,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하는 게 제로다.”

“…제로는 싫어.”

“그래, 너는 스자쿠니까.”

“…….”

“스자쿠라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돼.”

“그럼 제로는, 나나리는? 너는 또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괜찮아.”

 

를르슈는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커진 를르슈는 스자쿠와 이마를 맞대고서 웃고 있었다. 제로 레퀴엠 때 입었던 그 하얀 옷이다. 스자쿠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으로 이제 핏빛에 젖어들 것이다. 스자쿠가 쥐었던 그 검은 를르슈의 손에 들려있었다.

 

“스자쿠, 너의 소원은 내가…….”

 

스자쿠는 제 가슴팍을 물들이는 붉은 자국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를르슈의 하얀 옷에도 피가 튀었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지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콱 졸려왔다. 잠기는 눈 사이로 를르슈가 쓸쓸한 얼굴로 스자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줄게.”

 

죽어간다. 몸이 차게 식고 있다.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다. 근육이 굳어간다. 죽어간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를르슈가 산다는 기어스를 걸어서, 분명 싫어도 살게 될거야. 억지로라도 살게 될거야. 하지만 이제 더는 살기 싫어. 이런 세상은, 나를 모르는 세상은 싫다. 네가 살아있는데, 거짓된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가 싫다. 를르슈의 자리를 빼앗고 있어. 내가 죽었더라면, 를르슈가 더 잘 해낼 수 있을거야. 아아, 싫다. 살기 싫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 * *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스자쿠는 땀으로 흠뻑 젖은 시트를 뒤로 하고 꿈에서 꿰뚫렸던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어떠한 상처도 없는 것에 괜히 안심을 했다. 사람은 이렇게 모순적이다. 죽고 싶다고 그렇게 바래서 꿈에서 죽었는데, 깨어나고 나서 살아있음에 안심하다니.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제로로써 활약할 시간이었다. 

캠프에는 황무지에서 불어온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나라로 분류하기에는 그 힘이 작고, 집단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 땅은 난민 캠프 주변으로 황무지를 가로질러 시장도 있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있을 정도로 꽤나 융성한 땅이었다. 내란도 없는 이 땅에 흑의 기사단과 제로가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캠프의 철거 때문이었다. 

중요한 시설의 대부분은 두고 갈 것이지만, 이제 흑의 기사단의 원조 없이도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사람들도 흑의 기사단의 철수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그들의 철거 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그들은 말로만 듣던 브리타니아 공화국의 수장,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의 등장에 환호했다. 

스자쿠 역시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면 아래로 작게 웃었다. 이런 활기찬 평화로움이 좋았다. 치안이 안정된 곳이기에 나나리도 와서, 자기 노력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를 일부러 만든 보람이 있었다. 환호성이 들리는 곳에서 멀리 있던 제로의 앞에, 울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제로의 말에 남자는 화들짝 놀라더니, 아니라고 손을 저어 말하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기쁨의 자리에 자신의 비통함을 알리고 싶지 않은지, 소리를 크게 내진 않았다. 

 

“그저, 예전의 나나리 님처럼 가엾은 애가 떠올라서 그러오.”

“예전의…?”

“예전의 나나리 님처럼, 혼자서 걷지도, 보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오빠랑 단 둘이서 살았는데. 맨날 고물들을 모아서 내가 가진 음식이랑 바꿔갔소. 어느날은 영악하게 가지고 있는 아메시스트를 다이아몬드라고 거짓말을 했지 뭐요. 그 다음날 아닌 걸 알고 혼쭐을 내주려 갔더니 도망을 치고 난 뒤였고….”

“…….”

“황무지에서 남매 둘 다 총을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소.”

 

장사하는 법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남자는 훌쩍거리는 울음 사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숱하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도 벌써 십몇 년 전의 일이고…. 남자의 말처럼 한참도 전에 일어난 일들을 일부러 괴롭게 반추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변하기 마련이고, 그 흔적을 끌어안고 살기도 한다. 남자의 어깨를 다독이고 나서, 스자쿠는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나나리의 휠체어를 끌고서 돌아가려는 찰나에 붉은 빛이 보였다. 

 

총이다.

 

그 붉은 레이저는 나나리를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스자쿠는 나나리를 휠체어 째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드에게 넘기면서 레이저가 쏟아지는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돌진하는 제로의 모습에도 저격수는 당황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캠프에는 총성이 울리고, 그 에코가 멀리 퍼져나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섞여들어갔다. 스자쿠의 가슴을 뚫지 못한 채로 박힌 총알의 고통은 어마어마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본 것은 얼마만인지. 스자쿠는 태평한 생각을 했다.

 제로! 제로! 나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동시에 냉정을 되찾고서 주변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고 있었다. 빨리 들 것을 가져와요! 제로를 의무실에!

 

의무실로 가는건가. 그럼 또 살겠군. 몸이 반사적으로 살려고 움직이지 않은 것은, 뭐, 늙어서 그런건가. 나름 훈련하고 있는데.

 

그리고 스자쿠를 노린 총성은 두 번 더 울렸다.

한 번은 가면을 벗겨냈고, 다른 한 번은 얼굴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터진 머리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쿠루루기 스자쿠, 그리고 제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나나리의 옆에 있던 가드가 저격수의 다리를 꿰뚫었다. 범인은 잡았습니다, 나나리 님, 괜찮으신가요?! 사람들이 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에 나나리는 망설임 없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나나리의 전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L.L.는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온갖 속보들을 보면서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아요.

—제로의 일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고, 캠프의 철거는 흑의 기사단이 할 거고…. 저와 제로는 각자 움직였기 때문에 맡았던 업무가 겹치진 않았어요. 슈나이젤 오라버니께서 제로의 일을 잘 마무리하시겠지만, 제가 듣기로는 제로의 업무는 이제 사실상 없다는 걸로 알고 있어요. 

—세상이 평화로운 증거죠.

—하지만 누군가 힘을 갖기 시작하면 평화는 금방 무너지겠죠. 그런 과오를 반복되지 않게… 노력할게요. 

—제로는… 뉴스에서 들으신 그대로에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순식간에…….

—괜찮아요.

—오라버니.

—항상 사랑해요.  

 

L.L.가 다시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을 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죽을 때까지 전화가 울리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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