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수님 커미션 *
Lovely dumbs
오늘날의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는 아마 제99대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생일일 것이다. 황제가 되어 처음으로 맞이한 생일 연회는 이제껏 맞이했던 를르슈의 생일 중 가장 화려하고 성대했다. 자신의 생일 연회에 대한 계획을 들었던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연회가 시작되었던 당일에는 무엇보다 환한 미소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를르슈 황제의 생일이 지나가고, 12월의 겨울이 깊어져 가고 있는 중에,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에서도 겨울을 쉬어가기 위한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끼고 있는 이 일주일은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연휴로 쉬어가는 때였다. 그것은 워커홀릭이라고 불리우는 황제 를르슈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황제 를르슈의 유일한 기사, 나이트 오브 제로라고 불리우는 사내,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 연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긴장감으로 인해, 를르슈의 방문 앞에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쉬는 것을 아까워 하는 자신의 주군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주일은 쉬었던 여름 휴가마저도 를르슈는 아직 때가 아니라면서 사흘만 쉬었고, 그 사흘 동안에도 비공식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겨울 연휴 만큼은 쉬게 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진 스자쿠는 를르슈의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스자쿠는 자신이 세운 계획서를 고쳐 쥐고서 들어갔다.
“때마침 잘 왔어, 스자쿠.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클로비스 형님께 이 부분의 예산은 왜 필요한지, 만약 이유가 있다면 추가로 필요한 서류까지 정리한 리스트야. 번거롭겠지만 스자쿠가 직접 가서 전달해줘.”
“예, 폐하.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인데 그렇게 비장한 표정이야?”
스자쿠는 그 말에 입가를 억지로 당겨 웃으면서 겨우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는 애매하게 웃는 스자쿠가 저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는 것을 받았다.
“이게 뭐야?”
“폐하의 이번 겨울 연휴 계획 관련으로 결재를 올리려고 합니다.”
“나의 겨울 연휴? 또 쉬라는 이야기야?”
“여름 휴가 이후로 또 하루도 안 쉬고 일하고 계시잖아요. 폐하를 걱정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계획서까지 올린다고?”
“……네.”
스자쿠의 계획서를 넘겨보던 를르슈는 달력과 스자쿠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써는 를르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자쿠는 그에 대한 반격을 감내해야만 했다. 쉬고 싶지 않은 를르슈에게 휴식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기사이자 연인인 스자쿠의 몫이었다. 스자쿠가 숨을 한 번 고르고서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내가 연휴 때 쉬면, 너는?”
“네? 저요?”
“너도 쉴 예정이지? 어디서? 누구와?”
“맞습니다, 저도 쉴 겁니다. 폐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폐하의 곁에서.”
“그렇다면 좋아. 연휴에는 쉬도록 하지.”
순순히 쉬겠다는 말을 하는 를르슈는 어딘가 현실성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를르슈가 쉬어야 하는 이유 14가지를 만들어온 스자쿠는 어느 한 가지도 말하지 않고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떨떠름했다.
“리브라 별궁이면 가는 데에 반나절은 걸리겠어.”
“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면 폐하께서도 일하는 걸 쉬실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번엔 제대로 쉴 거야.”
“여름 휴가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자쿠의 대답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자기를 믿을 수 없냐고 물었다. 스자쿠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를르슈가 서명한 계획서를 갈무리할 뿐이었다.
“이대로 재상부와 군부에도 폐하의 겨울 연휴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급한 안건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올리도록 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알겠어. 나이트 오브 제로는 무섭군.”
“폐하께서 저와 한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여름 휴가 때 서류 배달 때문에 드론 띄운 건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해.”
“네, 알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나가보겠다고 하는 스자쿠의 뒷모습에 를르슈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 뿐이었다. 스자쿠가 나가고 문이 닫히고, 를르슈는 혼자 남아서 방금 전 살폈던 달력을 훑어보았다. 크리스마스를 사이에 두고서 앞뒤로 3일씩 쉬어갈 수 있는 이 연휴. 그것도 스자쿠가 작정을 하고 있는 이 연휴에 대해서 를르슈도 고민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싱긋 웃어보일 여유가 있었지만, 앞으로의 겨울 연휴를 생각하면 여유보다는 초조함이 앞섰다. 를르슈에게는 스자쿠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미루어 온 문제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스자쿠와 자신 사이에 일어난 이 일, 연애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를르슈는 알고 싶기도 했고, 모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낫겠지. 를르슈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 * *
리브라 별궁은 제도 펜드래곤에서 비행기와 차로 반나절 이상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교외에 위치해 있다. 워낙 외진 곳에 있다 보니 황족들이 피서나 피한을 위해서 즐겨찾는 별궁으로는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스자쿠가 그 별궁을 고른 것이었다. 오로지 를르슈가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는 조건이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골랐을 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메리트가 없는 그 리브라 별궁에, 일주일 전에 사람을 보내어 스자쿠와 를르슈가 머물 수 있도록 준비는 해두었지만, 오래도록 별궁을 찾은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별궁으로써 제대로 기능할 지는 의문이었다.
공항에서 내린 후, 준비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스자쿠였다. 뒷좌석에 앉아도 된다고 했지만, 를르슈는 부득불 스자쿠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피곤할 테니까 누워서 자도 되는 뒷좌석을 권했던 스자쿠는 기어를 조작하는 자신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오는 를르슈를 보고서 피식 웃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폐하.”
“이제 폐하는 없어. 일주일 동안 를르슈 뿐이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폐하는 없으며 를르슈 뿐이라는 말에 스자쿠가 굳어서 잠시동안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연휴 내내 황제로써 일이나 할까, 나이트 오브 제로?”
“네가 그런다면 나이트 오브 제로도 없어. 일주일 동안 여기에는 스자쿠와 를르슈 뿐이지.”
“그럼 됐어.”
천천히 나아가는 자동차에 를르슈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나이트 오브 제로도, 황제폐하도 없는 이 자동차는 리브라 별궁으로 앞으로 적어도 세 시간은 달릴 것이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래와 함께 달리는 차 안에서는 스자쿠와 를르슈만이 손을 잡은 채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이 노래는 멜로디에 비해 가사는 별로라던가, 진부하다거나,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랑은 그럴 것이라고, 그런 식의 감상을 주고 받기도 했다. 별궁에 가서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다가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나나리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스자쿠는 항상 여동생을 우선시하는 를르슈가 이번 연휴에서 그녀와 함께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한 번 물었지만, 를르슈는 ‘각자의 시간도 필요한 법이야’라고 말하면서 어딘가 에둘러 말하는 느낌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대답한다면 좀 섭섭하겠는데, 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꺼내본 화제였다. 를르슈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나랑 단둘이 있는 건 그렇게 싫어?”
“응?”
“지난번에도 나나리 이야기 했잖아, 너.”
“그게 아니라, 나는 를르슈가 나나리랑 있는 걸 좋아하는 걸 아니까, 나나리도 함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 그러니까. 나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부끄러운 놈, 이런 걸 말하게 하다니.”
고개를 돌린 를르슈는 귀만 살짝 보일 정도였다. 그 살짝 보이는 귀마저도 붉게 물들어 있어서, 스자쿠는 솔직하지 못한 를르슈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런 를르슈가 사랑스러워 스자쿠는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를르슈한테 사랑받고 있네, 나.”
“그런 거 소리 내서 말하지 마.”
“에이, 우리 둘 뿐인데.”
우리 둘 뿐이니까 이런 이야기 할 수 있잖아, 방금 전에 를르슈도 그랬고. 스자쿠의 당돌한 고백에 를르슈는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로 계속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애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스자쿠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더라도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은 이 기분이 오래도록 영원하겠지.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면 장기간의 이동에 대한 피로도 잊혀지는 것 같았다. 들뜨는 스자쿠와 다르게 를르슈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스자쿠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조금씩.
도착했을 때에는 해는 다 진 저녁 무렵이었다. 맞이해주는 하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인들은 황제의 연휴를 책임지게 되었다는 책임감이 무거운 듯 해보였으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과 자부심에 차있었다. 그들에게 를르슈와 자신의 일주일을 맡겨도 되겠다는 안도감에 스자쿠는 한숨을 덜어낼 수 있었다.
가볍게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이윽고 안내 받은 방은 서로 붙어있는 옆방이었다. 미리 리브라 별궁의 내부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던 스자쿠는 자신의 부탁대로 간단한 구성으로 꾸며진 서로의 방들을 보고 만족스러웠다. 이정도면 를르슈도 마음에 들 거 같네. 스자쿠는 를르슈의 기색을 살폈다. 를르슈는 자신의 원래 침실과 별다를 것이 없는 방의 구조를 보고서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다행인건가? 아마 긴 이동시간으로 인한 피로로 더 기분을 드러내기도 피곤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를르슈에게 이제 쉴 것을 권유했다.
“이제 쉬는 게 좋을 거 같아, 를르슈.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되니까 푹 자.”
를르슈의 방문을 열어주면서 스자쿠가 침대를 가리키면, 를르슈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듯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아, 설마.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강조하듯 말했다.
“참고로 여기서 드론을 날리거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서류를 받아보면 나 진짜로 화낼 거야.”
“그러지 않아!”
“그럼 믿을 수 있게 얌전히 자도록 해.”
“……너는?”
“나? 나도 잘 거야. 아, 물론 바로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는 마.”
그럼 잘 자, 하고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굿나잇 키스는 스자쿠와 를르슈가 펜드래곤에서도 곧잘 하던 것이었다. 둘은 기사와 황제 이전에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하루의 마무리이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그 키스를 받고서 기분 좋게 웃었을 를르슈는 무언가 불만에 찬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의 찡그린 얼굴이 신경쓰여서, 스자쿠가 물어보자 를르슈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따로 자야 돼? 모처럼 같이 있을 수 있는 건 일주일 밖에 안 되는데….”
이런 것까지 말해야하냐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말아버렸다. 활짝 웃고 있겠지? 를르슈는 고민 끝에 말해준 건데 웃으면 진짜 안 돼…! 필사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스자쿠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러 따로 자려고 한 건 아니야. 를르슈가 같이 자고 싶으면 자도 돼. 난 내가 옆에 있어서 를르슈가 편히 못 쉴까봐 그런 거였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오랜만에 같이 잘까?”
스자쿠의 허락을 구하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먼저 씻고 있을 테니까, 너도 짐 챙겨서 다 내 방으로 옮겨.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알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를르슈는 스자쿠와 계속해서 같이 잘 생각인 것 같았다.
잠깐 짐을 챙기고 오겠다며 스자쿠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미리 챙겨두었던 짐들은 아직 풀지 않았으니 옮기는 것은 수월했지만, 스자쿠에게는 편하게 넘어가지 못할 일이 있었다. 를르슈와 보내게 될 앞으로의 일주일 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계책을 준비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의 침대에 같이 눕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포함하여 같이 자는 밤은 몇번이고 있었다. 연인이 되고 나서부터 그러한 의도를 담고서 그와 밤을 함께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밤들 중에서 섹스를 했던 밤은 하룻밤 뿐이었다. 그 하룻밤 이후로 스자쿠와 를르슈는 단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았다. 서로를 갈구하는 키스를, 그 이상으로 끌어안아도 섹스를 해본 것은 그날 밤 딱 하루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스자쿠와 를르슈는 키스를 하고 서로를 만지더라도 섹스는 하지 않았다.
섹스가 무조건 서로를 사랑하는 최종적인 형태는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며 스자쿠는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유감이 없음을 스스로 되뇌이고는 했다. 가끔씩 를르슈를 미친듯이 끌어안고 싶고, 그에게 원하는대로 퍼붓고 사랑하고 싶더라도, 그 충동을 억누르며 를르슈의 곁에서 자는 숨소리를 들으며 숱한 밤을 보내왔다. 이번 일주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자쿠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냈다.
해낼 수 있어, 참을 수 있어, 견뎌낼 수 있어. 스자쿠는 자신의 방문을 닫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첫날밤은 를르슈가 씻던 그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으로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장거리 이동에 대한 피로는 스자쿠에게도 제법 있었던 모양인지, 스자쿠는 새벽녘에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를르슈를 기다리며 침대에 잠깐 걸터 앉았던 기억까지 있었던지라, 눈을 떴을 때에 품 안의 를르슈가 제 옆에 누워있는 것에 조금 놀라긴 했다.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를르슈의 뺨을 한 번 쓸어주고서는, 스자쿠는 뒤늦은 샤워를 하러 를르슈의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섰다. 를르슈와 앞으로의 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각오를 다진 것치고는 바로 침대에 누워서 자버린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런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대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눈을 부비면서 하품을 하고 있는 를르슈가 있었다. 시계를 보면 아직 오전 4시, 보통 를르슈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벌써 일어난 거야?”
“더 잘거야, 너도 빨리 누워.”
“하하, 나 기다렸어?”
“응, 기다렸어….”
잠결인지 아니면 단둘이 있겠다고 하기로 한 때부터 그런 것인지, 를르슈는 솔직했다. 스자쿠가 다시 이불 사이를 파고들면, 를르슈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손을 잡아왔다. 반쯤 감긴 보라색 눈동자가 졸음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에 스자쿠는 샤워의 마무리를 찬물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은 다른 손으로 를르슈의 머리를 쓸어주면서 잘 자, 라고 속삭여주면 를르슈는 눈을 감고서 호흡을 천천히 했다. 느릿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를르슈의 가슴팍을 살피던 스자쿠는 그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길게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군인으로서, 나이트 오브 제로로서 나름 갈고 닦아온 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도 못해도 4시간만 버티면 끝날 것이다. 나는 랜슬롯 알비온을 타고 쉬지 않고 30시간 전투도 해본 사람이야! 이 정도는 별 거아니야! 스자쿠는 속으로 외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못해도 눈앞의 를르슈가 주었던 쾌락의 달콤함을 아예 몰랐다면 좋았을까. 스자쿠는 그날밤을 떠올렸다. 그날밤은 스자쿠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했다. 다시 없을 충족감, 그러나 동시에 몰아쳤던 자기혐오 같은 것에 몸은 뜨거워졌다가 차갑게 식어갔다.
* * *
스자쿠와 를르슈가 처음 몸을 섞은 것은 를르슈가 차기 황제의 자리를 완전히 굳혔던 날이었다. 를르슈는 그날 저녁, 아리에스의 정원 구석으로 스자쿠를 불러내어 고백을 했다.
—난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너를 두고 갈 거야.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생각 이전에, 자신을 두고 가겠다고 말하는 것에 스자쿠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면, 를르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스자쿠에게 말했다.
“차기 황제로 내가 뽑혔어. 모두가 동의했어.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거야. 난 너를 황제의 검으로 두고 싶지 않아. 너는 나 따위의 검이 되는 것보다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그런 이유로 절 버리시겠다고요?”
“황제의 기사가 되는 건 일개 황자의 기사였던 때보다 더 위험해. 난 그런 곳에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럴 바에야 너랑 아예 헤어져서 네가 안전한 게 난 좋아. 그래, 그게 맞는 거야. 스자쿠, 그동안 고마웠다.”
돌아서려는 를르슈를 붙잡은 스자쿠는 말을 꺼내는 대신에 그에게 키스를 했다. 입술이 겨우 닿은 듯한 그 키스에 를르슈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런 마지막을 원하지 않아, 라고 울음 사이로 토해내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그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만들면서 말했다.
“지금 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주신 적 없잖아요.”
“너는 억지를 부릴 거야. 내 옆에 있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스자쿠.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를르슈.”
기사가 되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를르슈를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었던 스자쿠는 오랜만에 그를 를르슈로만 바라보았다. 항상 지켜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나의 황자전하. 를르슈는 오롯이 자신만이 스자쿠의 눈에 담기는 것에 고개를 저었다. 피하려는 를르슈를 제 품에 단단히 붙잡아둔 스자쿠가 말했다.
“너도 내 마음을 알잖아, 를르슈.”
“아니까 그러는 거야.”
“바보 같아. 서로 좋아하는데 헤어지는 게 말이 돼?”
“너를 위험에 빠뜨리느니 난 바보가 되는 게 나아.”
“날 그렇게 못 믿는 거야? 그럼 이제까지 어떻게 나를 너의 기사로 둔 거야?”
“그건…!”
“믿고 있는 거잖아. 이번에도 난 해낼 수 있어, 를르슈.”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보통 자리가 아니야. 언제든 전쟁터에 나가야 하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알아, 그렇다면 나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줄게. 그러면 네가 안심하고 나를 계속 너의 기사로 남게 해줄래?”
기꺼이 최강의 존재가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신의 고집에 를르슈가 져버린 것을 알아차린 스자쿠는, 사랑에 승복한 를르슈를 제 품 안에 가두고서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넌 나를 좋아해.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갈 수 없어, 를르슈.”
스자쿠를 두고 가겠다고 말했던 를르슈에게 되새기듯 하는 그 말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기대었다. 그제서야 자신을 믿어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스자쿠는 그에게 보다 깊은 키스를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신에 서로의 숨을 가쁘게 앗아가며 하는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를르슈는 금방이라도 스자쿠를 원한다고 말했고, 스자쿠는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나를 원해? 너를 원해. 이런 말들이 오가면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겨우 들어간 를르슈의 침실에서 섹스를 했다.
섹스는 숨 가쁜 키스만큼이나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스자쿠는 느긋하게, 라는 단어를 잊은 것처럼 를르슈를 안았다. 를르슈는 안기는 고통에 울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더 참을 수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몇번이고 안았다. 열락에 지친 를르슈가 지쳐서 쓰러지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지쳐서 숨을 몰아쉬는 를르슈의 뺨이 지나치게 붉은 것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이마에 입을 맞추던 스자쿠는 자신의 열과 비교할 수도 없이 높은 를르슈의 체온에 놀랐다.
첫 섹스의 여파로 를르슈는 고열을 내버렸고 사흘을 앓아누웠다. 차기 황제로써 내정되었던 다음날 앓아 눕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를르슈를 지키겠다고 해놓고서 그의 앞길을 망쳐놓는 것은 자신이 된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황제가 된 를르슈는 앞으로 더 바빠지고 할 일도 많을 텐데, 고작 자신의 사랑에 어울려 달라고 섹스를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고열로 아픈 주제에 스자쿠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입맛이 썼다.
* * *
리브라 별궁에 도착하고 두 번째 밤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키스를 졸랐다. 낮 동안에는 서로 체스를 두거나 산책을 가거나, 혹은 길어진 산책에 지친 를르슈의 낮잠을 자는얼굴을 보거나 했다. 겨울인 만큼 해가 빨리 떨어졌기 때문에 밤은 금방 찾아왔다. 어두운 밤이 되고 나면 를르슈는 낮보다 더 반짝이는 눈으로 스자쿠를 원한다고 말했다. 키스해, 라고 말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그가 원하는 입술을 내어주며 그를 끌어안았다.
혀와 입술이 맞닿는 소리가 야하게 느껴져서, 스자쿠는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의 끈을 겨우 다잡으며 제 품을 파고드는 를르슈의 팔을 붙잡았다. 스자쿠의 목에 매달려 키스를 하던 를르슈는 떨어지려는 스자쿠의 입술에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를르슈, 급하게 하지 않아도 돼.”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그가 입고 있는 파자마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를르슈의 뺨은 기대로 더 붉게 물들었다. 또 를르슈가 열이 오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저를 쳐다보는 두 눈동자가 흥분으로 빛나는 것에 스자쿠는 안심하고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어두운 곳에서도 흐릿한 달빛으로 보이는 하얀 피부에 스자쿠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너도 얼른 벗어….”
스자쿠의 손에 의해 다 벗은 를르슈는 몸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끌어안는 대신에 스자쿠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부끄러움에 작아지는 목소리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전해진다. 를르슈의 손길에 힘입어 스자쿠도 하나씩 옷을 벗었다. 알몸이 되어 서로를 마주하는 것은 부끄럽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서로 발기한 아래를 훤히 드러내고 를르슈는 스자쿠의 위에 올라타 그와 페니스를 맞댄 채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 스자쿠의 손이 를르슈의 허리를 감싸고, 남은 한 손은 두 사람의 페니스를 맞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혀를 섞으면서 흐르는 신음 사이로, 귀두부터 젖기 시작하는 쿠퍼액의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게 허리를 받쳐주는 스자쿠의 손에 를르슈는 쾌락을 좇아서 움직이는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로 움찔거리는 를르슈의 몸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스자쿠는 를르슈를 더 세게 끌어안고서 그의 페니스와 함께 닿은 자신의 페니스가 뜨거워짐에 숨이 거칠어졌다. 받치고 있던 를르슈의 허리를 선을 타고 내려 골반을 지나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살짝 어루만지면 를르슈가 가볍게 숨을 멈추면서 긴장한 눈으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아마 삽입에 대한 공포겠지. 를르슈를 안았던 그날밤, 스자쿠는 자신의 쾌락에만 몰두하여 를르슈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서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를르슈의 모습이 안쓰러워 스자쿠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를르슈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았다.
“스자쿠, 나, 있지, 아, 으응, 흐응…!”
“응, 를르슈… 기분 좋아?”
“좋아, 좋아서, 후, 더 좋아지고 싶어, 하으, 응!”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를르슈의 바짝 선 유두를 혀끝으로 굴리면서 스자쿠는 그가 원하는 쾌락을 주려고 있는 힘껏 애를 썼다. 스자쿠가 자신의 가슴에 달라붙어 애무하는 것에 를르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스자쿠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하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떨리는 가슴팍과 다물리지 못하는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가슴과 페니스가 동시에 만져지면 를르슈는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 갈 거 같아…! 를르슈가 겨우 사정의 전조를 알리면그의 가슴팍에 매달리고 있었던 스자쿠가 고개를 들어 를르슈의 페니스를 힘주어 쥐었다. 같이 가자, 를르슈. 헉헉거리는 숨 사이로 스자쿠의 흥분이 느껴졌다. 날카로워진 안광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쾌락에 미쳐 추한 꼴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런 모습마저도 스자쿠가 사랑해준다면 를르슈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페니스가 움찔거리면서 정액을 토해내고 나면, 를르슈는 헐떡거리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를르슈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스자쿠는 다시 팔로 를르슈의 허리를 받쳐주면서 물었다. 무너질 거 같은 몸을 스자쿠에게 의존하면서 를르슈는 끝까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스자쿠의 굳은살로 딱딱한 손이 상냥한 움직임으로 제 눈을 덮어오는 것에 를르슈는 결국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 사이에 몸이 식을 새라, 젖은 수건으로 정액을 대충 닦아낸 스자쿠가 를르슈를 이불로 감싸면서 말했다.
“이제 피곤하잖아, 자도 돼. 를르슈, 고마워.”
“…더 할 수 있어.”
“무리하지 마. 나 를르슈가 무리하는 게 제일 싫어.”
스자쿠의 싫다는 말에 를르슈는 더 조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사정 후에 몰아닥치는 피로 때문에 를르슈는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음이 몰아치는 것을 억누르고 를르슈는 스자쿠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분 좋았어?”
“응. 최고였어.”
“…다행이다.”
스자쿠가 최고였다고 하는 말에 를르슈는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러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고, 스자쿠가 계속해서 피할 구석을 만들어주면 그 틈에서 쉬어가는 척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고작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키스로 전해주는 물을 마시면서 목을 축이다가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워내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을 자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인지, 스자쿠가 잘 자라고 인사하는 것을 들으며, 를르슈는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이 섹스도 아닌 행위에서도 오는 쾌락의 피로는 상당했다. 이래서는 스자쿠를 만족시켜줄 수 없을 거야.
마지막 생각에 도달하자 를르슈는 울고 싶었다. 스자쿠는 아마 계속해서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냥하고 다정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그 진실을 전하지 않는다. 그의 배려를 기회 삼아서 를르슈는 진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 * *
셋째날은 크리스마스의 전날이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에게 준비한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낮을 보냈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다. 항상 함께 있기는 어렵지만, 내가 없을 때도 써준다면 함께 있는 기분이겠지?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그러겠다고 말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나도 같은 의미야. 랜슬롯에 탈 때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평소에 지녀준다면 좋겠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기뻐하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지난 일 년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부탁을 적힌 크리스마스 카드를 서로 주고 받았다.
건전하다면 건전한, 연인답다면 연인다운, 행복하다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계속해서 걸리는 지점이 있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오늘이야말로 ‘확인’을 해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세간에서는 연인들의 이벤트인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기회와 때가 잘 맞아 떨어지는 걸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를르슈는 욕실에서 먼저 씻고 나오는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던 스자쿠는 눈이 마주지차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를르슈도 씻고 와.”
오늘을 기점으로 관계를 바꿔나갈 각오를 한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비장한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스자쿠는 스쳐지나가는 를르슈를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꼼꼼하게 샤워를 마친 를르슈는 마지막으로 물을 틀어놓고서 바디로션을 손바닥에 천천히 늘어뜨렸다. 점성이 제법 있는 바디로션이 러브젤의 역할을 제대로 해줄지는 의문이지만, 맨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를르슈는 욕조에 걸터 앉아 다리를 벌렸다.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서 애널이 훤히 드러나는 자세를 취하고, 를르슈는 꽉 다물린 구멍 위를 로션으로 적신 손끝으로 매만졌다. 주름 하나 하나 느릿한 손길로, 익숙치 않은 것을 해내기 위해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몇번이고 되새기면서, 를르슈는 검지 손가락 하나를 밀어넣었다. 하나를 넣어도 빠듯하게 죄여오는 것이 느껴져서,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를르슈는 천천히 손가락을 안쪽으로 움직였다. 꾸욱 꾸욱 안을 넓히기 위해서 움직이는 손가락은 유쾌하지는 않았다. 긴장으로 몸이 굳어가서, 어느새 호흡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손가락만 밀어넣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린 를르슈는 겨우 숨을 뱉으면서 로션을 안쪽에 바르며 더욱 구멍을 넓히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스자쿠의 페니스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손가락을 또 넣어야 한다. 를르슈는 하나로도 꽉 죄이는 자신의 애널의 좁음에 혀를 차며 로션이 더 마르기 전에 중지를 밀어넣었다. 빠듯하게 벌어지는 애널이 한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밤, 스자쿠는 어떻게 했더라…? 를르슈는 스자쿠의 페니스를 받았던 때를 떠올리려고 했다.
스자쿠가 계속 키스를 해주면 그 키스로 숨을 고르고, 안아주는 손길이 따뜻해서 그 체온에 기대고 있으면 스자쿠가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엉덩이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려고 하며 를르슈는 하악, 하악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 두 개를 밀어넣은 구멍 안쪽을 천천히 헤집었다. 로션의 질척거리는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축축하게 울렸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졌던 안쪽까지는 닿지 않았다. 닿지 않아, 더 넣고 싶은데, 안 돼…. 를르슈는 눈을 질끈 감고서 구멍에 넣은 손가락을 찔걱이며 얕게 숨을 골랐다.
아냐, 괜찮아, 이제 됐어. 난 자위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섹스를 하고 싶은 거니까. 를르슈는 스자쿠를 생각하며 더워지는 몸을 겨우 식혔다. 애널을 풀기 위해서 긴장했던 몸은 발기하기에는 애매한 열이 맴돌아서 괴로웠다. 더 초조해지기 전에 를르슈는 흘려두었던 물을 잠그고서 샤워가운 차림으로 욕실 밖으로 나섰다. 엉덩이 사이는 바디로션으로 질퍽하게 젖어있고, 몸 안에 감도는 열감에 머리는 어딘가 멍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스자쿠 뿐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자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스자쿠가 를르슈 쪽을 쳐다보았다. 샤워가운을 걸치고 있는 를르슈를 보고서 뺨이 붉어진 스자쿠는 오늘밤도 를르슈를 만질 수 있다는 흥분감에 고양된 것이 느껴졌다. 그 욕망을 더 참지 않고 자신에게 모조리 다 부딪쳐 쏟아냈으면 좋겠다. 참고 있는 게 를르슈 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보고는 일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여기 호위의 문제야. 이상 없다는 보고서를 받았을 뿐이야.”
“그럼 이제 치워.”
“그래야지. 이리 와, 를르슈.”
태블릿을 협탁 위에 내려둔 스자쿠는 를르슈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스자쿠가 이끄는 대로 그의 아래에 깔려 를르슈는 샤워가운의 끈을 푸는 스자쿠의 손을 느끼면서 그와 키스를 했다. 샤워를 막 하고 나와서 촉촉하게 젖은 가슴팍을 더듬는 손길에 솔직하게 소리를 내며 스자쿠를 애타게 부르면, 스자쿠는 샤워가운 사이로 손을 밀어넣고서 를르슈의 허리선부터 천천히 매만지며 를르슈의 혀를 가볍게 씹기도 하면서, 그의 쇄골에 이를 세우기도 했다.
를르슈의 몸 안에 맴돌고 있던 쾌락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스자쿠가 느슨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만져오는 것에 를르슈는 헐떡대며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귀여워, 를르슈. 정말 귀여워. 스자쿠는 를르슈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고, 아랫배부터 천천히 혀를 굴려 를르슈의 페니스에 입을 대려고 했다. 오늘은 펠라치오로 끝낼 생각인 듯 싶었다.
그런 건 싫어, 이제 난 섹스를 하고 싶어.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의 얼굴을 제 쪽으로 이끌고서 다시 입을 맞추었다. 목을 끌어안고서 혀를 깊게 섞고 있으면 스자쿠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도, 를르슈가 원하는 키스를 해주었다. 방황하듯 허리와 골반을 매만지는 스자쿠의 오른손을 잡아서, 를르슈는 자신의 페니스를 만지게 하고 그 아래의 구멍 쪽을 만지게 했다. 스자쿠는 바디 로션에 젖어서 움찔거리는 를르슈의 애널을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자쿠가 놀란 것은 알지만, 그런 그에게 를르슈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다.
“섹스하자, 스자쿠. 그날밤처럼.”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을 더 구멍 깊숙이 묻으면서 그의 손으로 자위를 하듯이 손끝으로 자신의 젖은 애널 부근을 만지게 했다.
“넣어줘… 제발.”
마지막은 거의 애원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그날밤 이후로 자신을 왜 안지 않는지에 대해서 짐작하고는 있었다. 아마 내가 아팠기 때문이겠지. 물론 스자쿠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 쉽지 않은 것을 해내고 싶고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스자쿠에게 안기는 것은 쾌락을 느끼게 했다. 그런 를르슈의 마음도 모르면서, 스자쿠는 를르슈가 황제가 된 이후로는 키스만 자주 할 뿐, 성적인 접촉은 거의 의무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남자라서 싫은 건 아니야, 남자의 몸인 나를 사랑하는 걸 좋아했잖아. 그렇다면 마음껏 사랑해줘. 를르슈는 그렇게 눈으로 말하며 스자쿠의 허벅지에 다리를 감았다. 있는 힘껏의 유혹이었다. 다리를 벌리고서 스자쿠의 손으로 바디로션으로 어설프게 푼 애널을 만져달라고 애원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찔꺽이는 소리가 들리는 애널은 무언가를 이미 한 번 받아들인 듯이 뻐끔거리고 있었고, 움찔거리는 를르슈의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여서, 붉게 물들어 촉촉해진 피부 같은 것이 스자쿠로 하여금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다시 한 번 필사적인 브레이크를 걸었다.
“굳이 섹스하지 않아도 돼. 말했잖아, 난 를르슈가 무리하는 게 싫어.”
“무리가 아니야…. 무리였다면, 너랑 진작에 헤어졌어.”
“뭐?”
“너랑 하는 섹스는, 기분이 좋아서… 아파도 좋아. 언제든 하고 싶어. 물론 난 너랑 다르게 오래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랑 하는 건 다 좋으니까.”
를르슈의 마지막 말은 거의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자쿠가 성급하게 입을 맞추면서 를르슈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바디로션으로 젖은 애널의 주름을 덧그리는 스자쿠의 손길에 비명을 질렀지만 그마저도 스자쿠가 전부 다 삼켜버렸다.
다 벗은 두 사람의 몸은 흥분과 쾌락에 대한 기대로 흠뻑 젖기 시작했다. 를르슈의 구멍에 자신의 손가락을 검지부터 중지까지 밀어넣은 스자쿠가 안쪽을 난폭하게 넓혔다. 찔걱찔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혼자서 할 때는 발기조차 하지 않았던 를르슈의 페니스가 안쪽이 헤집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발기했다. 그게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스자쿠의 손이 자신의 아래를 드나드는 걸 보고 싶어서 를르슈는 피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후우, 좀 풀려있어서 부드럽긴 한데… 뭐로 풀었어, 를르슈?”
“바디, 로션… 으로, 응, 으, 으아…! 스, 스자, 쿠…!”
“바디로션으로 혼자 욕실에서 풀고 온 거야?”
“그, 치만… 손가락, 두 개 밖에, 안, 들어, 가서! 아, 아아, 으, 거기, 거기! 기분, 좋아…!”
“응, 지금은 세 개째야. 어때?”
“뱃속이 뜨거워서, 이상해, 아, 빨리 넣어줘. 네 거로, 가득 채워져서, 흣, 으응, 으윽!”
구멍 주변을 손가락으로 넓히는 것이 생경해서, 를르슈는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스자쿠의 페니스도 쿠퍼액으로 번들거리고, 를르슈의 애널도 뜨겁게 달아올라서 녹아버리는 바디로션으로 번들거렸다. 손가락이 빠지고, 페니스가 구멍 끝에 맞추어지면서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것에 를르슈는 이불을 세게 쥐었다.
몸이 열리는 이 느낌은 거의 일 년만이나 다름없었다. 스자쿠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그 기분, 스자쿠의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었다는 독점욕이 채워지는 기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자신을 향한 욕정을 고스란히 부딪쳐 오는 스자쿠의 열기 같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선 앞에서 사정해버리고 말았다.
를르슈의 가슴까지 쏘아지는 정액의 줄기를 보며, 스자쿠는 자신의 페니스가 삽입되어 부풀기 시작하는 를르슈의 아랫배까지 훑어보았다. 발갛게 부풀어오른 유두 끝에도 튀어오른 정액을 문질러 펴바르고, 뜨거운 체온으로 후끈해진 손바닥을 스자쿠의 페니스를 삼킨 모양대로 오르내리는 아랫배를 감싸면서 꾹꾹 눌러주면 를르슈가 훌쩍거렸다.
“울 정도로 좋아?”
“으, 흐응, 응, 좋아, 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 아, 아, 으! 으응! 아! 스자쿠, 스자, 쿠. 아, 흐아…!”
“여기 좋아하는 거, 여전하네.”
“거기, 꾸욱꾸욱… 눌리면, 응, 좋아….”
얕게 들쑤시는 스자쿠의 허리짓에 를르슈는 더 깊게, 안쪽까지 넣어달라고 울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가장 안쪽까지 콱 밀어박았다. 다리가 접힌 채로, 허리까지 반으로 접힐 것 같이 깊게 파고드는 스자쿠의 페니스에 를르슈는 가장 안쪽까지 받아들여지는 감각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아냐, 아니야, 거기, 너무 깊어, 싫어, 무서워, 아, 스자쿠, 그만!”
“왜? 넣어 달라고 한 건, 를르슈잖아. 후, 더, 안 까지, 채워줄게.”
“아! 아아앙! 아, 아아, 흐, 으윽…!”
마지막에 스자쿠가 끝까지 밀어넣었을 때, 를르슈는 하얗게 변하다 못해 까맣고 빨갛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아랫배가 부글거리는 걸 느꼈다. 뭔가가, 이상해, 아, 이상해서, 무서워…! 를르슈는 스자쿠의 어깨를 붙잡고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였다.
점막의 안쪽의 안쪽까지, 막다른 곳까지 뚫고 들어온 것 같은 스자쿠의 것에 를르슈는 턱을 다물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자신의 몸에 쏟아지는 쾌락을 견뎌내야 했다. 스자쿠는 안쪽까지 저를 꽉 죄여오는 를르슈의 조임에 사정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스자쿠였다. 스자쿠가 다시 깊게 파고든 곳을 둥글게 쳐올리는 것에 를르슈가 몸을 바르르 떨며 옅은 정액을 토해냈다. 흐아, 가, 가버려. 가기, 싫은데, 가, 또 가…! 를르슈는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스자쿠의 가슴팍, 어깨, 쇄골, 그의 목덜미 같은 것을 보면서 흔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를르슈. 나도, 후, 섹스하고 싶었어.”
“응, 으… 아, 하으, 윽, 깊어, 뜨거워어….”
“계속해서 이렇게, 네 안에다가 박고 싶어서.”
“우응, 응, 으응! 흐아, 아, 스, 스자쿠, 읏…!”
“이제 안 참아도 돼? 그런 거지?”
“하으응, 좋아, 좋아해, 그러니까, 차, 참지 마… 참는 거, 싫어, 아, 스자쿠, 잠깐만, 아, 자, 잠깐만, 그만, 그만, 으아, 아, 나 이상해, 아, 계속, 아, 배가, 뜨거워, 안에다가, 아, 으응!”
뱃속 가득 쏟아지는 스자쿠의 정액이 제 안을 적시는 것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끌어안은 채로 훌쩍거렸다. 스자쿠의 사정은 길었고, 정액을 사정하며 벌벌 떨리는 페니스의 끄트머리가 점막 안쪽의 연한 살까지 다 꾹꾹 밀어올리는 것에 를르슈는 구멍을 힘껏 조이면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탐욕스러운 자신에 스자쿠가 질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있었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를르슈의 대한 욕정을 감추지 않은 스자쿠의 초록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자신을 비추고 있는 것에 를르슈는 만족스러워졌다. 뱃속 가득 들어찬 스자쿠의 정액에 안쪽은 보다 더 유연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질척이다 못해 질퍽이는 소리가 페니스를 삼킨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를르슈는 스자쿠의 페니스가 아직 발기한 채로 제 안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스자쿠가 를르슈를 더 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스자쿠가 자신을 이렇게 원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느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섹스다. 뜨거운 것이 다시 안을 들쑤시며 를르슈의 안쪽을 깊숙하게 파고드는 그 느낌에, 를르슈는 쾌락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혀 때문에 어눌해진 발음으로 스자쿠를 불렀다. 절정에서 잔뜩 긴장했던 근육들이 아프게 느껴지고, 벌어진 다리와 퍽퍽 쳐올리는 스자쿠의 허리짓에 울리는 허리까지 통증이 상당했지만 스자쿠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달콤한 쾌락이었다.
를르슈의 부름에 스자쿠는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한다는 그 오만에 젖은 눈빛으로 대답 대신에 키스를 했다. 잘 돌지 않는 를르슈의 혀뿌리까지 천천히 굴려서 삼킨 다음에 자신의 타액을 삼키게 만들어 위도 아래도 흘러넘치게 만들었다. 스자쿠의 것으로 모든 것이 채워지는 기분은 를르슈에게 있어서 행복이었다.
를르슈가 흘리는 눈물부터 내뱉는 호흡까지도 모두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스자쿠의 열렬한 사랑에 를르슈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를 위해서 참아왔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밤은 계속 될 것이다.
기사도 황제도 없는 이곳 리브라 별궁, 스자쿠와 를르슈만이 남아 서로를 탐하고 원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 이젠 두렵지 않았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너를 원하는 나를 알고 있고, 나를 원하는 너를 알고 있으니까.
를르슈는 자신을 힘껏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스자쿠에게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스자쿠, 나는 널 사랑한다는 말로는 이걸 다 전할 수 없어. 어떡하면 좋아? 말로는 다 못 전할 거 같은 게 싫어. 를르슈의 귀여운 투정에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면 나를 꽉 끌어안아. 너의 기분이 전해질 때까지 몇번이고. 우리 둘이 그렇게 하나가 될 때까지, 또 다시, 몇번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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