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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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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DOZI 2020.06.20 22:50 read.418 /

스자루루의 앵스트 연성 소재는 낡은 사진첩, 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너는 끝내 웃더라. 입니다.

#shindanmaker

 

 

 

 

L.L.가 늘 들고 다니는 낡은 앨범에는 색이 거의 다 바랜 사진들이 몇 개 있었다. 대부분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것이고, 진짜 사진은 두 개 밖에 없었다. 모서리가 다 해져서 둥글어진 그 사진을 L.L.는 앨범에서 펼쳐보는 것도 아까워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겼다. 

그것은 L.L.가 버리고 오지 못한 미련이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정처 없는 인생에서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한정 없는 시간을 뒤돌아볼 하나 뿐인 구원이었다.

그래서 C.C.는 L.L.가 가지고 있는 것을 굳이 빈정대지도 않았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유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은 너무 나약해서, 사진 조차 없더라면 진작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나나리의 사진은 몇장이고 있지만, 스자쿠의 사진은 단 하나 뿐이었다. 

L.L.는 오랜만에 가방 제일 밑바닥에 있는 앨범을 펼치면서 스자쿠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너무 빛이 바래서 원래 색이 무엇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사진을 보면서 눈을 감으면 그때는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지금이 꿈이고 눈꺼풀 아래가 진짜인 것처럼 느껴진다. 

눈을 감으면 애쉬포드의 클럽하우스, 스자쿠가 좋아하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준비하고, 나나리와 함께 저녁을 기다리는 시간이 돌아온다. 학생회실에서 늦게 나온 스자쿠는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면서 햄버그 앞에서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나나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냥한 일상.

버리고 왔던 것들이 너무 소중해서, 그것이 미련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커질 때 L.L.는 눈을 떴다. 

 

현실은 삭막하다. 

오늘은 넓은 초원을 거닐면서, 고장난 나침반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화풀이를 하고, 대충 천막을 치고 불쏘시개로 쓸 것들을 찾아 떠도는 것이 현실이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스자쿠도, 상냥한 나나리도 없다. 그것들은 모두 를르슈의 과거에 있을 뿐이다. 현재의 L.L.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때 가슴에 구멍이 났을 때, 확실하게 죽어버리는 게 좋았을 지도. 

아니면, 다시 한 번 손을 내밀 때, 잡는 것도 좋았을 지도.

 

L.L.는 꿈을 꾼다. 

C.C.처럼 어딘가의 세계와 연결되지는 못하는, 기억들의 편린 같은 꿈을 꾸었다. 낡은 앨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억지로 억지로 이어가며 꾼다.

 

카렌은, 흑의 기사단은, 셜리는,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유피는, 로로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만날 자격이나 있을까. 

 

꿈 속에서는 누군가에게 용서받기도 하고, 나눠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클로비스와 체스를 두고 있는 꿈은 씁쓸하기만 했다. 체크메이트. 를르슈는 아리에스에서 클로비스와의 마지막 체스를 두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직감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클로비스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를르슈에게 ‘어쩔 수 없군!’ 하고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보니, 를르슈. 네 기사는 어디 있지? 아무리 나와 같이 있다고 하지만 주군의 곁을 비우다니, 괘씸한 놈이군.

—형님도 농담을 하시는군요. 제게 기사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클로비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던가,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밖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군. 를르슈는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의 기사는 지금까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나가는 클로비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쿠루루기 스자쿠….

—당신의 기사입니다, 폐하.

 

이제 이곳은 아리에스 궁이 아니다. 그때 불타서 사라졌던 브리타니아의 황궁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때 늘 지었던 어두운 표정이 아니었다. 좀 더 홀가분한 얼굴로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의 미소에는 어떠한 그늘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은 정말 편리하군. 를르슈는 늘 보고 싶었던 것을 보게 되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 옷차림도 어느새 바뀌었다. 지긋지긋한 순백의 옷. 를르슈는 꿰뚫렸던 가슴팍을 만지면서 한숨을 쉬었다. 

 

—너도 그 차림이 싫겠지, 스자쿠. 

—상관 없어. 이제 끝난 일이니까. 

 

스자쿠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다 나한테는 어색했는걸.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듯 하는 말에 를르슈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마지막으로 입혀준 것은 를르슈였으니까. 가면을 내민 것도 를르슈가 했던 일이었다. 

 

—언제까지 꿈에 시달릴거야, 를르슈?

—만족할 때까지.

—너는 욕심쟁이니까 쉽지 않겠는걸.

—맞아. 그러니까 꿈 정도는 자유롭게 꿀 수 있게 해줘.

 

꿈 정도는 자유롭게, 라.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의 자유는 나쁘지 않아. 나도 꿈은 자주 꾸거든.

 

—무슨 꿈을 꾸는데?

—사실 지금까지는 모두 다 꿈이고, 우리 둘은 평범한 고등학생인 꿈. 너는 여동생을 좀 유달리 좋아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오빠.

—뭐야, 그게.

—그러면 너무 재미 없을까?

 

그것은 를르슈도 줄곧 그려왔던 꿈이라, 를르슈는 목이 잠겼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뭐, 꿈은 꿈이니까. 눈을 뜨면 전부 꿈이 되어버리지.

 

스자쿠는 웃으면서 빛속으로 걸어갔다. 이제 각성의 아침이다. 일어날 시간이야. 를르슈는 나도,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평온한 일상으로, 그런 평범함으로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를르슈는 한동안 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낡은 앨범을 뒤져 스자쿠의 사진을 꺼내어 보다가 결국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는 스자쿠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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