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암. 로로의 하품은 꽤 길게 이어졌다. 로로의 옆에 앉은 를르슈는 로로의 하품이 끝나자마자 기지개를 쭉 켜는 나나리의 움직임에 미소를 지었다.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으니 세상 늦잠 자는 것을 좋아하는 두 사람에게 잠이 안 올 리가 없었다. 하품 때문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 로로와 잠을 어떻게든 떨쳐보려고 애를 쓰는 나나리 사이에서 를르슈는 두 사람에게 자도 된다고 말했다.
“아직 비행기 이륙도 안 했는데 자는 건 좀 그래요.”
창문 쪽에 딱 달라붙은 나나리가 그렇게 말했다. 로로가 그쪽 창문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언제 뜨는 거야? 글쎄요…. 서로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를르슈를 가운데에 두고서 쌍둥이들이 앉았다. 덕분에 복도 쪽에 앉게 된 로로는 창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를르슈의 옆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꾹 참을 요량인 듯 싶었다.
스자쿠는 바로 옆좌석에 덩그러니 홀로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쌍둥이들이 워낙 치열하게 를르슈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했기 때문에 제가 끼어들 수도 없었다. 그리고 를르슈의 옆자리는 언제든지 앉을 수 있고…. 스자쿠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눈을 감았다. 옆자리의 대화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비행기는 브리타니아 갈 때도 타잖아.”
“그래도 재미있어.”
“맞아요, 설레요.”
계속해서 활주로 위만 달리고 있던 비행기는 언제 뜰지 가늠할 수 없는 타이밍에서 어느 순간 이륙했다. 우와…! 로로와 나나리의 작은 탄성에 를르슈는 언제나 어린애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면서 사진을 찍거나 하더니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둘은 를르슈의 양 어깨에 기대어 쿨쿨 자고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착륙까지는 금방이었다.
“잘, 잤, 다!”
조용해진 쌍둥이들과 덩달아서 같이 자버린 스자쿠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길게 기지개를 켜며 외쳤다. 로로와 나나리도 찌뿌둥해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기에 하품을 했다. 짐을 찾고 나서 카트에 모두 다 싣고 스자쿠가 그것을 끌었다.
“으음… 2번 게이트로 나오랬는데….”
“2번 게이트는 저쪽이야.”
스자쿠의 옆에는 를르슈가, 그리고 그 뒤로는 쌍둥이들이 종종거리며 쫓아왔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한산한 공항의 밖이 보였다.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지만 그조차도 많지 않았다. 그 사이로 서 있는 미니밴은 눈에 띄었다. 스자쿠는 미니밴에 기대고 있는 남자를 금방 알아보았다.
“아저씨! 여기에요!”
스자쿠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남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스자쿠 쪽으로 달려왔다. 남자는 나이가 있어보이지만 햇빛에 그을린 피부가 그의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스자쿠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도, 도련님이라니… 그냥 편하게 스자쿠라고 불러주시면.”
“옛날에 그렇게 작았던 도련님이 이렇게 커버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아, 이쪽이 같이 오셨다는 친구 분이시군요!”
“아, 네. 를르슈 람페르지입니다. 이쪽은 제 동생들이고요.”
안녕하세요! 나나리 람페르지에요. 로로 람페르지입니다. 이어지는 람페르지 삼남매의 활기찬 인사에 남자는 어딘가 감동을 받은 얼굴을 했다.
“저는 사토 히로시입니다. 쿠루루기 가의 별장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토 씨,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께서 오신다는 것도 놀랐는데, 친구 분들도 이렇게 많이 오실 줄은…!”
“하하, 그러니까 도련님이라고 안해도 된다니까요.”
스자쿠의 말을 적당한 곳에 흘려들은 사토는 여전히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짐을 차로 옮겼다. 제가 할게요, 라고 스자쿠가 말했지만 그 의견 또한 묵살되었다. 결국 스자쿠는 사토가 도련님이라고 계속 부르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별장은 여전해요?”
스자쿠는 어색한 ‘도련님’ 호칭에 얼굴이 벌개진 채로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앞좌석엔 스자쿠 혼자, 뒷좌석엔 람페르지 삼남매가 줄지어 앉았다. 아직 낯선 곳에 대한 경계 때문에 로로와 나나리는 를르슈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렴요. 도련님 오신다고 대청소도 한 번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사실 오면 청소부터 해야하나 걱정했거든요.”
“근데 어쩌다가 이런 시골까지 다시 오신 거예요? 옛날에 도련님이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나는데요.”
“무, 무슨 말이요?”
“이따위 촌구석에 다시 돌아오나봐라!—였죠, 촌구석에 살고 있는 저로써는 너무 충격적이라.”
“아니, 그런 걸 왜 기억하고 있어요?!”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커지는 목소리와 동시에 떠오른 기억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어렸다. 를르슈를 만나기 전이고, 이 시골에 있는 별장까지 온 이유도 사실상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이끌려와서 근신 처분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비뚤어진 상태에서 스자쿠는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붙잡혀 들어와서 결국 저런 대사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뭐, 촌구석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니 가끔은 나쁘지 않죠.”
“죄송합니다….”
“아니, 뭐 도련님께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요! 그냥 그랬다— 이 말이죠. 하하, 너무 기가 죽으셨네.”
“으으, 일부러 그러는 거죠?”
“아니라니까요!”
능수능란하게 스자쿠를 가지고 노는 사토의 저력에 를르슈는 내심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사토는 거울 너머로 를르슈와 시선을 맞추더니, 이젠 를르슈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도련님이 잘 선택하신 거예요. 여기는 산도 괜찮고 바다도 좋거든요. 도련님은 잘 쏘다니셨으니까 안내도 잘 해주실 거고.”
“그렇겠죠? 사실 엄청 기대하고 왔어요.”
“아, 근데 도련님. 이번엔 친구 분들이랑 오신다고 하셔서 저는 다른 곳에 있을 예정인데요.”
“응? 왜요? 같이 있어도 되는데.”
“그렇게까지 제가 눈치 없는 건 아니죠! 뭐, 필요한 물건들이랑 음식은 어느 정도 채워넣긴 했지만 떨어지면 차 타고 시내로 나가셔 장 보시면 되고요.”
도련님에게 스스로 장을 보라고 하는 사토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 스자쿠 도련님, 장 보실 줄은 아시죠? 스자쿠는 저를 놀리는 듯한 그 말투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얼굴이 다시 붉어지다 못해 목덜미까지 달아올랐다. 왜인지 아무것도 못하는 도련님 취급을 받는 건 부끄러웠다.
그 어렸던 도련님이 이렇게 장성하셔서— 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토의 이야기는 스자쿠의 흑역사를 줄줄이 읊는 수준이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어린 스자쿠의 행동력 넘치는 반항기 이야기는 같은 나이의 를르슈가 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스자쿠가 천방지축으로 굴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별장 앞까지 도착했다. 너른 마당이 딸린 2층짜리 일본식 저택이었다. 바다 쪽과 가까우면서도 산을 등지고 있는 곳이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잘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좀 많이 낡았지만 안쪽은 깔끔해요.”
“아뇨, 오히려 분위기가 있어서 좋아요.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커서….”
“기대 이상이라면 다행입니다.”
각자 짐을 들고서 마당이 있는 마루로 향했다. 제 짐을 기어이 자신이 들겠다고 말한 나나리를 안절부절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던 를르슈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모였다. 사토가 말했다.
“제가 아침에 한 번 살펴봤는데 크게 문제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만약에 불편하시다면 연락 주세요.”
“아, 진짜로 가는 거예요?”
“하하,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실 건 없어요. 마을 쪽에 있을 거니까요.”
스자쿠는 그 말에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고에 차 한 대 있어요. 도련님, 그리고 를르슈 씨, 면허는 있으시죠?”
“네, 있습니다만….”
“그럼 편하게 쓰세요.”
“차까지 준비한 거예요?”
“구석구석 돌아보시려면 차가 필요할 겁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차고까지 확인시켜 준 사토를 따라간 스자쿠는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는 산이나 바다로 쏘다니던 기억 밖에 없었지만, 그 기억에 의존해서 람페르지 삼남매를 이끌고 다녀야하는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헤매는 것도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뭐, 나쁘진 않겠지.
그 사이에 저택 안으로 들어간 로로와 나나리는 집 구경에 한창이었다. 2층까지 올라가고 나면 반층이 하나 더 나왔다. 다락방이었다. 나나리! 다락방이 있어! 우와, 정말요?! 다락방까지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겨우 창문을 열고서 이야기 중인 스자쿠와 를르슈, 사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좋아요! 다락방이에요!”
“아니, 다락방은 또 어떻게 올라간 거야….”
를르슈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손을 흔들어주면 로로와 나나리는 방긋 웃었다. 다락방 구경도 끝이 났다 싶으면 금세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어른 셋과 마주쳤다. 를르슈가 부엌 쪽의 냉장고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삼일은 버티겠는데.”
“마을 쪽에도 작은 가게는 있지만 아무래도 시내 쪽으로 나가서 장을 보는 게 편할 거예요. 번거로우시면 저한테 연락 주셔서….”
“아니에요, 저희가 할게요. 어차피 차도 있고. 다같이 장도 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스자쿠도 이어서 맞장구를 치자, 사토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원래 하던 일을 여기서도 하는 것 뿐인데, 를르슈는 괜히 쑥스러웠다. 사토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스자쿠 도련님이 스스로 하시겠다고…. 정말, 다 크셨군요…. 듣고 있다보면 를르슈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그만하세요!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벌써 10년이나 지났군요, 감개무량합니다.”
“으아… 정말이지.”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사토는 이내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현관 쪽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는 나가기 전까지도 스자쿠와 를르슈에게 당부와 걱정어린 말을 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다들 다치지 않게, 그래도 재미있게 쉬다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사토 씨.”
아, 참. 열쇠를 드려야지. 사토는 마지막으로 스자쿠에게 열쇠 두 개를 주고 나갔다. 곧 사토의 미니밴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는 긴장이 풀렸는지 터덜터덜 소파 쪽으로 가서 엎어졌다.
“아, 지쳤어—.”
“왜 그래, 도련님? 이제 시작인데.”
“를르슈까지 그러지 마.”
지쳤다는 스자쿠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구경을 시켜주겠다던 쌍둥이를 따라 를르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쪽으로 가면 산이 보이고, 이쪽으로 가면 바다 쪽이 보여! 드물게 로로의 들뜬 목소리에 를르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누가 바다 쪽 방을 쓸 거야?”
“저요! 괜찮죠, 로로?”
“뭐, 상관 없어. 산 쪽도 나쁘지 않으니까.”
“산 쪽은 뭔가 벌레가 나올 것 같아서 싫어요.”
“아냐, 역시 나도 바다 쪽 방 쓸래. 형, 괜찮지?”
“어, 말 바꾸는 거 없어요!”
그치만 나도 벌레는 싫단 말이야. 로로의 투정에 를르슈는 창문에 방충망이 제대로 딸려 있는지까지 확인시켜주고 나서야 두 사람의 방을 정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산이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어느 쪽이든 벌레가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벌레 이야기는 그만하면 안 돼요? 정작 벌레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인 나나리가 싫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튼 방 깨끗하게 쓰고, 창문 잘 닫아놓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럼 이제 짐 풀고 1층으로 내려와, 라고 를르슈가 말하고 나면 로로와 나나리는 각자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 달 가까이 머물 곳이니 정이 빨리 붙으면 좋을 지도.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1층의 거실로 내려왔다. 약간 후텁지근했던 공기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문을 다 닫고서 에어컨 앞에 서있는 스자쿠의 뒷모습은, 집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겠다고 늘 쪼르르 달려가는 로로와 나나리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더웠어?”
“를르슈는 안 더워? 이제 좀 땀이 식으니까 살 것 같아.”
“뭐… 난 괜찮은데.”
“그럼 좀 추우려나? 에어컨 온도 좀 올릴까?”
“아냐, 됐어. 그나저나 우리도 방을 정해야 하는데.”
1층에는 부엌 겸 식당, 거실과 화장실, 그리고 큰방과 작은방이 있었다. 를르슈가 큰방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방은 네가 써.”
“응? 혼자 쓰기에는 너무 크지 않아? 같이 쓰자.”
“아니, 왜 둘이서 같이 써야하는데? 따로 쓰고 싶어.”
그리고 애들도 있으니까, 같이 쓰는 건 좀. 를르슈의 이어지는 말에 스자쿠는 헤에, 하고 웃었다.
“나 야한 짓 안 하는데. 를르슈 너무 기대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알아, 농담이었어. 그래도 이쪽 방은 를르슈가 쓰는 게 좋겠어. 로로랑 나나리도 가끔씩 내려올 거고. 그러면 좁은 것보다 넓은 게 낫지?”
“…알았어.”
연인의 상냥한 배려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작은방은 내가 쓸게. 마주 보는 구조의 건너편 방에 스자쿠도 짐을 옮겼다. 짐 풀고 나서 밥이라도 먹을까? 좀 늦었지만 점심으로. 를르슈의 권유에 스자쿠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머물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들어온 를르슈는 캐리어를 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힐링보다는 서바이벌의 긴장이 타고 흐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녹음이 한창인 곳이다.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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