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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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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를르슈를 자주 보는 것 같아.”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니, 나쁘지 않아. 네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이득이니까.”

“그럼 됐습니다.”

 

를르슈는 슈나이젤의 말에 짧막하게 대꾸하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회의록을 읽는척 했다. 를르슈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였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 사이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군화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낮게 울릴 때마다 를르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며칠 전 유페미아와 함께 아리에스를 찾아온 코넬리아가 전하길, 슈나이젤이 주축이 되는 이번 군부 회의에 스자쿠가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를르슈는 냉큼 그 회의에 가겠다고 말해버렸다. 황위계승서열이 13위인 애매한 위치에서는 나이트 오브 세븐을 만날 일은 드물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짝사랑 상대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기 위해서 나름 물불 가리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발소리가 문 가까이로 다가왔을 때, 를르슈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무표정을 가장한 채로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렸을 때는 코넬리아가 먼저 들어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스자쿠가 들어왔다. 처음 코넬리아가 들어왔을 때에는 조금 실망했지만, 스자쿠가 바로 얼굴을 비추자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느라 입가를 가렸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코넬리아와 스자쿠의 이야기가 끝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들이 정해져있고, 슈나이젤의 재미없고 지루한 진행이 이어질 것이지만 를르슈는 이 시간을 기다려왔다.

를르슈는 느릿한 손짓으로 회의록을 넘기면서 스자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딱딱하게 굳은 미간으로 회의록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를르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를르슈는 시선을 재빨리 돌려야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제11황자의 모습에 빙그레 웃어주었다. 웃어주니 기분은 좋았지만 왜 웃어주었는지는 몰라서, 를르슈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선을 겨우 회의록으로 고정시켰다.

 

“그래서 를르슈는 어떻게 생각하지?”

“네?”

“를르슈, 슈나이젤 오라버니께서 지금 한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만.”

“……뭐, 좋다고 생각하죠.”

 

사실 회의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도 몰라서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이었다. 를르슈의 무성의한 대답에 슈나이젤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네, 를르슈.”

“…….”

“명예 브리타니아인 부대에 대한 처우가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너답지 않은데.”

 

젠장. 하필이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를르슈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면서 한숨을 삼켰다.

 

“나이트 오브 세븐과의 첫 출정에서 명예 브리타니아인 부대의 혁신을 이뤄낸 를르슈가 이대로 만족하는 것도 난 아니라고 생각하다만. 뭐, 다른 의견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 순간 스자쿠와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스자쿠의 시선에 를르슈는 또 다시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실수하는 꼴만 보여줬다가는 이 회의에 부득불 참석한 이유가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예 브리타니아인… 부대… 처우… 스자쿠와 처음 같이 나갔던 출정… 를르슈의 머리는 거의 형편 없이 굴러갔다. 굳어가는 혀를 겨우 굴려서 를르슈는 비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요즘 무리하는 거 아닌가, 를르슈? 오늘 회의도 일부러 무리하는 거라면….”

“아, 아닙니다.”

 

코넬리아의 다정한 걱정에도 를르슈는 그저 짜증이 치밀었다. 스자쿠의 앞에서 이런 망신이나 당하고. 를르슈는 회의록에 코를 박을 것마냥 매섭게 종잇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슈나이젤 형님도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어. 를르슈는 자신에게 웃어준 스자쿠에게 홀려버린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애꿏은 슈나이젤의 탓을 했다.

 

자신의 사랑을 자각한 날, 를르슈는 절망과 희망을 번갈아 오가며 몇번이고 담금질 당하면서 단단해졌다. 절망은 너무 쉽게 를르슈를 집어삼켰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으로 지금의 출세를 져버릴 리가 없었다. 를르슈는 황족이었지만 나이트 오브 세븐보다 가진 기회가 적었다. 즉, 어떤 면에서도 를르슈는 그에게서 선택 받지 못한다는 것이 확연했다.

하지만 희망은 이상한 곳에서 솟아났다. 그래도 아직 시도도 해보기도 전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 인생 아닌가? 있는 힘껏 부딪혀서 깨지더라도 를르슈는 그 깨진 조각마저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스자쿠와의 접점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와 만날 수만 있다면 시간낭비 뿐일 파티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의도 모두 다 참석할 생각이었다. 목숨을 걸고 만나도 좋으니 전장에 나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다정한 면모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황자전하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말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를르슈는 제일 늦게 남아있기로 했다. 같이 나가서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떠냐는 슈나이젤과 코넬리아의 제안에 를르슈는 ‘반성회를 갖겠다’며 거절했다. 오늘 대답하는 것이 영 시원찮았던 를르슈를 떠올렸는지 두 사람은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간 스자쿠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시선에 고개를 들 자신이 없어서 를르슈는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았다.

언제든 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스자쿠를 본다는 그 생각에 들떠서 멍청한 실수나 저지른 것이다. 를르슈는 오늘 회의에서 놓친 부분을 다시 복기하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바보가 따로 없군.”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있던 를르슈는 여기서 더 우울해져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으로 구겨진 회의록을 갈무리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오면, 한참 전에 떠나야 했을 스자쿠가 서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스자쿠?”

“를르슈 전하, 좀처럼 나오시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난 반성회를 갖겠다고 했잖아.”

“반성하실 게 뭐가 있었나요?”

 

스자쿠의 목소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기분이었다. 그런 실수를 보였는데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는 건, 를르슈에 대해서 기대가 없는 건지, 아니면 를르슈가 실수를 잘 무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꼴을 보고서도….”

“무슨 말씀이시죠?”

“아니야, 됐어.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아, 저는.”

“응.”

“전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스자쿠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말을 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를르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랑 이야기를 더 한다고? 를르슈가 되묻는 말에 스자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현실감이 떨어지는 말이라서 를르슈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다시 되물었다.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해?”

“그, 그러게요.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라던가. 전하가 요새 어떻게 지내신다거나, 아, 아니면 제 업무 이야기라도 할까요? 아, 이런 건 재미 없으시겠죠.”

“…응?”

“를르슈 전하는 이런 자리가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워서… 아, 아닙니다. 그냥 제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죄송합니다.”

 

스자쿠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는 다시 한 번 이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니까, 스자쿠는… 나랑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기다린 거야.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멍청하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냐고 물어본 것이 바보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주도해서 그와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최우선이었는데도, 젠장!

를르슈는 뒤늦게, 그리고 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면서 스자쿠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니니까… 음, 좋아. 이야기, 하고 싶어. 좋아, 이야기 하자고?”

“……정말로요?”

“응. 난 요새 아리에스에서 그냥저냥 업무를 보곤 하지. 아, 그래, 너는?”

“저도… 그냥 카멜롯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밀린 서류작업을 하다가 원정에 나가거나… 해요.”

“그래.”

“지지난주에는 파티를 나갔는데… 음, 전하가 안 계셔서 조금 외로웠어요.”

 

뭐?! 를르슈는 갑자기 떨어진 폭탄 발언에 스자쿠를 쳐다볼 뻔했다. 분명 지금 쳐다봤다가는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이 붉어진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 분명해서 시선을 바닥에 내리 꽂았다.

 

“아, 그렇지만 유페미아 전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나나리 전하께서 열이 나셔서 간병하느라 바쁘셨다고.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아아, 나나리는 이맘 때면 감기를 심하게 앓곤 해.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그때마다 어리광을 부려서 달래주느라….”

“전하 같은 오빠가 있다면 누구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거예요. 나나리 전하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뭐,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지.”

“좋은 뜻으로 한 이야기예요.”

 

를르슈는 나나리가 열이 난다는 이야기에 파티에 가는 걸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나나리가 열이 나면 늘 곁에 붙어서 간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을 텐데, 스자쿠를 사랑하고 나서부터는 그것조차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도 오빠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그녀의 간병을 선택하긴 했지만, 스자쿠를 모처럼 만날 수 있는 파티를 놓친 것은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그걸 생각하니 입맛이 써진 를르슈는 속으로 혀를 차며 스자쿠와 함께 걷는 보폭을 천천히 좁혀갔다. 보다 더 느리게 걸어서 그와 더 오래 있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를르슈의 편이 아니었다. 스자쿠의 단말기가 울렸다. 나이트 오브 세븐을 부르는 소리였다. 내용을 확인한 스자쿠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를르슈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전하,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이트 오브 세븐은 바쁠 테니.”

“…이번 임무만 끝나면 여유로워집니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출입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밋밋한 군부의 마크가 새겨진 카드를 받으면서 를르슈는 뭐냐고 물어보았다.

 

“카멜롯의 출입 키key입니다. 전하의 아리에스만큼 멋진 곳은 아니지만… 요즘 전장에 관심이 생기신 전하께서 재미있으실 거 같아서요.”

“……카멜롯?”

“제가 최선을 다해 에스코트할게요. 오시기 30분 전에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아, 물론 언제든지 오셔도 편하게 둘러보실 수 있게 모두에게 말은 해놨어요.”

 

왜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장에 관심이 생긴게 아니라 너에게 관심이 생긴거라고 고쳐 말해줄 용기도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를르슈는 출입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고맙다고 겨우 말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를르슈 전하, 조심히 들어가세요.”

 

반대 복도로 사라지는 스자쿠를 보면서,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돌아서는 스자쿠의 웃음은 상큼했고, 발걸음은 가벼워보였다.

그는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보여주는 것일까. 나랑 같은 마음… 일 리는 없을 테고. 를르슈는 혼자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걸었다. 일희일비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반성회를 가져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기쁨을 누려도 되는 걸까.

주머니 속의 카멜롯 출입 키를 만지작거리면서 를르슈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