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왜 저러지?
이제 제목 짓는 능력 떨어짐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의 전임 기사.
나이트 오브 세븐.
나이트 오브 제로.
제로.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짧은 시간이 걸렸지만, 앞으로 모든 삶을 제로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둘이었으니까. 하지만 홀로 남고 나니,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을 스자쿠는 실감했다.
를르슈가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던 나나리는, 지켜지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켜낼 만큼 강했고, 때로는 스자쿠의 보호 없이도 거뜬하게 모두를 이겨냈다. 제 100대 브리타니아의 황제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에 억눌려 도망가고 싶을 것이 분명한데도, 나나리는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오빠와도 모습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자쿠는 한계에 부딪혔다. 나나리는 를르슈를 닮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를르슈의 이상은 나나리의 이상이었기에, 나나리가 원하는 세상은 를르슈가 바라는 것이었다. 나나리는 모든 정적이 사라진 곳에서 원하는 이상향을 펼친다. 를르슈가 원하던대로. 그 평화와 이상을 누린다. 그의 옆에는 정의의 편인 제로가 함께한다.
스자쿠의 한계는 날이 갈수록 가빠졌다. 이 제로는 내가 아니다. 내가 만든 제로가 아니다. 를르슈가 만든거야. 나나리, 진짜 제로는 를르슈야. 너도 알잖아. 눈을 떴으면 현실을 봐. 제로는 없어도 된다. 제로가 없어도 되는데….
제로가 없어도 될 정도로 강한 나나리를 알면서도, 를르슈는 죽음을 선택했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굳이 가면을 뒤집어 써서 허수아비의 삶을 살지 않아도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는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를르슈는 죽어서 사라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제 이해할 수 없어. 나로써는 더 이상.
제정이 폐지된 브리타니아에는 조촐하게나마 국가 원수를 위한 건물이 세워졌다. 그 건물에는 나나리와 제로가 살고 있다. 나나리의 호위는 전적으로 제로가 맡고 있지만, 오늘밤 그 호위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제로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가면을 벗고 나나리의 침실에 나타났다. 휠체어에 기대어 앉은 나나리는 늘상 그렇듯 웃는 얼굴이었다.
“얼굴은 처음 보네요, 스자쿠 씨.”
“…오랜만이야, 나나리.”
“이제 저의 차례인가요?”
“뭐?”
나나리는 전동 휠체어를 조작하며 스자쿠의 앞으로 다가왔다. 침실 문을 닫고 들어오세요.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들리는 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이제 눈이 보이면서 기척엔 민감하지 못해요. 그러니…. 그녀의 뜻대로 스자쿠는 문을 닫고 들어섰다.
“오라버니는 제로였고…. 제로는 유피 언니의 원수였죠. 저는 스자쿠 씨가 어떤 이유로 제로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오라버니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노려서 제로가 된 걸 수도 있겠죠.”
“나나리, 나는 그런 이유로 제로가 된 게 아니야! 세계의 평화를…!”
“그럼 오라버니를 왜 죽이셨나요?”
“……그건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해서, 제로 레퀴엠을 한 거야.”
“제로 레퀴엠, 이름은 좋죠. 중요하지 않아요. 제로가 제 하나 뿐인 오라버니를 죽였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
“당신은 제 원수입니다. 오라버니가 유피 언니의 원수이듯이.”
“…나나리.”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나리는 스자쿠를 노려보며 울먹거렸다.
“이제 제 차례냐고 물었습니다. 유피 언니의 원수를 끝까지 갚으려면 끝까지 하세요. 그 핏줄의 씨를 말리세요, 스자쿠 씨.”
“…나나리!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죽이세요! 저를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보내세요!”
지긋지긋합니다, 이따위 황제 노릇도, 위정자 노릇도! 무엇을 위해서 해야하나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요?! 천하의 제로가 옆에 있어도 그는 이제껏 내 모든 가족을 다 죽인 살인자인데 뭐가 위로가 되는 거죠?!
빨간 레이저가 스자쿠의 이마 사이로 겨눠졌다. 나나리가 지금 저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에 스자쿠는 쓴웃음이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나나리. 그리고 나는 죽을 수 없어.”
“방아쇠 한 번 당기면 당신은 끝입니다.”
“를르슈의 기어스가 나를 살게 할거야.”
“기어스…. 기어스, 기어스, 기어스! 당신도, 오라버니도!”
“……비열한 힘이지.”
“나에게 그 힘이 있다면!”
걸을 수 있고 앞을 볼 수 있는 그런 것보다 그 기어스라는 힘이 있다면…. 오라버니를, 오라버니가….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저 오라버니와 단 둘이 있는…!
총을 내린 나나리는 숨을 골랐다. 울음으로 엉망이 된 나나리의 호흡을 다듬어 주려고 등을 두들겨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나리는 스자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호흡을 다듬고 침착해졌다.
“제로의 가면을 쓰세요, 스자쿠 씨.”
“…….”
“쿠루루기 스자쿠는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제로는 살아야합니다. 그는 평화의 상징이니까요.”
“…….”
“오늘 같은 날은 이제 두 번 다시 용납하지 않아요.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약한 소리를 하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나요? 그러면 오라버니를 죽인 원수에 대한 제 증오가 동정심으로 조금 사그라들 것 같았습니까? 제 증오를 얕보지 마세요.”
그 이후로 제로는 나나리와 단 둘이 있어본 적은 없었다.
나나리는 늘 다른 사람을 대동했고, 호위의 임무만 제로가 대신했다. 정치의 일선에서 나나리가 슈나이젤을 압도하는 수완을 내보이면서 세계의 평화는 지켜졌다. 나나리는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며, 자신의 오빠가 지키기 위해 죽어갔던 세계에 대해서 경의를 표했다. 나나리의 활약이 빛이 날수록, 제로는 점점 뒤로 물러섰다. 정의의 편이 없어도 모두가 정의가 되는 동화책 같은 세상이 올 무렵에는, 모두 역사로 남아서 사라졌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더니 갑자기 생각나버렸다는 게 전생의 기억이라고 하면 모두들 믿어줄까. 스자쿠는 출석부를 부르다 말고 멈칫해버렸다. 그리고 이름이 불린 상대는 아주 예전에 몸이 굳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래. 스자쿠는 괜히 마음 속으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미안, 그럼 다시 람페르지 다음부터 부를게.”
다시 불리자 길게 묶은 머리가 쫑긋 하고 또 흔들리는 게 긴장했다는 게 티가 났다. 너도 정생의 기억 있구나. 스자쿠는 출석부를 덮고는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애쉬포드 학원의 중등부 체육 교사 실습생으로 나온 스자쿠는 여기서 설마의 그 상대를 만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몸에 익은 준비운동과 준비해 온 커리큘럼대로 아이들과 뜀틀운동을 했다. 설마의 상대는….
“나나리, 진짜 잘한다. 도움닫기 없어도 바로 뛰네.”
“칭찬 고마워요, 운이 좋았어요.”
“그나저나 교생 선생님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이름도 멋있어, 스자쿠 선생님!”
“…그, 그러네요.”
소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나나리가 마지못해 잘생겼다고 하는게 느껴졌다. 하긴 네 오빠가 나보다 천 배 만 배 잘생긴 건 알고 있는데…. 아니 잠깐, 나나리가 여기 있다는 건 를르슈도 있다는 건가?
“람페르지, 저기 잠깐.”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나나리를 불렀다. 꺄악. 여자애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나리는 커다란 보라색 눈을 노골적으로 찡그리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나나리가 이런 얼굴 짓는거 전생에서도 이생에서도 처음 보네…. 나나리가 운동 잘해서 스카우트 하시려나봐~ 여자애들이 꺄악거리면서 하는 소리에 스자쿠는 그걸 주워 담았다.
“아, 응, 운동 이야기야. 잠깐만. 운동 신경이 좋던데. 혹시 따로 트레이닝을 받거나.”
“안 하는데요….”
“……나나리라고 불러도 될까? 나 스자쿠 씨라고 불러도 돼.”
들고 있던 출석부로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만들며 말하자 나나리는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걸었다.
“학교니까 람페르지라고 부르세요. 저도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왜냐하면 저는 여중생이고 스자쿠 씨는 교생실습 중인 대학생이니까요!”
“배려 고마워, 나나리, 아니, 람페르지. 오랜만이네.”
“네.”
“…저기, 를르슈는.”
“오라버니 이야기를 제가 왜 선생님께 해야하는 거죠?”
“왜냐니, 친구니까 만나고 싶어서.”
“친구인데 죽였어요?”
“그거에 대해서 이제 진짜 둘이서 열심히 해명할게, 나나리. 를르슈랑 만날 수 있게 해줘!”
“나나리라고 부르지 마세요!”
친구들 쪽으로 우다다 달려간 나나리는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스자쿠 선생님이 뭐라셔?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운동 쪽으로 생각 없냐고…. 하긴 나나리는 운동을 잘하니까! 아이들끼리 떠드는 모습에 스자쿠는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혼자서라도 노력해야하나….
그러나 고작 교생 실습을 나온 대학생에게 누가 학생기록부를 내어줄까. 스자쿠는 나나리의 학생기록부 구경도 못했다. 나나리의 가정상황도 알 수도 없었다.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를르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형제 쯤 되려나? 아, 그러면 진짜 접촉하기가 힘든데.
갑자기 생각난 전생의 기억이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교무실에 앉아서 한숨이 나왔다. 를르슈와의 끝은 제로 레퀴엠. 나나리와의 끝도 좋지 못했다. 그 이후로 대화다운 대화도 해보지 못하고 나나리는 모두의 앞에서 숨을 거두었고, 제로는 기어스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 를르슈에게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요새는 학생 기록부도 다 전산화 되어있어서 비밀번호를 풀지 못하면 열지도 못하게 되어있었다. 를르슈라면 풀었겠지만…. 난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니까. 스자쿠는 제일 늦게 나온 사람으로써 교무실 뒷정리를 마치고 나왔다.
때마침 아이들의 부활동도 끝날 시간인 것 같았다. 체육관 쪽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체육관이면 배구부 아니면 농구부인가? 이쪽은 여자 배구부인 거 같네. 체육복 차림으로 머리를 깡총 묶은 뒷모습이 낯익은 게 나나리 같았다. 한 번 더 불러보고 한 번만 더 빌어볼까….
“나나리!”
익숙한 목소리. 낮지만 음울하기 보다는 경쾌한 느낌으로, 사랑을 담은 그 느낌이 가득한 것이 느껴진다. 검은색 코트 차림이 산뜻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전무후무하지. 이런 느낌. 안에는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수트 차림으로 나나리에게 팔을 벌려 끌어 안는 남자.
검은 머리카락을 반쯤 넘겨서 예쁜 이마를 훤히 드러내도 부담스럽지 않고, 여동생보다 더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항상 빛에 비치면 그림처럼 반사되는 그런 눈빛도. 날이 선 것 같은 시선도 사실은 그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면 모두 사랑으로 채워지는 그런 마법 같은 기분이 들게하는 남자는 세상에 단 한 명 뿐이다.
“오라버니! 기다리셨죠!”
“아냐, 오래 안 기다렸어. 오늘은 배구부?”
“그렇습니다!”
“열심히 했구나, 집에 가서 나나리의 활약상을 얼른 들어보고 싶네.”
나나리의 체육복을 목 끝까지 잠그며 를르슈는 귀여운 여동생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얼른 차에 타서 들어가렴. 나나리는 알겠다며 뒷 좌석에 가방을 놓고 조수석에 탔다. 를르슈는 이제 저도 운전석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를르슈!”
“…?”
들을 수가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에 를르슈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나리가 나왔던 교문 쪽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남자가 서있었다. 평생을 가서도 못 잊어서 환생을 해서도 못 잊는 그 남자. 쿠루루기 스자쿠다. 말도 안 돼.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 막았다. 도망치듯 운전석에 올라탔다. 하얗게 질린 를르슈의 얼굴에 나나리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조금….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렇게 대답해놓고서는 바로 시동을 걸고 를르슈는 학교 근처를 떠나버렸다.
태어났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 람페르지로써 시작되는 삶이 너무 평화로워서. 이게 내가 만든 세계? 그리고 3년을 기다렸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나나리가 3살 차이가 났으니까.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나나리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 로로가 태어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를르슈는 처음으로 떼를 썼다. 동생 만들어주세요. 동생. 동생! 뭐 갖고 싶니? 동생! 동생이요! 열 두살이 되던 해에 나나리가 태어났다. 정말 나나리였다. 아리에스 궁에서의 그 천방지축으로 굴던 나나리가 맞았다.
마지막까지 잘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좀 오냐오냐 키운 것 같지만, 나나리는 그래도 예의 바르고 성실한 소녀로 컸다. 나나리가 태어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걱정이 시작됐다. 그럼 스자쿠도 태어나지 않을까?
그 녀석은…이제 자기를 제로로 만들었다는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 본 얼굴을 보면 그냥 순진하게 만나서 반갑다는 얼굴이라서 또 뭘 예측하기가 어렵다. 옛날부터 그랬지. 그 녀석은 예측하기가 어려웠어. 제로 레퀴엠은 유피의 원수라고 친다고 하면, 이번에는 스자쿠의 원수라고 죽이는 거 아니냐고. 원수가 원수를 낳는 이 원수의 연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담.
나나리는 안전한가? 를르슈는 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나나리의 얼굴을 살폈다. 나나리는 나나리대로 심란했다. 오라버니의 원수는 학교에 나타나서 선생질을 하겠다고 교생실습을 하고 있고 만나게 해달라고 하루 세 번 빌게 생겼는데 그걸 빠져나갈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 전생에 죽이려다 말았으니 이번생에 그 복수를 하겠다고 죽이려 들면 어떡하지. 오라버니를 못 만나게 한다고 또 죽이려고 하면 어떡하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학교에서 체육 수업 있던 날 아닌가? 어땠어, 나나리? 나는 체육은 맨날 빠져서 혼자서 보충이었는데.”
“저는 오라버니처럼 불성실하지 않습니다! 아, 오늘부터 교생 선생님이 수업을 하시는데….”
를르슈가 말을 걸어와서 또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려다가 나나리는 제가 허튼 소리를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 오라버니는 전생의 기억이 있으실까?! 있으시다면 당장에 어떻게 되는걸까?!
“그래? 새 교생 선생님은 어때? 여자? 남자?”
“남자 선생님인데, 잘 생겼고, 친구들은 이름도 멋있다고….”
“흠. 나나리도 그렇게 생각해?”
“저는 오라버니가 최고예요.”
다행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걸까. 나나리는 포크로 고기를 찍으며 우물우물 씹었다.
“이름이 어떻길래 애들이 이름도 멋있다고 그러는거지? 요새 유행하는 아이돌 이름 같은건가?”
아,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께 거짓말을 해도 될까요?
“글쎄요, 전 그냥 그래서….”
“대답이 시원찮은 걸 보니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 거 같은데? 난 별로 안 섭섭해? 나나리도 좋아하는 사람 찾을 나이고…. 이름 정도야.”
거짓말을 하느니 진실을 토하는 게 낫겠다 싶은 나나리는 바로 말했다.
“스자쿠 선생님이에요.”
“…성은 쿠루루기?”
“……어떻게 아세요?”
“…….”
“…….”
두 눈빛이 마주친다. 나나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두 남매는 그 남자와 연이 깊다.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면 좋을까…. 를르슈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사이비 종교 권유의 상투적인 문구를 꺼내고야 말았다.
“나나리는 전생을 믿어?”
근데 여동생은 그걸 또 받아들였다.
“네, 오라버니.”
너무 결연하고 단호한 대답에 를르슈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이가 없어지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저는 오라버니를 죽인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없어요.”
“…그거 스자쿠를 말하는 거야?”
“네.”
“스자쿠, 이 자식. 죽을 때까지 제로로 살라고 했는데, 어떻게 아는 거야, 나나리?!”
“가면을 벗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고…. 그리고 오라버니를 죽인 제로를 어떻게 원수로 안 삼고 살아요!”
“스자쿠는 원수가 아니야, 오히려 내가 스자쿠의 원수야. 나나리, 스자쿠는 오히려 우리의 은인이다.”
“아니에요, 스자쿠 씨는 오라버니를 죽인 원수입니다!”
“설마 나나리, 네가 제로를 죽인 건 아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못 뛰어다녀서 죽일 수 없던 게 한이 맺혔어요!”
“나나리!”
“지금이라도 당장 죽이고 싶어요! 오라버니의 원수잖아요!”
벌떡 일어서는 나나리를 끌어안으며 를르슈는 그녀를 토닥거렸다. 예전보다 한참 어려진 여동생은 더 건강하고 활기찼지만, 빛이 밝아진 만큼 그림자도 깊어졌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스자쿠는 자기 삶을 버리고 제로로써 사는 삶을 선택할 만큼 정의를 위했다. 나나리의 등을 두드리며 말해도 나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를 죽인 원수에요, 오라버니를 죽였어요. 훌쩍거리며 울먹이는 나나리는 어린 얼굴에도 증오가 선연했다.
평생 평화를 위해서 살아왔던 브리타니아의 제 100대 황제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걸 이제 알았다. 를르슈는 제 여동생을 끌어안으며 이제 괜찮다고 속삭였다. 오빠의 등을 꽉 붙잡은 여동생의 손에는 여느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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