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의 길었던 원정이 모처럼 끝난 날이었고,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나나리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해서, 아리에스에서는 파티를 열었다. 아쉬운 점은 아리에스의 진짜 주인인 마리안느가 브리타니아를 떠나 다른 에리어의 순방을 돌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아리에스를 비우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파티를 여는 호스트—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오랜만에 여는 파티에 업무도 미룬 채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크고 화려하게 여는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신경을 쓰고 싶었다. 를르슈는 파티의 초대장을 보낼 리스트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스자쿠의 지인, 나나리의 친구들,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몇몇 친한 황족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를르슈의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것은 완벽했지만, 이번 파티는 더 특별했다. 여동생 나나리와 이렇게 길게 떨어져 지낸 것도 처음이었고, 그만큼 그녀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고 싶었고, 연인 스자쿠와의 오랜만에 만나는 기쁜 자리를 조금 유난스럽더라도 특별하게 챙기고 싶었다. 그래서 를르슈는 만전에 만전을 다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파티일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하지만 를르슈가 세상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확률에 대한 오차 범위를 계산하고 계산하더라도, 인간은 이레귤러 덩어리이며 언제 무슨 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파티는 별다른 사건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초대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나나리를 에스코트하는 스자쿠가 등장했고, 두 사람의 모습에 뿌듯해진 를르슈는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의 소개를, 그리고 자신의 소개를, 아리에스의 평화를 위한 건배사를 하고, 음악을 즐기고 춤을 추는 일들을 이어갔다.
나나리의 까르르 웃는 소리며 스자쿠의 그간에 회포를 푸는 말들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이 파티를 준비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파티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면서, 를르슈도 적당히 취하고 있을 때였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자신하고 있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나이트 오브 세븐, 오랜만이에요…. 오늘 이 파티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무슨 일이 있어도 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기억하시나요?”
배가 산처럼 부풀어오른 여자는 드레스 차림이 불편한 것일텐데도, 스자쿠와 를르슈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저를 기억하냐고 묻는 여자의 말에 스자쿠는 난처한 듯 미간을 좁혔다. 를르슈는 여자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렸다. 아마도 스자쿠의 지인 중에 한 명이었을 것이다. 스자쿠는 옆에 있는 를르슈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어 인사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오랜만입니다.”
“다행이에요, 저만 나이트 오브 세븐을 생각하는 줄 알고…! 아아, 이제 정말 바랄 게 없지만, 그래도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알리고 싶어서요.”
여자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키스를 받은 손을 그대로 잡아 끌어서 자신의 부푼 배 위에 얹었다. 스자쿠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한두걸음 뒤로 물러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를르슈도 숨을 멈추었다.
“이 아이가… 나이트 오브 세븐의 아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때의 밤에 생긴 것 같아요.”
“…네?”
“부모님께서는 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지만, 그래도 저는 쿠루루기 경 뿐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오직 당신 뿐이에요. 그러니까, 쿠루루기 경…!”
“자, 잠깐.”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순간 음악이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그녀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을 확 빼내면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여자는 곧 크게 오열하며 스자쿠의 앞에서 무너졌다. 그럴 리가 없어, 라고 스자쿠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달싹거리는 입모양을 읽은 를르슈는 순식간에 가라앉는 기분에 허탈해졌다.
굳어버린 스자쿠가 어정쩡하게 무너진 그녀를 부축하려고 할 때, 를르슈는 그를 앞질러서 그녀를 일으켜 부축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께서 힘드신 거 같으니 다른 곳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쿠루루기 경, 그녀를 안쪽 방에서 쉴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해. 그리고 필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들어주고.”
“르, 를르슈…!”
“레이디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어려울 이야기일 것 같으니 나이트 오브 세븐과 단둘이서 이야기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스자쿠의 팔을 붙잡아 여자에게 넘겨주면서,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스자쿠는 당황한 채로,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해야할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아리에스의 하인들이 뒤따라나와 를르슈의 지시대로 가야할 곳을 안내해주는 걸 따라갔다. 옆에서 느껴지는 여자의 체온은 무거운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스자쿠는 저에게 매달리는 여자의 팔을 꾹 붙들면서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스자쿠가 그렇게 퇴장하고 나서, 를르슈는 다시 한 번 음악을 조율하고 사람들 사이의 웃음소리가 피어날 수 있게 말 몇마디를 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의 나나리를 달랬다. 스자쿠 씨는 괜찮을까요?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과거 스자쿠에게 여자가 많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면서부터, 귀족 간의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니면 하룻밤의 미혹이라는 이유에서, 그는 수많은 여자들의 치마폭에서 놀고 다니는 망나니였다. 를르슈와 사귀게 되면서, 스자쿠는 그런 이유는 모두 를르슈 때문이었다고 말했지만, 를르슈로서는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덮치게 될까봐 다른 사람을 안는다, 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혼자서 정리하는 씁쓸함도 사랑의 일부분이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면 스자쿠는 애매한 표정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를르슈의 사랑은 너무 깨끗해서,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그건 꼭 를르슈를 애송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섹스는 기분이 좋거든, 하고 를르슈를 안으면서 스자쿠는 그를 자기 입맛대로 길들였다. 그리고 경험 많은 사람 답게 끝내주는 테크닉으로 를르슈에게 ‘섹스는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를르슈는 완벽하게 그에게 안기는 것으로 쾌락을 느꼈고, 스자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섹스를 함으로써 성실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를르슈에게는, 스자쿠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스자쿠는 여태껏 여자와 섹스를 해왔고, 여자가 더 좋았을 것이 분명했으며, 남자인 를르슈와의 섹스가 불만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때의 스자쿠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 여자와의 섹스를 허락할 것인지, 아니면 불만스럽더라도 자신과의 섹스를 강요해야할지, 를르슈는 상식 밖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를르슈는 자신이 스자쿠의 과거 여자들과 경쟁해야한다는 것의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런 것을 꼭 짚어내기라도 한 듯이, 오늘의 사건이 터진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를르슈는 자신의 방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마른 세수를 하고서 숨을 고르고 있으면 오늘의 일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정리되지 않는 사건—스자쿠는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파티가 끝난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를르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여자를 데리고서 자기 저택으로 돌아갔을지도. 를르슈와 사귀고 있더라도, 그건 비밀리에 사귀고 있는 것이고, 또 자기 핏줄을 임신한 여자를 보고 있으면 남자로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체온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게 식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홀짝거리고 있으면, 문 밖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문 밖의 상대가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스자쿠였다. 를르슈가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스자쿠는 대뜸 문을 열었다.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라 밖은 어두웠지만, 전깃불로 환한 를르슈의 방 안에 스자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망토를 벗은 하얀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옷차림이었다. 어딘가 피곤한 기색인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들어가서 쉬지 그랬어? 피곤할 텐데.”
“너랑 이야기를 별로 못 했잖아.”
문턱을 넘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미안한 표정과 동시에 연인의 얼굴을 보였다. 나이트 오브 세븐과 아리에스의 황자라는 관계가 아닌, 스자쿠와 를르슈의 관계에서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를르슈는 입술을 억지로 당기며 웃었다.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할 이야기도 없잖아.”
“할 이야기야 있지. 방금 전에 파티에서 있었던….”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를르슈는 스자쿠와 예전에 잤던 여자를 파티에 초대한 자신이 싫었고, 그 여자를 옹호하듯 스자쿠와 함께 보내버렸던 자신이 싫었고, 지금 스자쿠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자신도 싫었다. 자기혐오의 연쇄에 를르슈는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호박빛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그 사람의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하, 어떻게 장담해? 그 짧은 시간에 검사라도 하고 왔어?”
“검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나는 할 때는 무조건 피임했으니까.”
“그게 완벽할 수는 없잖아. 무슨 자신감이야?”
를르슈는 자신이 스자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이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입밖으로 튀어나가는 말들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말하는 를르슈도, 듣고 있는 스자쿠도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잠시 대답하는 것을 망설이다가, 를르슈와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설령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하더라도, 난 인정하지 않아.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테니까.”
를르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크리스탈 잔이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카페트가 술에 젖는 것은 둘째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위험한 자리까지 나온 사람에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비정함은 꼭 저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를르슈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더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스자쿠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들어서, 그 안도감이 역겨웠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벌어져있는 거리를 좁히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를르슈는 저를 다독이려고 손을 뻗는 스자쿠의 팔을 내치면서 외쳤다.
“만지지 마!”
“를르슈, 화를 내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리가 없잖아, 누가 그따위 이야기를 들어줘?!”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질 듯 하면서도 멀어졌다. 를르슈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아이가 있어도 자신을 위해서 포기하겠다. 를르슈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의 비정함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황족으로 태어나서 황제의 아들로 취급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주어지는 특권이 황제인 아버지의 인정이 있어서였다. 만약 그가 말 한 마디로 간단하게 를르슈의 존재를 부정했다면, 그 이후의 처사는 나락에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할수록 끔찍하다.
그런 끔찍한 짓을 스자쿠는 거리낌없이 저지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신을 사랑하니까. 그런 이기적인 이유로? 그 아이는 무슨 죄야? 를르슈는 저를 힘으로써 멈추려고 하는 스자쿠에게서 있는 힘껏 반항했다. 엇갈린 손이 스자쿠의 뺨을 한 번 세게 스쳤다. 손톱에 긁힌 스자쿠의 뺨에는 붉은 상처가 남았다.
스자쿠의 신음과 함께 를르슈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이제 됐어, 를르슈?”
“…이제 됐냐니, 뭐가 된건데?”
“할 만큼 날뛰었냐고 물은 거야, 난.”
“아니라고 하면?”
“풀릴 때까지 해.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
“아, 그러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스자쿠의 얼굴을 향해 내뻗었다. 체중을 있는 힘껏 실어서 갈긴 펀치는 나름 유효했다. 스자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한쪽 뺨을 내주었다. 를르슈는 다른쪽 주먹으로 스자쿠의 가슴팍을 내쳤다. 옷자락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컥, 하고 스자쿠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 스자쿠는 시선을 맞추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해봐, 라는 눈빛이었다.
그게 싫었다. 손이 아플 때까지 그를 마음껏 두들겨 패고 난 다음, 를르슈는 스자쿠의 멱살을 쥔 채로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풀릴 때까지? 이런 일이 생겼는데 뭐가 어떻게 풀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너는, 스자쿠, 너는, 사람을…! 사람을 그렇게…!”
“를르슈.”
“됐어, 필요 없어. 너 따위, 너 따위 모르는 채 사는 게 나았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들으면 몰라? 이제 됐어. 너랑은 더는 못 해. 나를 핑계로 책임에서 도망치는 너는…!”
“그럼 나보고 너를 포기하란 이야기야…?”
를르슈는 그 말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스자쿠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면서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그래, 라는 말이 입밖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스자쿠가 를르슈의 팔을 잡았다. 당연히 떨쳐냈다. 그러자 어깨를 붙잡았다.
“떨어져, 나한테 손 대지마.”
스자쿠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나면서, 방금 전 를르슈가 스자쿠의 멱살을 쥐었던 것과 역방향으로, 스자쿠는 를르슈의 멱살을 붙잡고서 그를 자기 앞으로 붙들어맸다.
“너는 그 정도였어, 를르슈?”
“나한테 따지려고 하는 거야?”
“대답해. 이따위 일로 나를 포기하는 거냐고.”
“포기하고 말 게 뭐가 있어, 난 지금 너를 만난 거 자체를 후회하고 있어.”
스자쿠는 를르슈를 소파 앞까지 끌고가서 그를 그 위로 내던졌다. 엉망으로 무너진 자세로 등을 세게 부딪힌 를르슈는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스자쿠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를르슈는 자기 턱을 붙들고 저를 바라보게 하는 스자쿠와 시선을 마주했다.
“다시 말해봐, 뭘 후회한다고?”
“너를 만난 자체를 후회한다고!”
스자쿠의 손이 허공을 가르면서 를르슈의 뺨을 세게 때렸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이었음에도 뺨은 순식간에 얼얼해졌다. 입 안쪽 살이 터진 모양인지 피맛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를르슈는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바로했다.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를르슈.”
“너 따위 모르는 게 좋았어.”
또 다시 스자쿠의 손이 움직였다. 를르슈는 억눌린 신음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세게 내리치는 따귀에 고개를 다시 쳐들었다. 분명 맞은 것은 를르슈인데 스자쿠는 자신이 아픈 것처럼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를르슈는 이번에도 그가 할 말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봐.”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는 없어.”
“왜? 왜 그런 말을 해?”
“왜겠어, 너 따위 이제…….”
를르슈의 마지막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떨어지는 물방울이 스자쿠의 눈물이라는 걸, 그의 절규 끝에 알게 되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퉁퉁 부은 뺨을 문지르면서 울음으로 헐떡거리는 숨을 삼켰다. 뺨을 타고 내려간 손은 가느다란 목을 향하고 있었다. 스자쿠의 손가락이 제 목울대를 더듬고, 그리고 가볍게 쥐는 것을 느끼면서 를르슈는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느꼈다.
“다시 말해봐, 를르슈….”
“…너 따위.”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안 그러면, 나, 너를 죽여버릴 지도 몰라….”
“알, 게 뭐야, 너 따위.”
“를르슈!”
스자쿠의 큰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제 목을 조르는 손아귀 힘에 숨을 멈추었다. 스자쿠의 말은 진짜였다.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는 순간적으로 스자쿠의 손등을 할퀴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방어이자 반항을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깊은 순간이었다. 를르슈는 갑자기 들이치는 산소와 급격하게 도는 혈류의 감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를르슈의 숨을 토하듯 뱉는 소리에 스자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를르슈의 숨가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를 사랑해, 를르슈…. 아이 같은 건 너와의 아이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난 남자야, 아이를 낳아줄 수 없어.”
“응, 그래서 아이는 바라지도 않아. 나는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를르슈는 제 얼굴 위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스자쿠의 모습에 눈을 감았다. 저를 피하듯 눈을 감아버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중얼거렸다.
“만약 그 여자의 아이가 너와 나 사이를 방해하면, 그 아이를 없애버리는 게 낫겠어….”
“…미쳤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물 범벅을 하면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네가 좋아, 를르슈.”
“…….”
“아이 따위 없는 게 나아.”
스자쿠의 말은 단호했다. 를르슈는 그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핏기가 돌아온 입술을 손끝으로 쓸어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눈물로 젖은 를르슈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스자쿠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너랑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미치는 것도 좋아.”
를르슈는 자신에게 제멋대로의 키스를 하는 스자쿠에게 맥없이 입술을 내주면서 그가 하는 말을 곱씹었다. 그래. 어쩌면 를르슈도 스자쿠와 같이 그런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의 기쁨 따위 잔인하게 짓밟고도 웃으며 키스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것도, 스자쿠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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