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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감금강간 연상연하

DOZI 2019.06.11 00:33 read.2111 /

제목 그대로 납치/감금/강간

연상 스자쿠 X 연하 를르슈 

 

 

 

 

 

 

 

 

 

 

 

 

 를르슈는 주말에 대형 서점으로 왔다. 같이 온 일행은 여동생 나나리. 곧 있으면 고등부 입시라는 이유로 문제집을 고르러 왔다. 나나리가 고등부에 입학하면, 를르슈는 곧 졸업이지만 그래도 애쉬포드 고등부와 애쉬포드 대학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나나리에게 문제집을 골라주면서 해설과 같이 보라고 조언을 해준 를르슈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살폈다. 도입부는 흥미진진하지만, 이 작가의 글은 뒷심이 부족해서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고 뒤를 먼저 읽어서 스포일러를 당하는 건 싫다. 어쩌지…. 

 

 “저기, 잠깐만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소설책을 덮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급스러워보이는 정장 차림에, 선해보이는 인상. 정말 곤란해보이는 듯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목소리에는 한껏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애쉬포드 고등부 학생 같은데, 맞아?”

 

 교복 차림도 아닌데 어떻게 안 거지? 를르슈는 그 남자를 경계하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 위험한 사람 아니야, 아, 위험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도 않겠지만…. 뭔가 미행한 것처럼 말해서 미안. 방금 전에 여동생이랑 문제집을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 이야기가 나온 거 같아서.”

 “…계속 보고 있었습니까?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 나도 그 근처에서 문제집을 고르고 있었어! 진짜야! 오해할 만한 거 알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정말 나도 급해서….”

 

 어느새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문제집을 다 고른듯 팔 가득 문제집을 골라온 여동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이 분은….”

 “모르는 사람이다. 상대하지 말자, 나나리. 끝났으면 계산을….”

 “아,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렇지만 진짜 한 번만 도와줘!”

 

 아예 시선 집중이 되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에 를르슈는 얼굴을 감쌌다. 됐으니까 소리지르지 마세요…. 를르슈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남자는 또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급한 일입니까? 제가 얼마나 도울 수 있죠?”

 “그냥 잠깐의 조언을 구하고…. 그전에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줬으면 좋겠다는 건, 너무 내 욕심인가?”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 같습니다. 제가 만약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아, 여동생 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쪽이 도와주시면 더 도움이 되지요!”

 

 그 순간 시큐리티 가드가 를르슈에게 다가왔다. 손님, 무슨 불쾌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를르슈는 저 남자가, 라고 운을 떼려다가 시큐리티 가드에게 무언가를 내미는 남자를 보았다. 그러자 시큐리티 가드가 바로 고개를 숙여 의심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뭐지?

 

 “손님의 안전을 지키는 건 잘하고 있는거야. 오히려 소란을 피운 내가 미안한걸.”

 “따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저희가 직원을 불러서….”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내가 알아서 일 보고 갈게. 바쁜 주말에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를르슈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나나리를 등 뒤로 돌려세우고는 남자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완전한 를르슈의 경계에 남자는 ‘정말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라면서 시큐리티 가드에게 내밀었던 그것과 다른 한 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하나는 사원증이었고, 하나는 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주인은 같았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야.”

 

 이 서점이 있는 쿠루루기 빌딩의 주인 아들이라는 증명이었다. 그리고 이 서점 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 사원증과 명함의 위조 가능성은?”

 “했다면 진작에 쫓겨났겠지?”

 “…….”

 “알았어, 자, 카드는 어때? 자기 이름으로 만든 카드 정도는 다들 들고 다니니까.”

 

 빳빳한 은색의 카드가 들이밀어진다. 이건…. SUZAKU KURURUGI라고 적혀있는 이름까지 완벽했다. 

 

 “이건…팔라듐이군요.”

 “어,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인걸.”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아하하, 고마워, 크게 어려운 점은 아니니까. 아, 우선 서로 통성명을 하려면…. 그 전에 네 여동생, 팔이 빠지겠다.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 할까?”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대신 짐을 들어줘도 되냐고 물어보는 스자쿠가 상당히 매너가 좋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직 계산을 안해서 카페에 갖고 못 들어갈 텐데요…. 나나리가 조금 머뭇거리자 스자쿠는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 나 여기 서점 아들이라서 잘 말하면 돼.”

 

 환하게 웃으면서 권력을 남용한다. 속을 알 수가 없다. 해맑은 척 하면서 뭘 도와달라는 건지. 카페에 들어가면서 스자쿠는 두 사람에게 뭘 마실거냐고 물었다. 를르슈는 평소처럼 밀크티를, 나나리는 차가운 레모네이드였다. 그럼 나는 커피. 스자쿠는 주문을 하고 나서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아, 그럼 나 방금 전에 자기소개 했으니까. 이제 두 사람. 사실 애쉬포드 학생이 아니면 곤란해서.”

 “…나나리는 연예계 데뷔 같은 거 안 시킬 거니까요.”

 “아, 여동생 이름이 나나리야? 그럼 너는?”

 “저는 를르슈 람페르지입니다.”

 “흠, 나이는? 나나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년에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 진학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쿠루루기 씨는 도청까지 하는 취미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면 듣기 싫어도 다 들리지? 를르슈는?”

 

 도저히 페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다. 

 

 “저는 나나리가 입학하면 졸업하는 졸업반입니다.”

 “애쉬포드 대학으로 진학하겠네. 거기도 명문이니까. 브리타니아랑 교류도 제일 활발하고.”

 “……이제 당신의 용건을 말해주세요.”

 

 스자쿠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후우, 하고 말했다. 아주 비장한 목소리였다. 

 

 “나는 28살인데, 대학 졸업한 것도 까마득한 옛날인데 이제와서 나한테 중학생 문제집 골라오라는 심부름을 받았어. 그렇지만 요즘은 나 때랑 다르게 교과 과정도 아예 달라진 거 같고. 아, 참고로 나도 애쉬포드 졸업생. 그리고 진급 시험 제도도 뭔가 까다로워 진 거 같고…. 문제집 코너에서 우선 보고는 있었는데 를르슈랑 나나리가 그쪽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도움을 받을까 했지만…. 음, 어때? 이야기 들어보니까 도와주고 싶어?”

 “쿠루루기 씨가 왜 중학생 문제집이 필요한가요?”

 “친척 중에 스메라기…이름은 뭐 나중에 나나리가 친해지면 알 수 있겠지? 아무튼 이쪽의 신원도 밝히기가 어렵지만.”

 

 스메라기라는 성에서 다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일본의 거물 집안의 후계자들이 우수수 애쉬포드로 진학하는 건 어쩌면 극비사항일 수도 있다. 

 

 “나이가 좀 멀리 떨어진 친척 여동생인데, 이번에 애쉬포드 고등부 진학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내가 그쪽 졸업생이니까 도와달라고 부모님께서 SOS를 보내셨거든. 어쩔 수 없지. 도와야지.”

 “…….”

 “아,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 계속 반말해서 미안! 미안해요, 나나리 양.”

 “아니에요, 쿠루루기 씨는 저희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뭔가 재수없는 도련님 느낌이 물씬 난다고 다들 존댓말을 하라고 하는데, 진짜로 존댓말을 쓰면 다들 어려워해서 반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서 고르고 있던 문제집, 나도 구경시켜줄 수 있어? 를르슈는 입시에 도움될 정보, 알려주면 더 좋겠는데…. 자기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주제에 세상 물정 모르니 봐달라고 비는 얼굴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학교 홈페이지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그쪽도 그쪽 사정이 있겠죠.”

 “응! 맞아, 내 사정이 좀 복잡해. 그나저나 를르슈는 대학 입시로 바쁠 때 아닌가?”

 “저는 추천입학으로 이미 안정권이라.”

 “공부 엄청 잘하나보다. 나는 스포츠 특기였어. 생각해보니 그립네. 3년 내내 3년 전부 다 다른 부로 전국대회 우승했지….”

 

 엄청난 체력 바보란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하다니. 어차피 신원도 확실하니 이쯤에서 경계는 풀까. 를르슈는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서 애쉬포드 학원의 고등부 진학 방법과 중도 입학에 대해서 설명했다. 체력 바보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스자쿠는 바로 이해했다. 

 

 “이젠 예전처럼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가 되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문제집도 난이도 별로 사야겠다.”

 “나나리는 기본이 되어있으니까 심화 과정을 골랐고, 각자 개인 차이가 있으니 직접 보고 푸는 게 나을 거예요.”

 “응, 알았어. 과연 그 집에서 걔를 서점까지 보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애지중지하는 후계자인가보군. 를르슈는 그렇게 크고 있는 또 다른 여동생을 떠올렸다. 이제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가야할 시간이기에, 를르슈와 나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다정한 나나리는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인사했다. 

 

 “아, 그리고 를르슈.”

 “네?”

 “괜찮다면 같은 오빠로써 여동생을 위해 연락처 교환하지 않을래?”

 “……쿠루루기 씨는 친척 오빠잖아요.”

 “잘 되면 여동생들끼리 친구가 되고, 우리끼리도 친구가 되면 좋지.”

 “10살 차이가 나는데요.”

 “내년이면 성인이지?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날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려고 한 사람 네가 처음이야. 정체를 밝혀도 끝까지 경계하는 것도 아주 인상 깊었어.”

 “…….”

 “음, 그럼 대신 나나리가 나랑 라인 친구 할래?”

 

 휴대폰 친구추가 창을 내미는 스자쿠를 뜯어말리며 를르슈는 제 아이디를 입력해주었다. 

 

 “저한테 필요 이상으로 연락하시면 차단할 겁니다.”

 “아쉽게도 남자 고등학생한테 필요 이상으로 연락하는 취미는 없으니 안심!”

 “…….”

 “쿠루루기 씨는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 친척 여동생 분께서도 꼭 애쉬포드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나나리는 손을 흔들었다. 를르슈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해맑게 웃고 있는 스자쿠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제 계산하러 가자, 나나리.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여기에 오지도 않았는데 계산이 어떻게 끝났냐고 말하니, ‘쿠루루기 스자쿠 님이 미리 계산을….’ 서점이 무슨 칵테일 바인줄 아나! 어이가 없어서 그를 찾을 생각도 없이 바로 나와버렸다. 옆에서 나나리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웃는 소리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 * *

 

 

 금방이라도 연락할 것 같았던 쿠루루기 스자쿠는 여름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도 연락이 없었다. 기본 이미지로만 만들어진 프로필 계정을 괜히 클릭해보면서 를르슈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학생회 활동만 하는 를르슈와 다르게 나나리는 체육부에서 부르면 부르는대로 나가는 인기인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활동이 끝나면 클럽 하우스에 들어와서 를르슈가 준비한 테스트를 치르면서 고등부 입시 준비에 힘을 썼다. 

 를르슈도 마지막 학창시절의 방학을 만끽하기로 했다. 집에서. 에어컨을 쐬면서. 절대로 밖을 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어차피 나는 인도어니까 운동 같은 거 하면, 탈수증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구급차나 안 타는 게 다행이지. 결국에 그때 고를까 말까 했던 소설책을 사서 읽었다. 

 완결은 형편 없었다. 이 작가 자식에게 펜레터라는 이름의 테러를 해버릴까 고민하던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나나리? 아니면 이상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학생회장? 제발 나나리였으면. 

 

 [스자쿠: 오랜만이야!]

 [스자쿠: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네]

 [스자쿠: 괜찮다면 오늘 만날 수 있을까?]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 꺼림칙한 남자는 대체 언제부터 봤다고 이렇게 친한 척…. 아니다, 어차피 여동생을 서로 둔 입장에서 괜찮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예전부터 나나리를 아끼는 를르슈에게 시스터 콤플렉스니 뭐니 하고 놀리는 녀석들보다는 나았다. 

 

 [오늘 갑자기요?]

 [스자쿠: 오늘이 안 된다면 다른날도 괜찮아]

 [스자쿠: 하지만 빠를 수록 좋거든]

 [스자쿠: 안될까?]

 

 그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괜찮지만]

 [아직 고등부 입시는 한참 남았는데요]

 [스자쿠: 그거 관련해서 물어볼게 있어서!]

 [스자쿠: 편한대로 입고 나와, 애쉬포드 클럽 하우스에서 살고 있지?]

 

 그런 사실을 밝힌 적은 없다. 를르슈와 나나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은 정말 드물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정보망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아니면 뭘 협박하려는거지. 풀리려던 경계가 다시 날이 섰다. 

 

 [스자쿠: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스자쿠: 내 여동생도 거기에 살 거 같아서]

 [스자쿠: 우선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인은 너네니까 물어보려고]

 [스자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

 

 물어봐야 할 것 : 어떻게 알아냈는지, 무슨 의도로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인지. 기타 등등.

 약속 시간이 다 되자 를르슈는 셔츠 차림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뭘 해도 무난한 차림으로 나온 를르슈와 다르게 차를 끌고 클럽 하우스 앞까지 온 스자쿠는 지난 번과 다름 없이 수트 차림이었다. 아, 날씨 너무 좋아—. 선글라스까지 벗으면서 하는 소리가 태평했다. 

 

 “이쪽은 더워 죽을 거 같아요.”

 “아, 를르슈, 더위에 약하구나. 알았어, 우선 차 타고 이동하자.”

 “에어컨 최고로.”

 “감기 걸리니까 중간으로 타협. 안 그러면 나나리가 걱정하지?”

 

 어디로 가나요?

 그걸 자세히 알려주면 내 보안이 위험해져서…. 우선 쿠루루기와 스메라기의 이름을 걸고 위험한 곳은 아니야. 

 회사들이 즐비한 빌딩 촌으로 들어가면서 스자쿠는 막히기 시작하는 도로에도 싱글벙글이었다. 를르슈는 그걸 애써 모른 척 하면서 바깥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무슨 빌딩에 가나요?”

 “아, 이번에 내 명의로 지은 빌딩이 하나 있어. 아버지한테 맞아가면서 만들었지만….”

 “…….”

 “집에 가는 게 귀찮아서, 회사에 집을 지었거든. 아예 한 층을 독채로 쓰려고….”

 “맞을 만하네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집에 안 들어오면 걱정이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 28살이야—.”

 

 뭔가 할 말이 없다. 빌딩이나 그런 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척 물어보면 이쪽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아마 쿠루루기 화학 쪽이 들어오겠지? 일하는 소리 듣기 싫어서 제일 꼭대기 층에 집을 지어버렸어.”

 “…집들이하자고 부르신 거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이제 이름을 밝혀도 된대. 스메라기 쪽에 있다는 친척 여동생, 스메라기 카구야라고 하는데, 중등부 편입 시험에 통과했나봐. 홈스쿨링 하면서 자란 애라서 과연 적응이 어떨지 몰라서….”

 “카구야 씨군요. 편입 시험에 통과라니, 훌륭하네요.”

 “응, 그래도 또래랑 같이 지내본지 오래 되어서…. 애쉬포드 쪽에 그런 걸 상담했더니 클럽 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한테 양해를 부탁하고, 같이 살다가 나중에 고등부 때부터 기숙사에 들어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고.”

 “…애쉬포드에서 그랬다고요?”

 

 를르슈와 나나리의 안전을 누구보다 생각하는 애쉬포드가 그런 말을 꺼낼 정도면 위험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스자쿠는 아직 를르슈와 나나리의 정체를 모르는 듯 했다. 차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스자쿠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를르슈를 끌고 갔다. VIP 전용이야. 씩 웃으면서 하는 말이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난 소년 같았다. 

 

 “애쉬포드 클럽 하우스는 어때?”

 “편합니다. 거의 10년 째 거기 살고 있고. 대학을 가서도 거기에서 살 생각입니다. 그래도 카구야 씨가 오는 건 나나리와 함께 상의하면 안될까요?”

 “당연히 되지. 를르슈와 나나리의 의사가 중요하니까.”

 “다행이다. 황자 전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해주면 좋겠어.”

 

 응?

 부드럽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자쿠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도 모르니까요.”

 “애쉬포드는 알고 있지…. 아니, 뭐 그리고 애쉬포드가 아니어도 이쪽의 정보망도 무시하지 말아줘.”

 “원하는 게 뭐죠, 쿠루루기 스자쿠 씨.”

 

 끝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바깥이 보이지 않아서 세 자리가 넘어가는 층수가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스자쿠는 엘리베이터의 난간에 기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바라는 건 없어. 친척 여동생의 상담을 원했지만, 이야기는 끝났고.”

 “우리는 황위 계승 순위도 떨어지고, 인질로써 가치도 없고, 이제와서 일본와 브리타니아의 전쟁을 원해서 저를 노렸다면 그건 실패입니다. 이름만 황자와 황녀일 뿐, 우리는 브리타니아 제국과 관련이 없습니다.”

 “딱히 바라는 건 없다니까?”

 “그럼 왜!”

 “음……. 이제 와서 이유를 지어내자면 그냥 모든건 다 핑계야. 내 집 구경할래? 를르슈라면 뭔가 인테리어 조언을 해줄지도 모르고.”

 “뭐라고요?”

 

 다 도착했다는 경쾌한 알림음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복도가 이어지기 시작하는 앞에서 스자쿠가 서자 불이 들어왔다. 

 

 “너를 납치할 생각도, 너를 빌미로 전쟁을 할 생각도 없어.”

 “…나나리는.”

 “나나리도 그저 핑계야. 자, 계속 거기에 있다가는 전력 낭비라고?”

 

 스자쿠의 옆에 서서 를르슈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인기척에 맞춰서 불이 들어오는 복도는 차분한 보라색이었다. 유행과는 다른 색이다. 슬리퍼가 없어서 미안. 러그가 있으니까 봐줄거지? 스자쿠는 거실에 잠깐 기다려주라고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 스자쿠가 사라지는 소리에 를르슈는 주변을 살폈다. 

 크고 아름다운 그림이 몇 장 걸려있는 거실. 이상하게도 텔레비전이 없다. 그 그림들을 가까이서 보려고 하니 모두 모자이크 조각으로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검은색 가죽 소파가 늘어진 모양 대로, 그냥 각지게 놓인게 아니라 동그랗게 원을 그려 놓여졌다는 게 신선한 감각이라 를르슈의 취향이었다. 진공관이 놓여있는 걸 봐서 스피커도 꽤나 좋은 걸 쓰는 것 같다. 아무리 인테리어 도구로 갖다두었어도, 이것도 를르슈의 취향이다. 

 벽에 걸린 그림부터, 발끝에 닿는 러그의 감촉까지. 전부 를르슈의 취향이다. 

 

 “어때? 나는 나름 공들여서 했는데.”

 “쿠루루기 가문에서 반대할 법하네요.”

 “약간 브리타니아 풍이지? 마실래?”

 

 손끝에 쥐어진 잔은 주황색 내용물이 넘실거렸다. 

 

 “오렌지 주스야. 평범해. 그리고 나는 너를 납치해서 전쟁같은 거 할 생각도 없고. 진심이야.”

 “……잔, 바꿔서 마시죠.”

 “그래서 기분이 풀린다면.”

 

 스자쿠와 잔을 바꾸었다. 순순히 바꿔주는 걸 보면 별 것 없어 보이는데. 내가 먼저 마실게. 스자쿠는 잔을 기울여 오렌지 주스를 다 비웠다. 자, 멀쩡하지? 그 모습에 를르슈도 주스를 들이켰다. 갈증 끝에 마시는 오렌지 주스는 평소보다 달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왜 브리타니아 풍으로 집을 꾸민거죠?”

 “같이 살 사람이 그쪽 사람이라, 아무래도 브리타니아가 그립지 않을까 싶어서.”

 “…결혼을 하시는군요. 낭만적이네요.”

 “그렇다고 생각해?”

 “확실히 일본에서 계속 살다보면 브리타니아 풍의 물건을 봐도 그리워지니까요. 저랑 나나리는 브리타니아인이 많은 학원에 다니고, 축제도 브리타니아풍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

 

 를르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다행히도 부드러운 러그가 그의 무릎을 받치고 있어서 상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몸을 지탱하는 팔까지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리 사이의 열감이 어느 때보다 심했다. 버클이 아프게 눌릴 정도로 서버리는 것에 를르슈는 숨까지 헐떡거렸다. 온몸이 덥고, 뜨겁고, 아플 정도로 민감해진다.

 스자쿠의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겨우 고개를 들어 확인한 그의 눈은 마찬가지의 열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같이 살 를르슈가 낭만적이라고 하니까, 안심이야. 약 때문에 힘들지? 나는 조금 견딜만 해.”

 “…약?”

 “아, 몸에 쌓이지 않아. 그냥…소위 말하는 데이트 강간에 쓰이는 약인데, 그보다 더 순한거지만. 그래도 이거로 바로 쓰러지는 를르슈는 몸이 얼만큼 야한거야?”

 

 이제 곧 편하게 해줄게, 최고로 기분 좋게. 

 스자쿠가 몸을 안아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취향의 그림, 내 취향의 모든 집…. 를르슈는 끊어지는 의식사이로 스자쿠가 계속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 핑계야. 나나리도 그저 핑계야. 목표는 나였어. 브리타니아 제국도 아니고, 그저 나였어. 

 

 흐릿해지는 시야와 몽롱해지는 머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밖에 없다. 스자쿠의 팔에 안긴채로 를르슈는 지금 상태로 물어볼 수 있는 걸 계속 입 밖으로 내는 수 밖에 없었다. 

 

 “무슨…약이라고?”

 “말 편하게 하는 게 좋긴 하지, 앞으로도 더 편해질 관계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최음제야.”

 “…나는 남자야.”

 “너의 그런 점이 좋아.”

 

 그래서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경계를 풀었지. 이래보여도 집안에서 자기 몸 하나는 알아서 건사하라고 단련시킨 몸이니까 를르슈한테 한 대 얻어맞고 뻗을 생각은 없어.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듯 코끝을 부비는 스자쿠의 행동에 를르슈는 한 번 더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왜, 내가…나를…아니, 모르겠어.”

 “모르겠어? 알면 돼.”

 “다 거짓말…?”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그냥 핑계를 좋게 댄 것 뿐.”

 

 몸이 흔들린다. 어디지. 주변 환경을 더 살펴볼 것을, 대화에 집중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이 하얗다. 침대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스자쿠의 손이 뜨겁게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사람 손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나? 를르슈는 고개를 겨우 떨구며 그 손을 피했다. 하지만 스자쿠는 개의치 않았다.

 

 “방학 때까지 여기를 완공하느라, 내가 태어나서 한 번 안 쓰던 떼를 써서 부모님이 놀라시더라.”

 “……뜨거워.”

 “뭐가? 아, 체온이? 지금 뭘 해도 민감하게 느낄 때라…. 그거에 놀란 거구나.”

 “약, 언제까지….”

 “근육 이완제 효과도 좀 들어가 있어서 몸이 좀처럼 말을 안 들을거야.”

 

 를르슈는 제 바지부터 벗기는 스자쿠의 손에 짧게 신음했다. 일부러 가볍게 문지르며 사람을 괴롭히는 손길에 사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런 건 처음인걸. 약 때문이야, 다 약 때문이야. 스자쿠는 웃으며 버클과 지퍼를 풀었다. 

 

 “벌써 갔네, 를르슈. 내 손이 좋았어?”

 

 를르슈가 허리를 들지 않아도 속옷과 바지를 단숨에 벗겨버린다. 스자쿠는 정액으로 범벅이 된 를르슈의 페니스를 만졌다. 거칠고 뜨거운 손이 민감한 성기를 휘감는 것이 기분이 나빠야 되는데, 를르슈의 입술 끝에서는 벌써 얕은 신음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위를 할 때에도 한 번 하고 말아버리는 를르슈에게 그 이후의 또 다른 사정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내가 최고로 기분 좋게 해준다고 했잖아, 응?”

 

 스자쿠가 정액으로 엉망이 된 손가락을 더 아래로 내린다. 를르슈는 제 귓가에 더 좋게, 기분 좋게, 라는 단어를 속삭이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침을 삼켰다. 이제 무섭다. 그만하고 싶다. 뭘 원하는 거야.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 그만해. 나를 망치지 마. 넘쳐나는 공포를 틀어막는 자존심이 아직까지도 우스웠다. 

 음낭을 부드럽게 만지고는 그곳까지 끈적하게 젖어버리게 만든 스자쿠는 나중에 빨아주겠다고 했다. 뭘 빤다고…? 를르슈의 머리는 이제 한계였다. 스자쿠의 손길은 온몸이 꼬일 정도로 간지럽고 미칠 것 같았다. 회음부를 훑는 손길에 를르슈는 겨우 소리를 냈다. 스자쿠가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약에 취한 멍청이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거, 거기…!”

 “응, 여기로 기분 좋게 해줄게.”

 “싫, 어. 그만, 그만, 쿠루루기 씨, 그만해요, 나, 아, 앗…!”

 “갑자기 존댓말하니까 더 귀엽네.”

 

 뒤에서 들어온 것은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었다. 딱딱하고 간지러웠던 그 손길이 아니라 혀인 것 같았다. 더 끔찍하다. 를르슈의 엉덩이 사이에 혀를 파묻고 있는 그 얼굴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벌어진 다리와 꺾인 허리. 숨이 제대로 쉬어질 리가 없는데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만은 생경해서 를르슈는 울음이 터졌다. 

 

 “싫어, 그만…!”

 “를르슈는 처음이지?”

 “그만, 잘못 했으니까, 그만, 그만…!”

 

 알지도 못하는 죄에 대해 용서를 빌 지경이다. 타액으로 젖어버린 제 아래에 이제 손가락이 들어서는 게 느껴졌다. 우선 하나야. 세 개까지는 해보고…. 솔직히 세 개 들어간다고 다 풀릴 거라고 생각은 안 해서. 하지만 피는 안 보게 조절할게. 스자쿠가 중얼중얼, 말을 하면서 를르슈의 안에 손가락을 휘젓기 시작했다. 뱃속이 이상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손끝에 약이라도 발랐나? 내 몸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 

 하으, 읏, 아, 아앗. 를르슈의 끊어지는 신음마다 스자쿠는 손가락의 갯수를 늘려 밀어넣고, 더 깊숙하게 넣으며 감탄했다. 

 

 “약 때문에 이런거야? 아니면 원래?”

 “야, 약….”

 “나중에 약 먹지 말고 다시 해보면 알겠지. 를르슈는 기대 이상이야.”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이제 싫어. 스자쿠는 이제 대꾸해주는 것 대신에 뺨에 키스했다. 세 개까지는 넣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찢어지겠어. 스자쿠가 짧게 혀를 찼다. 협탁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를르슈는 제 엉덩이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감각에 새된 소리를 냈다. 미끌거리고 차가운 느낌에 를르슈가 바르작거리자, 스자쿠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젤이 있는 게 더 나을거야. 손가락 세 개 넣었다고 택도 없어.”

 

 엉덩이부터 구멍이 있는 부분까지 다 젤로 젖었다. 스자쿠는 미끌거리는 느낌이 좋다고 중얼거렸다. 구멍 안에 젤을 부어버리듯이 적셔주고, 스자쿠는 손가락 세 개를 다시 밀어넣었다. 흐읍. 를르슈는 차가운 젤과 스자쿠의 뜨거운 체온에 몸을 떨었다. 곧 따뜻해질거야…. 를르슈의 귓볼을 가볍게 씹은 스자쿠가 바지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아찔하고, 몽롱하고. 이 두 개가 같이 쓰일 수 있는 말인가? 뭐가 잘못된 거야. 이 사람의 핑곗거리에 지금 놀아나고 있는 거야? 나는, 나는, 나는….

 

 “집중해, 를르슈.”

 

 방금 전과 비교도 안되는 열기가 바로 느껴졌다. 그리고 뜨겁게 몸을 가르는 감각이 덮쳐왔다. 근육 이완제 때문에 힘도 못쓰고 있던 를르슈가 침대 시트를 쥐어뜯을 것처럼 힘을 주었다. 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뱃속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은 평생 느낄 일이 없을 것인데, 어째서 내가. 왜 이 남자가?

 를르슈의 골반을 쥐듯이 잡은 스자쿠는 제 페니스를 서서히 밀어넣으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를르슈 진짜 처음이네. 다행이다. 사람 안 죽여도 되서. 무슨 말을 하는거야. 를르슈의 시트를 쥔 손을 제 목에 걸면서 스자쿠는 좀 더 매달리는 게 편할 거라고 말했다. 

 

 “왜, 왜 나한테 이, 러는, 거야….”

 

 다 들어갔다고 말하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울음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살면서 이런 일 당할 짓 한 적 없어. 브리타니아 본국에 있었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고. 를르슈가 소리를 내서 우는 소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스자쿠는 눈물만 닦아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크게 허릿짓을 한 번 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몸이 무너지는 소리에 를르슈가 소리를 질렀다. 

 

 “좋아하니까? 를르슈를 사랑해서?”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제 한계네. 를르슈가 자꾸 보채는 말만 하고. 스자쿠의 허릿짓이 강하고 빨라질수록 를르슈는 울면서 스자쿠에게 매달렸다. 싫어, 싫어, 그만해, 아, 아파, 아프다고…. 안쪽의 어딘가가 들쑤셔질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히익, 흣, 아, 아앗, 쿠, 쿠루루, 기, 씨이…. 이상해, 지니까, 그만, 그만…! 를르슈가 허리를 뒤틀며 벗어나려고 하는 것에 스자쿠는 이제야 찾았다고 웃었다. 

 나정도 되야 를르슈가 만족하겠네. 기분 좋은 곳이 그렇게 안쪽에 있으면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고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에 쾅, 하고 머릿속에 이명이 울렸다. 아으, 윽! 스자쿠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그를 떼어내려고 해도 스자쿠는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온몸이 아프다. 죽을 거 같아. 이대로 죽어버리면 끝나는거야? 를르슈는 헉헉거렸다.

 

 “를르슈, 좋아해, 사랑해, 옛날부터 계속, 좋아했어.”

 “노, 놓아, 빠, 빨리, 빼…!”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해줘. 그럼 뺄게.”

 

 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내장을 들쑤시는 느낌이 완전히 이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빨리 벗어날 방법을 선택했다. 

 

 “좋아해요, 좋아하니까, 이제 그만…!”

 “…실제로 들으니까 감당이 안 되네.”

 

 빼준다고 했으면서 이 거짓말쟁이는 다섯 번이나 더 박아대더니 겨우 빼주었다. 를르슈는 눈물로 흐릿한 제 시야 앞에 들이밀어지는 것이 스자쿠의 페니스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방금 전부터 계속 를르슈의 희망과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스자쿠는 자기 페니스를 두세 번 주무르더니 를르슈의 얼굴에 사정했다. 

 제 눈가부터 입까지 뿌려진 정액의 끈적거림에 를르슈는 눈도 못 뜨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스자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키스까지 했다. 첫 키스를 해본 적도 없는 를르슈는 첫 키스의 맛이 남의 정액 맛이라는 거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기로 결정했다. 

 

 

* * *

 

 

 기묘한 감각에 눈을 떴다. 온몸이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그러면서 푹 젖어있는 느낌이 이상했다. 를르슈는 소리 없이 눈을 떴다. 하얗고 큼직큼직한 네모난 타일. 우아한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천장. 어디인지 모르겠다, 욕실인가.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천장을 계속 보고 있던 목이 아파서 시야를 내리면 물에 젖은 갈색 머리가 제 가슴팍에 보였다.

 간지러운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야릇한 소리가 자기 가슴에서 들린다는 사실까지도 알 수 있었다.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유두를 부드럽게 굴린다거나, 유륜까지 빨아들이는 그 입술의 느낌에 를르슈는 물 속에 잠겨있는 제 손을 덜덜 떨었다. 아직도 약 때문이야. 혀끝으로 유두를 세게 튕기는 감각에 결국 를르슈는 소리를 내버렸다. 흐읏…. 아주 작은 신음이었음이어도 스자쿠는 고개를 들었다. 

 

 “를르슈, 일어났어?”

 

 입을 떼면서도 다 스자쿠의 타액으로 범벅이 된 가슴을 손으로 문지른다. 스스로도 상태를 짐작할 수 없는 가슴이 이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스자쿠는 기분 좋았지, 하고 물으며 를르슈의 벌어진 입술에 키스를 했다. 

 방금 전에도 키스하다가 정신을 잃었지. 뜨거웠던 손바닥의 체온 만큼이나 혀가 뜨겁게 밀려서온다. 고개를 뒤틀며 깊숙하게 를르슈의 안쪽까지 탐하는 스자쿠의 혀에 를르슈는 눈이 감겼다. 뒤로 밀리는 를르슈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으며 스자쿠는 그의 혀를 밖으로 끌어냈다. 키스라고는 여동생과의 굿 나잇 키스가 고작이었던 를르슈에게는 이런 키스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하, 흐읍, 읏…. 를르슈에게 숨을 쉬는 틈을 주는 스자쿠 덕분에 를르슈는 질식사로 죽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제 페니스를 쥐어오는 스자쿠의 손에 혀를 깨물고 죽을 뻔 했다. 나는 지금 발기한거야? 기분이 좋아서? 아냐, 이건 생리적 발기야…. 를르슈는 가까스로 머리를 굴리며 스자쿠가 혀끝으로 넘기는 타액을 다 마셔야했다. 

 

 “기분 좋지?”

 “…그럴 리가 없지.”

 “아예 반말만 하기로 했어? 그럼 스자쿠라고 불러줘. 쿠루루기 씨는 누구나 부를 수 있으니까.”

 “누가 그럴 거 같아?! 당장…!”

 

 스자쿠가 물 속에서 쥐고 있던 페니스를 콱 움켜쥐는 것에 를르슈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하, 하아, 앗. 그만, 그만…. 를르슈는 다시 애원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내가 왜 이래야 돼. 싫어. 고개를 저으며 스자쿠에게 애원을 했다. 스자쿠는 목덜미부터 쇄골까지 키스를 하며, 혀로 궤적까지 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그 뜨거운 느낌이,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보다 더 뜨거워서 를르슈는 또 눈물이 났다. 

 

 “이제 약 기운은 다 떨어졌을 거고…. 지금부터 느끼는건 를르슈가 진짜로 느끼는 거야.”

 

 가슴은 어땠어?

 를르슈의 유두를 치아 끝으로 가볍게 물고 늘어진 스자쿠의 애무에 를르슈는 허리를 떨었다. 신음은 당연했다. 욕실에 울리는 제 신음이 이제서야 들렸다. 이런 소리로 우는 남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확인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스자쿠가 한 쪽은 입으로, 한 쪽은 손으로 만지는 것에 를르슈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싫어, 그만…. 이상하잖아.”

 “기분 좋은 거구나. 처음인데 가슴도 느끼는 를르슈는 진짜 야하네. 내가 처음에 말했지? 를르슈는 몸이 야할 거라고.”

 “아냐, 아니라고…!”

 “괜찮아, 나만 알고 있을게.”

 

 여기 봐봐, 완전히 섰어. 가슴 만지는 동안에 계속 서더니, 이젠 완전히 싸기 일보 직전이네. 스자쿠는 입욕제 하나 풀지 않은 물 밑을 가리키며 를르슈에게 자기 상태를 알려주었다. 친절한 말투였다. 투명한 물 사이로 빳빳하게 서 있는 자기 페니스에 를르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런 거, 왜 하는, 거야? 내가, 뭔가, 자, 잘못 했어?”

 “아니, 내가 를르슈를 좋아해서.”

 “그럼 하, 하지 마….”

 

 를르슈의 등줄기를 훑는 어른의 손은 야하게 움직였다. 그 손은 등을 끌어안고 를르슈를 더욱 가까이 제 몸으로 잡아당겼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페니스 만큼이나 민감해진 유두가 스자쿠의 가슴팍에 문질러질 때마다 를르슈는 소리를 안 내려고 애를 썼다.

 이제 약 기운이 아니라 내 진짜 상태라니. 이게 내 몸이라니. 거짓말이야. 이 남자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싫어, 하지 말아줘. 를르슈는 휘어진 허리의 굴곡을 타고 내려가 방금 전까지 혹사당한 구멍을 더듬는 손길에 비명을 질렀다. 

 

 “싫어! 스, 스자쿠, 하지 마! 싫어!”

 “물 속이라 덜 아플거야. 많이는 못 움직이지만.”

 

 이름을 부르면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강간을 하지 않아. 닫혀진 구멍은 부어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지만 스자쿠는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방금 전과 비슷하지만, 물까지 밀려 들어온다는 느낌에 를르슈는 또 정신을 놓을 뻔 했다. 뱃속에 들어차는 물이라니, 죽고 싶다.

 하나, 둘, 셋…. 늘어나는 손가락의 갯수를 소리내서 세어보는 스자쿠의 목소리는 욕실에 낮게 울렸다. 페니스끼리 부딪히는 것이 느껴져서 를르슈는 울기만 하다가 물 아래를 보았다. 이게 안에 들어갔다고? 그것도 뒤에? 거짓말. 스자쿠의 페니스를 본 를르슈는 울음까지 멈추었다. 

 

 “내가 말했지, 나 말고는 아무도 를르슈 만족 못 시킬 거라고. 나 만나서 다행이지?”

 “너, 넣지 마.”

 “괜찮아, 겁 먹지마. 이제 두 번째인데 를르슈는 한 번에 기절하고, 조금 놀랐어.”

 

 그래도 나 두 번째도 정신 있을 때 하려고 참았어. 착하지? 스자쿠의 말도 안되는 소리에 를르슈는 헛소리 말라고 외치려는 찰나에 스자쿠가 제 엉덩이 사이를 가르는 것에 스자쿠의 목을 덥썩 끌어 안았다.

 무서워, 무서워….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싫어, 라는 말을 계속 남발해도 스자쿠는 멈추지 않았다. 귀두 끝이 바깥에서부터 밀려 들어와서, 동시에 물도 들어와서 기분이 이상했다. 뜨거운 물에 풀린 몸이 나른하게 스자쿠가 원하는 방향대로 열려갔다. 스자쿠의 낮은 신음도 귓가에서 바로 들려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제 이걸 알게 되버리면 싫으니까 이상하다고 하는거다. 배 안 깊숙하게 자리 잡은 스자쿠의 것에 를르슈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약 기운이 떨어졌다며, 이게 진짜 나라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를르슈의 등을 끌어안고 있기만 하는 스자쿠가 방금 전과 달라서 를르슈는 싫었다. 

 그래, 안을 휘젓고, 마음대로 자극을 주지 않는 스자쿠가 싫었다. 빼달라는 말이 아니라, 움직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물 때문에 이상해?”

 “아, 아니.”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릴게, 방금 전엔 너무 여유가 없었지….”

 

 스자쿠는 귓가에 속삭이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할까? 방금 전까진 를르슈의 의사 따위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그것도 이제 막 삽입해서 움직여주길 기다리고 있는 를르슈에게? 이건 명백한 약 올리기다.

 그렇지만 나는 뭐야? 남자랑 섹스를 하는데, 두 번째 섹스에 이렇게? 를르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방심하게 만들고, 강간하고, 이런 나쁜 놈에게 부탁 해도 통하지 않았고.

 

 “섹스, 기분 좋지?”

 “……아읏.”

 

 허리를 살살 돌리기 시작하는 스자쿠의 몸짓에 를르슈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음했다. 물 속인데도, 몸이 더 둔하게 반응하는 게 정상인데도, 스자쿠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정말 미친놈이다. 를르슈는 울면서 그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방금 전처럼 더 박아주면 좋겠다는 본능과 강간범과의 섹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이성이 싸우고 있었다. 

 그런 를르슈의 갈등을 모르는 스자쿠는 욕조의 물이 첨벙거릴 때까지 를르슈의 안쪽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가 느끼는 부분을 문지르며 은근한 자극을 주며, 상기된 얼굴을 가까스로 가리려고 하는 를르슈를 즐겼다. 

 

 “괜찮아, 무서운 거 아니까. 하지만 나는 를르슈를 아주 옛날부터 좋아했어…. 괜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거, 짓말…. 그럼 먼저 고, 백을 해야, 하, 읏….”

 “거절당하면 바로 이랬을거라. 어차피 고백해도 이랬을거고. 결과는 똑같지? 그리고 고백이라니, 를르슈는 생각하는 것도 귀엽네.”

 

 타인의 의사를 묻고 합리적 결론을 따르는 고백이라는 과정을 귀엽다고 치부해버리는 이 남자는 과연 성인이 맞나. 를르슈는 미적지근한 열감만 느껴지는 것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더 안에, 더 깊이, 더 세게. 물 안에서 움직이는 거라 감각도 둔하고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를르슈의 어색한 허릿짓에 스자쿠는 키스를 해주었다. 뜨거운 혀가 또 들어온다. 속살끼리 엮이는 느낌이 이제 익숙해진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진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늘어지는 스자쿠 때문에 아파서 미간을 찡그렸다. 

 

 “일어설 수 있어?”

 “…뭐?”

 

 자기 맘대로 할 거면 대체 왜 자꾸 물어보는지. 를르슈는 저를 일으켜 세우는 팔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욕조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수증기가 덮일 정도로 더운 욕실이었지만, 그래도 한순간 뜨거운 물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몸이 식는 게 느껴졌다.

 

 “아무데나 짚어. 버티기 쉬운대로.”

 

 욕조의 끝을 겨우 쥐고 있었다. 어느새 빠진 스자쿠의 페니스가 아쉬움과 동시에 흐르는 물이 를르슈를 수치의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려는거야. 를르슈는 고개를 떨구며 또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살면서 이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스자쿠의 손이 허리를 감싸고, 그리고 스자쿠의 것이 엉덩이 뒤로 느껴졌다. 그러나 들어오는 방식은 방금 전처럼 일일이 손으로 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확 밀고 들어왔다. 흐앗! 를르슈의 새된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봐, 를르슈.”

 

 넣은 것만으로도 갔네. 두 번째 섹스인데. 

 를르슈는 그 말에 다리 사이의 제 페니스를 확인했다. 투명한 물 위로 정액이 떠다니고 있었다. 정액이 걸쭉하게 떨어지는 모습까지. 거짓말. 를르슈는 소리내서 그 말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런 를르슈가 정말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스자쿠는 고개를 돌려서 키스를 퍼부었다. 물이 흘러 넘치는 소리, 젖은 피부끼리 부딪히는 소리. 결합부에서 들리는 소리, 그리고 제 망측한 신음소리까지. 를르슈는 제 뱃속에 퍼지는 스자쿠의 사정에 스스로 뒤를 조였다는 것까지 자각했다. 

 

 “너무 더워서 그런가? 또 기절하면 재미 없어, 를르슈.”

 

 당신 재미보자고 내가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를르슈는 그렇게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머리가 정말 어지러웠다. 스자쿠의 목덜미에 뺨을 기대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눈을 뜨면 어떻게 될까?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게 제일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