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tto
그는 애매한 때에 전학을 왔다. 때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 아이들이 무리를 나누고, 적당한 일상을 보내는 틈을 비집고서, 그는 그런 것들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앞에 섰다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눅이 들어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유로워보였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학기 초부터 줄곧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잘 부탁해, 람페르지.”
나에게 인사하는 말투는 부드러웠으며, 눈이 마주치면 미소까지 지었다. 실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그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이 숨죽이며 나와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이 전학생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다.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탐색전이 벌써 물밑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고 유치한 일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런 시선으로 쿠루루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가, 그는 이 교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위를 차지했다. 에스컬레이터식 학원의 고등부 2학년에 편입한 전학생이라는, 겉돌기 딱 좋은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하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뛰어난 운동신경, 서글서글한 성격, 준수한 외모, 나쁘지 않은 머리까지. 캐릭터로 치자면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완벽한 동급생’ 정도 일 것이다. 그런 쿠루루기는 교실 내 뿐만이 아니라 학교 내에서 내로라하는 인기인이 되었다. 본인 또한 아쉬울 것 없는 최고의 학교 생활을 만끽하고 있겠지.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 * *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다. 여름은 아직 초입인데도 날씨는 푹푹 찌는 듯 했다. 시험공부 때문에 들고 온 교과서로 가방은 묵직했고, 돌아가는 길목에는 나무그림자 하나 없이 내리쬐는 햇빛뿐이었다.
본관 건물 앞에는 교문까지 향하는 길이 왼쪽에, 그리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 오른쪽에 있었다. 시험기간에는 도서부도 쉬기 때문에 도서관은 열지 않았겠지만… 도서관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나에게는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왼쪽 길에는 나무그늘이 우거져 있고, 또 무엇보다 본관에서 교문까지 향하는 길보다는 거리가 짧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해가 지고 나서 시원해지면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서 도서관 앞에 섰다. 가방을 대충 내려두고, 사서 선생님이 열쇠를 숨겨두는 곳인 소화전 뒤를 열었다. 그렇게 찾은 열쇠로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불은 켜지 않고 문만 잠그고 있으려고 할 때였다.
“이래도 되는 거야, 람페르지?”
내 뒤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깜짝 놀라서 바로 뒤를 돌아보면, 그는 뭔가 불만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 교내 인기인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바로 규칙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불편해하는 점이 무엇인지 대충 파악한 나는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사서 선생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어서 들어온 거야.”
“나 본관에서부터 봤는데. 너 계속 혼자 있었잖아.”
“그 이전에 부탁받은 일이야.”
“무슨 일인데?”
“쿠루루기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봐.”
그러자 쿠루루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이제 그만 돌아가 줬으면 했지만, 쿠루루기는 아예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와서 내 옆에 섰다. 뭐야, 이건 또.
“그럼 내가 도와줄게. 그럼 빨리 돌아갈 수 있겠지?”
“뭐?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왜?”
그냥 밖은 덥고 나는 시원한 곳을 찾아왔을 뿐이니까…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내 미간이 구겨졌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에 가방을 적당히 근처 책상에 올려두고, 눈에 보이는 아무 서가에 들어갔다. 책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도서관은 서늘하고 시원했지만, 뒤를 따라다니는 쿠루루기 때문에 그걸 즐길 새가 없었다.
“뭐하는 거야?”
“…생각 중이야.”
“무슨 생각?”
쿠루루기는 나를 방해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에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뒤를 돌아 반대쪽 서가로 향했다. 또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람페르지.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아?”
“…….”
“할 일 말고 다른 거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걸 알고 있으면 그냥 갈 길이나 가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부러 쿠루루기를 스쳐지나가며 다른 쪽 서가로 향했다. 쿠루루기는 뒤처지는 것 없이 내 뒤를 바로 따라왔다. 그 좋은 운동신경이 쓸데없는 곳에서도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정처없이 앞서 걷는 나와 그 뒤를 따라 걷는 쿠루루기의 발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마지막 서가에 도달하자 쿠루루기는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람페르지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야.”
“그럼 뭐해?”
더위를 피하러 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을까. 땀은 식었지만 계속해서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다. 람페르지, 하고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더는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돌아보는 내 시선과 그의 시선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 쿠루루기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왜 웃어?”
“그냥… 람페르지도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어서.”
그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내 모습에 쿠루루기는 더 즐거워하며 내 옆에 붙었다.
“너랑 계속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싶었거든. 근데 람페르지는 바빠 보인다고 해야하나.”
“바쁜 건 그쪽이잖아.”
“나? 아냐, 나 그렇게 안 바빠.”
그럴 리가. 시험기간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운동부 용병으로 매일 같이 방과후마다 끌려다녔을 것이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쿠루루기는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쿠루루기는 꽤 끈질기군.”
“람페르지야말로 이쯤 되면 알려줘도 되잖아.”
“……더워서.”
한참 뜸을 들이고 말하고 나면,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더워서. 더워서? 더워서. 더워…서? 내가 계속 대꾸해주자, 쿠루루기는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하고 말을 꺼내는 쿠루루기에게서 두세 걸음 앞질러가며,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가리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람페르지가 누구 만나러 여기 온 줄 알았어. 여자친구라든가.”
“여자친구?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없어.”
“그래? 람페르지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은 많은 거 같던데. 지난주에도 고백 받았잖아. 편지로.”
“…어떻게 알았어?”
“나, 람페르지의 옆자리니까.”
편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교과서로 덮어버렸는데, 쿠루루기는 언제 그걸 봤다는 것인가.
“동체시력이 꽤 좋은 편이거든.”
그런 것보다, 언제 나를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도서관에 왜 있냐고 집요하게 물어본 것에 대한 복수해볼까,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쿠루루기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대화를 끌고 갔다. 람페르지, 하고 나를 부르더니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를르슈라고 불러도 될까?”
“왜?”
“싫어?”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친하지도 않잖아, 우리.”
내가 내뱉어 놓고도 차갑게 느껴졌다.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되지. 어려울 일도 아니고.”
“…굳이 그래야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사귀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를르슈는 이런 데에서 소심하구나.”
쿠루루기 스자쿠는 바보 멍청이다. 그 바보 멍청이의 도발에 넘어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욱하는 마음에 그를 노려보았다.
“소심하고 말고를 떠나서, 인간관계에 신중해지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 알았어.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건 맞지?”
“그건 안 돼.”
“왜?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딱히 이유를 고르자면 그것 밖에 없었다. 약간의 텀을 두고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선을 그어두고 시작하면 그 천하의 쿠루루기라도 어색함에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설 것이다. 그러나 쿠루루기는 정답을 찾은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럼 를르슈가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질 때까지 노력할게!”
뭘 노력한다고?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쿠루루기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아, 아님 벌써 내 노력이 통했어?”
“아니.”
“를르슈도 나 이름으로 불러도 돼.”
“아니, 안 불러.”
“왜?”
쿠루루기는 도서관을 나가는 내 등 뒤를 따라다니며 ‘왜?’를 남발했다. 대답하지 않고서 묵묵히 걷고만 있으면 그 또한 조용해지는 듯 싶었다. 이윽고 본관을 다시 지나서 교문 쪽으로 지나가야 하는 길이 나왔다. 그 사이에 햇빛은 기울고, 건물 그림자 덕분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지 않아도 되었다. 교문까지 중반 쯤 왔을 때, 쿠루루기가 말했다.
“를르슈, 내일도 도서관에 갈 거야?”
“아니. 내일은 바로 돌아갈 거야.”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싫어.”
“알았어.”
교문 앞에 다다르자, 쿠루루기는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내일 봐, 바이바이. 어릴 때나 했던 그런 인삿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 너도 잘 가. 내가 대답하면 쿠루루기는 고개를 크게 끄떡이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잘—가! 를르슈! 내일 봐!”
* * *
이름으로 불러도 되냐고 물어보고 어린애처럼 들떠서 내일 보자고 한 놈 치고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변한 게 없었다. 아침에 마주치면 고작 ‘안녕’ 하고, 어제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이쪽에서 먼저 그것들을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서, 나 또한 ‘안녕’ 하고 인사를 되갚아주었을 뿐이었다. 쿠루루기는 한 번도 나를 쳐다보거나, 혹은 이름으로 부르려고 한다거나, 말을 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럼 괜히 초조해지는 건 나였다. 누구에게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 보면 오늘의 시험은 엉망으로 끝이 났다.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 괜히 울컥 화를 쏟아내고 싶어지는 기분은 햇빛이 쨍쨍한 하늘을 보면서 더 우울해졌다. 머리라도 식히고 들어가자. 지금 이대로 돌아갔다가 나나리에게 괜히 걱정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어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건 다 쿠루루기 때문이야. 그 녀석이 어제 쓸데 없이 오지만 않았더라도.
머릿속은 하루 종일 쿠루루기 생각 뿐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아니, 멈춘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쿠루루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통난 표정을 짓고서, 여기에 온 내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를르슈는 거짓말쟁이. 안 온다고 했으면서.”
“…너야말로.”
“응?”
“너야말로 이상한 말이나 한 주제에….”
뭔가 말을 꺼내놓고 보니 내 자신이 꼴사나워서 입을 다물었다. 를르슈? 말을 하다 만 나에게 쿠루루기는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내가 이상한 말을 했어? 무슨 말? 나 오늘 너한테 말 안 걸었는데.”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게, 어딘가 이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걸 또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는 것도 싫어서,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쿠루루기를 노려보았다. 멀뚱멀뚱 서있는 쿠루루기는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말한다면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 거나 다를 바 없어서, 나는 그를 두고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
“집.”
“같이 가.”
“싫어.”
“갑자기 왜 그래, 를르슈?”
“갑자기는 너잖아!”
마음대로 사람 쫓아다니기나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억누르면서, 나는 쿠루루기를 두고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으응?! 등 뒤에서 쿠루루기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본관까지 있는 힘껏, 체력 테스트를 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쿠루루기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한테 잡히면 앞으로도 계속 휘둘리고 엉망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고… 본관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여태까지 이런 전력질주는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때,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달려오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너 진짜 달리기 느리구나.”
“흐어, 조용, 히, 허억, 해!”
“으응…. 무리해서 대답하지 않아도 돼.”
거칠게 몰아쉬던 호흡이 서서히 제 박자를 찾아갈 때, 하늘에서 툭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비 온다. 쿠루루기는 태평하게 빗방울을 손으로 받으면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물기만 희미하게 느껴지는 빗방울은 순식간에 굵어졌다. 문이 잠긴 본관의 좁은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우리 둘은 불편하게 딱 달라붙어 있어야만 했다.
“비가 많이 오네….”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쿠루루기는 내 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를르슈는 우산이 있겠지?”
“…어떻게 알고 있어?”
실제로 가방 안에는 3단 접이식 우산이 들어있었다. 내 가방 속 사정을 알고 있는 쿠루루기를 의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면 그는 상당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에 리발이랑 말하는 걸 들었어. 언제 비가 와도 젖지 않게 우산을 챙기고 다닌다고. 비 맞고 들어가면 여동생이 걱정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까지.”
“별 걸 다 기억하는군.”
확실히 교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쿠루루기가 그걸 듣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내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는 걸까? 어제도 내가 편지를 받았다는 걸 봤다는 건, 나를 자주 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 괜히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뭔가,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나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되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을 감춘 채로, 나는 태연한 척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덕분에 나도 비 안 맞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씌워준대?”
“역 앞까지만 부탁할게. 를르슈도 그쪽이잖아.”
“싫어.”
‘제발 한 번만!’이라고 애원하는 쿠루루기는 기어이 내 우산에 기어들어왔다. 키는 분명 내가 더 큰데, 쿠루루기는 자기가 더 체력이 좋다는 이유로 우산을 빼앗아 들었다.
“다 젖는 기분인데.”
“기분 탓이야.”
“앞도 안 보이는데.”
“그것도 기분 탓이야.”
가늘어지는 것 같았던 비바람은 거세지고 가방과 교복이 흠뻑 젖었다. 우산은 그저 들고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안하다, 나나리. 이 오빠가 어쩌다가 이꼴이 되었는지, 원.
“하하하, 머리까지 다 젖었어. 우산 썼는데도.”
“웃을 일이 아니야, 쿠루루기.”
“를르슈도 엉망이네.”
“누구 덕분인지.”
우리 둘 다 비에 젖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역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그쳐버렸다. 아, 조금만 더 있다가 나올걸. 그러게. 나와 쿠루루기는 조금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산을 탈탈 털어서 정리하고 있는데, 쿠루루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냐고 묻는 대신에 시선으로 대꾸하면,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말 걸어도 돼?”
멋대로 이름으로 부르고, 친하게 굴고, 우산까지 같이 써왔으면서 이제 와서 저렇게 소심하게 구는 건 뭐지?
“생각해보니까 어제 제대로 대답을 못 들은 거 같아서….”
제대로 대답했다. 싫다고 말했던 것은 기억나지 않는 건가? 그때 제대로 대답했다고 말해야하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말은 또 이상하게도 마음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쿠루루기랑 얽히면 분명 귀찮고 싫은 일들만 가득할 것이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학창시절이 엉망으로 변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후회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설렘에, 나는 쿠루루기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간지러웠다.
잠깐의 정적 끝에 쿠루루기가 말했다.
“그럼 를르슈도 날 이름으로 불러줄래?”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쿠루루기는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이름으로 부르는 게 뭐가 어려울까. 하지만 쿠루루기의 이름을 떠올리며 발음하려고 혀를 굴리는 순간, 영문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를르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괜히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쿠루루기가 나의 손을 잡았다. 뭐야, 이건 또.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쿠루루기는 자기가 하고 있는 짓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얼굴로 내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아, 알았으니까 손 좀 놔.”
“정말? 진짜로? 이름으로 불러줄 거야?”
“그래, 부른다니까.”
“어떻게 부를 건데?”
잡은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끄는 쿠루루기 때문에 떨어져있던 거리가 좁혀졌다. 가까워진 만큼 다가오는 쿠루루기의 기대하는 눈빛에 피할 곳도 없는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스…자쿠, 손 좀 놔줄래? 그리고 얼굴이 너무 가까워.”
마지막 말을 하는 데에는 숨이 조금 벅차서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런 엉망인 말에도 쿠루루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걷히면서 밝아오는 하늘 못지않게, 쿠루루기는 활짝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놓아주었다.
“응, 를르슈.”
“고마워.”
“지금은 ‘고마워, 스자쿠’라고 해야지. 안 그러면 감동이 줄어들잖아.”
“그래, 그래. 고맙다, 스자쿠.”
갑자기 친한척을 하고, 엉뚱한 부탁을 하면서, 혼자서 멋대로 감동받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겉보기와 다르게 이상한 놈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어제와 같이 ‘잘 가, 를르슈!’라고 인사하는 녀석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 내 자신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녀석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안녕, 를르슈. 좋은 아침.”
기말고사 사흘째라는 피 말리는 상황 속에서도, 쿠루루기 스자쿠는 아랑곳 않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라면 고개만 끄덕였을 인사에 입을 열었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스자쿠.”
“공부 많이 했어?”
“할 수 있는 만큼만. 너는?”
“오늘은 자신 있는 과목이라 어깨에 힘 좀 뺐더니… 위험할 수도.”
“보통은 반대 아냐?”
“그런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대화라서, 괜히 떨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뭐, 이런 대화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펼쳐놓은 노트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대화를 끝낸 쿠루루기 스자쿠는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내용은 주로 쓸데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으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된걸까.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야 그에 대한 신경을 끌 수 있었다. 평범하게 시험지에 집중할 수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옆자리의 그를 의식하게 되는 걸 또 억누르게 되는 게…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채점을 마치고 나서, 벼락치기 치고는 점수가 썩 나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오늘은 아무리 더워도 도서관에 들리지 말고 그냥 돌아가야지, 하고 가방을 싸고 있던 중에 그가 말을 걸었다.
“를르슈, 혹시 오늘 바빠?”
“응?”
“내일 수학이잖아. 나 수학은 못해서 그러는데… 좀 봐줄 수 있어?”
스자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정말 자신이 없다는 걸 어필하고 있었다. 나 정말 수학 못해. 봐줘. 부탁이야. 들리지 않는 말들이 불쌍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나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부탁 정도야 가볍게 거절하면 그만인 것을, 왜 나는 또 고민하고 있을까.
“……알았어.”
그리고 그걸 왜 또 괜찮다고 말하고 있을까.
내 대답에 들뜬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떠나고 교실이 텅 비어가면서, 나와 스자쿠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본관의 오른쪽 길을 걸으며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이전에 내가 소화전에서 열쇠를 꺼냈던 것처럼, 이번엔 스자쿠가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내가 닫았다. 우리 둘은 밖에서 보이지 않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책과 노트를 펼쳐놓고서, 서로 공부를 하다가 스자쿠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내가 답했다. 서너 차례 정도 성실하게 이어지는 질의응답은 즐겁기도 하면서도 아쉽기도 했다.
스자쿠는 정말 공부만 할 건가? 아니, 공부만 해야지.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따로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자꾸 딴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스자쿠가 물어본 문제를 풀다가 세 번째 계산 실수를 했을 때, 스자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를르슈, 지금 다른 생각해?”
“…아니야, 아무 생각도 안 해. 문제는 없어. 잠깐 실수한 거뿐이야.”
“아무 생각 없는 게 더 문제 아니야?”
틀린 것 하나 없이 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는 대답 대신에 샤프를 내려놓으면, 스자쿠도 기지개를 켜고서 잠깐 쉬자고 말했다.
“를르슈는 의외로 집중력이 오래 못 가네.”
“원래 안 그래. 너랑 있으니까 괜히….”
나는 왜인지 놀리는 것 같은 그 말에 욱해서 바로 말을 덧붙이다가, 이어지려는 그 다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라 입을 닫아버렸다. 내가 말을 하다 마니,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뭔가 했어?”
“아니, 넌 아무것도 안 했어.”
문제가 있다면 아무것도 안 한게 문제겠지. 그런데 그걸 왜 문제삼고 있는지 나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나도 몰라.”
“를르슈도 모르는 게 있구나.”
“뭐야, 그게.”
“뭔가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거든. 뭐든지.”
스자쿠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아이들이 동경하는 그 미소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그 미소를 보고 있는 건 또 나뿐이라는 걸 의식하면 기분이 묘했다.
“평균보다 많이 알고는 있어도 뭐든지는 아니지.”
뺨이 뜨거워지는 것은 기분 탓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괜히 노트를 뒤적거렸다. 스자쿠의 시선이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공부나 하라고. 그렇게 대꾸해야하는데 입안이 바싹 말랐다.
바깥에서는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스자쿠는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빈틈없는 시선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어딘가로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기도 하면서도, 그대로 갇혀있고 싶기도 하면서도.
“그만 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져버린 것은 나였다. 겨우 내뱉은 말에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비웃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스자쿠는 비웃지 않았다. 그저 계속 나를 보면서 말할 뿐이었다.
“맞아, 를르슈는 정말 모르는 거 같아.”
“…뭐?”
“이제 늦었으니까 돌아가자.”
스자쿠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창밖을 보면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교문도 닫을 시간이라 급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본관에서 교문까지, 나는 앞서가는 스자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스자쿠에게 다시 물어보면 대답해줄까? 쉽게 답을 얻으면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 혼자 그 답을 찾을 때까지 방황하고 싶어졌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 *
스자쿠와 나는 남은 시험기간 내내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몰래 시험공부를 했다. 나는 종종 딴 생각을 했고, 스자쿠는 그 어쩔 줄 모르는 시선으로 나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을 일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며칠 내내 그 시선에 시달리면서도 시간이 흐르는 걸 아쉬워했다.
시험이 끝나면 이 시간도 끝이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고서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모두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모처럼의 방과후를 즐기겠다는 녀석들이 스자쿠를 둘러싸고 있었다. 놀러가자고 말하는 아이들을 모두 거절하고, 스자쿠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를르슈, 도서관 갈 거지?”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도서관에는 활동을 재개하는 도서부원이 있고, 이용하러 온 다른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도서관에 더 이상의 볼일이 없었다. 시험기간 동안 미루었던 집안일도 해야 하고, 스자쿠랑 같이 있느라 늦어진 귀가시간 때문에 줄어든 나나리와의 시간을 소중히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스자쿠를 거절하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람페르지랑 쿠루루기랑 그렇게 친했던가?’와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줄곧 아무도 없었던 도서관에는 사람들로 가득해 활기가 넘쳤다. 나는 인적이 드문 서가 제일 끝칸까지 느릿느릿 걸었고, 스자쿠는 두세 걸음 뒤에서 책등의 제목을 살피며 걸었다. 형광등 불빛이 어둑한 그 구석에서 스자쿠와 나는 나란히 서있었다.
가만히 스자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건너편에서 간간히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나 발소리,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우리 둘만 있었던 공간이 이제 아니게 되었다는 우울감이 유치하게 느껴져야만 하는데, 오늘따라 나를 더 가라앉게 만들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는 나에게 스자쿠가 입을 열었다.
“를르슈,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이 아닌데.”
나 좀 봐, 하고서 내 얼굴을 잡아 돌리는 스자쿠와 시선이 마주쳤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에, 알 수 없는 상심 속에 침울해하는 내가 비쳤다. 꼴사납다. 보기 싫어. 스자쿠의 손을 내치고서 다른 서가로 발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스자쿠가 손목을 잡아 끌고 구석으로 나를 몰아갔다. 더 어두워진 그림자 밑에서 보는 스자쿠의 시선은 평소 보던 그것과 달랐다. 보다 더 매섭고 날카롭고, 나를 꿰뚫어볼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피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나한테는 말할 수 없어?”
“아무 일도 없어.”
양옆에는 책장이, 등 뒤에는 벽이, 눈앞에는 스자쿠가 있다. 도망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대체 뭔지, 여전히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를르슈.”
나를 파헤칠 듯 쳐다보는 시선을 해놓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스자쿠는 나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네가 알아서 어떻게 날 도우려고? 너랑 같이 있었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나는 뭔가 고장나버린 기분이라고, 어떻게 말하냐고. 책임지라고 말할까. 하지만 무엇을?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또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를르슈.”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그를 밀어내고 도망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스자쿠와 벽 사이에 머물렀다. 내가 계속 조용히 있자, 내 이름을 부르면서 말해주기를 원했던 스자쿠는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스자쿠가 떠난다, 라고 인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했다.
“네가 자꾸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정말 뜬금없이 튀어나온 속내였다. 그런 말을 해서 어쩌려고? 나는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지만 스자쿠의 놀란 눈이 나를 쳐다보는 것에 굳어버렸다.
“그것뿐이야.”
“뭐?”
“이제 됐으니까 갈래.”
“잠깐만, 를르슈.”
나는 스자쿠를 떼어내고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와 나의 체력 차이였고, 나는 다시 그에게 붙들린 채로 서가 구석에 쳐박혔다. 그늘진 그림자로 스자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에게 다시 잡힌 손목이 뜨겁게 느껴졌다.
“도망가지 말고… 들어줬으면 해.”
스자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본인도 그걸 깨달았는지 얼굴이 더 붉어졌다.
“나도 너 때문에 이상해졌어. 그것도 한참 전부터.”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기분이었다. 나보다 조금 낮은 스자쿠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에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몰랐다. 시선을 피한 나에게 스자쿠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진 거리는 금방 줄어들었고, 스자쿠와 나는 얼굴을 맞댄 채로 서가의 그늘 속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마음이 엉망이다. 이상해졌어. 전부 다 스자쿠 때문이야. 머릿속이 뒤엉켜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 스자쿠가 중얼거렸다.
“우리 둘 다 이상해졌네. 근데 난 이게 더 좋아.”
스자쿠가 그렇게 말했다. 를르슈는? 나에게 되묻는 말에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끄덕였는지는 이유는 알 수 없다. 계속해서 이유를 알 수 없고, 답을 찾을 수 없고, 방향을 헤매게 되는 이 감정 속에서 나는 스자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스자쿠는 마지막 거리까지 좁히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가 입술을 맞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진 키스였다. 여기서? 도서관에서? 남자끼리… 키스를? 머릿속이 하얗게 질릴 만한 쇼크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스자쿠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스자쿠가 말했다.
“좋아해, 를르슈.”
그는 정말로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이상한 것이 분명하다. 그 고백을 듣고서 정답을 찾은 것처럼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고 느꼈으니까.
줄곧 스자쿠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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