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는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를르슈 람페르지에게 끌리고 있다고. 죽은 상관의 아내에게.
그것은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상관 부부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스자쿠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사랑과 자신의 욕망을 이루더라도 를르슈를 욕보이는 짓을 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자쿠도 좀 여유를 갖고 다가가는 건 어때?’
아니, 지노. 그럴 필요 없어. 이건 지노의 말을 따라 여유를 가질 필요도 없이 그냥 묻어버리면 되는 감정이다. 그게 정답인 것이다.
‘고민할 게 있어? 너 그거 제정신 아닌 거야.’
어느 쪽이냐고 하면 카렌의 반응이 정답인 것이다. 그런 건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제 깨달았으면 제정신으로 살아야지. 흔들린다고 해서 흔들린 채로 살면 그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거잖아. 스자쿠는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먹는 건 쉽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통용된다. 어떤 일이든, 어떤 감정이든.
* * *
상황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스자쿠는 샴페인 잔을 들고서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로 애매한 상태로 서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거리로 사람들의 무리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인사를 할까 하다가, 세련된 수트를 차려입은 그의 왼손에는 오늘도 반지가 끼워져있는 걸 보고서 스자쿠는 뒤로 돌았다.
군인이지만 스자쿠는 명문가 쿠루루기 가의 후계자로써 불려나가는 일이 제법 되었다. 오늘 파티도 그런 일의 연장선이었다. 그런 화려한 자리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스자쿠는 자신의 쓸모를 보여야 하는 곳에서는 내빼지 않았다.
그렇게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를르슈가 있다는 것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언젠가 상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를르슈의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라서, 결혼할 때 꽤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아내 자랑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그때 상관은 아내 를르슈가 이전에 누려왔던 풍족한 생활을 군인 월급으로는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게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나니 스자쿠는 쓸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 씨… 원래 이런 데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뒤돌아섰지만 시선은 계속해서 를르슈를 쫓았다. 스자쿠는 샴페인 한 잔을 다 마시고, 가르송에게 되돌려주면서 를르슈가 서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이 상황에 굴복한 것이었다.
“를르슈 씨.”
“어라, 스자쿠 씨.”
“이런 데서 만나네요.”
“그러게요, 의외에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버지가 귀찮게 해서요. 이런 데에 얼굴 비추지 않으면 곤란하거든요. 를르슈 씨는요?”
“아… 오늘 누님이 여는 파티라서, 오랜만에 제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를르슈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화려한 자리에서 답지 않게 주눅이 들기라도 하듯, 눈치를 보는 미소에 스자쿠는 마음이 쓰였다.
“제가 어지간히 걱정이 많이 되나봐요. 스자쿠 씨도 그러고, 누님도 그러고.”
“를르슈 씨가 사람이 좋으니까 그래요.”
“후후, 감사합니다.”
를르슈는 화려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곳은 솔직히 피곤하네요. 웃는 를르슈의 눈에서는 솔직함이 묻어났다. 스자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요. 저는 이런 자리에 아는 얼굴이 없어서 더 지루하고요.”
“저도요. 여긴 다 누님의 손님들 뿐이라서 저도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를르슈의 하얀 목이 젖혀졌다가 천천히 돌아오는 것에 스자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이내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곧 시선을 돌렸다.
“—를르슈!”
저 멀리서 누군가가 를르슈를 불렀다.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도 금방 와서 를르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코넬리아 누님, 오랜만이에요.”
“를르슈, 네가 브리타니아에 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걱정할 거 없다니까요….”
“아, 이야기 중이었나? 미안해요. 를르슈는 제 남동생으로 요즘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코넬리아라고 불린 여자는 스자쿠에게 사과했다. 스자쿠는 고개를 저으며 를르슈와 그녀가 어딘가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과를 듣던 스자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오늘 파티에 초대해주신 아버지 대신 왔습니다. 인사를 빨리 드렸어야 했는데 저야말로 죄송해요.”
“쿠루루기 스자쿠…? 아, 쿠루루기 겐부 씨의 아들이군요. 그러고 보니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뭐, 부족한 아들에 대한 이야기겠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코넬리아 씨도, 를르슈 씨도.”
를르슈가 곤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보다 차라리 빨리 나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인사를 황급히 마쳤다. 뒤돌아 서는 스자쿠를 쫓는 두 명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자쿠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스자쿠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코넬리아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녀는 스자쿠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스자쿠는 의아함을 가졌지만, 가까이 가서 그것을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멀어지려고 할 생각으로, 스자쿠가 테라스에 나와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쿠루루기 스자쿠 씨, 잠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를르슈를 닮은 보라색 눈동자의 코넬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스자쿠는 무언가를 감추기에는 어설픈 미소로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무슨 일이시죠, 라고 말을 꺼내면 코넬리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실례지만… 당신, 알파죠? 그것도 각인 안 한 프리 알파.”
“…아, 네. 우선은요.”
“를르슈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아이의 사정도 다 알고 있더군요.”
“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스자쿠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등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이 분위기로 봐서는, 코넬리아는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게 틀림없었다.
“를르슈를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가엾다거나, 불쌍하거나, 아니면.”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그럼?”
스자쿠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꽤 괴롭다는 걸 느꼈다. 말하지 않은 채로 침묵으로 일관하자, 코넬리아는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를르슈를 만나보는 건 어때요?”
“…네?”
“부담 되나요?”
“당연하죠. 그리고 애당초 를르슈 씨는 아직….”
를르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스자쿠는 그에 대해서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던 과거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과거의 영향력은 무척이나 강력해서 그저 를르슈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스자쿠에게는 독이 된다는 것.
한편으로는 아직 남편을 잊지 못했으면서 스자쿠에게 저리 쉽게 곁을 내주는 를르슈를 원망하고 싶다가도, 얼마나 외로우면 남편의 부하에게 의존할까 싶었다. 를르슈에 대해서 스자쿠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코넬리아는 그런 스자쿠의 모습에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오늘 처음 봤지만 당신에게 를르슈를 만나보라고 하는 건 진심이에요.”
“왜 그런 말씀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우리 집안에 뒤떨어지지 않는 프리 알파, 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
“두 번째 이유는…. 당신, 를르슈를 사랑하잖아요.”
누가 각인도 안 한 상대에게 그만큼 페로몬으로 범벅을 해두냐고, 코넬리아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리고 를르슈도 를르슈지, 본인 스스로도 자각 없이 그 페로몬을 다 뒤집어 쓰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당신한테 마음이 있어서죠. 코넬리아의 말에 스자쿠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페로몬으로 범벅이라니, 한 번도 그러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스자쿠의 붉어진 얼굴을 본 코넬리아는 ‘이거 쌍방 모두 자각이 없었군.’ 하며 혀를 찼다.
“요 몇년 동안 를르슈는 계속 불안한 상태였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편이 진짜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리기까지 하니… 원체 히트 사이클도 불안정해서 예민한데, 당신 같은 알파가 옆에 있어주면 가족인 나로써는 무척이나 든든한 일이죠.”
“그런 이유로 를르슈 씨를 만날 순 없어요. 애초에 를르슈 씨는 다정하신 분이라서 저에게 잘해주시고 계신 거고요.”
“뭐, 를르슈가 눈치가 없어서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코넬리아 씨의 편의를 위해서 만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양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꽉 막힌 남자는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진 못하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 남자를 를르슈 씨가 원한다고 하면 상관없어요.”
그런고로, 를르슈가 자신을 원한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으면, 그 곁을 내어주고 페로몬을 허용해준 것도 다 믿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코넬리아는 완고하게 구는 스자쿠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실례했다며 테라스를 벗어났다. 이제 혼자가 되겠구나, 하고서 스자쿠가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누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스자쿠 씨.”
어쩐지 코넬리아가 순순히 비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의 등장에 스자쿠는 마른 입술이 더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서 를르슈 쪽을 돌아보았다. 를르슈는 방금 전보다 붉어진 얼굴이었다. 그는 취기가 오른 듯 했다.
“별 거 아니었습니다.”
“맞춰 볼게요, 제 이야기였죠? 누님은 제가 매번 걱정된다는 말로 쓸데 없는 오지랖을 부리시니까.”
“…뭐, 그런 거로 하죠.”
“…….”
스자쿠가 순순히 인정하는 것에 를르슈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울어도 괜찮지만, 저 때문에 운다고는 하지 마세요.”
“왜요?”
“……아시잖아요.”
“모르니까 물어보잖아요.”
스자쿠는 이런 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노나 카렌에게 상담할 때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좀 더 심사숙고하고 분위기를 봐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바로 건너편에서는 연회장의 음악이 들리고,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사랑이 끝낼 운명의 시간이라면, 어쩌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를르슈 씨를… 좋아하니까요.”
그러자 를르슈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아놓고서는, 정작 떨구는 모습을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받은 스자쿠의 손수건에 모두 닦아 버렸다. 틈을 주지 않고 눈물을 닦아내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거리를 유지한 채로 계속해서 그가 소리 없이 우는 것을 쳐다만 보았다.
“…제가 각인 안 하고, 집안도 나쁘지 않은 오메가라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아뇨.”
“스자쿠 씨는 제 남편을 잘 따랐잖아요. 제가 불쌍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누님이… 그런 말을 하니까 괜히 욱해서.”
“그건 진짜 아니에요.”
를르슈는 세 번씩이나 부정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겨우 시선을 맞추었다.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냥 를르슈 씨가 좋아졌어요. 이제 불편하실 테니, 이제 다시는 제 곁에 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사람이 기대하게 되잖아요. 를르슈 씨가 편해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저도… 그런 식으로 상처받고 싶진 않아서요.”
스자쿠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를르슈를 두고 테라스를 떠났다. 우는 를르슈를 달래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이 거리가 딱 맞는 거야.
울고 있는 를르슈를 달래줄 사람은 금방 생길 것이다. 누구나 될 수 있는 그 자리에, 양심이 있다면 적어도 자신은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스자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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