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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잉 리퀘스트 - All about you

DOZI 2022.02.03 19:37 read.211 /

스자쿠가 브리타니아 본국에 도착했을 때, 사건은 이미 끝나있었고, 아리에스 궁의 테러리스트는 죄의 심판을 받은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스자쿠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없었다. 사건이 모두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스자쿠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멈춰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숨을 쉬는 것도, 걷는 것도, 또 보는 것조차 하지 못한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주위가 모두 까맣게 물들고, 바람소리까지 멀게 느껴지는 감각은 스자쿠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정말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을 때, 호흡은 그제서야 터져나왔고, 스자쿠는 눈을 부릅뜨고서 눈앞의 풍경을 살필 수 있었다. 눈 속에서도 겨울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스자쿠에게는 오싹하기 그지 없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뒤따라 오던 스자쿠의 발걸음이 멈춘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긴 비스마르크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스자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심호흡을 했다. 추위로 얼어붙은 하얀 숨결이 말끝마다 흩어졌다.

 

“아닙니다. 범인이 잡혔다니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나이트 오브 세븐은 를르슈 황자전하와 친분이 있었지, 참. 걱정이 되겠군.”

 

하지만 이 나라에는 황자와 황녀는 수도 없이 많고, 서로를 노리는 테러는 빈번하게 많았기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은 입에 발린 소리였다. 그래서 비스마르크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스자쿠는 멈췄던 걸음을 겨우 떼며, 비스마르크의 뒤를 따랐다.

브리타니아 제국의 당연하고 마땅한 승전보를 올리기 위해서, 스자쿠는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까지 숨을 죽이며 걸어갔다. 그는 군화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일정한 속도로 뚜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에라도 집중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자쿠는 지금 당장 아리에스로 달려갈 것 같았다. 

 

* * * 

 

알현을 마치고, 나머지 서류의 제출은 추후로 미루어지고 나서야 스자쿠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정으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던 주인을 맞이하는 사용인들은 그동안의 공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스자쿠를 맞이했다.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스자쿠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받은 이상 저택의 누구도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자쿠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며, 스자쿠는 겨우 자기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스자쿠는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숨을 조르는 듯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옷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제게 주어지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는 자리도 때려치고 싶었다. 맨몸으로,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이 네 번 울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자쿠는 제 손이 텅 비어있는 것을 보고서 허탈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만든 전쟁터의 승리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국의 영광이며, 저에게 돌아오는 명예 같은 것들은 다 의미가 없었다.

 

* * *

 

하지만 그간 전장에서 쌓인 긴장 때문인지, 스자쿠는 그 모습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모처럼의 수면이었지만 개운할 리가 없었다. 재빠르게 씻고 나온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모습으로 다시 저택을 나섰다. 아침은 어떻게 하겠냐는 말에 그는 아리에스로 향한다는 말로 대답했다.

차는 스자쿠를 싣고서 아리에스로 거침없이 향했다.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흩어졌다. 아리에스로 향하는 길은 늘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오늘만큼 가장 가라앉을 때도 없었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가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를르슈와 연락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스자쿠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연인과의 정담을 즐기기도 했다. 그간의 연락을 하는 동안 를르슈는 테러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물론 스자쿠가 걱정을 할까봐 그를 배려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서라도 알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그것을 아직까지도 함구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스자쿠를 위한 배려의 연장선이 틀림없었지만, 스자쿠는 그런 배려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스자쿠에게 의지했으면 좋겠다. 를르슈가 자존심이 강하고 그 심지가 곧은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가 아닐까. 깊게 생각을 하던 스자쿠는 아리에스에 도착했다는 말에 겨우 바깥을 내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아리에스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 비스마르크가 그 테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스자쿠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를르슈가 그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 사실을 알려줄 리가 없었고, 스자쿠는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그저 만나는 것에 대한 기쁨에만 젖어있을 것이다. 바보 같이, 속아넘어갔을 것이다.

아리에스의 주인은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지만, 그녀는 늘상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기 때문에 대체로 를르슈가 나와서 스자쿠를 반겨주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자쿠는 를르슈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입구에서 스자쿠를 반겨주는 것은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마리안느였다.

 

“마리안느 님…?”

“오랜만이네, 나이트 오브 세븐. 아리에스에 들러줘서 고마워. 를르슈가 아니라 내가 나와서 조금 실망했나?”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뭐, 그 아이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내가 나온 거라서. 아마 다음 번부터는 당신이 원하는 를르슈가 나올 거야.”

 

나이트 오브 세븐과 제11황자의 관계는 은근히 공공연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오히려 더 스자쿠를 짓궃게 놀릴 것 같아, 스자쿠는 입을 다문 채로 앞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아리에스의 안은 밖과 다를 바 없이 여전했다. 마리안느는 응접실로 스자쿠를 안내했다. 마리안느가 먼저 앉자, 스자쿠는 뒤따라 그녀가 말한 반대편 자리에 마주 앉았다. 메이드가 따라나와 마리안느와 스자쿠의 앞에 차를 내왔다. 보통 를르슈가 내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라, 낯선 맛—썩 나쁘진 않지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런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어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 말하지 않았나? 내가 없는 사이에 아리에스에서 소소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야할까.”

“테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스자쿠에게 있어서 소소한 사건이 아니었다. 마리안느는 가라앉은 스자쿠의 눈을 보면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다니, 나이트 오브 세븐도 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흔히들 테러라고는 하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소소한 사건일 뿐이라. 를르슈가 조금 다쳤다는 것 말고는 그냥 해프닝에 불과하지. 뭐, 그 부상을 입었어도 직무를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말해서 일하는 건 말리지 않았지만.”

“부상…?”

 

비스마르크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사건이 끝났다, 라고만 말했을 뿐. 를르슈의 부상은 극비리로 다루어진 모양이었다.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로의 위치가 있는 만큼 함께 있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서로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것, 그리고 가까이 있듯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은 스자쿠만의 바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의지할만한 상대가 되지 않는다던가…? 사고는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기 시작했고, 스자쿠의 인상은 점점 어두워졌다. 마리안느는 그것을 보고서 재미있는 것을 본 것처럼 키득거렸다.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여기에 있는 모르니까, 직접 그 아이를 찾아가서 말해보는 건 어때?”

“…어디 계신가요?”

“아마도 자기 방이 아닐까? 요즘은 나나리가 학교에 가고 나면 바로 방에 틀어박혀서 일만 하거든.”

 

를르슈는 나나리에게까지 자신의 부상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스자쿠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자신이 같은 선상에 올려졌다는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의 감정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은 마리안느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럼 나는 여기까지. 를르슈를 대신해서 주인 노릇을 하느라 계속 갇혀지냈더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외출을 할 예정이니까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아리에스의 호위를 부탁할게.”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느를 배웅했다. 너무 괴롭히진 마. 스자쿠는 저에게 그렇게 당부하는 마리안느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을 배웅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스자쿠는 저에게 를르슈의 방을 안내하겠다는 메이드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숱하게 가본 곳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가본 것은 처음이지만.

발은 익숙하게 를르슈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고, 난간을 손으로 짚으면서, 스자쿠는 답지 않게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차피 스자쿠는 를르슈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능력은 없었다. 그렇지만 뻔한 수를 보여주면 를르슈는 또 보기 좋게 피해나갈 것이다. 그런 를르슈에게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알리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를르슈의 방까지는 금방이었다. 예법대로 문을 세 번 두드린다. 안쪽에서는 를르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전하.”

 

자신을 밝히는 순간, 문 너머에서의 당황한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레귤러에 약했다. 스자쿠의 등장은 자신의 예상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에게 달아날 틈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자쿠는 문을 앞에 두고 선전포고를 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아, 안된다! 들어오지 마!”

 

사랑하는 여동생이 언제든지 방에 들어올 수 있도록, 그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바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스자쿠는 굳게 잠긴 문고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문을 잠글 정도의 비밀을 저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의 부상에 대해서 마리안느 님께 이미 들었습니다.”

“젠장, 어머니는 왜….”

“열어주시죠, 전하. 열어주시지 않으면, 부수겠습니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더 이상 참지 않고서 문고리를 아래로 강하게 눌렀다. 빠각, 하며 단단한 잠금쇠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의 악력 하나로 부서지는 문고리에 를르슈는 진짜로 그가 부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를르슈는 소파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자세로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이 빠진 보라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흉할 정도로 어두운 얼굴이었다. 스자쿠의 무시무시한 얼굴에도 를르슈는 허탈한 듯 입을 벌렸다. 

 

“이거 불법 침입이야, 나이트 오브 세븐.”

“상관 없습니다. 전하의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무슨 안전을 걱정해?!”

“위험하셨잖아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스자쿠는 문고리가 박살나서 닫으나 마나하는 문을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를르슈와 단둘이 되었다. 를르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다 못해서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스자쿠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자리에 앉는 것 대신에 스자쿠가 굳은 얼굴로 그를 빤히 노려보는 것에 를르슈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자리에 앉아, 스자쿠. 하루 종일 서있을 생각인가?”

“제가 전하께 고분고분하니까, 전하는 자꾸 저희 관계를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뭐?”

“물론 전하는 황족, 저는 귀족 출신도 아닌 그저 나이트 오브 라운즈지만… 저희는 연인 관계잖아요?”

 

스자쿠는 를르슈가 앉아있는 자리 쪽으로 향했다.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를르슈는 다가오는 스자쿠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그림자에 자신이 서서히 먹혀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자쿠의 어두워지는 녹색 눈동자에 당혹으로 물든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에, 를르슈는 어렴풋한 패색을 느꼈다. 진심으로 달려드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만큼 나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별 것도 아닌 일이었고. 일하는 데에도 지장은 없었다. 너와의 연락도 꾸준히 했잖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에게 숨기려고 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야.”

“전하께서 그렇게 좋아하는 결과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결국 숨기신 거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달변은 스자쿠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범인도 잡았고, 배후세력도 알아냈어.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네가 신경쓰는 건 웃기는 일이잖아.”

“뭐가 웃기는 일이죠? 하마터면 전하를 잃을 뻔 했는데.”

“어차피 너는 그때 돌아오지도 못했어. 내가 말했다고 한들 지금의 상황이 바뀌겠어?”

“그러니까, 전하… 아니, 를르슈. 너는 내가 알았어도 아무것도 못했을 게 뻔하니까 말하지 않았다, 이거야?”

 

이제 경어와 존칭을 집어치운 스자쿠는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스자쿠의 분노하는 모습에 를르슈는 속으로 긴장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를르슈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입술 밖으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회가 어깨를 짓눌렀다.

 

“다쳤다고 하더라도 네가 입는 부상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찰과상에 불과해. 계속 말했다시피 업무에는 지장이 없고.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어.”

“사소하다고?”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이 저의 오른쪽 어깨에 와닿는 것이 몸을 움츠렸다. 스자쿠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를르슈는 어깨를 다쳤다. 말할 때마다, 호흡을 할 때마다 어색하게 굳는 오른쪽 어깨가 특히 그랬다. 아픈 곳을 단숨에 짚는 스자쿠의 손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사소한 부상’이라고 강조한 만큼 아프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걱, 정도… 그 정도면 과보호야.”

 

아픈 신음을 억누르는 말은 마디마디 끊겼다. 를르슈는 늘상 웃는 얼굴로 스자쿠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어깨에 가해지는 힘에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를르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나한테 숨길 필요는 없잖아.”

“너한테 별 것도 아닌 일로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이런 게 사소한 거고, 별 것도 아니라고?! 네가 죽을 뻔 했잖아! 이런 걸로 나를 속이면 마음이 편해?!”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를르슈!”

 

스자쿠의 악다구니에 를르슈는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계속 짓눌렸던 어깨가 겨우 풀려났음에도 그 압박감과 통증은 여전했다. 테러에서 입었던 부상—파편이 스쳤던 어깨는 를르슈의 생각 이상으로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었다. 사흘에 한 번 나나리가 학교를 간 사이에 부르는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통증을 느끼는 것은 를르슈 뿐일 텐데, 정작 눈물을 떨구고 있는 것은 스자쿠였다. 갑자기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를르슈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화난 얼굴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우는 얼굴을 보여주는 스자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너한테 떨어져 있는 시간 만큼 불안한 게 없어, 를르슈.”

“……왜, 그런 걸 불안해하는 거야?”

 

스자쿠는 그걸 왜 모르냐는 눈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왼손을 들어 스자쿠의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서로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둘 다 꼴사나워 보였다. 울고 있는 남자와 허세를 부리는 남자.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스자쿠는 떨어지려는 를르슈의 손을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스자쿠의 말을 이해하는데, 를르슈는 무언가 말문이 막혔다. 나를 좋아하니까,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불안해한다고.

 

“그건… 내 마음을 의심한다는 건가? 내가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럼 왜?”

 

상대는 아내를 108명이나 둔 남자의 아들인데도, 스자쿠는 를르슈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럼 믿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가? 를르슈는 스자쿠가 울면서까지 그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점에서는 안심이 되지만….”

“혼자서 불안하다가 안심하는 네가 더 걱정이 되는데.”

“너에 대해서 그냥 다 알고 싶은 거야. 를르슈도 내가 갑자기 연락이 안되거나 그러면 걱정하는 것처럼. 만약 내가 다친 걸 너한테 숨기면 어떨 것 같아?”

“……뭔가 이유가 있겠지? 너는 일부러 그런 걸 할 사람이 아니니까.”

 

스자쿠의 를르슈에 대한 신용 만큼이나, 를르슈의 스자쿠에 대한 신용도 엄청났다. 스자쿠는 어딘가 허탈해졌다. 평소라면 남의 속을 읽어가면서 판을 보기 좋게 뒤집어 엎는 사람이 왜 자신과의 연애에서는 이렇게 눈앞에 뻔한 수 조차 읽지 못하는 것일까.

 

“일부러 그랬다면?”

“…왜?”

“어차피 나는 다치는 게 일상인 군인이니까. 그런 사소한 일 따위로 를르슈를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런 게 어떻게 일상이야, 그건 궤변이다.”

“그래, 네가 한 말도 궤변이야. 너랑 관련된 일에 사소한 건 없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깨는 괜찮아?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그제서야 아직도 남아있는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스자쿠의 말을 곱씹느라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을 리가 없을 텐데도 또 막간의 허세를 부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빈 옆자리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의 체온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자신 쪽으로 기우는 스자쿠의 몸에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눈을 감은 스자쿠가 말했다.

 

“네가 다쳤다는 말에 제대로 못 잤어. 책임져.”

“뭐? 그건 네가 멋대로 걱정한 거잖아. 보다시피 멀쩡하고.”

“얼마나 멀쩡한지 몸으로 한 번 확인해볼까, 그럼?”

 

아직도 괜찮다고 항변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은근히 날을 세우며 말했다. 그 모습에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에게서 눈을 피하는 를르슈의 모습은 퍽 당황한 것 같아보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에 손을 두르면서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어차피 나나리가 오려면 멀었지? 좋아, 확인해보자.”

“무슨…!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아, 그렇지. 문이 고장났구나. 그럼 다른 방에서 확인할까? 네 집무실은 어때?”

 

스자쿠의 뻔뻔한 말에 를르슈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네멋대로 화를 냈다가 풀었다가 할 뿐이면서 왜 나한테…! 스자쿠는 를르슈의 빨갛게 물든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나한테는 어떤 것도 숨기지 마, 를르슈. 난 를르슈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싶으니까.”

“…그런 말로 나한테 일일이 참견할 셈이야?”

“참견이라니, 사랑하니까 그런 건데”

 

마지막 말은 갑자기 떨어진 폭탄이었다. 를르슈는 맥없이 소파에 무너졌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몸 위로 올라타며, 그 와중에 섬세하게 그의 어깨에는 무리가 없게 움직였다. 를르슈의 반듯하게 맨 스카프를 슬쩍 풀어내린 스자쿠는, 그 앞의 행위에 대해 묘한 기대감으로 부푼 를르슈의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문, 안 잠기는 거 알지?”

“…….”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 겨우 만난 연인에 대한 애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자쿠는 여유롭게 물었지만, 그의 눈에는 여유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쁜 자식, 자기도 참기 어려우면서. 기어이 를르슈에게 그런 허락을 내리게 하는 것은 그의 심술이었다.

대답 대신에 키스로 자신을 꾀어내는 를르슈의 전략에, 스자쿠는 나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게다가 스자쿠가 늘상 하는 듯한 방식으로, 스자쿠를 서서히 녹여가는 그 움직임은 가산점까지 더할 정도였다. 키스를 하면서 비교적 멀쩡한 왼쪽 손으로 스자쿠의 옷자락을 벗기려고 애쓰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구석에 놓인 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나나리가 올 때까지 앞으로 세 시간… 부상을 입은 를르슈에게는 좀 가혹하려나. 나름대로의 계산을 마친 스자쿠는 를르슈의 허리 아래를 더듬었다. 벌써 흥분으로 달아오른 몸은 뜨겁게 닿아왔다. 누구의 체온이 옮겨붙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