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가 눈을 떴을 때에는 초록색이 온통 시야를 다 가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L.L.는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눈동자였다. L.L.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그도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작고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소년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L.L.는 눈앞의 소년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방금 전까지 꿈에서 보았던…. L.L.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을 겨우 굴리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자쿠?”
소년은 이름이 불리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어렸을 때 만났던 스자쿠와 똑같았다. 그는 스자쿠다. L.L.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스자쿠, 하고 한 번 더 부르면 소년은 이번엔 겁을 먹은 표정으로 L.L.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L.L.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나를 어떻게 알아?”
“…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너, 뭐, 뭐하는 놈이야?!”
“……뭐하는 놈이냐니.”
그 건방진 말투, 어린애 치고는 거친 말씨가 영락없이 그가 스자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하는 놈이냐니, 나는 를르슈잖아. 마지막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다가 L.L.는 입을 다물었다.
스자쿠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스자쿠는 죽었는데.
L.L.가 당황하는 사이에 스자쿠는 망설임 없이 L.L.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으악! 만화처럼 나동그라지는 L.L.의 모습에 스자쿠는 때려놓고 나서 더 놀라서 두 세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등을 돌려 달아나려다가 두 사람이 잊고 있던 누군가의 등을 걷어차고 말았다.
잘 자고 있다가 두들겨 맞은 C.C.는 뒤집어 쓴 담요를 화들짝 벗어버리고는 눈 앞의 풍경을 보고서, L.L.와 똑같은 표정으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설마 쿠루루기 스자쿠?”
이번엔 풀 네임으로 불리자, 스자쿠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겁에 질린 표정의 얼굴이 영락없는 그 나잇대의 소년들이 지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것은 L.L.가 알고 있던 기고만장했던 어린 도련님인 스자쿠와는 달랐다.
저런 겁쟁이를 누가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볼 것인가? 그 괴리감에 L.L.가 머뭇거리고 있으면, C.C.는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모두 굳어있는 채로, 한참의 시간을 정적으로 채우다가, L.L.의 한 마디로 상황이 종료되는 것 같았다.
“우린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스자쿠.”
“거짓말 하지 마! 그럼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데?! 처음 보는 녀석들이잖아!”
안 좋은 방향으로 분위기는 흘러가고 있었다. L.L.의 멍청한 대사 선택에 C.C.는 골머리를 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담요를 접으면서 그 위에 걸터앉은 C.C.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별 것 아닌 일처럼 행동하는 C.C.의 모습에 어린 스자쿠는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가, 다시 시선이 마주친 L.L.에게는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수상한 사람은 자기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하거든?!”
“아아, 알고 있어. 안 그래도 지금 첫마디를 잘 못 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너, 뭔데 나를 알고 있어?”
“너는 뭔데 그렇게 건방진 말투로 말을 하는 거지?”
마지막은 C.C.였다. 그녀는 한심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서 결국 끼어들었다.
“나…?"
이번엔 쿠루루기 스자쿠가 한 방 먹은 얼굴을 했다. 어린 스자쿠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에 L.L.과 C.C. 모두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원래 잘 울던 애지만 이런 말에도 울 정도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 마음에 C.C.가 L.L.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L.L.야말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했다.
L.L.가 알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울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이 나잇대의 스자쿠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장 차있을 시기였다. 그럼에도 스자쿠는 우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갑자기 울어서.”
울던 스자쿠가 울음을 그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소리는 사과였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L.L.의 기억 속에서 스자쿠는 늘 자기 과신에 찬 골목대장이었기 때문에 사과와 거리가 먼 꼬마였다. 하지만 눈앞의 스자쿠는 훌쩍거리면서 정말 미안, 하고 두 번이나 사과했다.
“나쁜 걸로 치자면 함부로 너를 아는 척 한 이 녀석이 나쁜거야.”
“너도 스자쿠를 이름으로 불렀잖아!”
“네가 먼저 그렇게 불렀으면서!”
“저기, 그, 안 싸워도 돼.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내 이름을 아는 것 정도는 쉬우니까.”
냉정하고 차분한 쿠루루기 스자쿠. 나이는 10살.
L.L.는 어느덧 해가 쨍쨍하게 올라온 하늘을 보면서 그의 자기소개를 듣고 있었다. 너네는? C.C.는 L.L.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C.C., 저 녀석은…. 이번엔 L.L.의 차례였다.
지금 눈앞의 스자쿠는 를르류 비 브리타니아의 기사가 된 스자쿠가 아니듯, 스자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를르슈가 아닌 L.L.일 것이다. 그렇다면 L.L.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L.L.의 입밖을 나간 것은 다른 것이었다.
“를르슈, 를르슈 람페르지다.”
“C.C.랑 를르슈? 헤에—. 이상한 이름이네. 둘 다.”
“뭐라고 한거지, 방금 전에?”
L.L.의 배신—를르슈라는 자기 지칭에 C.C.가 눈을 매섭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L.L.는 태연하게 저를 다시 소개했다.
“를르슈라고 했잖아, 하도 저 녀석 저 녀석 하다 보니까 잊은 건가? 머리가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너…!”
“두 사람 다 그만 싸워! 싸우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니니까!”
다시 한 번, 쿠루루기 스자쿠의 색다른 모습에 L.L.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그의 빤한 시선을 받다가 조금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부모님이 자주 싸워서, 싸우는 모습 보는 건 싫거든….”
“흐음…. 잘난 아드님을 두고서 왜 그러시지? 흉한 꼴을 보여서 미안하군.”
“정말 몰라?”
그 말을 하는 스자쿠는 너무 절박해보였다. 제발 몰랐으면 하는 얼굴에, 진짜 알지도 못하는 L.L.와 C.C.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넨 정말 이상해, 이름도 이상하고. 이런 곳에서 자기나 하고.”
“너도 멀쩡한 꼬마 같진 않다, 쿠루루기 스자쿠.”
“여긴 원래 내가 있는 곳이야.”
스자쿠는 텅빈 공터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는 곳이거든. 그 말을 하는 스자쿠는 너무 쓸쓸해보여서, L.L.는 저도 모르게 스자쿠를 끌어안을 뻔 했다.
꼬르륵 하고 스자쿠의 배가 배고프다고 소리를 낸 탓에, L.L.는 웃음을 터뜨리며 배낭 안에 있던 통조림 세 개를 꺼냈다. 몇개 없는 복숭아 통조림을 까서 제일 먼저 스자쿠에게, 그 다음은 C.C.,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으로 챙겼다. 스자쿠는 고맙다고 말한 다음에 잽싸게 복숭아 통조림의 바닥을 비우고, 그 안의 설탕물을 주스처럼 홀짝거렸다.
“아침 안 먹었어?”
“응.”
“하나 더 먹을래?”
“를르슈는 안 먹어도 돼?”
“적당히 배만 채우면 되니까.”
“그렇게 먹고도 배가 불러?”
“그렇게 먹으니 체력이 없지.”
C.C.의 핀잔은 ‘너를 또 업고 돌아다니긴 싫다’는 말로 이어졌다. 를르슈를 업고 다녀? 짐도 이렇게 많은데? 스자쿠는 L.L. 몫의 복숭아까지 먹으면서 우물거렸다.
“너도 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으면 되겠어, 쿠루루기 스자쿠?”
“아, 나는 괜찮아. 어차피 배고팠고.”
“아니,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게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는게!”
“상관 없어.”
“뭐?”
“상관 없다구.”
“무슨 소리야, 그게….”
이번엔 L.L.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은 채, 스자쿠의 말에 동요했다.
“멀쩡한 게 아니어도 좋아.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차라리 다들 좋아할걸.”
무슨 말이냐는듯이 쳐다보아도 스자쿠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어린 아이에게 억지로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어스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어스를 써왔는데, 이제 와서 스자쿠에게만 쓰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왜인지는 알고 있다. L.L.는 지금 태연하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엄청난 동요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만남이 부자연스럽다던가, 눈앞의 스자쿠가 쓸쓸해 보인다거나, 그리고 C.C.가 아무런 말도 하지않은 채로 더 이상 스자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거나. 그런 많은 조건들이 L.L.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너는 모르는데 너를 아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건 좋은 거야.”
“이상한 거로 칭찬하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았지만 L.L.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L.L.의 그런 침묵에 스자쿠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린애 답지 않은 눈치보기에 L.L.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괴리감에 그에게 어떤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를르슈였던 L.L.가 기억하기로는 스자쿠는 이렇게까지 남의 눈치를 보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친구가 없던 녀석이 아니던가. 스자쿠는 L.L.를 힐끔힐끔 보더니 무언가 포기한 듯이 입을 열었다.
“너네 둘은 정말 날 몰라?”
“모른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처음 보는데 내가 쿠루루기 스자쿠인 걸 알았어?”
“……친구가.”
오랜만에 내뱉는 그 단어에 C.C.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 못본 체하면서 L.L.는 입을 열었다.
“친구가 너를 닮아서, 이름까지 똑같을 줄은 몰랐어.”
“친구?! 를르슈의 친구가 나를 닮았어?”
“아, 응.”
“그, 그 친구는 어디 있어? 혹시 만날 수 있어?”
방금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분위기로 스자쿠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옷자락을 붙잡는 스자쿠의 손이 기억 속의 것과 너무나도 다르게 앙상하게 말라있는 것에 L.L.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말을 속으로 되뇌이고 있을 때였다.
“정말 쿠루루기 집안에 나랑 닮은 사람이 있어?!”
“…그, 글쎄. 친구는 오래 전부터, 만나지 못하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나랑 닮았어? 혹시, 음, 혹시…….”
스자쿠는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잃어버린 도, 동생이나, 가족, 그런 사람이 있어?”
L.L.는 스자쿠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렸다. 모두 를르슈가 빼앗아간 것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그의 나라, 그의 유페미아. 떠올리고 나니 웃음도 지어지지 않았다. 한참 전에 끝난 일이고, 스자쿠 조차 죄를 더 이상 캐묻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반추하는 것은 여전히 괴로웠다.
“그 녀석이 잃어버린 사람이 정말 많아서.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 그래?! 그럼……. 혹시 내 또래의 아들이나, 그런.”
“아들?!”
L.L.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쿠루루기의 혈연 관계에 집착하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또 기억 속의 스자쿠와 이질감이 생긴다. 스자쿠는 혈연에 얽힌 자신의 운명을 괴로워하는 편이었다.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다.
대체 이 ‘스자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L.L.의 당황한 시선을 읽어낸 C.C.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친구는 죽은지 오래야. 애인도 없었으니 애가 있을 리가 없지.”
“아, 그렇구나……. 미안, 를르슈.”
“아니야, C.C. 말대로 죽긴 했지만, 그 녀석은 너의 먼 친척 정도는 될 수도 있겠어. 같은 쿠루루기일 지는 모르겠지만.”
“아냐, 쿠루루기는 어디를 가도 흔한 성이 아니니까.”
“확실히 발음하기는 어렵지만.”
“근데 그 친구 이름도 쿠루루기 스자쿠였어?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니잖아.”
“네 이름도 스자쿠잖아.”
“나는, 나는……. 부모님이 일부러 그렇게 지었어.”
“왜?”
L.L.는 일부러 뜸을 들이지 않고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쿠루루기’ 집안이 존재하고, 좋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알고 있던 쿠루루기 스자쿠의 친척 쪽의 아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먼 친척에 불과할 지금 눈앞의 스자쿠가 L.L.의 기억 속 쿠루루기 스자쿠와 이렇게까지 닮을 순 없었다. 격세유전도 정도가 있지. L.L.의 질문에 스자쿠는 눈을 내리깔았다. 방금 전 이질감과 괴리감을 동시에 들게 했던 그 쓸쓸한 표정이 스자쿠의 얼굴을 뒤덮었다.
“빨리 죽었으면 해서…….”
“뭐? 농담이래도 심하군.”
“아냐. 정말이야.”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한 행동 같았다. 어린애의 답지 않게 울음을 삼키는 게 익숙해 보이는 스자쿠가 왠지 싫었다. 알 수 없는 이 뒤숭숭한 느낌이 싫었다. L.L.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스자쿠는 갑자기 높아진 목소리로 L.L.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를르슈랑 C.C.는 왜 여기에 있어?”
“여행 중이야.”
“여행? 이런 마을까지?”
“쉬러 왔어.”
L.L.는 저도 모르게 옮아버린 그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제 C.C.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디 아파?”
“아니, 계속 여행하는 게 지쳐서. 여기서 쉬었다 갈 생각이야.”
“다시 가는구나.”
“그렇지.”
“어디로 가?”
“그건 C.C.가 알고 있어.”
“C.C.는 어디로 가?”
그 말에 스자쿠는 바로 C.C.에게 물었다. C.C.의 냉랭한 태도에도 스자쿠는 부딪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외로운 아이들이 곧잘 그러했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이라면 내쳐지고 뿌리치는 손이라도 달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그 외로움에 젖어 아주 작은 온기에도 달라붙는 스자쿠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L.L.는 이를 악물었다. C.C.는 그런 L.L.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물건을 찾고 있어. 그걸 찾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어.”
“물건? 그게 뭔데? 어디서 잃어버렸어?”
“말하기는 어렵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니까 찾고 있겠지? 너는 질문이 너무 많아, 쿠루루기 스자쿠. 너는 여전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C.C.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바로 입을 다물었다. L.L.는 그녀의 이어지지 않은 말을 듣다가 설마 하는 생각에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억 속의 그 모습과 훨씬 마른 모습이지만 지금 ‘스자쿠’는 쿠루루기 스자쿠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이 다시……살아난 것처럼.
“내가 여전해?”
“아, 아니. L.—이 아니라, 를르슈의 친구랑 너무 닮아서 그래. 나도 이런 실수를 하는군.”
C.C.의 잘 둘러대는 말에 스자쿠는 그래, 하고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부모님이 재수없는 얘기를 해대는데도 너는 아무렇지 않은가 봐.”
스자쿠는 L.L.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아, 하고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뭐야, 그게.”
“를르슈랑 C.C.는 정말 나 몰라? 나 이 마을에서 제법 유명하거든.”
“우리는 어제 여기에 막 도착했어.”
L.L.는 어제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마을의 입구 사이로 들어갔을 때 보았던 소년이 쿠루루기 스자쿠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름까지 쿠루루기 스자쿠일 줄은 몰랐다. 정말, 스자쿠가 다시 태어난걸까? 다시 살아난걸까? 하지만 그는 코드도, 기어스도 가지지 못한 채로 죽었는데.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없다. L.L.는 풀리지 않은 의문을 더하가는 존재인 ‘쿠루루기 스자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에서 쉴 거야?”
“그건—”
“일주일.”
C.C.의 못을 박는듯한 말투에 L.L.가 놀라서 쳐다보았다. 목표는 보름 정도 이 마을에서 몸을 숨기며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일주일은 이 스자쿠의 수수께끼를 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L.L.와 C.C.의 몸에 새겨진 영겁의 세월은 일주일은 얼마나 짧고 덧없는 시간임을 알게 했다. 넘쳐나는 시간 속에서 고작 일주일이라니.
불만스러운 감정을 담아 쳐다보면 C.C.는 나몰라라하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일주일……. 그럼 일주일 있다가 말해줄래.”
“뭐?”
“그럼 일주일 내내 여기에 있는거야?”
“아, 으응. 그렇게 되겠네.”
L.L.의 말에 스자쿠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예전에 나나리가 알려준 ‘약속’이라는 뜻인 그 손짓이었다. 스자쿠는 새끼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거는 L.L.의 모습에 씩 웃었다. 그 미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에 안도하며 L.L.도 따라 웃었다.
“그럼 일주일 있다 알려줄게, 약속!”
“약속이다, 스자쿠.”
스자쿠의 이름을 부르는 L.L.를 보고서 스자쿠는 약간 눈물이 고인 눈으로 L.L.를 바라보았다.
“이름, 불러준 사람 오랜만이야.”
그리고선 L.L.와의 손을 풀고서 C.C.에게 달려가서 손가락을 걸어달라고 애원을 했다. 꺼림칙한 표정으로 ‘일주일뿐이야’라고 말한 C.C.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해주었다.
두 사람과 약속을 한 스자쿠의 벅찬 표정은 기뻐보였지만 보고 있는 L.L.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근데 스자쿠는 여기에 왜 있어?”
어린애 혼자 오르기엔 험한 산길을 떠올리며 L.L.가 말하자, 스자쿠는 웃으면서 말했다.
“일주일 있다가 말해줄게. 약속했으니까!”
그 대답은, 태어나서 처음 약속해본 아이마냥 들떠있어서 더 이상 물어보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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