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아리에스의 사람들, 그리고 가깝게 지냈던 황족과 귀족들이 작은 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그 사람들의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나나리의 하나 뿐인 오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였다. 슬픈 선율의 장송곡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들리는 중에, 를르슈는 눈물 하나 흘리지 않은 채로 작은 묘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묘비가 다 완성되고 나면 를르슈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처음엔 소리 없이, 그리고는 이내 큭큭거리면서 어깨를 떨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 없이 웃기 시작하는 황자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 대신에 동정과 연민에 가득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그런 시선 사이에 제가 내던져진 것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오늘 나나리의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나리도 여러분을 마지막으로 만나 기뻐할 겁니다. 그럼, 즐기실 분은 더 즐기다가 가시고, 저는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연설을 하는 것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말한 를르슈는 하하, 하고 짧게 웃으면서 저택으로 향했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게 걷기 시작하는 뒷모습은 이내 불안하게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바뀌더니, 를르슈는 저택까지 얼마 남기지 않고서 쓰러지고 말았다.
고꾸라진 를르슈는 흙바닥에 얼룩진 자신의 옷에도 아랑곳 않았다. 바닥에 쓸려 핏방울이 맺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고서는, 를르슈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과호흡이 되지 않게 냉정하게 숨을 고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를르슈는 문득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손바닥을 맞잡아 쥐고서, 를르슈는 숨을 고르고, 머리가 텅 비어버릴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런 를르슈를 모두가 쳐다보기만 했다. 모두들 를르슈를 가엾게 여기고 있다. 어려서는 어머니를 테러로 잃고, 나아가서 여동생도 테러로 잃어버린, 홀로 남아버린 아리에스의 황자.
멀리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아, 저렇게 영특하신 분인데 가엾기도 해라. 하지만 전하께 여동생 공주는 솔직히 도움이 되지 않았잖아요. 그래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는데. 마리안느 황비도 테러로 돌아가셨죠? 어쩜 아리에스는 변한 게 없어서. 아직 황자전하도 어리시니까요. 이제 열여덟이라죠? 아아, 아직 기사도 없고…—
“—전하, 를르슈 전하.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목소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익숙한 목소리가 를르슈의 등 뒤로 들려왔다. 저벅저벅, 무거운 군화 소리. 그것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 특유의 발소리였다.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아리에스가 반기는 몇 안되는 손님 중에 하나. 언제라도 아리에스의 기사가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던 그였다. 를르슈의 연인이자, 나나리를 그만큼 아껴주었던 남자.
를르슈의 어깨를 짚고 있던 스자쿠는 대답을 크게 바라지 않았던 모양인지, 하얗게 질린 를르슈의 얼굴에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이내 를르슈의 팔을 들어올려 제 목에 두른 다음, 를르슈를 억지로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겨우 힘을 받고 일어섰다.
“혼자, 걸을 수 있어.”
“네, 전하.”
“꼴사나운 모습 보이게 하지 마. 얼른… 나나리가 보고 있단 말이다.”
“압니다.”
나나리가 보고 있는데, 나나리가 이 모습을 보고 있는데. 를르슈는 그런 말을 하다가 흡, 하고 차오르는 울음을 억눌렀다. 나나리가 보고 있으니 울어서는 안됐다. 그런 를르슈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스자쿠는 그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멍이 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도 울어서는 안 됐다.
왜냐면, 나나리가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를르슈는 그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로, 눈을 부릅뜨며 가까워지는 람페르지 저택으로 향했다. 나나리는 이제 친정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곁에 영원히 쉬게 되었다. 를르슈는 곧 아리에스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이제 당분간 안녕이다, 나나리. 아니, 당분간이 아니라, 영원히.
저택의 앞에서, 만개한 겨울 장미를 보며 를르슈는 의식을 놓아버렸다.
아리에스로 돌아온 를르슈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걱정하며 를르슈의 방 앞을 오갔지만, 를르슈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늘 모든 것은 다 필요없고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자는 것도 하지 않는 삶이었다. 살아있다고 하기보다는, 억지로 숨이 붙어있는 송장과도 같은 모습으로 를르슈는 일주일을 버텼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빛이 들어차는 창문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유리창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동안 바싹 마른 몸은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살겠다고 떨고 있는 몸을 보며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를 잃고도 나는 배운 것이 없었을까. 힘을 손에 넣어서, 강해졌다고 자만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나리마저 잃어버리고 만 걸까. 어쩌면 나나리를 죽인 건 나일지도 모른다.
그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를르슈는 게워낼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씻지 않은 몸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를르슈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모두 없어져버렸고, 사람 꼴을 갖춰도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창문에 기댄 를르슈는 눈을 감고서, 이대로 저도 죽어버리길 바랐다. 그때였다.
“를르슈, 나 왔어.”
브리타니아 밖으로 원정을 나갔다 돌아온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그것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해졌구나.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생각을 줄지어 하면서, 마른 입술을 당겨 웃었다.
“…를르슈,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야?”
“그게 중요한가?”
“를르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씻는 것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지?”
오랜만에 소리내어 하는 말은 목소리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뜻을 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를르슈, 하고 부르는 말조차 없었다. 대신에 를르슈에게 다가왔다. 를르슈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그림자에 뒤덮혔다.
스자쿠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더 아파보이지도 않았고, 더 건강해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스자쿠였다. 그게 속상하기도 하면서, 우습기도 하고, 그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는 잘 지냈나봐, 스자쿠. 나나리가 죽었는데도, 멀쩡하게 임무를 하러 다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나를 보러 오지도 않고, 그래, 황제폐하의 일이 중요하겠지.”
모두가 자기 몫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어쩌면 내가 뻔뻔하게 살아있는 게 아닐까. 를르슈가 눈을 내리깔고 그런 생각에 젖어있을 때, 스자쿠는 장갑을 낀 손으로 를르슈의 어깨를 만졌다. 마른 몸의 훤히 드러난 뼈대가 앙상하게 느껴졌다.
“너 혼자 내버려 둔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혼자서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어.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했으니까.”
“준비라… 무슨 준비?”
“를르슈, 이대로 너마저 잃을 수 없어.”
“…어머니도, 나나리도. 모두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를르슈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소용없어. 다 끝난 일이니까. 나도 이제 죽어버릴 거야. 이대로 죽어도 좋아. 얼른 죽고 싶어. 나나리를…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 싶어. 아, 그래. 스자쿠,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이 지긋지긋한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거야. 어머니도 너를 좋아하실 거야. 응, 나나리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반가워하겠지? 그 아이는 착하니까, 늦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를르슈의 잠겨있던 목소리는 서서히 들뜨기 시작했다.
짜악. 그리고 살갗을 갈기는 소리가 한 차례 이어졌다. 를르슈는 돌아간 자신의 고개와 뒤늦게 찾아온 얼얼한 통증에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를르슈야말로…!”
스자쿠는 자신이 때려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의 동그랗게 부릅 뜬 눈에서는 눈물이 잔뜩 고여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금방 흘러넘쳤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멱살을 붙잡고 그를 창문 근처에서 끌어냈다.
를르슈는 정처없이 끌려가며, 스자쿠에게 벗어나려고 했지만 며칠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몸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를르슈는 욕실에 쳐박혔다. 스자쿠는 막무가내로 그를 욕조에 몰아넣고서 뜨거운 물을 들이부었다. 콸콸 쏟아지는, 김 서린 뜨거운 물은 생각 이상으로 따가웠고, 한편으로는 몸의 긴장을 단숨에 풀어냈다.
“다시 한 번 말해, 를르슈. 죽고 싶다고?”
“하, 그래. 죽고 싶어. 얼른 죽어서 편해지고 싶어. 너는 싫었나보지? 미안하군, 그것도 몰라줘서.”
“너랑 죽어도 좋아. 하지만 이런 식은 싫어.”
“그게 뭔 상관이야, 나는 죽고 싶어!”
욕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를르슈의 뺨을 때렸다. 방금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갔다. 를르슈는 비틀거리면서 물이 고이기 시작한 욕조에서 미끄러졌다. 물에 흠뻑 젖은 를르슈는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울음을 터뜨렸다.
“스자쿠, 나를 죽게 내버려둬, 이대로는 싫어, 혼자서, 나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네가 어떻게 혼자야. 내가 있잖아.”
“너는, 나나리 대신이 될 수 없어… 나는, 나나리가 아니면.”
쏟아지는 물소리, 를르슈의 울음, 스자쿠의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정적 속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스자쿠는 물을 잠그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나나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낼 거야.”
“…….”
“당연히, 너도 그렇게 할 줄 알았어. 그렇게 복수를… 할 거라고.”
“그런다고, 나나리가 돌아오지도 않는데. 너무 소모적이야. 복수마저도 이상적이구나, 넌.”
를르슈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욕조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버린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옥, 또옥,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테러의 범인을 찾으면… 그 가족도, 친구도, 모두 다 죽여버릴 거야.”
“……나나리는 돌아오지 않아, 스자쿠.”
“그러고 나면, 나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물론 너도 돌아올 필요가 없어.”
“…….”
“너와 같이 죽어줄게.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잖아, 를르슈.”
나나리는 착하니까 우리를 기다려줄 거야. 그러니, 를르슈.
스자쿠의 말은 달콤했다. 를르슈는 그가 말하는 복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자신이 겪은 고통의 절반도 되지 않을 고통을 주는 것이겠지. 그 범인의 가족도, 친구도,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그리고 나나리와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버리는… 그런 아름다운 결말.
스자쿠는 를르슈가 쭈뼛거리면서 저에게 뻗어오는 팔을 목에 둘렀다. 안겨오는 를르슈에게 조금만 더, 라고 중얼거렸다. 를르슈는 더 힘껏 스자쿠에게 안겨왔다. 물에 젖은 옷이 서로 스며들어서 축축해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스자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제 앞으로 를르슈의 삶에 유일한 것은 오로지 나 뿐이구나. 그에게 남은 것은 나 밖에 없구나.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는 것은.
그 묘한 감정은 스자쿠를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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