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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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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쿠가 열두 살때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약혼자가 생겼는데, 4살 연상의 를르슈 람페르지라는 소년이었다.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나타난 를르슈는 아직은 어색한 자리에 익숙해지지 않은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면서 인사를 청했다.

 

“네가 스자쿠 군이지? 잘 부탁해, 난 를르슈 람페르지라고 해.”

 

를르슈는 지금 맺어진 약혼에 대한 부담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스자쿠만이 오로지 불만인 듯 했다. 를르슈가 내민 손에 스자쿠는 겨우 손을 내밀어 잡았다. 잘 부탁해요, 라고 조그맣게 말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웃을 뿐이었다.

 

“편하게 말해도 돼.”

“어떻게요?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한테.”

“앞으로도 자주 볼 텐데, 어색하게 존댓말 하는 거 보단 낫지 않을까?”

“그쪽은… 저랑 결혼하게 될 텐데 괜찮아요?”

 

스자쿠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정략결혼은 두 집안의 이득을 위해서 남자 둘을 약혼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아직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소년의 약혼이었다. 스자쿠는 오늘 나갈 수 있었던 검도 대회를 놓쳤다는 게 억울했고, 아버지의 마음대로 이끌려 와서 약혼이나 당하고 있는 처지가 싫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을 싫을 정도로 실감하고 있을 때, 잘생긴 를르슈가 왔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야기를 듣고서 피식 웃었다. 옆자리에 앉아도 되지? 이미 다 앉아놓고서 묻는 말은 뻔뻔했지만, 스자쿠는 얌전히 그에게 옆을 내어주었다.

 

“스자쿠 군은 나랑 결혼하는 게 싫구나.”

“좋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요즘 애들 사이에서는 동성결혼은 꽤 인식이 나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으니까 그런거죠.”

“아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를르슈는 활짝 웃으면서 그건 곤란하네, 라고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의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스자쿠는 자기와 결혼하게 될 남자가 이런 남자라면 나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좋아질 것 같진 않았다. 뾰로통하게 삐져 있는 스자쿠를 바라보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기분이 나쁜 게 분명한데도, 를르슈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어딘가 상냥한 느낌이 들어서 스자쿠는 가만히 있었다.

 

“스자쿠 군에게 억지로 나를 좋아해 보라고 말하진 않을게.”

“어차피 좋아할 수도 없을 걸요.”

“후후, 그렇겠지. 그럼 이렇게 하자. 어른들 몰래 비밀이긴 하지만, 약혼은 우리 두 사람의 문제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를르슈는 스자쿠의 귓가에 손을 갖다대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볍게 오소소 돋는 소름에도 스자쿠는 꾹 참고 그가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와의 결혼은 없던 일로 할게.”

 

스자쿠는 이 약혼이 쉽게 이어지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려도 알고 있었다. 팽팽하게 다투고 있던 두 집안의 평화적인 노선으로 스자쿠와 를르슈의 약혼이 정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이 약혼에 대해서 공을 들이고 있었는지, 오늘 약혼식에서 스자쿠는 싫을 정도로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의 노력을 배신하고, 쿠루루기 가문을 져버리는 짓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를르슈는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게 맞으니까, 라고 말을 덧붙이는 를르슈는 미련이 없어보였다. 스자쿠는 그게 어딘가 꺼림칙해서, 를르슈에게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들거든.”

“……그거 쇼타 콤플렉스일 수도 있어요. 범죄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그런 조건이면 나한테만 유리하잖아요. 언 페어예요.”

 

스자쿠는 공평해야한다고 말했다. 를르슈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키득거렸다.

 

“그럼 나한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결혼은 무효인 거야.”

“……좋아요.”

“그럼 그 날까지 잘 부탁해, 스자쿠 군.”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하는 를르슈의 손에, 스자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스자쿠 군이 아니라, 스자쿠라고 불러요.”

“그럼 너도 편하게 말해.”

“왜요?”

“안쓰러워 보이거든. 말이라도 편하게 했으면 해서.”

 

스자쿠를 완전히 동정하고 있는 듯한 그 말투에, 스자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어린애의 투정에도 를르슈는 다정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잘 부탁해, 를르슈. 스자쿠의 빈정 대는 반말에도 를르슈는 한결 같았다. 그럼 잘 부탁해, 스자쿠.

어른들은 적당히 시간을 채웠으니 돌아간다고 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편한 형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좋을 거야. 를르슈가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번호를 남겨주었다. 스자쿠는 바로 그 번호로 메시지를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을걸. 그러자 를르슈가 웃었다. 맞아, 나도 형들한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좀 웃기는 말이었어. 그래도 스자쿠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 를르슈의 그 말에 스자쿠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약혼자가 생겼던 열두 살의 봄. 스자쿠는 를르슈를 만나게 되었다. 

 

* * *

 

그 이후로 스자쿠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스자쿠 군, 좋아해! 검도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계속 좋아했어! 그렇게 말하는 여자아이와 사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그 여자아이와 손을 잡아도 기분이 좋아지질 않았다. 이런 정도로 를르슈와의 결혼을 무효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좋아하려고 노력하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면서 스자쿠는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처참했다. 스자쿠는 여자아이에게 차였다. 단 한 번도 스자쿠가 먼저 무언가를 해보자고 말한 적이 없다면서, 매번 자기만 기대하는 일들이 싫었다고 여자아이는 당차게 말하며 스자쿠를 차버렸다. 스자쿠는 ‘헤어져!’라고 말하는 그 아이에게 붙잡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실패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딘가 안도하기도 했다. 

 

[사귀던 애한테 차였어.]

 

그 안도감은 아마 자주 메시지를 나누는 를르슈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친하게 지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를르슈와 메시지를 자주 나누었다. 

대체로 를르슈 쪽에서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뭐해? 학교는 끝났어? 친구랑 놀았어? 저녁은 뭘 먹어? 그런 사소한 이야기였다. 스자쿠는 처음 몇 번을 무시할까 하다가, 를르슈가 내밀었던 악수를 잊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대답하듯이 답장을 했다. 검도. 학교 끝나고 도장에 가. 친구는… 그냥 그래. 저녁은 햄버그야. 그러면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메시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날은 스자쿠가 메시지를 먼저 보내기도 했다. 그 처음이 여자아이를 사귀게 되었을 때였다. 여자친구 생겼어, 라고 보낸 메시지에 를르슈는 축하해, 라고 답장을 해왔다. 그 이후로도 를르슈의 메시지는 변함이 없어서, 스자쿠는 별 일이 없는 자신의 약혼 관계에 대해서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는 두 번째로 스자쿠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때였다. 답장을 보내고 나서 몇 분 있다가 를르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는 처음이라서, 스자쿠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스자쿠, 통화 가능해?’

“아, 응.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너한테 일어났잖아. 여자친구한테 차였다니, 무슨 일이야?’

 

를르슈가 하는 말은 심각한 듯 했다. 스자쿠는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싫어졌대.”

‘초등학생이 뭘 할 수 있다고. 그 여자애도 너무하군.’

“좋아하는 사람을 만드는 건 힘든 거 같아.”

‘아아…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일은 아니지.’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하는 듯 했다. 첫 연애는 쉽지 않은 법이야. 아직 어린데도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더 대단한 걸. 스자쿠는 꽤 좋은 남자인가봐? 를르슈의 말을 듣고 있던 스자쿠는 길가에 놓은 돌부리를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난 좋은 남자친구는 아닌 거 같아. 를르슈는 다시 스자쿠를 달랬다. 첫 연애에 그렇게 낙담하지 마. 를르슈의 말을 듣고 있던 스자쿠는 툭 튀어나온 질문을 가감없이 물었다.

 

“를르슈는?”

‘응?’

“를르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딱히, 아직 그럴 만한 인연은 없는 거 같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잖아. 벌써 중학생이면서.”

‘스자쿠한테 잔소리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나는 그러고 싶은건가. 스자쿠는 고민하다가 그건 아냐, 라고 중얼거렸다. 스자쿠가 뭐라고 더 말할까 하다가 를르슈의 목소리 너머에서 ‘람페르지 군!’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끊을게. 스자쿠, 너무 우울해 하지 마. 를르슈는 끝까지 스자쿠를 달래는 것에 집중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달래준대로 계속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가장 길게 사귄 것은 세 달짜리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초등학교 졸업식 때 스자쿠에게 꽃 한 송이 받지 못한 게 서럽다면서 차여버리고 말았다. 어색한 중학교 교복을 입고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또 차였어. 그러면 를르슈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스자쿠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뒤, 다시 노력하면 된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를르슈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아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스자쿠는 안심하고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약혼자라고 해도, 매달 매주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메시지 교환이라도 없었더라면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가 약혼자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희미한 관계였다. 그런 게 어딘가 싫어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매번 연락할 거리를 찾았다. 단순하면서도 를르슈의 흥미를 끌만한 것. 그런 것은 실패한 연애 밖에 없었다.

 

* * *

 

중학교 2학년인 쿠루루기 스자쿠가 여자친구로부터 13번째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였다. 목도리 사이로 얼굴을 묻고 있던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또 차였어. 를르슈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전화를 기대하게 되는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스자쿠, 통화 가능해?’

 

여전히 예의 바른 전화 예절에 대해서 스자쿠는 감동했다. 응, 나 때문에 전화한 거야? 스자쿠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를르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린 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를르슈는 늘 솔직하게 스자쿠를 대해주었다. 그런 어른 같은 를르슈에게 투정만 부리고 있는 자신이 싫다가도, 스자쿠는 그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혹시 괜찮으면 지금 만나러 가도 될까?’

“응? 지금?”

‘스자쿠가 괜찮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저녁 먹을 시간이니 거절해도 돼. 중학생이어도 금방 집에 돌아가야 하지?’

“……를르슈랑 있다고 하면 아버지도 봐주실 거야.”

‘후후, 그래?’

 

를르슈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스자쿠가 다니는 중학교는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를르슈는 금방 스자쿠 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스자쿠가 가겠다고 말해도 를르슈는 아직 어린 스자쿠에게 그런 부담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지하철 탈 때 어린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를르슈가 자신을 만나러 와준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알겠다고 말하며 역사 안에서 그를 기다렸다.

12월의 추위는 매서웠다. 어지간한 추위를 타지 않는 스자쿠가 목도리를 둘러맬 정도였으니. 스자쿠는 하얗게 번지는 한숨을 보면서 를르슈를 상상했다. 계속 메시지나 전화로만 이야기를 한 것이 고작이라서, 를르슈는 여전할지 궁금했다.

스자쿠는 키가 제법 컸고, 목소리도 변성기를 거쳐 낮아졌다. 이런 스자쿠의 모습은 이제 제법 남자 티가 나기 시작해서, 를르슈가 괜히 식어버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뭐가 식지?— 이 생각에 다다랐을 때, 하얗게 얼어붙은 숨결 사이로 를르슈가 나타났다.

그때보다 키가 더 컸지만, 여전히 하얗고, 추위로 빨개진 얼굴은 여전히 잘생기고, 이런 말이 어울릴까 싶지만, 여전히 예뻤다. 스자쿠는 자기가 봐왔던 여자친구들 보다 더욱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를르슈를 부르지도 못하고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스자쿠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벨소리가 울리는 것에 따라서 를르슈가 스자쿠를 찾아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거리는 단숨에 제로로 좁혀졌다. 를르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뭐야? 거기 있었으면 말해주지, 스자쿠.”

“를르슈….”

“나 아는 척하기 싫었어?”

“아, 아니.”

“그나저나 키 많이 컸구나. 그래, 그때보다 얼굴이 더 어른이 된 거 같기도 하고.”

 

실제로 보는 를르슈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전국대회 때보다 더 긴장한 스자쿠는 자신의 옆에 선 를르슈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바로 시선을 피했다.

 

“혹시 내가 온 거 싫어?”

“아냐! 그게 아니라… 그, 오랜만에 봐서.”

“그렇긴 하지. 벌써 몇년 만이야? 아무튼 오늘은 스자쿠의 위로를 할 겸… 내 생일파티를 할 거야.”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걸음을 멈추었다. 스자쿠의 놀라는 모습에 를르슈는 서프라이즈에 성공한 것이 기분이 좋은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스자쿠는 잠깐만, 이라고 말하며 오늘 날짜를 살폈다. 12월 5일, 를르슈의 생일, 그러고 보니 생일 이야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구나.

 

“내 생일을 기억해 주면 고맙겠지만, 스자쿠는 바쁘지?”

“수험생만 하겠어?”

“하하, 나는 합격 안정권이야. 걱정할 거 없어.”

“근데… 를르슈는 생일인데 나로 괜찮아?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던가…. 학생회, 학생회 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더낫지 않아?”

“겨우 떼어내느라 고생했는데 무슨 소리야. 난 스자쿠랑 있고 싶어. 내 생일이니까.”

 

를르슈는 스자쿠와 있는 것이 당연한 소리처럼 말했다. 역사 밖으로 나와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걷기 시작했다. 이쪽 동네는 말로만 들었지 잘 몰라서 말이야, 스자쿠가 소개해줄래?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안내를 맡기겠다고 말했다. 를르슈의 말을 듣던 스자쿠는 중학생이 가는 곳 따위 그에게 흥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실제로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격한 집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외아들 스자쿠에게 친구들과의 나들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몇 없는 인간관계이기도 했다.

그런 스자쿠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를르슈는 지나가는 길에 어떤 카페를 보고서 저곳에 들어가자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홍차를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야. 커피도 나쁘지 않아. 아, 스자쿠, 커피 마실 수 있어? 를르슈는 신이 난 것처럼 떠들었고, 스자쿠는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살게.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생일에는 생일인 사람이 기분 내는 법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를르슈가 여기까지 와준 걸 생각하면, 내가 내는 게 맞는 거지.”

“스자쿠랑 놀아달라고 한 건 나잖아.”

“……그렇지만.”

“만약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말할게. 그럼 됐지?”

 

그렇게 스자쿠는 를르슈가 사주는 홍차를 마셨다. 고작 티 백 하나 우려내는 데에도 그런 값을 내는 건가 싶었지만, 홍차를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를르슈의 표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카페 안에서 차를 마시면서 를르슈의 옆에 익숙해지고 있다보면, 스자쿠는 적당한 곳을 떠올렸다. 이 근처에는 쇼핑몰이 있었다. 거기서 선물할 만한 것을 를르슈에게 사주자. 여자친구들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들이 들었다.

 

“어때. 홍차, 나쁘지 않지?”

“신기하네. 집에서는 늘 녹차만 마시거든.”

“그럴 거 같아. 스자쿠가 좋았다니까 다행이군.”

“케이크 같은 건 안 먹어도 돼? 생일이잖아.”

“케이크는 사먹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해.”

“직접 만든다고?”

“응. 나름 요리하는 걸 좋아하거든.”

 

를르슈의 취미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자쿠는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자기 위주로 메시지를 나눴는지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스자쿠가 기가 죽은 것에 를르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자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스자쿠는 검도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할 거야?”

“그러고는 싶은데… 뭔가 검도는 이제 시시해진 기분이야.”

“맞붙을 강한 상대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면 좀 재수없으려나.”

“스자쿠가 강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상대가 약한 것도 나쁜 게 아니고. 아쉬운 일이지.”

“…….”

 

를르슈와 마주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몇년 전, 오렌지 주스를 나눠마셨던 것과 다른 분위기였다. 를르슈는 내년이면 어른이 되고, 스자쿠는 고등학생이 된다는 점이… 스자쿠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뭐가 아쉬운 걸까. 스자쿠는 알맞게 식은 홍차를 맛있다고 말하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차를 홀짝이던 를르슈는 중얼거렸다.

 

“내가 만나보니 스자쿠는 생각보다 나쁜 남자가 아닌데, 왜 매번 차이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아, 그런 건 괜찮아. 어차피.”

“어차피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서?”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미간을 좁혔다. 그 말은 자신이 스스로의 연애에 대해서 불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지간하면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를르슈에게 불성실하게 보이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스자쿠의 굳어진 얼굴에 를르슈는 컵을 감싸며 웃었다.

 

“그런 건 좋지 않다는 거, 알고 있지?”

“…그럼 어떡해? 그렇게라도 사귀지 않으면 나는 를르슈랑 결혼하게 되잖아.”

“여전히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그런 피하겠다는 의도로 연애를 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게 아닐까?”

“먼저 고백해오는 건 그쪽인데.”

“그렇게 핑계를 대니까 힘든 거지.”

“그럼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는 를르슈는, 누구를 사귀어 본 적이 있어?

스자쿠는 오늘 생일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는커녕, 자신의 초조함에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쉽게 궁지에 몰린 스자쿠에게 딱히 고를 선택지가 많은 게 아니었다. 를르슈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잔소리하는 거 치고는 나는 연애 경험이 없으니까, 의미가 없는 대화이긴 했어.”

“……그렇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스자쿠랑 할 이야기가 없잖아.”

 

를르슈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했다. 이 근처에 쇼핑몰 하나 있지 않았어? 거기에서 뭔가 사고 싶어. 그는 말을 부드럽게 돌렸고, 스자쿠는 알겠다고 말했다. 스자쿠와 할 이야기가 없는 것에 대해서 를르슈가 신경쓰고 있었다는 것이 스자쿠는 기쁘게 느껴졌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무언가의 우월감 같은 게 생기는 기분이었다. 나만 초조해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도 더해졌다.

쇼핑몰로 향하는 도중에, 를르슈는 차도 바깥쪽으로 걸었다. 스자쿠, 위험하니까 조심해. 그런 말을 더하면서 스자쿠의 어깨를 감싸기도 했다. 마치 꼭 여자아이한테 해주는 배려 같았다. 스자쿠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면, 를르슈는 보기 좋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스자쿠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내가 를르슈한테, 이런 걸?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도 를르슈가 안쪽 자리를 내어주고, 의자를 빼주기도 했었다. 그런 낯부끄러운 배려를 받았다는 걸 이제서야 실감한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곱씹어보면 어쩌면 더 많았을 수도. 스자쿠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도리를 한 번 고쳐서 묶어주었다. 칠칠맞기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완전히 아이를 돌보는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우월감, 안도감 같은 것은 차게 식어버리고, 스자쿠는 자신이 받는 애 취급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결국 쇼핑몰에서는 를르슈에게 아무것도 사주지 못했다. 이거 사줄까? 저거는? 이거 괜찮지 않아? 스자쿠가 일부러 안겨줘도 를르슈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그럼 나 를르슈 생일 선물로 아무것도 못해주는 거잖아. 스자쿠가 화가 난 것처럼 중얼거리면, 를르슈는 그를 달래주었다. 괜찮아, 스자쿠랑 데이트했잖아? 데이트라는 말에 스자쿠는 또 단순할 정도로 뾰로통하게 올라왔던 감정들이 가라앉았다.

데이트는 여자친구들이랑 수십 번 해봤을 텐데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 없었는데. 스자쿠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어둑어둑한 밤길을 걷는 를르슈가 걱정이 된다고 말해도 를르슈는 어린 스자쿠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다면서 기어이 혼자서 돌아갔다.

뭐야, 이렇게 휘둘리는 건 싫은데. 스자쿠는 를르슈에게서 ‘잘 도착했어. 그럼 잘 자, 스자쿠.’라는 메시지를 받고서 안심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를르슈에게 답장을 평소처럼 하려다가, 스자쿠는 다시 메시지창을 비우고서 새로 썼다.

 

[생일 축하해, 를르슈. 좋은 꿈 꿔.]

 

* * *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

“아무것도 안 보고 있는데요.”

“에이, 를르슈. 야한 거 보고 있었구나? 역시 남자들이란.”

“아니라니까요.”

 

를르슈 람페르지는 들여다 보고 있던 메시지창을 닫았다. 스자쿠한테 뭐라고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참았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은 바쁘겠지, 시험 공부도 해야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해야 하고, 여자친구도… 만나야 할 테고. 를르슈는 마지막 핑계를 댔다가 스스로 씁쓸해져버렸다.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를르슈를 눈치 챈 미레이와의 대화 덕분에 어두운 사고는 걷혔다. 를르슈는 미레이 애쉬포드를 필두로 모인 고등학교 학생회 동창 모임에 참석 중이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즐기면 되는 그 자리에서도 스자쿠의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를르슈는 시켜 놓은 하이볼을 느긋하게 비우면서도 휴대폰에 신경을 썼다. 언제 스자쿠로부터 연락이 오더라도 금방이라도 답장하기 위해서였다.

밤 9시가 되어서도 스자쿠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오늘은 바쁜가. 를르슈는 자리를 옮겨 2차를 가겠다는 분위기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스자쿠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여기서 를르슈가 먼저 계속 말을 걸었다가는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답게 여기선 참아주는 것이다. 스자쿠의 고등학생 라이프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난. 를르슈는 그렇게 되뇌면서 코트를 챙겨 입었다.

스자쿠한테 먼저 연락이 오는 일은, 여전히 스자쿠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일 말고는 없었다. 초등학생이던 스자쿠와 약혼을 한 것도 벌써 5년 전의 일이 되었다. 를르슈는 처음부터 스자쿠가 마음에 들었다. 브리타니아에 두고 온 어린 여동생 나나리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다는 감각으로 스자쿠를 대하곤 했었다. 처음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니, 정확히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를르슈의 생일을 함께 보냈던 그때에, 를르슈는 그를 남동생으로 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자신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여자친구를 만드려는 스자쿠는 불안정해보였다. 엄격한 성장과정 속에서도 올곧은 심지를 갖고 자란 스자쿠는 기특하다면 기특했지만, 그 기특하다는 칭찬을 좇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금방이라도 실수하면 버려질 거라는 사고 방식 속에서 여자친구 만드는 것 하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이 속상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매번 입에 발린 위로만 했을 뿐이었다. 스자쿠에게 진심으로 여자친구가 생기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에게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길 바란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배려에 매번 감동받으면서,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변화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6살의 스자쿠가 를르슈와 생일을 딱 한 번 보내고 나서부터, 스자쿠는 12월 5일 경을 근처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랑 헤어지고는 했다. 처음엔 우연이 겹쳤겠거니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것이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12월 3일이었고, 를르슈는 19살의 스자쿠의 이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번 여자친구는 스자쿠와 도통 헤어질 마음이 없어보였다. 연애에 대해서 건성이다 싶을 정도로 불량하게 참여하고 있는 스자쿠에 대해서 불만도 갖고 있지 않은 듯 했다. 항상 차이는 것이 익숙했던 스자쿠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여자친구를 차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여자친구한테 차이지 않으면 를르슈한테 연락할 명분이 없어지니까 싫었다. 벌써 12월 4일이었고, 여자친구는 여전히 스자쿠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12월 5일까지는 헤어져야만 했다.

 

“스자쿠 군, 잠깐 편의점 들려도 될까?”

“뭐 살 거 있어?”

“응. 빨리 다녀올게.”

 

오늘의 데이트에서 결판을 내자고 생각한 스자쿠는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으로 편의점에 따라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여자친구를 기다리면서 를르슈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회 동창 모임이 있다고 했었지, 참. 바쁘겠구나. 나도 빨리 대학생 되고 싶다. 스자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는, 어딘가 를르슈를 닮았다. 차분한 쇼트 컷 헤어스타일이며, 항상 윤이 나는 검은 머리, 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 길고 마른 몸 같은 외관은 를르슈를 닮았다. 성격도 어느 정도 를르슈를 닮은 것 같았다. 귀찮은 연락은 자주 하지 않았고, 필요할 때에 적절하게 스자쿠를 찾았다. 스자쿠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그의 옆에 있는 것에 통달한 여자친구였다. 먼저 스자쿠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그녀였으면서, 오히려 스자쿠가 눈치를 보면서 그녀에게 언제 헤어지자고 말할 것인지에 대해서 매번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편의점에서 나오는 여자친구는 추위 때문에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스자쿠는 보다 못해서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고마워, 스자쿠 군. 여자친구는 살 것을 다 샀다면서 스자쿠와 손을 잡고 걸었다. 이런 건 좀 귀찮긴 하지만… 뭐, 금방 헤어질 거니까. 스자쿠는 그녀와 손을 잡으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집 데이트 겸 공부 모임이었다. 여자친구는 를르슈를 닮은 외관만큼이나 좋은 성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자쿠는 그녀에게서 공부를 배우는 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를르슈가 가르쳐주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나쁘지 않은 설명방식 덕분에 제법 구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자쿠는 가는 길에 조각 케이크 세 개를 샀고, 곧 헤어지긴 하겠지만 여자친구의 집에 선물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썰렁했지만, 여자친구의 방에 짐을 두고 있을 때였다.

 

“부모님은 금방 오시지? 조금 있다가 인사 드려야겠다.”

“아니, 오늘은 아무도 안 계셔.”

“…뭐?”

 

스자쿠는 그녀가 를르슈와 같은 외관을 한 것 치고는 꽤나 과감한 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짐을 정리한 여자친구는 놀란 스자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무, 무슨 짓이야. 스자쿠는 당황하며 그녀의 허리를 잡고 밀어내려고 했다. 마른 몸이라고는 하지만 인간 한 명 분의 무게를 스자쿠는 쉽게 내던질 수 없었다.

 

“순진하기는, 스자쿠 군. 이런 얼굴로 아직까지도 동정이라는 게 신기해.”

“도, 동정인 게 뭐가 나빠?”

“있지, 이제까지 키스도 한 번 안 해봤다며?”

“난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해! 당장 떨어져!”

“난 안 좋아해? 스자쿠 군의 여자친구잖아.”

“이제 싫어지려고 해.”

“헤어지자는 거야?”

“그러고 싶으니까 이제 좀 내려와 줄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스자쿠 군.”

 

스자쿠는 자신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는 여자친구에게 긴장하고 말았다. 가볍게 소름이 돋은 스자쿠의 피부 위를 여자친구의 혀가 기어다녔다. 저기, 있잖아! 스자쿠가 배에 힘을 줘서 소리를 내질러도 여자친구는 요지부동이었다. 가슴팍에 와닿는 작은 가슴이며 말랑한 허벅지 안쪽 살로 스자쿠의 허리를 감싸는 것이 그녀는 이미 경험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안 되니까 나를 만나는 거, 아니었어?”

“몰라, 그런 거. 말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 사람이랑 키스도, 섹스도 안 해본 거지?”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나름 마이 페이스가 강한 스타일이라고 자부했던 스자쿠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만지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하고 말았다. 후후, 꽤 크네. 아직 발기도 안 했는데. 여자친구는 사이즈 별로 콘돔을 다 사왔다고 말했다. 스자쿠는 머리를 감싸고 싶어졌다. 여자애가 발기니 콘돔이니 그런 말 하지 마.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따위라서 스스로도 혀를 차고 싶었다.

 

“내가 알려줄게. 키스도, 섹스도.”

“싫어.”

“동정인 남자는 어딜 가도 인기 없는데도? 그 좋아하는 사람도 스자쿠 군이 동정인 거 알면 식을지도 몰라?”

 

마지막 말에 스자쿠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를르슈는… 벌써 대학생이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다고는 했지만, 그렇게 잘생겼고 예쁘니까… 어쩌면… 경험이 있을 지도. 섹스는 아니더라도 키스는… 해봤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머리 한 구석이 차게 식어버렸다. 허벅지 위에 올라탄 여자친구의 무게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어질 정도였다.

 

“뭐든 능숙한 남자한테 끌리는 법이야.”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이끌렸던 것도, 어쩌면 를르슈가 스자쿠를 대하는 것에 능숙했기 때문이었을까. 능숙한 어른 남자 같은 느낌으로. 하지만, 를르슈는, 아니, 잘 모르겠다. 를르슈를 닮은 여자친구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서 스자쿠에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 끝에 말랑하게 와닿는 감각에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서로 옷을 벗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스자쿠는 이게 맞는 걸까, 하며 브래지어를 벗는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 콘돔을 덧씌우던 여자친구는 혀를 찼다. 사이즈가 다 작네. 아직 다 서지도 않았는데. 결국 콘돔을 치워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 오늘 안전한 날이니까.”

 

여자친구가 다리를 벌리고서 삽입을 요하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와 닮은 하얀 피부의 그녀에게 맞닿고 있으면, 를르슈 생각이 나서 어딘가 흥분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를르슈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바로 식어버릴 거 같았다. 스자쿠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려고? 설마 여기서 그만 두려고? 아무리 과감했던 여자친구라고 해도 이 상황은 상정 외인듯 했다.

스자쿠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동정을… 를르슈가 아닌 사람과… 를르슈를 위해서 졸업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 뿐이었다. 오로지 머릿속은 를르슈 생각 뿐인데, 정작 몸은 다른 사람과 맞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 스자쿠 군. 정말 나도 많이 봐준 거야. 뭘 고민하는 건지 알겠는데… 그런 점이 동정 같아서 귀엽네.”

 

여자친구는 다시 스자쿠를 앉혀놓고, 그의 페니스를 천천히 입에 물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잘 안 해주는데 스자쿠 군이니까 특별한 거야. 그나저나 정말 크네, 스자쿠 군. 안에 넣으면 정말 기분 좋겠다. 그런 코멘트를 들으면서 스자쿠는 펠라치오를 받았다. 어느 정도 부풀기 시작한 스자쿠의 페니스에 그녀는 넣어달라고 말했지만, 스자쿠는 훤히 드러난 여자친구의 아랫도리를 보고 나니 금방이라도 식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한 처음은 이게 아닌데. 여자친구는 삽입하기 싫으면… 이라고 말을 흐리면서 허벅지 사이를 가리켰다. 여기에 넣고 흔들면 돼. 좀 쓸려서 아프긴 하겠지만.

 

“그나저나 정말 그 사람 좋아하는구나? 이건 진짜로 하는 게 아니니까, 노 카운트야, 스자쿠 군.”

 

그 말에 스자쿠는 그녀의 마른 허벅지 사이에 페니스를 끼워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말랑하면서도 스자쿠의 페니스를 다 조이지 못할 정도로 마른 것이 느껴지는 앙상한 허벅지는 어딘가 를르슈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더 흥분하게 되었다. 여자친구의 아래가 젖어서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스자쿠는 그것을 무시하고 허벅지에 열심히 페니스를 쑤시고 비벼댔다. 하아, 하아, 하고 숨이 가빠졌다. 스포츠 대회를 치르는 것 같은 긴장감이 풀리고서, 우승을 앞두었을 때의 쾌감이 스자쿠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사정하는 스자쿠의 것을 배로 받아낸 그녀는, 스자쿠에게 매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싫어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스자쿠는 아직 자신이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처음은 를르슈가 좋았다. 그걸 자각하고 나니까 섹스는 더욱 하고 싶지 않아졌다. 여자친구에게서 몸을 떼어낸 스자쿠는 오늘의 마지막 할 말을 떠올렸다. 

 

“이제 나랑 헤어져 줄래?”

 

스자쿠의 별 꼴을 다 참아줬지만, 마지막 말은 참아줄 수 없었는지 여자친구는 손을 올려 뺨을 갈겼다. 스자쿠는 휴지로 뒤 처리를 하고서 벨트 버클을 잠그고 다시 정갈한 교복 차림으로 여자친구의 집 밖으로 나왔다.

섹스 비슷한 걸 했지만, 섹스는 안 했다. 난 아직 동정이야. 를르슈랑 진짜로 할 때까지, 절대로 섹스하지 않아. 스자쿠는 그런 생각으로 를르슈의 집으로 향했다.

 

* * *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집 열쇠를 준 적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로망이었거든, 자취하는 거. 스자쿠는 약혼자니까 언제든 올 수 있어. 그렇게 내미는 열쇠를 받으면서, 스자쿠는 어딘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열쇠를 쓰는 날이 언제가 될 지는 몰랐지만, 오늘, 그것도 섹스를 상정하고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를르슈가 알려주었던 집 주소로 향하는 전철에서, 스자쿠는 게이 섹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자처럼 젖지 않으니 젤이나 로션은 필수, 배 앓이를 할 수 있으니 콘돔도 필수. 를르슈가 자취하는 아파트에 가까운 역에 도착하자마자, 스자쿠는 드러그 스토어에 들려서 제일 비싼 젤과 제일 얇고 가장 큰 사이즈의 콘돔을 샀다.

시간은 벌써 12월 5일의 자정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이 시간에 안 들어오고 뭐하냐는 내용에, 를르슈랑 있어요, 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러면 아버지는 민폐 끼치지 말고 적당히 돌아오너라, 하고 말을 말아버렸다. 미안, 아버지. 나, 를르슈랑 섹스하느라 오늘은 안 들어갈 거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아파트로 향했다.

를르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아파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처음 들어오는 를르슈의 아파트는 잘 정리가 되어있고 깔끔한 분위기로, 를르슈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어색하게 불을 켜두고서, 스자쿠는 사두었던 젤과 콘돔이 들어있는 봉투를 바닥 아무 곳에나 내려두었다.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를르슈가 없는 게 이상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갑자기 찾아왔다고 하면 놀랄지도 모르니까, 적당히 둘러대면서.

 

[를르슈, 자?]

 

를르슈는 답장이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거실 소파에 앉아서 답장을 기다렸다. 벌써 자정이 넘어가는데도 를르슈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걱정이 되었다. 스자쿠가 전화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현관 쪽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하고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가 집으로 돌아왔다. 환한 집안 분위기에 를르슈는 놀란 것처럼 잠깐 들어오는 것을 머뭇거리다가, 스자쿠가 있는 것을 보고서 더 당황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자쿠? 왜 여기에 있어?”

“를르슈야말로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아, 오늘은 학생회 모임이 있었어. 스자쿠가 온 거 알았으면 일찍 왔을 거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를르슈의 대답은 사실일 것이다. 스자쿠는 더 이상 그를 탓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어서, 를르슈가 코트를 벗으면서 옷걸이에 걸어두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튼… 어서 와. 스자쿠는 뒤늦게 를르슈에게 인사를 했다. 스자쿠의 멋쩍은 인사를 받은 를르슈는 눈가가 휘어지게 웃었다. 다녀왔어, 스자쿠. 를르슈의 답례에 스자쿠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찾아오다니, 무슨 일 있어?”

“찾아오라고 열쇠 준 건 를르슈잖아.”

“그렇긴 하지만…. 온다고 말해줬으면 뭔가 준비라도 했을 텐데.”

“메시지 보내긴 했어.”

“메시지?”

 

그 말에 를르슈는 휴대폰을 꺼내보더니 뭐야, 라고 허탈하게 웃었다. 왜 자냐고 물어본 거야? 집에서 안 자고 있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집에는 연락했어? 를르슈가 그렇게 묻자, 스자쿠는 ‘아버지한테 를르슈랑 있다고 말했어.’라고 대답했다. 를르슈는 그렇구나아, 하고 말꼬리를 늘이면서 바닥에 놓여있는 비닐봉투를 들어올렸다. 이건 뭐지? 뭘 사들고 온 거야, 스자쿠? 

 

“아, 그건…!”

 

스자쿠가 아무렇게나 내려둔 섹스 준비물을 를르슈가 열어버리고 말았다. 를르슈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스자쿠를 방금 전보다 더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젤과 콘돔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한 그 얼굴이 어딘가 약이 올라서, 스자쿠는 기분이 상했다. 스자쿠는 오늘 그것들의 실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를르슈는 스자쿠보다 이전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 어쩌면.

 

“고, 고등학생이 이런 거 사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를르슈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면서 바닥에 다시 그것들을 내려두었다. 스자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를르슈의 모습이 어딘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를르슈는 이것들을 알고 있고, 사용하는 방법도 알고 있는 걸까? 그럼 벌써 경험이 있다는 걸까? 그럼 어느 쪽이지?

 

“살 수 있었어. 여자친구가 먼저 샀고.”

“뭐? 여자친구…랑? 이런 걸, 샀다고?”

“응. 그리고 헤어졌지만.”

“뭐?! 헤어졌다고?”

 

그렇게 가볍게?—라는 말이 내재되어있는 것 같은 되물음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섹스를 하고 헤어졌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자쿠는 스스로 아직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진짜는 를르슈랑 할 거니까.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준비물을 챙겨온 거고.

 

“아니, 그럼… 그러니까, 넌, 여자친구랑, 코, 콘돔, 같은 걸… 사고?”

“끝까지 안 했어.”

“뭐? 아니, 뭐, 그런 건, 신중하게 하는 게 맞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끝까지 안 할 거야.”

“…그, 그런 건 쉽게 속단해서 안 돼. 소중한 상대가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뭐랄까, 자연의 섭리 같은… 당연한 감정이라서. 스자쿠, 한 번 실패했다고 그러는 건 좋지 않아. 아니, 아직 고등학생에게는 이른 이야기긴 하지만.”

 

횡설수설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다가갔다. 다가오는 스자쿠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에 를르슈는 당황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던 스자쿠는 섹스의 직전 단계까지 갔다 왔다고 말하고 있고, 그런 분위기에 한 번도 놓여본 적 없는 를르슈는 이제는 전과 달라진 스자쿠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전과 달라진 스자쿠. 이것만은 확실했다.

 

“를르슈, 술 마셨어?”

“아, 조금….”

“어쩐지 말이 많더라.”

“미안.”

“미안할 건 아니야.”

“아니, 뭐, 그런가.”

“있잖아, 를르슈. 나 이제 여자친구 사귀는 거, 그만 두려고. 그냥 를르슈랑 결혼할래.”

“그런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나랑 결혼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흐앗!”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를 감쌌다. 이제는 전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그녀에 비하면 허리가 부러질 듯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가 남자답게 느껴지는 부피와 무게감이 좋았다. 스자쿠가 셔츠 위를 더듬으며 허리선을 더듬는 것에 를르슈는 그만하라고 말했다.

 

“난 자포자기한 게 아니야, 그냥 이제 알게 된 거지.”

“알다니, 뭘…?”

“를르슈를 좋아해.”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더 이상의 틈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를르슈의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보고서 스자쿠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은 아니었다. 까슬하게 일어난 입술의 느낌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여자아이처럼 마냥 부드럽지만 않은 를르슈의 키스는 나쁘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제 입술로 덮으면서, 를르슈의 맛이 궁금해졌다. 살짝 벌어진 를르슈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고 그의 혀를 살짝 핥아올렸다. 를르슈의 혀가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지자, 스자쿠는 더욱 과감하게 움직였다. 하으, 아, 아읏…. 혀를 섞으면 섞을수록 를르슈의 신음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여린 안쪽 살을 혀끝으로 핥아주면 를르슈의 턱끝으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렀다. 코로 숨을 쉬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 정도가 되었을 때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첫 키스를 했었을 때보다 더 정신없이 파고든 기분이었다.

 

“곧 있으면 를르슈 생일이네. 를르슈는 한 번도 나한테 생일선물 받아본 적 없잖아?”

“……?”

“이번엔 꼭 받아줘. 내가 준비한 거니까.”

 

침실은 어디야?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고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바닥에 내버려두었던 봉투를 덜렁 쥔 스자쿠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를르슈는 갑자기 스자쿠에게 붙들려 있던 손을 떼어냈다.

이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전 키스는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건으로 적당히 넘어갈 수 있겠지만, 섹스를 하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자신과 섹스를 하겠다는 의지가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큼은 참아야 했다.

 

“아니야, 안 돼, 스자쿠. 너 지금 세, 세, 섹스… 할 거잖아?”

“맞아.”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결혼 같은 거라고!”

“난 를르슈를 좋아하는데? 를르슈는 나 안 좋아해?”

“그, 그건 맞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넌 고등학생이잖아!”

“내년이면 성인이야.”

“그럼 내년까지 기다려!”

“싫어!”

 

침실 안으로 들어온 스자쿠는 문을 잠갔다. 철컥, 잠기는 소리에 를르슈는 이 아파트가 낡긴 했어도 방음 하나는 끝내주게 잘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를르슈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를르슈를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취해있던 술 기운도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를르슈가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뭐?”

“그건 너무 끔찍해. 나는 오늘 콘돔이랑 젤이 어떻게 생긴지 알게 되었는데, 를르슈는 그걸 나보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스자쿠, 그런 이유로 세, 세, 섹스 하는 건.”

“싫어? 정말로 싫어?”

 

스자쿠는 다시 키스할 것처럼 다가왔다. 그 입술에 당하고 나면 이제는 침대 위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를르슈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목을 잡은 채로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봉투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콘돔 박스와 젤이 자기 침대 위에서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를르슈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싫은 건, 아니지만… 난, 그… 그거…는 아닌 거 같아서.”

“그게 뭔데?”

 

그게 뭔지, 를르슈도 모르는 게 문제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목에 두드러지는 부분을 문지르면서 를르슈, 하고 그를 불렀다. 어렸을 때처럼 높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낮아진 스자쿠의 목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스자쿠의 한 손에 쥐어지는 자신의 손목을 보고서 를르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라도 말을 해야만 했지만, 자신이 스자쿠의 입장이라면 모든 조건은 클리어된 상태였다. 곧 결혼할 상대와 섹스를 좀 일찍 한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다면… 만약… 그러니까…. 

 

“나, 난 혼전순결주의자야!”

 

를르슈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스자쿠는 그 말을 듣고서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혼전, 순결, 주의자? 그 단어를 혼자서 되뇌어보더니 스자쿠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를르슈는 기세를 타고 스자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랑 결혼할 사이여도, 네가 곧 성인이 되더라도, 나는 결혼한 뒤에 첫날밤에 할 계획이었어!”

“…그래도 나랑 하고 싶다는 건 사실이지?”

“맞아!”

“근데 혼전순결주의자인데 콘돔이랑 젤을 어떻게 알아봐?”

“그, 그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첫날밤을 맞이하면 스, 스자쿠가 실망할 지도 모르니까.”

“…….”

“나는 너보다 어, 어른이니까… 리, 리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를르슈의 말들은 그럴싸했다. 연하를 리드해야 한다는 연상의 압박감 같은 건 스자쿠로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말을 듣고 있던 스자쿠는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콘돔과 젤을 바라보았다. 섹스를 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혼전순결주의 때문에 그런 거라면… 혼전순결만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 스자쿠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는 자신이 혹시 천재가 아닌가 싶었다.

 

“좋아, 그럼 오늘 섹스는 하지 말자.”

“그, 그렇지?”

“대신 다른 거 해.”

“키, 키스도 오늘은 그만…!”

“키스 말고 다른 거 하면 돼. 그럼 를르슈도 만족하지?”

“뭐, 뭘?”

 

스자쿠는 교복 자켓을 벗기 시작했다. 흐트러지는 스자쿠의 옷차림에 를르슈는 머릿속의 경고등이 미친듯이 발광하는 것을 느꼈다. 를르슈를 침대 위로 끌어당긴 스자쿠는 그가 입고 있는 니트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스자쿠의 손이 를르슈의 차가운 피부 위를 기어다니는 것에 를르슈는 히익, 하고 소리를 냈다. 이상한 소리, 하고 스자쿠가 웃으면서 를르슈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스자쿠, 난, 호, 혼전순결주의…!”

“알아. 혼전순결 중요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를르슈랑 진짜로 하는 건 결혼식 이후가 좋을 거 같아. 그때까지 나도…….”

“응?”

“일단 안 넣으면 되잖아?”

“무, 무슨 소리야?”

“직접 넣지 않아도 하는 방법이 있더라고. 몰랐는데 말이야.”

 

를르슈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깔아뭉개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자켓을 벗고 셔츠 차림의 스자쿠는 단추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으로 짜여진 스자쿠의 몸이 어둑한 방 안에서도 제대로 된 음영을 그리면서 드러났다. 를르슈는 아직 고등학생이, 고등학생 주제에, 고등학생 따위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의 스트립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드러난 가슴팍으로부터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불룩하게 부풀어오른 스자쿠의 앞섶이 보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시선이 그곳으로 닿은 것을 보고서 히죽 웃었다. 왜 그런 곳을 보는 거야, 혼전순결주의자 씨. 얼렁뚱땅 둘러댄 궤변 치고는 나름 먹히는 유효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자쿠의 그런 조롱을 들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넣지 않고, 한다는 게….”

“를르슈 바지 벗길게.”

“뭐…?!”

“속옷 너무 야한 거 아니야?”

“보… 보통이다!”

“엉덩이 작아서 귀엽네.”

“마, 만지지 마!”

 

은근슬쩍 보여주듯 하는 스자쿠의 스트립과 다르게 를르슈의 옷은 훌러덩 벗겨지고 말았다.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듯 를르슈의 바지를 내려버리고, 드러나는 검은색 비키니를 손끝으로 한 번 쓸어본 스자쿠는 한 손에 감기는 를르슈 엉덩이의 소감까지 말했다. 남자에게, 연하에게, 고등학생 스자쿠에게 엉덩이를 만져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를르슈는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트까지 단숨에 벗겨지고 난 뒤, 를르슈는 비키니 팬티 한 장 차림으로 스자쿠의 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 스자쿠 또한 드로즈 한 장 차림으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성기만 내놓지 않았을 뿐, 흥분한 분위기는 계속해서 고조되고 있었다. 스자쿠의 수납된 성기는 딱딱하게 굳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를르슈는 이 상황의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 채로 발기도 못했다.

스자쿠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를르슈도 분명 스자쿠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년 같이 생일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자쿠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12월 5일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 왜 발기하지 않는 건지. 를르슈의 팬티 위로 드러난 페니스 윤곽을 더듬고 있자, 를르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넣지 않고 하는 방법… 너는 어디서 안 거야?”

“아.”

 

그건 전 여자친구가 된 그녀가 알려줬다고 하면, 를르슈는 슬퍼하겠지. 스자쿠가 섹스 비슷한 것을 하다가 와서 를르슈에게 비비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눈치없는 천연 남자라고 해도 스자쿠는 그 정도 분위기는 읽을 줄 알았다. 스자쿠가 적당히 댈만한 핑계를 고르고 있을 때, 아래에 있던 를르슈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스자쿠가…… 어디서 구르다가 온 게 틀림없어.”

“그게 되게 부끄럽다. ‘나의 스자쿠’라고 하니까.”

“그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설마 이미……?”

“아니, 난 동정이야. 진짜로. 맹세코.”

“이상한 동영상 같은 걸 본 거야?!”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런 걸 볼 리가 없잖아.”

 

스자쿠는 이상한 곳에서 고등학생임을 강조했다. 를르슈는 울먹거리던 시야 사이로 스자쿠의 가라앉은 눈빛에 응했다. 스자쿠가 뭔가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눈치채긴 했지만, 더 이상 알아보는 것은 스자쿠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봤자 또래 여자친구랑 선 넘을까 말까 했겠지.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한 스자쿠니까 정말로 동정일 것이다. 를르슈는 그렇게 믿으면서 스자쿠가 벌리려고 하는 다리에 힘을 풀었다.

 

“절대로 넣으면 안 돼.”

“알겠어.”

“…진짜로 넣으면, 너랑은.”

“넣으면 어떻게 되는데?”

 

를르슈는 스자쿠가 다리 사이를 벌리고 난 뒤에 자신의 드로즈에서 페니스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헉, 하고 숨을 멈추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를르슈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프리컴으로 젖어든 귀두 부분을 문질렀다. 낯선 타인의 성기가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부딪치는 것에, 를르슈는 목까지 붉게 물들고 말았다.

 

“내가 진짜로 넣으면 어떻게 되냐고, 를르슈.”

 

스자쿠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넣지 않을 것이다. 를르슈는 뜨겁고 딱딱한 페니스가 자신의 허벅지살을 쿡쿡 찌르는 감각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답을 재촉하듯 를르슈, 하고 부르자 를르슈는 얼굴을 가리면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이, 이혼이야. 너랑 이혼할 거야…!”

 

를르슈의 말은 너무 귀여워서, 스자쿠는 핫, 하고 숨을 참으면서 를르슈의 벌어졌던 다리 사이를 모았다. 검은 비키니 팬츠를 벗기고 싶었지만 를르슈가 수치심에 기절할 거 같다는 생각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자신의 다리가 스자쿠의 힘에 의해서 굳게 다물리게 된 것을 본 를르슈는, 스자쿠가 무엇을 할지 대충 예상하게 되었다.

넣지 않고서 하는 방법.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는 스자쿠의 페니스. 미끈거리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허벅지 사이에서 찌익거리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자쿠가 허리를 움직이면서 살갗끼리 부딪쳐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를르슈는 혀를 깨물고만 싶어졌다. 기절하고 싶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를르슈는 침대 시트를 그러쥐면서 제 위에서 움직이는 스자쿠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그 시선에 응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한 용기를 허벅지 사이에 스자쿠의 페니스가 끼워진 채로 내는 것은 무리였다.

 

“이혼한다는 건, 결혼, 해준다는 거네, 를르슈…!”

“흣, 흐아, 아, 스자쿠, 그만… 뜨거워, 아파…!”

“결혼해준다는 건, 진짜로 넣게 해준다는 거고…?”

“쓸리는 거, 이상해. 느낌이, 스자쿠, 아, 아으읏.”

 

를르슈는 퍽퍽 내리찧는 허벅지의 느낌이 이상했다. 그 와중에 자신의 비키니 팬티 안에 얌전히 있을 페니스가 서서히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스자쿠는 단단해지는 를르슈의 페니스 느낌을 알아차리고서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흥분했어, 를르슈? 스자쿠의 묻는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냐, 이건, 생리현상이다…! 스자쿠는 그 말에 하핫, 하고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꽉 붙들린 허벅지는 아프고, 안쪽 살은 쓸리고 끈적거려서 불쾌했지만, 를르슈는 팬티를 비집고 발기하려는 페니스에 집중하고 나니까 더 죽고 싶어졌다.

 

“방금 전부터, 를르슈 정말….”

“흐응, 아, 아으, 아아앙…!”

“계속 이상한 말밖에 못하는 게, 귀엽네.”

 

스자쿠는 헉헉거렸다. 스자쿠의 더운 숨결이 종아리를 타고 느껴지는 게 야하게 느껴져서 를르슈는 이제 완전히 발기하고 말았다. 허리를 쾅, 하고 움직이는 스자쿠 때문에 침대에서는 스프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직 를르슈가 결제한 할부가 안 끝난 매트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맞춰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의 신음을 토해냈다.

 

“를르슈, 허벅지, 스스로 잡아… 후우, 더 조여줘.”

“그, 그런 거…!”

“할 수 있잖아. 안 그러면 진짜 넣을 수도 있어.”

“…못, 하겠어. 안 돼.”

“할 수 있어.”

“너무, 이상하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팔을 붙잡아 스스로 허벅지를 붙들게 했다. 스자쿠가 붙들던 때와 다르게 더 느슨해진 조임이었지만 스자쿠는 썩 나쁘지 않았다. 를르슈가 울먹거리면서 스자쿠의 페니스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도 좋았다. 이제야 쳐다봐주네, 하고 스자쿠가 중얼거리자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거, 너무 야해. 섹스보다 더 야한 거 같아.”

 

스자쿠는 그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 아직 를르슈 거도 못 봤고, 를르슈한테 넣지도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야한 거야? 그냥 만지는 거 뿐이잖아.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야해. 야하단 말이야. 그냥 너무 야해. 를르슈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스자쿠는 그에게 허벅지를 조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울먹거리던 를르슈가 어렵게 팔과 허벅지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야해서 싫다고 하면서도 스자쿠의 부탁에 기꺼이 응했다.

 

“괜찮아, 나 아직 동정이야. 를르슈를 위해서 참을 거야.”

 

를르슈는 그 말에 저었던 고갯짓을 멈추었다. 후욱, 하고 스자쿠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이제 곧 갈 거 같다고 말했다. 를르슈도 그 말을 들으니까 팬티 속에서 젖어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스자쿠의 페니스에서 정액이 두세 번 끊어져 나오는 것에, 를르슈 또한 자기도 모르게 사정하고 말았다. 를르슈의 팬티가 젖어서 정액이 천을 비집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걸쭉해진 팬티를 문지르면서 키득거렸다. 를르슈 말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해. 섹스보다 더 야한 느낌. 를르슈는 스자쿠가 해주는 공감이 달갑진 않았다. 를르슈의 배 위에 사정된 정액과 체액으로 더러워진 허벅지 사이를 협탁 위의 휴지로 닦아주면서, 스자쿠는 먼저 씻으라고 말했다. 아님 같이 씻을까? 를르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어, 들어오지 마! 를르슈가 욕실로 달아나는 것에 스자쿠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혼자 남은 침실에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위해서 사왔던 젤과 콘돔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서 애처롭게 구르고 있는 그것들을 손에 쥐고서, 스자쿠는 콘돔 박스를 뜯었다. 정사각형의 네모난 포장이 된, 이 콘돔 하나를 쓰기까지, 앞으로 또 얼마나 이런 관계를 가져야 할까. 진짜 동정은 언제 졸업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혼자서 콘돔 하나를 뜯어보았다. 미끌미끌한 액체와 함께 동그란 직경의 라텍스 조각이 삐질거리며 나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런 거로 ‘진짜’ 섹스를 하게 되는 날이 기대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