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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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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르슈에게 그녀는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꿈을 꾸듯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 자신에게 부딪혀오는 반대에도 지지 않고 의견을 말하는 당찬 모습,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 소중한 사람에게 정면으로 고백할 줄 아는 용기까지… 그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꿈이자 목표는 어딘가 황당하면서도, 그럼에도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응원하게 되었다. 를르슈도 그런 의미에서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를르슈에게 그녀가 첫사랑으로 끝난 이유는…

 

“안 돼, 유피! 안 돼! 같이 애쉬포드 학교에 가기로 했잖아!!!”

 

텔레비전으로 뛰어들어갈… 화면을 찢고 들어갈 기세로 울부짖는 스자쿠의 모습을 보면서, 15살의 를르슈는 첫사랑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으엑… 저런 거를 ‘오타쿠’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좀 실례되는 말… 아닌가요, 로로?”

“하지만 우리 반에도 저런 녀석 있잖아. 기분 나빠.”

 

정확히 말하면 남동생 로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은연 중에 깨달아버리고 만 ‘기분 나쁨’까지.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고여버린 눈물을 남들 모르게 닦아냈다. 를르슈가 몰래 울어버린 것과 다르게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스자쿠는 정말… 말 그대로…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음에도 훌륭한…

 

“제로 자식…!!! 유피를 살려내!!!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

 

오타쿠였다. 부정할 수 없는 오타쿠의 그것이었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에 불과한 인물들에 울고 웃으면서, 그 캐릭터들 중 한 명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패기 마저도 진심인 오타쿠였다. 그리고 실제로 스자쿠가 방송국 게시판에 애니메이션 감독 이름과 함께 ‘죽여버리겠다’라는 협박문을 남기는 것을 보고, 를르슈는 스자쿠가 중2병을 심하게 앓다 못해 현실과 구별하지 못하는 오타쿠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심각한 오타쿠가 옆에 있으니 를르슈의 첫사랑은 끝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피,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거야….

 

를르슈는 스자쿠가 극도로 혐오하는 ‘제로’라는 캐릭터가 남긴 명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줄지어 서있는 오만가지의 유페미아 피규어를 보고서 그 말을 되뇌었다. 바니걸, 수영복, 차이나 드레스, 원작대로의 드레스 피규어, (조금 매니악하다고 생각하지만) 피에 젖은 드레스 차림, 그 외의 아직도 미개봉 박스 상태로 보관되어있는 피규어 산더미. 

를르슈는 그 사이에서 퍼지게 자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옆에는 사랑스러운 유페미아가 조금 야한 자세로 흐트러진 모습이 프린팅된 인형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 현 일본 총리의 하나 뿐인 외아들이자, 외아들이기 때문에 더 없는 사고뭉치인 이 남자.

스자쿠의 자고 있는 모습은 문장 그대로 ‘미남이 자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지만, 그 주변에 놓인 유페미아 굿즈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식어버릴 지도 모른다. 를르슈는 그 ‘모두’에 자신이 들어가지 않음을 통탄했다. 

 

아…

왜 나는 남들과 같지 않은가?

이 빌어먹을 오타쿠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가?

원 앤 온리 유페미아를 외치는 이 오타쿠랑 왜 사귀고 있지?! 

 

를르슈 람페르지, 특이사항에 대한 간단한 정리.

-중학교 2학년, 유페미아라는 캐릭터를 첫사랑으로, 유페미아의 죽음 이후로 첫사랑이 끝나다.

-중학교 3학년, 유페미아 팬클럽에 가입한 스자쿠를 좋아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스자쿠를 여전히 좋아한다.

-고등학교 2학년, 스자쿠를 여전히 좋아한다.

-고등학교 3학년, 스스로 스자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브리타니아에 있는 국립대학으로 진학하고자 했지만… 

 

‘를르슈, 브리타니아로 돌아간다는 게 진짜야?!’

‘아, 말하려고 했는데.’

‘거짓말…! 를르슈, 다시 생각해 봐. 브리타니아로 돌아가면…!’

‘(너를 다시 볼 수 없게 되겠지, 스자쿠. 그래도 난…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게 옳은 것 같아. 왜냐면 이건 친구로써도 배신이고, 그렇다고 너에게 나의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를르슈)’

‘유피를 만나기가 어려워진다고!’

‘?!’

‘아니면 유피가 브리타니아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런 거면 나도 같이…!’

‘그럴 리가 없잖아!!!’

 

고등학교 3학년, 진학 문제로 가족들과 부딪히고 있었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망언에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때까지 스자쿠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스자쿠의 미남력에 빠져드는 잔챙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를르슈는 ‘유페미아 팬클럽 정모’에도 참여하기도 했고, ‘유페미아 팬클럽’에 No.125라는 애매한 숫자도 따내기도 했고 (스자쿠는 No.7이다) 아무튼 스자쿠에게 있어서 외롭지 않게 함께 해주는 오타쿠 메이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야!’

 

스자쿠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뭐야, 그게. 나를 왜 좋아해? 연애적 의미? 아니면, 동지애?’

‘당연히 연애적 의미지!’

‘그렇지만 나, 유피 오타쿠잖아.’

‘싫어도 알고 있어!’

‘를르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유피를 좋아하는 감정과 유피를 좋아하는 나를 보고서 느끼는 동지애나 그런 걸로….’

‘착각 안 해. 네가 좋아. 너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사람은 원래 심장이 뛰는데….’

‘닥쳐.'

 

를르슈는 그 즉시 스자쿠에게 키스라고 부르기 민망한 입술 박치기를 시전했으며, 입술이 퉁퉁 부어오른 스자쿠를 붙잡고서 말했다.

 

‘이런 의미로 네가 좋아.’

‘…나, 나는, 유피 오타쿠야.’

‘알고 있다.’

‘유피 말고는 아직… 아직… 아직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브리타니아로 떠나려는 거야.’

‘나 때문에?’

‘너한테 이런 내 마음은 부담되는 거잖아? 너의 오타쿠 활동에도 지장이 있을 거고.’

‘그렇지만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로 가버리면.’

‘괜찮아, 유페미아 걱정을 하는거라면, 유페미아는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유피 오타쿠인 스자쿠에게 맞춰준 자신의 일생일대 고백이었다. 를르슈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스자쿠를 놓아주었다. 유피는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너는 아니라서… 나는 외로워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나는?’

 

스자쿠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물었다. 그가 우는 것은 유페미아가 죽는 장면을 볼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를르슈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 또한 소꿉친구의 빈 자리가 아쉬워서 우는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네가 좋다, 스자쿠. 근데 넌 이런 거 싫어하잖아.’

‘…내가 싫다고 하면,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떠나는 거야?’

‘…….’

‘를르슈랑 같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를르슈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러면 될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그거야말로 네 착각이야. 동지애랑 연애 감정을 헷갈려하는 거잖아.’

‘연애 감정일 수도 있잖아! 를르슈랑 함께가 아니었으면 유피 팬클럽 같은 거 몰랐을 거야. 그리고 정모에 나갈 생각도 안 했을 거고. 나, 를르슈가 함께 있어서 할 수 있었어! 이제 알았어, 유피를 계속 좋아할 수 있었던 것도 를르슈가 있었기 때문이야. 유피를 좋아하는 만큼, 를르슈와 함께 있고 싶어. 이것도 ‘좋아하는 감정’ 아니야? 를르슈를 좋아하게 될게. 좋아할게! 유피를 사랑하는 만큼, 를르슈를 사랑하면 되는 거 아니야?’

 

오타쿠로서는 매력 만점 고백이었을지는 몰라도, 아마도 오타쿠 코스프레였던 를르슈에게는 세컨드라도 좋지 않냐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열아홉의 를르슈에게는 그것은 너무나도 달콤한 말이었고… 스자쿠 치고는 최고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학교 1학년, (동성애적 의미의) 남자친구가 된 스자쿠와 같은 대학에 진학 겸 동거를 시작하다.

 

그리고 본가의 압박에서 벗어난 스자쿠는 오만가지 유페미아 굿즈와 피규어를 사모으는데 이제까지 번 아르바이트 비용과 저금을 깨고 훌륭한 ‘행정특구♥︎유피’를 만들었다. 남자친구가 기뻐한다는 이유로 를르슈 역시 그 ‘행정특구♥︎유피’를 만드는데 일조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간간히 찾아오는 현실자각타임을 이겨낼 순 없는 것이다.

 

유피 굿즈 더미 속에 잠자는 기사마냥 자고 있는 스자쿠의 뺨을 쭈욱 늘리면서, 를르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새벽 늦게까지 오타쿠 토크를 하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었다. 아마 유페미아 팬클럽 회원들과의 랜선 정모가 있던 날인 것으로 기억한다. 를르슈 역시 팬클럽 회원이었기 때문에 정모 초대 메일을 받아서 알고 있었다.

스자쿠가 유피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애매모호한 점을 파고 들어서 연애를 시작한 것이 최악인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를르슈는 저와의 데이트를 까먹고 잠이나 자고 있는 스자쿠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나봐’라는 말을 듣고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잘 자라… 이불이나 제대로 덮고.”

 

스자쿠의 반쯤 내친 이불을 덮어주고서, 를르슈는 ‘행정특구♥︎유피’의 문을 닫고 나왔다. 모처럼의 데이트라고 잔뜩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앙?! 그게 말이 되냐?! 그 새끼 고자 아니야?!”

“아무래도… 그러려나.”

“아무래도가 아니지, 그냥 그거야, 그건!”

 

생맥주 500cc 잔을 쾅쾅 내리치는 카렌의 모습에 를르슈는 기가 죽었다.

코우즈키 카렌, 를르슈와 스자쿠의 고등학교 친구인 그녀는 예전부터 를르슈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호인이었다. 그녀는 대체로 확고한 대답을 내놓고, 를르슈는 그녀의 대답에서 착안하여 자신 만의 행동 루트를 개척하고는 있으나, 카렌 왈 “그럴 거면 왜 나한테 물어봐!”라고 하기 때문에 늘 그녀에게 상담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에게 의존하는 날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녀만큼 스자쿠와 를르슈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한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그녀는 스자쿠의 ‘유피 오타쿠’적인 면에 대해서 기분 나쁘다고 말하지 않은 몇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자쿠의 착한 본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진실된 반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를르슈는 그녀에게 스자쿠와 관련된 상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녀가 여자라는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를르슈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야, 같이 산지 벌써 반 년이라고?! 보통 남녀였다면 진작에 선을 넘고도 남았어!”

“그… 그치만 우리는 서로 남…”

“너도 너야, 걔가 언제까지 따먹어주길 기다리는 것도 남자의 수치 아니냐?! 너는 남자 아니야?!”

“흐, 흐아악! 카렌, 카렌, 잠깐만, 진정하고.”

 

바지를 벗겨들려고 하는 카렌의 모습에 를르슈는 기겁하고 말았다. 동시에 카렌은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허리와 늘씬한 허벅지를 갖춘 를르슈의 몸매에 기겁하고 말았다.

 

“를르슈,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녀?!”

“당연히 먹지. 잠시만, 거긴 만지면…흐아, 아…!”

“허리가, 허리가 완전… 아니, 허벅지에 근육이, 없는데, 이게, 이게 남자의 몸…?!”

“아앗, 그, 그만, 만져…!”

 

말도 안 돼, 라고 말하려는 카렌의 손이 를르슈의 아랫배를 만지려는 순간이었다. 카렌의 손을 턱, 하고 붙잡고서 싱긋 웃는 스자쿠가 나타났다.

 

“아무리 친해도 남의 애인 몸을 이렇게 만지는 건 경우가 아닌 거 같은데, 카렌.”

“…아, 드디어 납셨군, 나이트 오브 세븐.”

 

스자쿠의 팬클럽 닉네임을 천연덕스럽게 부른 카렌은 일말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으며 ‘오랜만이네’라고 말하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모두의 인기남이었던 학교 킹카 를르슈를 사로잡은 주제에, 정작 를르슈랑 사귀고 있으면서 키스 한 번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이 남자, 제정신인가 싶으면서도 ‘애인’이라는 위치를 남발하면서 카렌을 저지하는 걸 보면 를르슈를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한데….

 

“무슨 일로 둘이 함께 있어? 그나저나, 를르슈. 오늘 나랑 데이트 하기로 하지 않았어?”

“너, 너야말로… 일어나지도 않았으면서.”

“깨우면 일어났을 텐데….”

“됐어, 새벽 내내 팬클럽 사람들이랑 바빴잖아.”

 

뾰로퉁하게 대답하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 싫어졌어?”

 

카렌은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질이 나쁘다, 쿠루루기 스자쿠. 분명 를르슈가 자기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서 이렇게 구는 것이 틀림 없었다. 저질 저질 저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저질일 줄이야… 를르슈는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오타쿠랑 사귀는 거람?! 

 

“싫어질… 리가 없잖아.”

“헤헤, 나도 를르슈 좋아해.”

“…….”

 

입만 산 쓰레기. 카렌은 남아있던 생맥주를 비우면서 캬, 소리를 냈다. 이제 됐다. 한쪽 호모는 상담을 빙자하면서 정작 고민해서 한 대답에는 관심도 없고, 또 다른쪽 호모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혼이 빠져서 진짜 애인에는 관심도 없고. 이런 상태를 반 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이 호모 커플에게 마음 쓰고 있는 자신이 바보다!

 

“아아, 서로 좋아 죽으니까 난 이제 가도 되지? 내 건 내가 계산할게.”

“아니,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를르슈가 왜 카렌 걸 계산해? 무슨 빚이라도 졌어?”

“이런 소리 들을 바에야 그냥 내가 계산한다, 진짜! 어휴! 잘 해보셔들!”

 

그렇게 카렌은 호모들을 두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두 호모가 선을 넘든, 혹은 선을 더 긋든, 그건 이제 카렌의 알 바가 아니었다.

 

 

 

카렌이 가고 나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약속했던 데이트… 같은 것을 했다.

서로 좋아하는 안주를 시키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나리와 로로가 어제 오믈렛을 해먹었대. 나중에 집에 오면 해준다니까, 언제 집에 갈래? 정말? 그럼 다음주 주말에는 를르슈네 집에 갈까! 그럴까. 어제 팬클럽 사람들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아아, 다들 를르슈가 참석하지 않아서 엄청 아쉬워했어! 이제 유피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게 아니냐고 걱정하고. 그래서 내가 를르슈는 나를 좋아하는 만큼 유피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고 하니까 다들 안심하더라! 그런 대답으로 괜찮은 거야…?

맥주를 한 잔, 두 잔 비우면서, 나중엔 소주도 시켜먹으면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취해갔다. 를르슈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한 술집. 남자 둘. 사귀는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화. 텐션이 높아진 스자쿠가 늘어놓는 말들은 전부 유페미아에 대한 것들 뿐.

 

“스자쿠, 이제 집에 갈까…?”

 

어딘가 가라앉은 를르슈의 목소리에도, 스자쿠는 눈치채지 못한 그 활기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고 싶겠지, 유피가 있는 곳으로. 를르슈는 어딘가 뒤틀리는 속 같은 것을 못본 척 하면서, 계산을 마치고 술집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술에 취한 스자쿠가 를르슈의 옆을 말없이 걸었다. 약간 붉어진 뺨이나, 살짝 풀린 눈을 한 채로, 스자쿠는 를르슈와 눈이 마주치면 또 생긋 웃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와의 말 없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거나, 눈이 마주쳐도 웃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런 분위기를 사랑한 것이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 대해서 계속 떠올리면서, 를르슈는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있잖아, 스자쿠.”

“응?”

“우리 헤어질까.”

 

를르슈는 집앞에 다다라서 그렇게 말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내뱉는 이별의 말은 어딘가 가볍게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무려 햇수로는 5년을 사랑한 것이다. 그런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현실감이 없는 게 당연한 걸까.

 

“왜?”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귀여운 놈, 하지만 하는 짓은 전혀 귀엽지 않은 놈. 를르슈는 웅얼거리듯, 속을 숨기듯이 말했다.

 

“너는… 유피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응.”

“나는 그걸 잘 모르겠어.”

“…….”

“유피랑은 같은 침대를 쓸 수 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 나랑은…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게 고작이잖아.”

“…….”

“남한테 나를 애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냥 억지로 그러는 거라는 생각 밖에 안 들어.”

“…….”

“너랑 헤어질래. 그만두고 싶어, 이런 거.”

 

키스 이상의 관계도 나가지 않는 애인 관계. 카렌이 말하는 것처럼, 남녀라면 훨씬 전에 선을 넘고도 말았을 시간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애인이면서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관계는 비참하다. 를르슈는 이 동거 관계를 지속해온 반 년간 계속 무시해왔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비참함. 그래서 계속 상처받았다.

 

“친구로 돌아가자, 스자쿠. 어색하지 않을 거야. 지금보다 덜 부담될 거고.”

“싫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를르슈가 놓으려는 손을 손목부터 다잡으면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지만, 그래도 누군가 볼 지도 모른다. 성별을 떠나서 우선 남에게 연애사정을 보이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라고 생각한 를르슈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스자쿠는 아랑곳 않고 를르슈의 등을 끌어안았다.

 

“를르슈랑 멀어지는 건 싫어. 더 가까워지는 건 몰라도.”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니까.”

“억지로가 아니야! 를르슈를 좋아해!”

“그래도… 유피만큼은 아니잖아!”

 

를르슈는 눈물이 났다. 이런 걸 입밖으로 내게 하다니, 정말 최악의 남자다. 쿠루루기 스자쿠. 

 

“유피가 나보다 더 좋잖아, 솔직해져, 스자쿠.”

“유피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써 좋아하는 거고….”

“그래, 그런 거에도 질투한다고, 나는!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도 모르겠어!”

“그럼 어떻게 하면 알아줄 거야?”

“그런 증명 따위로…!”

“를르슈가 믿어준다면,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아마 연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진지한 국면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를르슈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나랑 섹스, 할 수 있어?”

 

스자쿠는 기다렸다는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는 제가 오히려 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저를 쳐다보지 않고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그의 손을 이끌고 두 사람의 집으로 향했다.

를르슈의 울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가 ‘행정특구♥︎유피’의 문을 열었다. 쌓여있는 굿즈와 피규어 수 만큼의 유피의 눈이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유피가 프린팅 된 인형 베개를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면서 를르슈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앉아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울음으로 살짝 부어있는 를르슈의 눈가를 쓰다듬으면서, 스자쿠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없을 정도로 마이 웨이파인 스자쿠의 한숨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스자쿠의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섹스 할 수 있어? 그 말에 스자쿠는 보란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를르슈를 자기 방으로 데려왔다. 비록 피규어와 아크릴 스탠드 굿즈가 가득한 방이지만, 소중하게 여겼던 유피 베개를 바닥에 내려두고 를르슈를 그 위에 앉혔다.

 

진짜로 선을 넘는 것이다.

연인으로써의 한 발짝을 나아가는 것이다.

 

를르슈가 눈을 감고서 키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스자쿠의 입술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서히 닿는 두 사람의 입술, 간격은 제로—라고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안 되겠어. 유피가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역시 를르슈 방에서 하는 게 더 좋을지도.”

 

스자쿠의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아아—! 정말!! 카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앙?! 그게 말이 되냐?!” 그게 말이 되냐?! 그게 말이 되냐?! 그게 말이 되냐?! 그게 말이 되냐?! 

이 완벽하게 잡힌 섹스 텐션, 어둑한 분위기, 단 둘이 있는 침대, 젊은 혈기의 두 청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피가 보고 있어서 안 된다고?!

 

“너, 고자 아니야?!”

 

그렇게 를르슈는 스자쿠의 아랫도리를 박차고 ‘행정특구♥︎유피’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