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아리에스였다. 피투성이가 된 하얀 셔츠, 그리고 침대 위에서 그 옷을 입고서 침대에서 자고 있던 자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에는 정신은 너무 또렷했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돌아가는 머리는 그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스자쿠 얼굴을 보지…?!’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었다. 보통 이런 것들은 다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않나? 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방어기제는 왜 작동하지 않았나? 마른 세수를 연거푸 하던 를르슈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최우선은 앞으로 나이트 오브 세븐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죽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죽는다면 사랑하는 나나리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기각이다. 다음 방법은 브리타니아 본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아예 만날 일이 없도록 해외 도피 유학이라도 떠나는 건 어떨까? 하지만 를르슈는 이제 와서 배울 것도 없었으며 그렇게 도망친다고 한들, 스자쿠는 파견과 원정이 주 임무인 나이트 오브 라운즈였으니 해외로 도피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시뮬레이션의 끝은 그저 아리에스에 쳐박혀 숨만 붙은 채로 살아있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스자쿠가 를르슈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 이상, 스자쿠와 마주칠 일도 없는 유일한 곳이 바로 아리에스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도달하자, 를르슈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자쿠를 좋아하게 된 이후부터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서러움에 북받쳐 목놓아 울어버릴까 하던 때에 문이 벌컥 열리며 C.C.가 들어왔다.
“하하, 를르슈. 잘도 살아있구나.”
“…당장 문 닫고 나가.”
“너 쿠루루기 스자쿠 알몸 보고서 코피 흘리고 빈혈 와서 쓰러졌다며?”
“죽여버린다, 진짜!”
“내가 너였으면 눈 뜨자마자 자살했을지도.”
를르슈는 C.C.의 얼굴에 베개를 집어 던졌지만 그녀는 잽싸게 피하며 를르슈의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아, 꺼지라고. 를르슈가 다시 한 번 으르렁거렸음에도 C.C.는 떠는 것 하나 없이 키득거릴 뿐이었다.
“네가 좋아죽는 그 남자도 생각보다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더라.”
“무슨 소리야?”
살면서 쿠루루기 스자쿠만한 성격 좋은 남자를 본 적이 없는데. 를르슈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다가도 이제 앞으로 영원히 가슴에 묻고 살아야할 스자쿠라는 이름에 숨이 턱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C.C.는 를르슈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를르슈는 그녀가 다정하게 굴 때면 를르슈를 놀려먹기 위한 빌드업 단계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아주 애저녁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쿠루루기 스자쿠가 지금 문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거든?”
“…응?”
“네가 무사한 걸 확인할 때까지 안 돌아가겠다던데?”
“…뭐?”
왜 진작에 알려주지 않고서…!!
를르슈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며 엉망이 된 옷자락 같은 것들이 스자쿠를 만날 때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드레스룸까지도 거리가 있었고, 아니 당장 문밖에 스자쿠가 있는데 나는…!
“방금 전에 네가 소리지른 것도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를르슈의 움직임에 침대 구석으로 밀려난 C.C.가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죽여버린다, 진짜!—라고 외쳤던 자신을 떠올리며, 를르슈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제 더 무너질 것도 없을 바닥이 처참한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다 그만두고 진짜 죽을까. 아리에스의 2층 를르슈 방에서 뛰어내려봤자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를르슈는 창문 근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불행사고에 빠진 를르슈를 꺼내준 것은 문밖에서 세 번의 노크를 하며 허락을 구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였다.
“—를르슈 전하, 괜찮으신가요?”
이제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나 제대로 보고 죽자. 를르슈는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잘 차려입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차림의 스자쿠가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를르슈를 쳐다보다가, 이내 방 안을 둘러보고서는 얼굴이 굳어졌다. 코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자신의 추태가 떠올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를르슈는 스자쿠의 모습에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괜찮으니까 크게 신경 쓸 거 없어.”
“……전하.”
“그, 문을 연 건 솔직히… 그, 뭐랄까, 실수라고 해야 할까. 미안하게 됐어, 스자쿠. 일부러 그런 건….”
일부러가 맞아서, 솔직히 욕망에 이끌려서, 실수도 아니었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던 자신은 어디로 가고 이제 와서 횡설수설하는 건. 를르슈는 스스로의 모습에 비참함을 느끼면서 말을 하다가 말았다. 어째서인지 스자쿠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자쿠?”
“저 분은… 예전에 제게 전화를 주셨을 때 받으셨던.”
“아, 어머니 친구다.”
“…….”
스자쿠의 시선 끝에는 를르슈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C.C.가 있었다.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답변이 달갑지 않은 듯 했다.
“안녕, 쿠루루기 스자쿠. 나는 를르슈를 놀리는 낙으로 사는 를르슈의 엄마 친구, C.C.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자기소개에 를르슈 혼자 떨떠름한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를르슈의 상태를 힐끔 쳐다보던 스자쿠는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만… 바빠보이시니 이제 가보겠습니다.”
뭐가 바빠보인다는 거지?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자쿠를 붙잡으려다가, 자신의 셔츠 소매 끝자락에 묻은 코피 자국이 보이자 그 손을 거두었다.
나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냥 이대로 스자쿠 인생에서 사라져주는 게 정답인데, 뭘 뻔뻔스럽게 붙잡으려고 하고 있는 거지.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문밖을 나서는 스자쿠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스자쿠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를르슈는 그가 아리에스를 떠나는 걸 창문으로 볼 뿐이었다. 알몸을 멋대로 보겠다고 달려든데다가,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황족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졌을 것이다.
이게 스자쿠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를르슈는 우울해졌다.
* * *
를르슈는 그 이후로 한 발자국도 아리에스 밖을 나가지 않았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가는 곳마다 다 따라다녔던 일들은 기억도 안 나는 것처럼. 를르슈는 두문불출의 생활을 이어가면서 나나리와의 소박한 일상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자쿠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마음을 접고서 ‘원래대로’의 를르슈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C.C.는 아리에스 밖으로 나가지 않는 를르슈를 보면서 ‘둔한 놈’이라고 욕을 해댔지만 를르슈는 짜증을 낼 힘조차 나지 않았다.
쿠루루기 스자쿠를 보지 않은 채 3주째, 를르슈의 삶에서는 활력을 갖는 시간은 나나리를 만나는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런 를르슈의 앞에 한 장의 초대장이 내밀어졌다. 고급스러운 리본으로 한 번 묶여있는 초대장을 내민 슈나이젤은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홍차를 마셨다. 이전에 를르슈가 반성회를 가졌던 회의 이후로, 를르슈가 군부 어느 곳에서도 얼굴을 내밀지 않자 슈나이젤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클로비스가 부탁하더구나. 널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고 나에게 전해달라고 했어.”
“설마 클로비스 형님의 파티 초대장인가요? 그 이전에 말씀하셨던 미술관 개관 파티?”
“그래.”
“싫습니다. 저는 바빠요.”
“뭐가 바쁘지? 이제까지는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바쁘게 굴었다면 이해하겠지만, 요즘 를르슈 너는 아리에스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슈나이젤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를르슈는 슈나이젤의 호의로 마음대로 군부를 드나들었다가, 이젠 슈나이젤의 편의 덕분에 군부 일도 그만둘 수 있었던 참이었다. 한마디로 슈나이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 속에서 를르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요새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진 모르지만, 팬드래곤을 떠나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보여.”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언제나 냉정합니다.”
슈나이젤은 를르슈의 말에 하하, 웃으면서 그가 다시 돌려준 파티 초대장을 를르슈 앞으로 밀어두었다.
“제국 재상의 명령이다, 를르슈. 파티에 참석하도록 해.”
“……파티는 질색입니다. 저한테 좋은 소리하는 사람도 없고요.”
“그렇다면 내 대리인으로 참석해. 제국 재상의 대리로 참석하는 사람에게 밉보일 사람은 없을 테니.”
“왜 그렇게까지 저를 그 파티에 보내려고 하시는 거죠?”
“를르슈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형님께서 안쓰러워하실 일도 없는데요.”
“이렇게 날세워서 말하는 시점에서 를르슈, 너는 진 거란다.”
가지고 있는 패가 다 떨어졌을 때에는 순순히 승패에 응하는 것도 매너 중에 하나야. 슈나이젤의 가르치는 말에 를르슈는 제 앞에 놓여진 초대장만 노려보고 있었다. 화려한 금박의 무늬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기 싫었다.
“나나리도 걱정하고 있어. 네가 시들어가고 있다면서.”
“나나리가요?”
나나리에게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를르슈는 초대장의 리본을 풀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날짜는 사흘 뒤, 장소는 팬드래곤으로부터 3시간거리에 있는 새로운 미술관. 를르슈는 슈나이젤에게 알겠다고 말했다. 초대에 응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슈나이젤은 흡족스럽게 웃었다.
“왜 웃으시죠?”
“를르슈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게 기특해서.”
“형님 명령 때문에 다녀오는데 제 선택이 뭐가 기특합니까?”
를르슈는 그때 그 슈나이젤의 웃음을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다고, 사흘 뒤에 후회했다. 그때 그저 나나리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말에 마음을 쓴 것만 생각한 것에서부터 슈나이젤의 마수에 빠져든 것이다. 비겁한 형님, 어떻게 나나리를…!
를르슈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파티 당일, 를르슈를 아리에스 앞까지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였기 때문이었다.
“왜 스자쿠가 여기에…?”
“를르슈 전하께서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대리인으로 참석하신다는 말을 듣고서 호위 임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굳은 듯이 서있다가, 이내 뻣뻣한 걸음걸이로 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아준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자리에 앉았다.
숨이 막히는 긴장이 타고 있는 자동차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도로 밖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스자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를르슈 또한 반대방향의 창문만 바라보며 시선이 닿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역시 그때 코피 흘리고 기절한 다음에 깔끔하게 자살했어야 했다고, 짝사랑이 끝나지 않은 가슴은 후회를 말하고 있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얼굴 한 번 본 것으로 다시 들뜨게 되다니. 사랑이란 무섭다고, 를르슈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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