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는 카페 점원의 활기찬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늘 하나 없이 햇볕이 쨍쨍한 교정을 꽤 오랫동안 걸어서 온 탓에 열이 후끈 달아오른 볼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아왔다. 메뉴를 고르는 겸, 잠시 열을 식혔다. 아이스로 마실까, 하지만 계속 있다보면 추워질 것 같은데. 그렇다면 따뜻한 걸로…? 그런 고민은 금방 끝이 났다. 며칠 전 스자쿠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야! 얼어 죽어도 아이스라고 했으니, 스자쿠의 것을 한 모금 뺏어 마시자. 를르슈는 따뜻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그 사이에 더위에 올랐던 열은 식어가고 있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를르슈는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스자쿠가 먼저 공부하면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으니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법 넓은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그래도 를르슈는 금방 스자쿠를 발견했다.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스자쿠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스자쿠의 지인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를르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스자쿠는 곤란한 것처럼 어색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뭐… ‘그런’ 일일까? 를르슈는 입맛이 써졌다. 달달한 걸 시킬 걸 그랬나. 를르슈는 따뜻한 머그잔에 담겨진 카페라떼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스자쿠와 그 여자는 이야기가 좀 길어질까?— 혼자서 어정쩡하게 어딘가에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으려는 찰나였다.
를르슈,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자쿠였다. 옆에 있던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앉아있는 자리 쪽으로 향했다. 머그잔과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 를르슈는 한숨을 돌렸다.
“뜨거운 거 시켰어? 차가운 거 먹지.”
“에어컨 계속 틀어놓으면 추워지잖아.”
“그건 그렇지만…. 안 더워?”
“더워. 그거 뭐야?”
“복숭아 아이스티.”
“한 모금만.”
“좋아.”
스자쿠가 순순히 넘긴 아이스티를 마시고 나면 미지근하게 남아있던 열마저 식어버렸다. 를르슈가 빨대를 물고 있는 것을 빤히 쳐다보던 스자쿠는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그 웃는 낯이 괜히 얄미워서 볼을 쭉 잡아 늘리면 스자쿠가 아프다며 울상을 지었다. 표정 하나는 재미있는 놈이야, 정말. 를르슈는 아이스티를 다시 스자쿠의 앞에 갖다두었다.
“다 마셨어?”
“한 모금만 마신다고 했잖아.”
“더 마셔도 되는데.”
“됐어.”
를르슈는 제 몫의 카페라떼가 담긴 머그잔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서서히 시원해지는 몸에 따끈함이 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스자쿠, 방금 전에 누구랑 있지 않았어?”
방금 전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으응, 하고서 고민하며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았다. 스자쿠는 이런 데서 이상하게 신경을 쓴다.
를르슈와 사귀기 전의 스자쿠가 어떻게 놀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사귀고 나서는 그 여파로 스자쿠가 꽤나 골치가 아팠다는 것도. 지금도 비슷한 구석에서 그 여자와 만난 거라면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를르슈는 말을 고르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먼저 선수를 쳤다.
“고백 받았어?”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뻔했어?”
“그래.”
여자와 함께 있는 스자쿠. 사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다. 를르슈는 스자쿠와 만나고 나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질투가 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지만 저만을 오롯이 좋아하는 스자쿠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되게 놀랐단 말이야. 평소에는 그런 이야기를 안 했는데 갑자기…. 스자쿠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으며 를르슈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스자쿠에게 고백했던 그녀 입장으로는 지금이 찬스였을 것이다. 스자쿠는 어지간해서 를르슈와 함께 어울려다니고, 수업시간 외의 사적인 시간도 모두 를르슈와 함께 있다. 혼자 있는 때가 드물기 때문에, 카페에 혼자 있는 지금이 기회였을 것이다.
“그쪽 입장에서는 ‘갑자기’는 아니었을걸.”
“응?”
“아냐, 됐어. 뭐하고 있었어? 공부?”
를르슈는 스자쿠의 펼쳐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스자쿠가 ‘으아아!’하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카페 공기에 스자쿠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제대로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를르슈는 짓궃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이상한 거라도 보고 있었어?”
“아아아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왜 갑자기 닫아?”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 쓰이는데.”
“괜찮다니까!”
“안 괜찮은거네.”
“아니야! 음, 음, 공부하자. 공부. 나 궁금한 거 엄청 많아.”
“그거 보여주면 알려줄게.”
“혼자서 공부할테니까 신경 꺼줄래!”
목소리까지 뒤집어진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다, 알겠어. 안 보면 될 거 아니야? 를르슈의 항복 선언에 스자쿠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노트북을 꼭 끌어안았다. 안 본다니까? 다시 한 번 말해도 스자쿠는 단호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백팩 안으로 집어 넣었다.
“나도 참 신뢰가 없나보네.”
“응, 를르슈는 거짓말을 잘하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가방끈까지 야무지게 잠근 스자쿠는 다시 를르슈와 마주 보았다. 테이블 위로 펼쳐진 노트와 종잇조각에는 스자쿠의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대충 쓰긴 했지만 워낙에 달필이라 내용을 알아보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를르슈의 시선이 그 글씨들에 닿아있는 것을 모르는지, 스자쿠는 다른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 이거 이해가 안 되서. 음, 그러니까 여기—.”
“우리 여행 가?”
두 사람의 말은 동시에 나왔다. 를르슈에게 책을 펼쳐놓은 채로 들이밀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한참을 말이 없던 스자쿠는 백팩을 끌어안고서 를르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본다고 했잖아! 이 거짓말쟁이!”
“아니, 안 봤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아?!”
“여기에 다 써놓고 나서 가리지도 않으면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민망해!”
를르슈가 가리키는 종잇조각들에, 스자쿠는 흐아아, 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허술한 자식. 를르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면 스자쿠는 기가 죽은 얼굴을 했다.
종잇조각에 적혀있던 내용은 꽤나 공들인 여행 계획이었다. 비행기 시간표부터 공항에서 숙소까지 걸리는 시간들을 다 계산해놓은 흔적들은 스자쿠 답지 않게 꼼꼼했다. 칭찬이라도 해줄까, 아니 그 이전에.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넘어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자쿠, 너 내가 같이 못 가면 어쩌려고?”
“괜찮아. 를르슈의 여름방학 계획은 이미 다 파악했어.”
“응…?”
방학마다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는 를르슈의 여름방학 계획을 어떻게 파악했다는 말이지? 를르슈의 의아한 표정에 스자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유피한테 를르슈는 나랑 여행가서 브리타니아에 안 간다고 말해뒀어.”
“뭐?”
“아, 그리고 를르슈가 참석해야 하는 학회 세미나도 방학 때는 아예 취소 시켰어.”
“응?”
“그 세미나 여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지인이더라고. 연줄 좀 썼다고 해야할까나.”
를르슈는 스자쿠의 연이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를르슈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방학 동안의 일정이 모조리 다 취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쯤 되면 얼른 브리타니아에 오라고 칭얼대는 유페미아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학회 세미나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던 교수님의 침울한 표정도 이해가 되었다.
전부 다 이 녀석이…! 를르슈는 어느새 뿌듯하다는 얼굴로 칭찬을 조르고 있는 스자쿠의 목을 졸라버릴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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