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시대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악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다채롭게 빛이 나다 결국에 죽어간다.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잠깐 스쳐간 인연에서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사람 뿐이었다.
L.L.와 C.C.는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어스의 조각 뿐이었다. 둘을 묶고 있는 관계도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탓에, 헛것이라도 보는 저주에 걸렸나 싶었다. L.L.는 지금 있는 나라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진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이 대륙에 지금 존재하는 나라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브리타니아의 이름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수많은 전란 끝에 세워진 이 나라는 가장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대국 중 하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의 차이가 가장 극심하며, 그런 만큼 L.L.과 C.C.가 숨어들기도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이 걸렸음에도, 배를 타고 들어와서 이 나라의 항구에서 도심 주변부까지 무난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이 북적한 곳은 항구와 수도뿐인 건지, 제법 안으로 들어오면 인가가 드문드문 있는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딘가 낯익은 풍경이긴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늘 비슷하며, 낯선 이방인에게는 되다만 호의와 적의를 섞여서 내비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것들은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피로함이었다.
그래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믿었다. 소년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L.L.는 자기가 소리 내서 그 이름을 불렀는지 생각했다. 옆에 있던 C.C.는 갑자기 멈춘 L.L.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잠깐 현기증이 나서.
L.L.의 둘러대는 말에 C.C.는 더 의심하지 않고서 다음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으니 저렴한 숙소에 가던가, 아니면 노숙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렴한 숙소는 소위 말하는 집창촌과 붙어있는 곳 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 묵어도 상관없었으면서, 이번만큼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노숙하겠다고? 날씨는 제법 풀렸다만….”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보단 낫지.”
“나중에 앓는 소리나 하지 마.”
“너야말로.”
서로 헐뜯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둘은 어디서 노숙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은 작았지만 사람이 제법 있어서 마을 외곽을 따라서 산등성이를 올라가야지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낡은 여행자의 옷차림은 이 마을에서 너무 이질적이었기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문제였고, 그 산을 타는 것에 L.L.의 체력이 늘 관건이었다.
없는 체력을 끌고 가며 겨우 평탄한 땅까지 올라왔을 때, C.C.는 바닥에 뻗어버린 L.L.을 보고서 눈을 흘겼다. 숨을 헐떡이던 L.L.는 이어지는 그녀의 핀잔을 못 들은척 했다. 노숙이 좋으시다며? 얼마나 좋으시면. 입술을 삐죽거리며 L.L.가 내려놓은 짐에서 담요를 꺼낸 C.C.는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산은 꽤나 가파랐지만, 원래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있던 모양인지 길은 나있었고, 그러나 내란으로 오고 가는 사람이 드물어져서 그저 흔적만 남은 길이었다. 경사가 높은 길을 오르면서 L.L.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C.C.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했다. 마을의 저 너머로 보라색의 노을이 내려앉는 모습에 두 사람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황혼이 지고 밤이 찾아오면 L.L.과 C.C.는 각자의 담요를 덮고서 머리를 맞대고 잠을 청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C.C.의 머리카락이 L.L.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머리를 자르던가 해라, 번거롭게.”
“네가 번거로운거지 난 괜찮아. 너나 자르지 그래?”
“남이사, 머리를 묶던 말던.”
“내가 할 소리야.”
서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하고 나서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C.C.가 입을 열었다.
“희미하지만 조각의 흔적이 느껴져.”
“이 나라에는 쉬러 온건데,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
“느껴지는 걸 어떡하라고? 말 안하면 안 했다고 뭐라고 할 거잖아. 정보 공유는 중요하니까 알려주라고 한 건 너야, L.L.!”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기는….”
L.L.는 귀찮은 나머지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C.C.의 말은 믿고 싶지 않지만 흘려 듣기도 힘든 내용이었다. 간과했다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오히려 L.L. 쪽이었다. 귀찮은 이야기를 하다니…. 속으로 꿍얼거리면서 L.L.는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걷고 움직인 피로가 발끝부터 타고 오면서 팔다리를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맨 땅바닥에서 자는거니 몸이 배기면 배겼지 더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내일은 조금 돈이 들더라도 멀쩡한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갈까. 아니다, 어차피 저 마녀가 침대를 다 독차지 하겠지. 낭비다. 젠장…. 내일은 어떻게 하면 좋지?
내일, 내일, 내일—그 단어를 계속 반복하다가 L.L.는 숨을 멈추었다. 만약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이런 생활도, 이런 삶도 끝내버리고, 내일이 없어지면 정말 완벽할 텐데.
사람은 살 수 없는 세월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조차 희미해지려고 할 때면 L.L.의 안에서는 를르슈가 살아났다. 그럴 때면 담요를 뒤집어 쓴 채로, 자신의 목을 졸라 를르슈를 죽여, L.L.는 잠으로 달아났다.
오늘 밤도 그랬다.
* * *
산을 깎아 만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계단의 경사는 가파르고,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넘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달갑지 않은 곳이다. 더 위를, 저 멀리를 바라보면 빨간 신사의 문이 보였다. L.L.는 눈을 의심했다.
계단의 끝에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서있었다. 거짓말이다,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그러면서도 계단을 올라가는 발은 멈출 수 없었다. 스자쿠를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그를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스자쿠의 얼굴이 보일 때 쯤이 되면 L.L.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스자쿠는 어깨를 들썩거리는 L.L.를 보고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체력도 없으면서, 그 계단을 그렇게 달리다니. 위험해, 를르슈.”
를르슈.
L.L.는 오랜만에 불리는 제 진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스자쿠는 시선이 마주치자 예의 그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오랜만이네, 하고 말했다. 오랜만…. 그 말을 따라하면서 L.L.—를르슈도 스자쿠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스자쿠….”
“응, 잘 지냈어?”
“글쎄.”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쿠루루기 스자쿠는 애쉬포드 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예전에 이 교복 차림의 그에게 머리를 짓밟힌 적이 있었다. 모두 를르슈의 실수이자 과거의 악행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스자쿠는 그러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직도 호흡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를르슈의 등을 두드리며 친구처럼 웃고 있었다. 7년 만에 만났던 그때와 같은 분위기였다. 그 상냥함이 느껴지자마자 를르슈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것을 겨우 참고 눈을 부릅 떴다.
“C.C.는 잘 지내?”
“아아, 너무 잘 지내서 싫어질 정도야.”
“그래…. 다행이네, 둘 다 지내는 것 같아서.”
“이런 게 다행일 리가 없잖아. 너는?”
어쩌면 지금까지가 모두 긴 꿈이고, 지금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를르슈는 그런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서 스자쿠에게 물었다. 스자쿠는 뒷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시선을 흘렸다.
“나는 를르슈의 과거 안에서만 살아있어서,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
“뭐?”
“네가 만든 하나의 무의식에 불과해서, 잘 지낸다고 묻는다면, 네가 바라는 대답을 하는 수 밖에 없어. 미안.”
“…….”
“잘 지내고 있어. 아, 나나리가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갈래?”
“…….”
“참고로 나나리도 네가 만든 무의식이야. 우리는 존재하지 않거든. 알잖아, 우리가 죽은 거.”
“…그만해.”
를르슈는 스자쿠가 잡고 있는 팔을 뿌리쳤다.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는 현실이라면 차라리 꿈인 게 낫다. 나나리와 스자쿠가 죽었다니,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모처럼 지켜온, 죽어서까지 지켜온 평화가…. 를르슈는 그 사고에 다다르자 입을 다물고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우린 이제 서로 인연이 없는 사람들인걸. 나를 미워해도, 너를 미워해도, 모두 끝났어.”
“…….”
“를르슈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나를 이렇게라도 만나려는 거 아니야?”
“과거의 너를 만난다고 해서……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말에 스자쿠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래….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 곳의 시간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신사가 사라지고 텅 빈 공터만 남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었다. 쓸쓸한 듯 웃고 있던 스자쿠는 변한 풍경을 따라 얼굴을 바꾸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둥근 눈이 날카롭게 날이 선 것을 보면서, 스자쿠가 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래.”
“이미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
를르슈,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어둡고 깊었다. 그것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자쿠는 마지막에 를르슈를 늘 그런 목소리로 불렀다. 그가 다정하고 따뜻했던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이게 더 익숙하다.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어.”
“…….”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미안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야말로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로, 코드를, 아니, 어떤 이유에서든, 다시 살아난 것만으로도…….”
“다시 만났을 때, 를르슈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지?”
“……그래.”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까만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으로만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둑한 빛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스자쿠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를르슈는 말했다.
“잊을 수가 없지, 그런 말.”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해?”
“…….”
“약속은 이제 됐어. 나는 그걸로 충분해.”
“너는, 내가 바라는 말만 해.”
“왜냐면 를르슈의 무의식이 만든 거니까.”
“나의 무의식이라서?”
“응, 그래서 나는 를르슈의 소원이야.”
스자쿠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스자쿠의 등 뒤로 흐르는 별 하나가, 두 개가 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풍경과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스자쿠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스자쿠는 웃으면서 말했다.
“를르슈의 기어스, 확실하게 받았어.”
스자쿠는 웃으면서 계단 끝에서 를르슈를 밀어버렸다. 시야가 엉망이 되면서, 밤하늘과 스자쿠의 웃는 얼굴 사이로 를르슈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느낄 수 없는 고통이 마음을 힘껏 두들겨 패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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