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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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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인지, 셜리의 한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연필을 고쳐쥔 스자쿠는 그 소리에 괜히 허리를 곧게 펴면서 눈앞에 있는 만악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스자쿠의 앞에 있는 를르슈는 별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앉아있을 뿐, 셜리가 왜 한숨을 쉬는지, 그리고 왜 스자쿠가 모든 여학생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제 앞에 앉아있는지, 그런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를르슈는 잘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그에게 박력있게 고백하는 여자애들도 있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그를 좋아하는 티를 내는 인물들도 있고, 혹은 셜리처럼 티를 내듯 안 내듯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를르슈는 인기가 많았다. 그런 를르슈를 두고서 하는 경쟁은 늘 치열했다. 학생회의 깜짝 이벤트는 물론이고, 오늘처럼 미술시간의 예기치 못한 사건이 그러했다.

자유롭게 2인 1조로 짝을 지어 서로를 그려줄 것. 그것이 선생님이 내준 이번 수업 시간의 과제였다.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들은 를르슈를 향해 달려갔고, 를르슈는 저에게 밀물처럼 몰려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 루루! 가장 뒤편에 있던 셜리가 용기 내어 를르슈를 불렀지만, 를르슈는 정작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를르슈는 그 모든 것을 남일처럼 바라보고 있던 스자쿠를 불렀다. 스자쿠, 짝 없지? 나랑 같이 해. 으응? 나?! 를르슈의 갑작스러운 지목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있는 힘껏 당황한 티를 내고 말았다. 모든 여자애들이 실망한 눈치와 동시에 쿠루루기 스자쿠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해라. 스자쿠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를르슈랑 하고 싶은 애랑 같이 하는 게 낫지 않아?

뭐야, 나랑 짝 하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를르슈랑 하고 싶어 하는데.

나는 너랑 할래. 미안해, 모두들. 나,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라서 여자애들한테 실례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를르슈의 멋들어진 변명에 여자애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알겠다고 말했다. 이제 됐지? 를르슈는 변명하던 얼굴은 어디가고 뻔뻔하게 스자쿠를 끌고서 미술실 가장 구석으로 향했다. 따끈한 볕이 들이치는 뒤쪽 창문에 등을 내준 채로, 를르슈는 늘 들고 다니는 작은 문고본의 책을 펼치면서 스자쿠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온다. 셜리의 한숨소리를 시작으로, 진 빠진 여자애들의 힘 없는 연필 문대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는 애매하게 깎아온 연필을 휘적거리면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를르슈는 연필과 종이를 들지도 않고 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쉰 스자쿠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안 그려, 를르슈?”

“움직이는 사람을 그리는 건 어려울 텐데. 널 위해 맞춰주고 있는 거다.”

“괜찮아, 나 동체시력은 평균 이상이니까.”

“평균 이상이 아니라 영장류 최강이겠지.”

“뭐든 간에. 아무튼 너도 그려야할 거 아니야? 얼른….”

“피곤해. 잠깐 졸고 있을래.”

“뭐? 어제 잠 안 잤어?”

 

스자쿠는 종이와 를르슈의 얼굴을 오가던 중에 손을 멈추고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잘 보면 를르슈는 피곤하다는 말이 정말인 것처럼 평소보다 창백하고 눈가가 어두웠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무슨 고민 있어?”

“없는데.”

“없는데 왜 잠을 못 자?”

 

스자쿠는 연필로 선을 대강 그었다. 조금 깊게 패인 연필 자국 때문에 종이에서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잘못 그었다. 스자쿠는 지우개로 방금 그은 선을 지웠다. 얼룩덜룩한 흔적이 남았다. 여기가… 어디더라? 코? 눈? 어디지? 동그라미의 한 가운데에 그은 선의 정체를 떠올리다가 스자쿠는 한 템포 늦게 그것이 입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그려.”

“노력은 할게. 아, 그게 아니라.”

“어디 봐.”

“아직 다 안 그렸어. 아, 움직이지 마, 를르슈.”

“동체시력은 자신 있다며? 흠, 너 왼손잡이였던가?”

“아니, 오른손잡이인데.”

“근데 왜 왼손으로 그린 것보다 더 못 그린 거 같지?”

 

를르슈의 비아냥에 스자쿠는 그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빼앗아 들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를르슈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저는 방금 전의 거리로 돌아와 연필을 다잡았다.

 

“그러면 원래부터 잘 그리는 애랑 짝하면 좋았잖아.”

“그게 누군데?”

“모르지.”

“너도 모르는 애인데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모르는 사람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흐음, 를르슈라면 뭔가, 전교생 얼굴은 다 외웠을 것 같은데.”

“외웠지.”

“그럼 누군지 알잖아.”

“너는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사람을 안다고 말해?”

“그건 아니지만… 아니, 잠깐, 잠깐, 책을 볼 거면 계속 보고, 안 볼거면 지금 덮어.”

 

스자쿠의 지시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도 처음처럼 해줘. 스자쿠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흘려들으면서, 를르슈는 다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아, 어렵다. 를르슈 얼굴 의외로 어렵네.”

“의외는 또 뭐야?”

“음… 잘생겼으니까 대충 그려도 잘 그릴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너무 어렵다.”

“칭찬인지 욕인지 하나만 해.”

“누가 들어도 칭찬이잖아.”

“누가 들어도 욕이거든.”

 

를르슈의 쿡쿡거리는 웃음소리에 스자쿠는 괜히 놀림을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부터 계속,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 엉망으로 그려줄 거야, 진짜. 스자쿠의 으름장에도 를르슈는 흐응, 하고 웃으면서 책 페이지를 넘겼다. 독서와 수다를 동시에 떠는 모습이 졸겠다고 말한 것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피곤하다며? 차라리 졸아. 졸고 있는 를르슈를 그리는 게 낫겠어.”

“피곤하긴 하지만… 뭐,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시간이 아깝잖아.”

“그런 감동적인 말로 넘어가려고 해도 난 속지 않아.”

“너무하군.”

“됐어, 이제 말 걸지 마! 집중할 거야!”

 

스자쿠의 입술을 앙다무는 모습에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정말로 입을 닫아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스자쿠는 사각거리는 연필과 함께 를르슈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나갔다. 훤칠하게 생긴 얼굴을 종이로 옮겨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눈이 괜찮다 싶으면 눈썹이 엉망이고, 눈매를 다 다듬고 나면 턱이 말썽이었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눈만 깜빡거릴 뿐, 더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30분 가까이를 종이 위로 지지고 볶던 스자쿠의 스케치북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를르슈는 완성하지 않고서 바로 뒤로 넘겨버리는 스자쿠의 모습에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그리다 말아?”

“너무 이상해서.”

“내 얼굴이?”

“내 그림이.”

“뭐야, 어차피 너 그림 못 그리는 거 알고 있어. 대충 그려.”

“그럼 너무 미안하잖아.”

 

새 종이 위로 동그라미를 다시 하나 얹는다. 스자쿠는 그 위로 한숨을 내쉬면서 를르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를르슈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넌 정말 이상한데서 성실하다니까.”

“친구한테 미안한 짓을 일부러 하는 것보단 낫지.”

 

를르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스자쿠는 연필을 쥔 손을 허공에서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쯤에서 보라색 눈이 반짝거리고, 이쯤에서 시원하게 뻗은 콧날이 빛을 받는다. 오늘은 평소보다 창백하지만 원래대로라면 하얗게 빛나는 뺨이나, 혈색 좋은 입술이 휘어지는 모양 같은 것을 눈여겨 보았다. 눈, 코, 입, 모두 눈에 익숙하다 못해 그 모양들의 이음새나 만듦새 같은 것들의 균형은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렇게 눈에 담고서 하나 하나 다시 박아넣는 작업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를르슈와 닮았던 얼굴을 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를르슈보다 더 연한 보랏빛의 눈을 가진 나나리, 더 풍부한 표정을 짓는 유피라던가. 그렇지만 결국 기준은 를르슈가 된다. 어느 쪽이 보기 좋은지에 대한 미추의 기준 보다 그냥 를르슈를 떠올린다.

 

를르슈는 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스자쿠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책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턱선 끝과 입술 사이의 공백을 눈여겨 보았던 스자쿠는 뒤늦게 그와 시선이 얽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허공 위로 그었을 텐데, 시선을 내려 종이를 살펴보면 종이 위로 마구잡이로 그은 선들이 엉망진창이었다. 아, 이런. 스자쿠가 어쩔 줄 모르고 다시 지우개를 드는 모습에 를르슈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성실한 거랑 실력은 상관이 없구나, 정말.”

“너 일부러 그런 말 하는 거지?”

“당연하지.”

“진짜 대충 그려주는 수가 있어.”

“뭐, 상관 없다니까?”

 

를르슈는 책을 덮고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이번엔 자기 스케치북을 들고서 잘 깎인 연필을 들었다. 스자쿠 쪽을 향해서 연필을 세로로 곧게 들이밀고, 그리고 이번엔 가로로 꺾어서 갖다 댄다. 익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스케치를 시작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괜한 긴장감을 느꼈다.

 

“이 상태로 가만히 있을 테니까, 이 모습으로 그려.”

“응? 를르슈는 나 안 보고 그려?”

“다 외웠으니까.”

“외웠다고?”

“그래. 몇 년 봐온 얼굴인데, 이 정도도 기억 못 하겠어?”

“그럼 보고 그리는 나는 뭐가 돼?”

“어렵다며, 내 얼굴. 쉽게 가야지, 그럼.”

 

를르슈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선을 그었다. 그의 그림자에 가려진 스케치북이 잘 보이진 않지만, 스자쿠의 엉망진창으로 그었던 선들의 조합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인 모양새였다. 를르슈, 얼굴이 잘 안 보여. 그림자 때문에. 역광을 등지고 있는 를르슈의 얼굴은 그림자로 얼룩덜룩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보라색 눈동자는 반짝거리듯 빛이 나고 있어서, 스자쿠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잘 보여?”

“아, 응.”

“그럼 이렇게.”

“…….”

“뭐야, 더 고개 들어줘?”

 

턱을 살짝 들어올린 를르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스자쿠를 놀리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 장난스러운 웃음에 스자쿠는 어딘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연필을 쥐고 있는 손이 땀으로 미끄러웠고, 종이 위로 얹은 손등도 긴장으로 뜨거워지는건지, 식어가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그 웃음이 저를 향하고, 햇빛이 들이치고, 하얀 커텐이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있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스자쿠는 눈에 담았다. 그는 그림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하다못해 카메라로 그것을 담는다고 할지라도 이 순간을 그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아, 스자쿠?

를르슈가 저를 부르는 순간에, 스자쿠는 스케치북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빛과 그림자로 얼룩진 를르슈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햇빛에 익어 따뜻한 뺨과 매끄러운 입술의 피부를 느끼면서 손끝을 부볐다. 를르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스자쿠는 끌리는대로 키스를 했다.

 

여자애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스자쿠는 멈추지 않았고, 를르슈는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